125. 막간에 벌어진 오판과 그에 대한 응징, 잘 가라!
흑마원이 갑자기 끼어든 건우의 모습에 스치듯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머금었다.
하지만 워낙 찰라에 스치고 간 것이라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수사의 말대로 이 용해천 지역이 모두 그렇게 생겨난 것이지요. 그래서 이곳에 특히 고계 마수와 요수가 많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수와 요수가 특히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용의 살과 뼈와 피 때문이지요. 비록 천겁으로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흑마원 수사가 말한 보물이 바로 그 천겁을 피한 용의 일부란 말이지요?”
“킁, 이거 제가 할 말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 버리십니다? 그런데 자기소개를 좀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흑모의 낮은 안목으로는 수사를 알아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세상에 영체기 수사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나를 모르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나는 길우몽이라 합니다. 보는 것처럼 튼튼한 몸 하나를 믿고 험한 세파를 견디는 산수이지요.”
“그렇구려. 길 수사셨군요. 이제 한동안 서로 도우며 잘 지내보십시다.”
흑마원은 건우의 말에 스스럼없이 친한 척을 했다.
건우는 그저 굳이 척을 질 이유는 없으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야 당연하지요. 험한 금지에 들어가는데 서로를 믿지 못하고 돕지 않는다면 어찌 밝은 미래를 기대하겠습니까. 그 정도 깜냥은 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킁킁. 그렇지요 당연한 일이지요. 자, 그럼 나머지 두 분도 통성명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기 탑탑(搭塔) 수사와 위위(僞瑋)선생은 이미 이름이 나왔으니 넘어가고요.”
흑마원이 지금껏 말을 아끼고 있는 두 수사를 향해 통성명을 제안했다.
그러자 둘 중에 키가 작은 수사가 먼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나는 다른 역에서 이곳 망천유역에 온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수사가 없을 겁니다. 태솔진(胎率辰)이라 합니다.”
태솔진은 이마에 두 개의 작은 뿔이 돋아나 있었는데 어떤 종족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태솔진이 인사를 하고 나자 남은 수사가 나섰다.
“나는 행려(行旅)라 해요. 대부분 수련 동부를 떠나지 않고 수련만 해서 이름을 알리진 못했어요. 이번이 사실상 첫 나들이인 셈이지요.”
의외로 그 수사는 여성 수사였다.
온 몸을 두꺼운 천으로 휘감아 눈만 겨우 드러낸 상태라 남녀 구분을 하지 못하다가 여성임을 알게 되자 다들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는데 사실상 남녀의 구분이 수사들 사이에서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건우 역시 별 관심이 없었다.
“자, 다들 소개를 했으니 이제 다시 용해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자, 이것을 보시오.”
행려까지 이름을 밝히자 곧바로 흑마원이 나서며 허공에 용해천의 대략적인 지도를 띄웠다.
반투명한 입체 지도는 용해천 지역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곳곳에 안개가 끼인 듯이 알아볼 수 없는 곳들이 있었다.
“아시겠지만 이렇게 흐릿한 곳은 대략 3천년 내로는 오간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그 전의 기록이 있는 곳도 있지만 3천 년이면 그 이전 기록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흑마원이 허공에 띄운 지도에 선을 그으며 앞으로의 경로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경로는 그저 제안일 뿐, 다른 다섯 수사들도 나름의 목적으로 가지고 경로를 수정하려 의견을 내었다.
용해천의 괴수와 요수, 마수들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서식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것이다.
모두들 용해천이 탐사 지역임을 알고는 각자 나름의 조사를 해 온 것이다.
그렇게 다시 여섯 수사의 갑론을박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그 후, 어느 순간 여섯 수사는 둔광을 펼쳐 용해천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여섯 수사의 용해천 원정이 시작되었다.
* * *
건우를 포함한 여섯 수사는 용해천 안으로 들어온 후로 비행 법기를 사용하지 않고 둔술을 이용해서 움직였다.
이는 그들 여섯 수사가 모인 이유가 사냥을 통해서 수련 자원을 얻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둘러 목적지까지 가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동하던 중에 건우에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 문제는 여섯 수사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건우 개인적인 문제였다.
건우의 의념공간인 아공간에서 뜻밖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으음.”
건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동행하는 수사들 모두가 주위를 탐색하며 적당한 속도로 둔술을 펼치는 중이었다.
일단 급한 상황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건우가 의식의 반을 나누어 아공간을 살폈다.
나머지 의식의 절반은 현실에 남겨 둔 상태였다.
‘으음. 결국 일을 벌였군.’
건우의 의식이 이상을 감지한 의념공간을 노려봤다.
그곳에는 호리병박을 탈출한 조모명과 경려주의 영체가 좁게 격리된 아공간에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 여기가 어디야?
- 빠져 나갈 곳이 없어요.
- 그 길 가 놈이 호리병박을 또 다른 봉인 안에 넣어 뒀단 말이냐!
- 사형, 이제 어쩌지요?
- 천겁을 받아 죽을 놈!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 이제 길 수사가 이 사실을 알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좋을까요?
- 어차피 그 놈은 우릴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탈출을 계획한 것이 아니냐.
- 차라리 윤회라도······.
- 그래, 그게 좋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살 방법이 있으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영체기의 수련이 아깝지 않단 말이냐?
- 그래서 이렇게 되었잖아요. 이러다가 소멸을 당하거나 영원토록 영혼이 어딘가에 묶여 버리면 어쩝니까?
- 이번 탈출은 사매 너도 찬성한 것이 아니었더냐. 그런데 막상 일이 어려워지니 나를 탓하는 것이냐?
- 아, 모르겠어요. 차라리 길 수사에게 윤회를 시켜 달라고 할 것을.
- 제기랄! 여긴 도대체 어디란 말이냐! 길우몽 이 죽을 놈! 내 기회가 되면 반드시 너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고 말리라.
- 사형, 그만해요. 혹시 길 수사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 들으라지. 홧김에 우리를 그냥 죽여주면 더 좋고. 아니라도 여기서 더 나빠질 것이 뭐가 있단 말이냐?
조모명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제 멋대로 떠들었다.
그 곁에서 경려주의 영체가 한숨을 쉬고 있었다.
건우는 그 두 영체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 했던 이들이다.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시간을 끌다가 인연이 쌓이고 말았다.’
건우가 조모명과 경려주를 지금껏 죽이지 못한 이유였다.
어쨌건 그들과 연이 쌓이고 보니 쉽게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죽일 수도 없고, 놓아주기도 어려운 상황.
그래서 그냥 호리병박을 따로 격리한 아공간에 넣어 뒀던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봉인을 풀고 탈출을 시도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때, 분위기를 보아서 슬쩍 놓아줄 생각도 있었다.
지금도 슬그머니 아공간 입구만 열어주면 저 영체들은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곳에서 풀어주면 살아날 가능성이 별로 없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을 풀고 있던 건우에게 지금 조모명과 경려주가 보여주는 언행들은 가라앉았던 건우의 독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차피! 어차피 나를 죽이려 했던 이들이었다. 내가 이들에게 선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위선일 뿐이다.’
건우는 결국 마음의 결심을 내리고 의념을 집중했다.
= 흐어어어억!
= 아아아아악!
순간 조모명과 경려주의 영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 건우가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추혼술이었다.
원래 추혼술은 혼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억지로 뽑아 읽는 술법이다.
이것은 하위 경지의 수사들에게 사용하면 그 수사들의 머릿속의 내용을 온전히 뽑아낼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대상이 백치가 되거나 할 수도 있지만 경지의 차이가 높을수록 그런 부작용도 줄어든다.
하지만 지금 건우가 조모명과 경려주에게 사용하는 추혼술은 부작용을 극대화 시킨 방식이었다.
기억을 모두 뽑아내면서 동시에 상대를 백치로 만들어 버리는 수법인 것이다.
= 흐으으으으으.
= 흐에에에에에.
건우의 독한 응징에 조모명과 경려주의 영체가 오래지 않아서 백치가 되고 말았다.
사실 이 과정은 이렇게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모명과 경려주가 있는 곳은 건우의 의념공간이었다.
의념공간은 곧 그 주인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영체기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잃고 영체만 남은 조모명과 경려주가 공간의 주인인 건우에게 저항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만약 밖에서 영체를 얻어 그것을 연화하거나 혹은 백치로 만들려고 했다면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음, 의외로군. 의식과 의념을 통한 일처리는 이곳이 밖에서보다 수백 배의 효과가 있어. 이건 잘 이용하면 굉장한 무기가 될 수도 있겠어.’
건우는 조모명과 경려주를 징벌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백치가 된 두 영체를 다시 호리병박에 넣어 봉인하고 의식을 현실과 합치시켰다.
마침 일행들이 영체기 급의 요수 하나를 발견하여 사냥할 준비를 하는 중이라 때를 잘 맞췄다 싶은 건우였다.
* * *
“위위선생, 선생의 공법은 무척 위력적인 바가 있습니다.”
길우몽의 모습을 한 건우가 위위선생에게 다가가 칭찬을 했다.
마침 영체기 초기급의 요수 사냥이 막 끝난 참이었다.
그 요수는 영체기 급의 힘을 지녔지만 영성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요괴의 태를 벗지 못했다.
요괴의 태를 벗지 못했다는 것은 이성을 얻지 못하고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는 의미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런 존재를 수사로 대접할 수는 없으니 경지가 높아도 요괴, 괴수, 마수 등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힘이 무에 그리 대단한 것이 있다고 추켜세우십니까? 오히려 길 수사의 그 강력한 연체술이 가히 일절이라 하겠지요. 역시 연체술이 경지에 오르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위위선생은 건우의 부추김에도 겸양을 보였다.
길우몽은 나오금강체술을 익힌 연체술사로 활동한다.
당연히 단단한 몸을 믿고 앞에서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 길우몽의 위치였다.
다른 수사들은 후방에서 제각각 법술을 펼치거나 법부, 법기의 힘을 빌려 공격을 가한다.
그러니 항상 제일 앞에서 싸우는 길우몽이 제일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셈이다.
위위선생은 그런 점을 고려하여 건우를 띄워 주려 하는 것이다.
길우몽이 몸을 사리게 되면 그만큼 사냥이 어려워질 것이니 최대한 비위를 맞춰 주려는 생각이리라.
건우 역시 그것을 짐작했지만 좋은 것이 좋은 거란 듯이 웃음을 지었다.
길우몽의 얼굴이 웃음기 가득한 하회탈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위위선생의 공법을 보아하니 사법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만.”
길우몽이 은근슬쩍 위위선생의 공법에 궁금증을 드러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제가 익힌 것이 사공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위위선생은 숨길 일도 아니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몇 번의 사냥을 통해서 드러냈던 것이라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아니었다.
“허면 혹시 영체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건우가 슬며시 위위선생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영체라니요? 무슨 영체 말입니까?”
위위선생이 말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위위선생의 눈빛 깊은 곳에서 호기심과 기대감이 은은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체가 뭐 달리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영체입니다. 예전에 저를 죽이려 했던 수사가 있었지요. 그래서 그를 잡아 죽이려다가 영체만 따로 봉인을 해 두었지요.”
“오호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위위선생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분명 관심이 큰 모습이었다.
“그게 좀 시간이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영체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백치가 되고 말았지요.”
“오오오, 그처럼 공교로운 일이!”
위위선생이 건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제가 알기로 사법을 익힌 수사들이 이런 영체를 무척 귀하게 여긴다던데 말입니다.”
“그야 이를 말입니까? 영체를 손에 넣어 제대로 연화할 수만 있다면 꽤나 위력적인 것들을 만들어 부릴 수가 있겠지요. 허허허. 그것 참, 길 수사께서 굉장한 보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려?”
“어째 욕심이 나시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욕심이야 없을 수 없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길 수사와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흐음. 대신에, 그런 것이 있다면 저와 거래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만.”
“거래요?”
“이번 용해천의 일이 끝나고 제가 가진 보물들과 길 수사의 그 영체를 서로 거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요?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이리 되면 위위선생께서 조금은 손해를 보셔야 할 겁니다. 물건을 애타게 원하시면 그만큼 대가를 크게 내 놓으셔야 할 테니 말입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단 이 위모에게 기회를 주시겠다면 최대한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그래요? 하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그리 하십시다. 내 우선 위위선생에게 먼저 기회를 드리겠다 약속하겠습니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위위선생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될 수 있으면 그 두 영체는 빠르게 처리를 하는 것이 좋겠어. 가지고 있어봐야 마음의 거리낌만 커져 언젠가는 심마가 될 수도 있어. 그냥 빨리 털어버리고 잊는 것이 최선이지.’
소멸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러자니 또 마음의 거리낌이 생겼다.
그래서 건우는 최대한 빨리 그 영체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차피 백치가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모습을 잃어갈 영체였다.
추혼술 때문에 영체의 중심축이랄 수 있는 기억과 혼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 다른 수사의 손에 들어가 쓰이다 보면 나중에는 건우가 다시 본다고 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되고 말 것이다.
“저기 앞에 강한 영기가 응결되어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영기의 속성이 목속성에 풍속성, 수속성이 더해져 있는 것을 보면 영초 종류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건우가 그렇게 조모명과 경려주에 대한 마무리를 고민하고 있을 때, 주변을 살피던 탑탑 수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는지 둔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흥분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그러자 사냥을 마치고 쉬고 있던 수사들이 모두 몸을 일으켰다.
다시 움직여야 할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