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15화 (115/499)

115. 다시 나타난 무형투선(無形偸仙)

이십 년 후.

= 확실히 영민한 데가 있으십니다. 어찌 그리 이해를 잘 하시는지.

“모두가 조 수사와 경 수사의 가르침이 좋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그 짧은 시간에 우리 풍수문의 비기는 물론이고 경 사매의 극금문 해봉당의 진수까지 모두 취하지 않았습니까. 영체기 수사라 하더라도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 맞아요. 볼수록 길 수사의 능력은 뛰어납니다.

조모명과 경려주는 여전히 건우를 길우몽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감탄하는 이유는 건우가 금제와 결계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상을 알아보면 건우의 그런 이해력은 지구 식의 사고방식에 도움을 받은 바가 컸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는 어떤 면에서는 대천세계 수사들에겐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신비한 술법과 의념의 두루뭉술한 힘이 크게 작용하는 수도계에서 수학적, 논리적 계산이 많이 필요한 부분에 약점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은 편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긴긴 시간의 노력 끝에 경지에 오르는 이들이 많지만, 건우는 그런 수사들에 비해서 투자한 시간이 짧았다.

그것이 조모명과 경려주를 놀라게 만든 것이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이해는 하지만 경지가 미천해서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들도 많지요.”

= 그야 길 수사의 경지가 오르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 맞습니다. 길 수사의 수련 자질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요.

조모명과 경려주는 틈나는 대로 건우를 추켜세웠다.

건우는 그들이 분명히 의도가 있어서 자신을 띄워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호리병박은 영체를 가두어 두는 특별한 힘을 지닌 법보였다.

하지만 조모명과 경려주에게 배움을 얻고, 해봉당 당주였던 과아분의 비전을 수습하다 보니 호리병박에도 틈이 보였다.

물론 안쪽에 갇혀 있는 조모명이나 경려주가 그 틈을 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주어지면?

당연히 금제를 뚫고 뛰쳐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만약 그런 일을 벌이면 곧바로 영체를 소멸시켜 버릴 테니까.’

건우는 내심 조모명과 경려주가 조용히 있다가 윤회의 길로 가기를 바랐다.

괜히 호리병박에서 뛰쳐나와 아공간에서 소멸을 당하면 윤회의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아, 두 수사께는 조금 미안한 말을 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두 분께 배움을 얻어 왔는데, 이번에 일이 있어 당분간 두 분을 찾지 못할 듯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건우는 조모명과 경려주에 대한 시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

그러니 그들을 윤회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조모명과 경려주는 죽고자 하는 마음이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나도 이들을 죽이는 것이 편치 않지만 원한다면 편하게 죽음을 내려 윤회의 기회를 주어야겠지. 하지만 그런 호의를 마다하고 시간을 끌다가 수작을 부린다면!’

내심 미래를 예상하는 건우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어차피 그리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선택권은 조모명과 경려주에게 넘겼다.

= 일이 있으시다면 당연히 그리 해야지요. 우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 맞아요. 우리야 이곳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인데 그나마 길 수사의 은혜로 목숨이나 보존하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 맞습니다. 우리에 대해서는 아무 염려도 하지 마십시오.

조모명와 경려주는 건우가 오래도록 찾지 못할 거라는 말에 다급해진 목소리였다.

혹시라도 건우가 당장 그들을 죽일까 겁을 먹은 것이다.

건우는 그 사실을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 인사를 하고 호리병박을 아공간 구석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수미산겨자씨 밑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아공간 전체를 훑어 봤다.

‘용랑과 혈원은 각자 속성에 맞는 곳에서 수련을 하는 중이고, 루야는 혼원석과 인공정령을 흡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군.’

용랑과 혈원이야 걱정할 것이 없었다.

수련에 성과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크게 타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루야는 달랐다.

혹시라도 흡수에 성공하지 못하면 루야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내가 도울 방법은 없다. 지금은 루야가 혼원석을 통해서 의지를 생성하는 과정이니까. 그리고 그 의지가 인공영체와 연결되면 드디어 제대로 된 수행자가 될 격을 갖추는 거지.’

건우는 그렇게 모두를 살피고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수미산겨자씨를 보았다.

건우가 영체기에 오른 이후, 수미산겨자씨의 모습은 조금 더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건우가 안력을 돋우고 수미산겨자씨를 살피면 그 안에 헤아리지 못할 엄청난 법칙들이 뒤엉켜 있는 것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했다.

‘수미선문의 비석.’

건우는 문득 거대한 비석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비석을 감싸고 있던 현묘한 광채의 한 자락을 붙잡았다.

“아!”

하지만 그 가느다란 깨달음의 자락은 곧바로 허무하게 끊어졌다.

아직 건우가 닿을 수 없는 경지란 소리였다.

‘그냥 반영세계나 들어가자.’

각 경지의 완경에 이르면 산적 스승을 만나 수련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항상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건우가 재미삼아 복불복 뽑기라고 부르는 반영세계다.

분명히 수미세계인 듯하지만 인적이 없어서 그림자 세상이라 부르는 곳.

건우는 모르지만 건우가 반영세계라 부르는 곳은 실제 수미세계였다.

다만 건우가 그곳에 얼마를 머물든, 그곳의 시간은 촌음이라 할 정도로 짧게 흐른다.

그 촌음의 시간을 건우는 며칠 혹은 몇 주로 사용하니 수미세계에 있는 이들이 건우의 종적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 뛰어난 수사들은 그 짧은 시간에 건우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반응까지 하곤 했지만 제대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 경지 높은 수사들도 온전히 반응하지 못한 탓이다.

건우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들어가는 곳이 수미세계의 반영세계라 판단한 것이다.

물론 건우가 그렇게 왜곡된 시간을 사용하는 까닭에, 건우의 시간 속에 특정한 대상들이 배제되어 있기는 했다.

건우와 수미세계 사이의 불균형한 시간 왜곡을 조율하기 위해 세상의 법칙이 그렇게 개입한 것이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어쨌건 건우는 조모명과 경려주에게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배운 것을 시험해 보고자 한동안 반영세계에 들어가 그곳에서 만날 결계나 금제들을 대상으로 연습을 해 볼 요량이었다.

‘아울러서 보물이나 수련자원을 얻을 수 있으면 더 좋지. 일거양득 아니겠어?’

수미세계의 수사들 입장에서는 눈 뜨고 도둑질을 당하는 셈이지만 그거야 건우도 모르는 것이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 * *

수미세계.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무형투선이 또 다시 난동을 부린다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그 사이에 경지가 올랐는지 제법 금제나 봉인을 푸는 실력이 늘었다고도 하더군요.”

“제법이지 않습니까? 성장이 빠른 것도 있지만 그 수법이 고명합니다. 어느 수사는 눈 깜짝 하는 사이에 눈앞에서 보물이 사라졌다지 않습니까.”

“그게 말입니다.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고작 성단기 수준으로 보일 때부터 그 신출귀몰함은 감히 짐작도 못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런 무형투선이 이젠 영체기가 되었다니 이건 재앙의 징조일 수도 있습니다.”

“벌써 보물을 잃고 속병이 난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 일을 어째야 할지······.”

“쯧, 뭘 그리 고민들 하십니까. 그래봐야 영체기 아닙니까. 게 중에 간혹 화신기 수사가 피해를 입기는 하지만 그것도 하찮은 것들 한 둘을 잃을 뿐이지요. 무형투선이 제대로 된 화신기의금제나 결계를 뚫었다는 소리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우리가 당장의 무형투선을 걱정하는 것입니까? 생각을 좀 해 보세요. 고작 몇 백 년, 그 사이에 벌써 영체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놈이 화신기 이상이 되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그 때에도 그리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크음.”

몇 명의 화신기 수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무형투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겨우 몇 백 년.

그 사이에 꽤나 유명해진 이름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미세계에 속한 백여 개의 인계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건우가 수미세계와 의식연결로 진입하면 매번 그 인계로만 들어왔다.

그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것도 그곳 인계의 수사들이고, 무형투선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곳도 그곳이 유일했다.

사실상 수미세계라는 영계 아래에 또 백여 개의 인계, 그 중에 한 곳에서만 난리가 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당장 피해를 입는 곳의 수사들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오래지 않아서 무형투선이 화신기가 되어 우리의 보물을 노릴지도 모릅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느긋할 수 있겠습니까?”

“커어엄.”

“그것 참. 그렇다고 무슨 도리가 있습니까? 짧은 시간에 여러 역에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을 어찌 잡는단 말입니까?”

건우는 하루에 한 번 반영세계에 들어올 수 있고, 그 때마다 진입 위치가 달라진다.

그러니 하루에 몇 개의 역을 건너뛰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화신기 수사들이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대책을 세우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으음.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에 광음자(光陰者)께서 그 무형투선의 꼬투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그런 중에 지금껏 조용히 앉아 있던 대나무 피부의 수사가 슬그머니 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다른 수사들 모두가 그 대나무 피부 수사에게 집중했다.

“무슨 말입니까? 광음자라면 화신기 완경에 이른 그 분 말입니까? 천겁도 벌써 다섯 번이나 겪으셨다는?”

“옳습니다. 게다가 그 분이 영족 출신이라 천겁도 2만 년에 한 번씩 받으시지요. 대충 10만년 이상을 이곳 인계에서 살아오신 분이지요.”

누군가 광음자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자 다른 이가 보충 설명을 했다.

“그 분께서 무형투선을 만났단 말입니까?”

“어서 이야기를 좀 해 보십시오.”

“이야기를 꺼냈으면 시원하게 털오놓지 무슨 뜸을 그리 들입니까?”

빙그레 웃으며 말을 아끼는 대나무 피부 수사의 모습에 다른 수사들이 안달이 났다.

그런 모습을 즐기듯이 지켜보던 대나무 피부 수사가 못 이기는 척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그 분의 제자와 가까이 지내는데, 얼마 전에 전신부로 연락이 왔었습니다. 광음자께서 무형투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 * *

“와, 이번엔 운이 좋았네?”

건우는 반영세계로 들어오자마자 환호성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들어온 곳이 어떤 수사의 동부 안쪽이었기 때문이다.

딱 봐도 제법 경지가 높은 수사의 거처였다.

곳곳에 놓여 있는 기물들이 모두 시간의 무게를 깊이 받아들인 것들이고, 그 하나하나가 현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여기는 동부의 전실인가?”

수사의 동부는 대부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입구에서 들어오면 전실이 있고, 그 전실에 각각의 연공실, 창고, 약초밭, 전송진, 영천, 연단실 등등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

지금 건우가 서 있는 곳에서도 그런 곳으로 통하는 듯이 보이는 입구가 여럿 보였다.

“으음. 특별한 결계나 금제는 없어 보이네?”

건우는 조용히 의념을 퍼트려 동부 안을 살폈다.

운 좋게도 동부의 입구를 넘은 상태로 진입을 해서 그런지 동부 안쪽에 특별한 금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입구 몇 곳에 기본적인 금제는 있었다.

일종의 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금제 결계였다.

연공실이나 창고 같은 곳을 구별하여 지어 놓았는데 입구를 훤히 트여 놓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은가.그래서 수사들은 동부의 전실에서 각각의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에 기본적인 결계는 해 두는 편이다.

또 그런 중에 중요한 것이 있는 곳일수록 그 기본 결계도 좀 튼튼한 것으로 하기 마련이고.

“이쪽이 창고나 약초밭 같은 곳일까?”

건우가 두 개의 문을 앞에 두고 살짝 고민에 빠졌다.

이곳 동부에는 전실에서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이 모두 여섯 개가 있는데, 그 중에 기본 결계가 가장 튼튼하게 되어 있는 곳이 바로 건우가 보는 그 두 개의 입구였다.

“아니지, 이번에는 시간이 좀 많이 있으니까 다른 곳들부터 살펴보자. 이 금제를 푸느라고 다른 곳을 살피지 못하면 돌아가서 많이 아쉽겠어.”

전실에 놓여 있는 물건들만 보더라도 이곳의 주인이 얼마나 부유한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에도 귀한 보물들이 있을 것이다.

일단 그것들부터 챙기고 이후에 출입이 어려운 곳을 노리자는 생각이었다.

건우는 우선 전실의 물건들 중에서 영기가 강하고 귀해 보이는 것들을 챙겼다.

그리고 제일 금제가 약한 입구의 금제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가아아아아아아아아알(喝)!”

“허엇!”

그런데 건우가 그곳으로 들어가자마자 뭔가 희끗한 형상이 건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질렀다.

건우는 그 형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실로 뛰쳐나갔다.

“아, 뭐냐 도대체.”

그리고 곧바로 수미산겨자씨와의 의식연결을 끊어 냈다.

영석을 써서 반영세계로 들어온 후로는 언제나 거의 영석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반영세계에 머물렀던 건우지만 이번에는 그럴 간담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건우가 사라진 것과 동시에 동부의 전실에 건우와 눈을 마주쳤던 수사가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그 사이에 사라졌다고? 게다가 내 물건들을 훔쳐? 이 놈이 무형투선인가?”

전실을 훑어보며 중얼거리는 그는 동부의 주인인 광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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