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06화 (106/499)

106. 여유와 편안? 설마 그럴 리가.

다시 수 십 년 후.

영체기 수사는 화신기 바로 밑 단계로 인계에선 대부분의 수도 문파에서 장로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존재다.

화신기 수사는 소규모의 역(域)에는 한 둘 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런 곳에선 영체기 수사가 수도 문파의 장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건우는 포란산맥을 벗어나 평량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그런 위치를 새삼 실감했다.

평량역에서 영체기 수사는 꽤나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량역에도 화신기 수사는 거대 수도 문파에 한두 명이 있을 뿐이고, 작은 수도 문파엔 없은 경우도 허다했다.

건우가 평량역을 돌아다니며 파악한 바로는 평량역 전체에 알려진 화신기 수사는 고작 서른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평량역의 넓이와 그에 속한 수사들의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외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화신기 수사는 또 그리 많지도 않지.”

“그건 그렇습니다. 모두들 영계 비승을 위해서 경지를 끌어 올리는데 힘을 쏟는 모양입니다.”

“그것도 있지만 천겁을 치르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것도 있지”

용랑의 추측에 건우가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아, 주인님. 그 천겁에 대해서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용랑이 그런 건우에게 천겁에 대해서 물었다.

“음? 천겁? 그래, 알고 싶다는데 알려주지. 그런데 사실 천겁은 영체기 이상이나 되어서 의미가 있어.”

“그렇습니까?”

“전에 이야기했지? 영체를 만든다는 것은 수사로서의 격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라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종족의 태를 벗고 온전히 새로운 종족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다고 하셨지요.”

“맞아. 바로 그거야.”

건우는 용랑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 거지. 새로 태어난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변하는 거 말이야.”

“그게 문제가 됩니까?”

“음. 아주 문제가 되지. 이 세상의 오롯한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천지 법칙이 볼 때에.”

“어차피 세상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수사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역천의 존재라 하는 것이고요.”

용랑은 그게 뭐가 문제냔 듯이 되물었다.

“맞아. 불로불사를 꿈꾸는 것부터가 법칙을 어기는 역천이지. 그런데 영체를 만드는 순간 그 역천의 정도가 급격하게 심화된다는 게 문제야. 내가 그랬잖아. 종족이 바뀐다고 할 정도로 수사로서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이 영체를 만드는 거라고.”

“음. 영체를 만드는 것이 천지 법칙을 크게 거스르는 일이란 말씀이군요?”

“맞아. 그 전까지는 천지 법칙이 두고 볼 정도, 혹은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수준이었다면, 영체를 만드는 순간 천지 법칙의 그물에 걸릴 정도가 된 거지.”

“그 전까지 그물코를 드나들 정도의 피라미가 그물에 걸릴 정도로 커졌다고 보면 되겠군요.”

“쯧, 너무 비유가 저렴하긴 한데, 일단 그런 거지. 여기서 문제는 천지 법칙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거야.”

“천겁은 바로 그 천지 법칙의 응징이란 말씀이군요?”

“하하, 맞아. 아주 제대로 핵심을 짚었어. 세상의 법칙이 흐름을 거스르는 존재를 벌하는 것. 그것이 천겁이지.”

“그런데 화신기들이 그것에 대비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말이겠어? 천겁이 닥치기 전에 그것을 이겨낼 방법을 마련하는 거지.”

“그럼 천겁을 이겨내지 못하면 어찌됩니까?”

“어떻게 되겠어?”

“······.”

용랑은 건우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수도계는 흉흉하다.

그런 수도계에서 천지 법칙의 벌을 받았는데 그것을 이기지 못하면?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게 아니라면 수련 경지가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고.”

“죽지 않으면 수련 경지가 떨어진다는 말씀입니까?”

“화신기가 영체기로 떨어지거나 재수 없으면 성단기, 축기기까지 떨어질 수도 있겠지.”

“으으음.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군요.”

용랑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화신기 정도가 되면 천겁을 걱정해야 해. 수사의 종족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일정 기간마다 천겁이 내려오니까.”

“한 번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용랑은 천겁이 연속된다는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당연하지 벌을 내렸는데 그걸 막고 버티면? 그걸로 용서가 될까? 여전히 역천을 길을 걷고 있는데?”

“아,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천겁도 점차 강해지겠군요?”

“하하하. 맞다. 한 번 버텨냈다고 끝이 아니란 소리지. 다음 천겁은 더 강하고 험하게 내릴 테니. 그래서 화신기 수사들은 그 천겁에 대비하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해야 하지.”

“죽기 싫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군요.”

“맞다. 화신기 수사의 수명이 1만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첫 천겁조차 견디지 못한다면 고작 3천 년을 살 뿐이다.”

“화신기가 되고 첫 천겁이 3천 년 후에 내리는 겁니까?”

“수사의 출신에 따라서 다르고 익힌 공법에 따라서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그렇지. 그리고 나 같은 인간 출신 화신기 수사는 거의 3천 년에 한 번씩 천겁을 맞는다.”

“그럼 세 번째 천겁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군요? 화신기 수명을 1만 년이라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맞다. 실력이 뛰어나면 세 번째, 네 번째 천겁까지 넘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면 1만 5천 년을 살 수 있다.”

“음, 주인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건우는 갑자기 정색을 하는 용랑의 물음에 긴장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영체기 수사는 천겁을 겪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 용랑은 표정이 어두웠다.

건우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용랑은 건우가 천겁을 겪을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 수사에겐 보통 천겁이 3천 년에 한 번씩 내린다.”

“네, 그리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체기 수사의 수명은 3천 년이라 한다. 왜 그럴까?”

“아! 알겠습니다. 영체기 수사는 천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니 모두들 한결같이 영체기 수사의 수명을 3천 년이라 했겠지요.”

“그렇다. 그런데 형자수란과를 먹으면 그 형자수란과의 수령이 몇이냐에 따라 수명이 늘어난다고 했지. 나는 운이 좋아 7만 년짜리를 먹고 7천 년의 수명을 얻었고.”

“그,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그게 염려가 되어 여쭈어 본 것입니다. 혹시 주인님께서 3천 년이 될 때에 천겁을 맞으시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라. 형자수란과가 영체의 수명을 늘려준다는 것은 그것이 천겁을 그만큼 늦춰준다는 의미니까.”

“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형자수란과의 가치가 무궁한 것이지. 사실 수령 7만년짜리 형자수란과는 인계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것을 얻은 것은 정말 대운이 터진 것이지. 사실 그 때는 나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그러려니 했었지만.”

“그럼 정말 다행입니다. 주인님께서 앞으로 1만 년 동안은 천겁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하하. 그래. 그렇게 말을 해 주니 고맙구나.”

건우는 영혼의 연결로 전해지는 용랑의 충심을 느끼며 기꺼운 마음에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루야 님께 인공영체를 흡수시키기 위해서 혼원석(混元石) 말고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천겁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 되자 용랑이 이번에는 혼원석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다른 것이 있을지 어떨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내가 알아낸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란 것이지.”

“그렇군요. 그런데 평량의 여러 대성(大城)들을 두루 다니고 있는데도 혼원석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건우가 포란산맥을 벗어나 평량역을 떠도는 이유는 바로 그 혼원석 때문이었다.

인공영체는 이미 괴뢰선의 손을 탄 것이라 순수한 상태가 아니었다.

당연히 건우의 또 다른 영체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공영체의 근원만 떼어 내서 루야에게 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괴뢰선과 연관된 부분은 모두 버리고 오직 영체의 근원만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루야에게도 일종의 영근이 생기는 셈이다.

즉 루야가 수행이 가능한 수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러려면 혼원석이 필요했다.

혼원석은 세상의 근원에서 비롯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기운을 담고 있는 돌이었다.

건우가 아는 한, 정보집합체인 루야와 인공영체의 근원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매개체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분명히 기록에 나오는 것이니 어딘가에 있겠지.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했지만 수도계의 역사에 몇 번 등장한 기록이 있으니까.”

기록이 없었다면 건우도 혼원석에 대한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혼원석에 대한 내용은 과아분이 가지고 있던 기록과 인공영체에 들어 있던 괴뢰선의 비전에서 각각 발견 되었다.

과아분의 기록에 혼원석은 법보를 만들거나 혹은 개조하는 데에 귀한 재료로 쓰인다고 했었다.

그리고 괴뢰선의 비전에는 혼원석이 화신기급 괴뢰를 만드는 중심 재료로 쓰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 괴뢰선이 남긴 그 비전 덕분에 루야와 인공영체의 결합에 대한 실마리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용랑은 혼원석을 구할 거란 기대가 그리 크지 않은 듯 보였다.

건우도 평량역을 몇 십 년 돌아다녀도 혼원석을 구하지 못한 상황이라 느긋하게 연이 닿기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대신에 평량역의 대성들을 돌아다니며 포란처에서 얻은 여러 수사들의 보물중 불필요한 것을 처분하고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중이었다.

특히 건우가 재미를 붙인 것은 이전에 얻어두고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천절노자(天絶老者)의 출도령패(出島令牌)였다.

완합종 부양도의 도주였던 천절노자는 완합종의 복수를 위해서 영계로 비승한 전대 종주의 도움을 얻고자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 때, 건우가 슬그머니 부양도를 통제할 수 있는 출도령패를 챙겼었다.

그 때는 건우의 실력이 부족해서 출도령패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지만 영체기에 오르고 여유가 생긴 후, 부양도에 욕심이 났다.

그런데 출도령패를 건우의 것으로 연화하려면 적잖은 재료들이 필요했다.

부양도는 지금 출도령패와 연결된 특수 공간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을 불러내고 또 사용하기 위해서는 부양도를 수리할 필요가 있었다.

거대한 섬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계 최고의 비행 법보에 해당하는 부양도였다.

그것이 천절노자의 마지막 발악으로 많이 훼손되어 버렸다.

영계로 통하는 통로를 연 것만으로도 부양도는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영계의 존재가 거꾸로 분노를 터트려 인계에 유사 천겁을 내렸으니 부양도가 멀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양도를 수리하고 복원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건우는 혼원석을 구하는 틈틈이 출도령패에 필요한 재료를 모으는데 힘을 쓰는 중이었다.

거기에는 또 이런 계산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부양도도 대대적으로 개조를 해서 원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야지. 그래야 마음 놓고 써 먹을 수가 있겠지.’

* * *

“길 수사. 맞지요?”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언제 본 적이 있었던가요?”

건우는 평량역의 어느 대성에서 수사들의 개인 거래 상점을 둘러보던 중에 말을 걸어오는 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용랑은 따로 떨어져 성을 둘러본다고 옆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말을 걸어 온 상대는 영체기 후기의 수사로 흔히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수사는 어두운 황토색 머리카락과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건우의 기억에 그 수사를 만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아, 저를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극금문의 해봉당 당주인 려모원(呂模院)이라 합니다.”

“극금문 해봉당 당주?”

건우는 려모원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건우가 아는 극금문 해봉당 당주는 과아분이었다.

그리고 그 과아분은 포란처에서 반신수의 새끼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려모원은 과아분 이후에 새로 당주가 된 이가 분명했다.

하지만 건우는 과아분의 죽음을 모르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해봉당의 당주라니 이상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봉당 당주는 과아분 수사인 것으로 압니다만.”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며 려모원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려모원의 복장에는 극금문의 표식인 금은(金銀)의 열쇠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런. 길 수사께서는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려모원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전에 길 수사가 난란성에 왔던 적이 있지요?”

“그렇습니다만.”

“그 때, 길 수사가 포란처 공략에 참여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랬지요. 하지만 몇 번의 결계를 뚫고 가다보니 함께 하던 수사들이 점점 줄어 결국에는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게 중요한 일입니까?”

“음, 그 공략에서 저희 해봉당의 당주가 죽고 부당주가 실종되었습니다. 당주의 죽음은 문중에 보관하고 있던 생사패를 통해 알수 있었지요.”

“이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혹시 길 수사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것이 있는가 여쭤 보려 했습니다만.”

“저야 포란처에서 뒤늦게 빠져 나온데다가 부상이 심해서 요양을 하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해봉당 당주나 부당주의 죽음과 실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건우는 얼굴 표정도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려모원은 건우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영체기 완경이었던 당주님의 죽음이 길 수사와 연관이 있지는 않겠지요. 다만 길 수사가 해봉당에 의뢰를 했던 것을 다시 신청하지 않아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쩝, 포란처에서 보물을 잃었습니다. 설마 그 이유나 과정까지 궁금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가 볼까 합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지 않군요.”

건우는 그대로 려모원과 헤어지려 했다.

그런데 려모원이 슬그머니 건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듣자니 길 수사께서 혼원석을 구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순간 건우는 려모원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음을 짐작했다.

당연히 건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