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23화 (123/499)

123. 만은사(萬隱絲)는 새롭고 낯설지만 잘 써 보자.

낙생역(落生域)을 떠나 망천유역(忘川流域)으로 향한 건우.

그 여정은 평량역에서 낙생역에 이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과정이었다.

건우는 망천유역에 도착할 때까지 꼬박 50년의 시간을 혼돈역에서 보내야 했다.

그런게 그 시간 중에 절반 정도는 아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이었다.

이유는 혼돈역의 괴수들.

낙생역에서 망천유역으로 가는 길에 건우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괴수를 세 번이나 만났다.

건우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감히 싸워 이길 엄두도 나지 않고, 부양도로 뿌리칠 수도 없는 괴수를 말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조류 마수가 둘에 공간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인간형 마수가 하나였는데 이 때는 어쩔 수 없이 아공간에 숨어 그것들이 멀리 떠날 때까지 버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드디어 도착이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주인님. 도움이 되지 못하고 편히 수련만 했으니 죄스럽습니다.”

“어차피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는데 용랑이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 그나저나 너는 아직도 성단기 완경에서 진척이 없으니 걱정이구나.”

“저는 인간과 달리 수명이 긴 편이니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째, 너나 혈원이나 벽을 넘지 못하는지. 그나마 루야는 온전히 인공영체를 흡수해서 다행이지.”

“루야님은 수련에 바빠 얼굴을 보기도 힘듭니다.”

“시작을 영체기로 했으니 신이 날 법도 하지. 단번에 너희를 뛰어넘지 않았느냐.”

“모두가 루야님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용랑은 루야의 성장에 전혀 섭섭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꽤나 오래 수련을 했음에도 성단기 완경에 막혀 정체된 상태인 용랑이었다.

그런데 루야는 인공영체와 혼원석을 흡수하더니 곧바로 영체를 지니게 되었다.

그 경지를 잘 다루느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영체기 수사인 셈이다.

“너도 그렇고 혈원도 그렇고 아무래도 방법을 찾아봐야 할 거 같다. 너나 혈원이나 고대 영수의 진혈이라면 무궁한 도움이 될 테지.”

“네? 영수의 진혈이요?”

“그래. 이곳 인계에서 온전한 진혈을 구하긴 어렵겠지만 전에 얻었던 것처럼 옅어진 것이라도 구한다면 좋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쉽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래서 지금 내가 이리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 않으냐.”

길우몽의 모습을 한 건우는 크게 웃고는 거리 구경을 이어갔다.

이곳은 망천유역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혹설천(酷雪川)이라 부르는 지역이었다.

망천유역에는 천(川)이라 부르는 강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꼭 강이 흘러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각 지역의 특성에 맞추어 이름을 짓고 그 뒤에 천(川)을 붙이는 것이 망천유역의 지명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워낙 오래 전부터 그렇게 이름을 붙여왔다는데 건우도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쨌건 이 혹설천 지역은 항상 거친 눈보라가 그치지 않아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곳이라 했다.

그런 중에 혹설천의 수사들이 모여드는 대성이 있는데 건우는 지금 그곳의 시장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물론 이곳은 범인들이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수사들만의 영역이었다.

“찾으시는 것이 만은사(萬隱絲)의 표식이라 하셨지요?”

“그래,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니면 볼 수가 없지.”

“어찌 그렇습니까? 제가 함께 찾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텐데요?”

“령인완 수사가 남긴 만은사에 대한 기록, 그것을 내가 취했기 때문에 만은사의 표식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만은사는 매우 신비한 바가 있는 자들이다.”

“기록을 읽은 것으로 일종의 계승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령인완의 기록에 의하면 만은사의 손님이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특히 만은사의 손님은 누구에게도 만은사에 대한 정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지. 이것을 어기면 화신기 수사라도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다.”

“네? 화신기 수사라도요?”

“그렇지. 내가 너희에게 만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너희가 나에게 속해 있어, 나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만은사를 이용하는 이들의 수는 나날이 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격이 되는 이들이 만은사에 누군가를 추천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지. 물론 그 조차도 가입비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지만.”

“그럼 주인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인님도 가입비 같은 것을 내는 것입니까?”

“하하,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는 령인완의 자격을 그대로 이어받은 몸이다. 물론 오래도록 거래가 없었으니 그 등급이 조금 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화신기 수사의 자격을 이어받았으니 영체기로선 나름 손에 꼽을 등급일 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아, 저기 저것인 모양이구나.”

건우는 거리를 구경하며 용랑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작은 찻집의 깃발을 발견했다.

차(茶)라는 글자를 기묘하게 비틀어 놓은 깃발은 검은 색 바탕에 흰 색 글씨였다.

그런데 그 검은 바탕에 건우에게만 보이는 두 가닥 실이 있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은 사람이 양쪽으로 실 한 가닥씩을 뻗고 있는 모습인데 그 사람조차 자세히 보면 수많은 실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 깃발을 보시는 겁니까?”

“그래, 찻집 깃발에 뭐가 이상한 것은 없느냐?”

“제가 보기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영기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낡은 찻집 깃발에 불과합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겐 만은사의 표식이 보이는구나. 자, 잠시 혼자서 구경을 하고 있거라, 나는 만은사에 들렀다 올 것이니.”

“아닙니다. 저는 주인님의 아공간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언제든 급한 일이 있으시면 나올 수 있도록 대기를 하고 있어야지요.”

“그럴 필요는 없다만,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리 해라.”

건우는 용랑을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만은사의 표식을 내 건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엔 탁자 네 개가 모서리마다 하나씩 놓여 있고, 차를 끓여 내는 다실(茶室)은 따로 입구 반대쪽 문 너머에 만들어져 있었다.

건우가 들어가자 마침 다실에서 점원이 차를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점원은 건우보다 먼저 온 손님의 탁자에 차를 올리고 건우를 향해 다가왔다.

그 점원은 축기기 후기의 수사였다.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저희 찻집에는 처음 오셨군요.”

“그렇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더니 오래전에 마셨던 차 맛이 그립더구나. 혹여 특별한 차도 주문이 되느냐?”

건우는 그 점원에게 자연스럽게 용건을 이야기했다.

건우의 말에 점원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저희 찻집에 모든 차가 다 있다곤 하지 못해도 어지간한 것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차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면 가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 참 곤란하구나 나에게 차를 주었던 이가 차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서 말이다. 다만 그 맛이 입안에 달콤한 비단실이 풀리는 것 같았던 것은 분명하지. 너는 혹시 그런 맛의 차를 아느냐?”

“아, 그것이군요? 다행히 저는 그 차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워낙 특별한 방법으로 끓여 내는 것이라 안쪽 내실에서나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냐? 그럼 내실에는 자리가 있느냐?”

“네, 마침 자리가 있습니다. 모실까요?”

“그래, 내 그 차를 마시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마다하겠느냐. 앞장서거라.”

건우는 그렇게 말하곤 점원이 이끄는 대로 다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차를 끓이는 다실 뒤편의 문으로 들어서자 몸을 스치는 금제의 느낌이 전해졌다.

찻집과 이쪽 공간을 나누는 결계였다.

“맞은 편 문으로 들어가시면 마사(麻絲)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마사(麻絲)? 이곳의 등급이 그리 높지 않은 모양이구나. 나는 면사(綿絲)는 될 줄 알았더니.”

“혹여 마사님께서 감당하지 못할 의뢰라면 그 또한 마사님께서 방법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건방지구나. 네가 감히!”

건우는 혓바닥을 가볍게 놀리는 점원을 향해 기세를 뿜었다.

그러자 점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서, 선배님.”

“쯧.”

건우는 건방지게 자신에게 충고를 하려 한 점원을 한 번 더 노려보고는 짧은 복도 맞은편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여기서 괜히 만은사의 보푸라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었다.

만은사의 가장 바닥에 있는 존재가 보푸라기, 그 위에서 하나의 거점을 운영하는 이가 삼베실을 뜻하는 마사, 그 마사 몇을 묶어 관리하는 이가 면사(綿絲), 그 위에 비단실을 뜻하는 견사(繭絲)가 있고, 최종적으로 만은사의 사주는 비단을 뜻하는 능라다.

어쨌거나 보푸라기라 하더라도 만은사에 속한 이를 크게 상하게 해선 좋은 것이 없다.

그래서 건우도 약간의 경고만 하고 만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건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검은색 넓은 탁자 건너에 한 사람이 앉아서 그를 맞이했다.

건우는 탁자의 검은색 표면에 일렁거리는 영기의 흐름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영기의 흐름이 갖가지 금제와 결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았다.

저 탁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마사를 보호하고, 때에 따라 맞은편에 있는 손님을 공격할 수 있는 법보였다.

건우는 말없이 사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이가 철이 없어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 건우에게 마사가 먼저 사과를 했다.

건우는 그런 마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체기 중기에서 후기.

얼굴빛이 붉은 사십대의 호남형 외모.

몸에 흐르는 영기를 보아하니 사공이나 마공 계열의 공법은 익히지 않은 듯 보였다.

언뜻 현묘한 기운이 느껴지니 정도 계열의 공법 수련자인 모양이다.

“원래 오래도록 호랑이 시중을 들다보면 자신이 호랑이라고 착각하는 일이 있지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점원의 결례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이곳 혹설천은 처음이시지요?”

마사가 곧바로 용건을 불었다.

“혹설천 뿐만이 아니라 만은사 자체가 처음이오.”

그에 건우는 그렇게 대꾸했다.

“아, 통틀어 첫 방문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신분 증명이 필요한데요?”

마사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건우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검은색 탁자 위에 손을 올리고 영기를 뿜어냈다.

그러자 검은 탁자의 표면에 아름답게 수가 놓인 천의 형상이 떠올라 나풀거렸다.

그리고 거기에 령인완이란 이름이 천천히 새겨졌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모습에 마사가 깜짝 놀라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탁자에 손을 올리고 의념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사의 다급함은 건우가 보인 신분 등급이 워낙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건우는 뒤로 물러나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마사의 작업이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7천 년 전에 죽은 령인완의 자격을 계승한 이가 나타났으니 그것을 확인하고 처리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리라.

“확인했습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신분입니다. 손님께서는 화신기 령인완 수사의 자격을 이어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워낙 오래 전의 자격이고 그 사이에 거래가 없었기에 등급이 조금 하락했습니다.”

마사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등급 하락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받아들이겠소.”

“그러시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 자격을 얻으셨는지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이 과정에 거짓이 있으면 저희 은살사(隱殺絲)의 방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은살사는 은밀하게 만은사의 적을 처리하는 이들을 말한다는데 건우도 그에 대해선 자세히 몰랐다.

어쨌거나 은살사가 있어서 만은사의 비밀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은 기록으로 읽어 알고 있었다.

“거짓을 말할 것이 뭐가 있겠나. 나는 낙생역이란 곳에서 령인완 수사가 남긴 기록을 얻었고, 거기서 령인완 수사의 자격을 이어받았을 뿐이오.”

“알겠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확인은 며칠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것이 사실이라 치고, 이제 수사의 이름으로 새로 자격을 갱신해야 합니다.”

“알았소.”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이도 역시 거짓을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만 숨기려 하신다면 숨겨도 됩니다.”

“그럴 거야 없겠지. 나는 길우몽이라 하오.”

“길 수사셨습니까? 알겠습니다. 길 수사의 모습과 이름으로 만은사의 손님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등급은 아깝게도 무명 9등급입니다.”

“무명이라, 비단(緋緞) 5급에서 많이도 떨어졌구려.”

“하지만 영체기 수사로 그만한 등급을 가진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능라 등급의 추천을 받은 분들이 아니라면 어렵지요.”

“거래를 하다보면 등급이야 오르는 것이니 시간이 해결을 하겠지. 그럼 내 자격이 확인되어야 거래를 할 수 있겠군. 며칠 걸린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넉넉히 닷새 후면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이곳 혹설천대성에 계시면 저희가 연락을 드릴 것입니다. 나가시는 길에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전신부를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아시겠지만 저희의 거래는 항상 지점에서만 가능합니다. 전신부를 통한 정보 거래는 없습니다.”

“그도 알고 있소. 결과가 나오는 대로 다시 오겠소. 첫 거래라 제법 큰 거래를 할 수 있을 게요.”

“아, 그러면 감사한 일이지요. 좋은 결과가 나와서 그 거래를 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길 수사님.”

“고맙소. 그럼.”

건우는 말을 마치고 탁자를 벗어나 마사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며칠 후, 건우는 만은사 무명 9등급에 이름이 올랐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마사를 찾았다.

그리고 만은사의 거래 목록에 화신기 수사의 공법 세 가지가 올라왔다.

하나는 마수 출신 수사에 어울리는 공법이고, 다른 하나는 영족 수사의 것, 그리고 마지막은 인족 수사의 것이었다.

그 모두가 이름 높은 공법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화신기에 이르는 길을 담은 공법.

그런 것이 거래 목록으로 올라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랜만에 만은사 회원들의 발걸음이 부산해졌다.

“쓸모없는 것으로 쓸모가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거기에 팔 때에는 비싸게 팔고 살 때에는 싸게 사는 것 또한 거래의 상리(商理)인 것이고.”

그리고 물건을 내 놓은 건우는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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