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난란(亂卵)? 알이 어지러워? 알 때문에 어지러워?
“오서 오십시오. 난란성입니다.”
건우가 전송진을 통해 공간이동을 마치자 성단기 후기의 수사 하나가 전송 대응진 밖에서 건우를 맞이했다.
건우는 빠르게 주변을 탐색하고 곧바로 전송 대응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난란성(亂卵城)은 처음인데 밖으로 나갈 때에 절차가 필요한가?”
건우는 자신을 맞이한 성단기 후기의 수사를 보며 물었다.
이곳 난란성은 포란산맥에 있는 성들 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으로 극금문에 속한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건우를 맞이한 수사 역시 극금문의 제자로, 양쪽 소매에 금색과 은색의 열쇠가 있는 정식 제자복을 입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시면 난란성의 접객청에서 선배님을 도울 것입니다. 성함과 방문 목적을 말씀하시면 합당한 신분패를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건우의 물음에 성단 후기의 수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멀고 먼 조양성에서 홀로 전송진을 이용해서 도착한 영체기 수사를 어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더욱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구먼. 알았네.”
건우는 그런 수사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전송 대응진이 있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밖으로 나서자 야트막한 산비탈에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여럿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여러 지역에서 전송진을 이용하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건물들로 보였는데 어떤 것은 규모가 크고 어떤 것은 작았다.
그 중에 건우가 나온 곳은 가장 규모가 작아서 소수의 인원이 이동할 때 사용되는 곳인 듯 했다.
건우는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포장된 길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굳이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어디가 접객청인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건물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전송 대응진이 있는 모든 건물에서 뻗은 길이 한 곳으로 모이니, 그것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오서 오십시오. 난란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건우가 길을 따라 접객청 건물로 다가가자 입구에 서 있는 수사가 공손히 인사를 해 왔다.
축기기 후기의 수사였다.
“여기서 신분패를 받아야 한다지?”
“그렇습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게냐?”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건우의 말에 축기기 수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인 체로 앞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접객청 건물 안의 복도를 따라서 한참 들어가더니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건우를 안내했다.
건우는 그 방에 들기 전에 좌우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았다.
언젠가 녹림도에 들기 전, 섭주구 장로를 만나기 전에도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복도 좌우에 그려진 기암괴석과 영초, 영물, 괴수, 괴충, 구름과 바람, 파도 같은 것들이 잘 어우러진 벽화는 녹림도의 그것과 조금씩 다른 점이 있기는 했지만, 같은 류의 그림임은 분명했다.
건우는 아공간의 루야에게 그림을 기억하도록 하고 대청으로 들어섰다.
“오서 오시오. 극금문의 난란성 접객청을 맡고 있는 양경(洋鏡)이오.”
대청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 저편에 커다란 책상을 앞에 두고 앉은 수사가 인사를 했다.
양경이라 자신을 소개한 수사도 양쪽 소매에 금은의 열쇠를 수 놓은 극금문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건우는 그가 영체기 경지에 있음을 알아보았다.
“길우몽이라 합니다. 극금문에 의뢰할 봉인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건우는 그를 보자마자 곧바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어차피 극금문에선 금은연리로 봉인된 것들을 열어주는 의뢰 통로를 항상 열어두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지만 의뢰 자체가 특이할 것은 없었다.
용건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렇소? 수 년 만에 다시 봉인 해제 의뢰가 들어왔구려. 그렇다면 그 문제는 해봉당(解封黨)과 의논을 해야 할 문제니, 여기선 의뢰만 접수하는 것으로 하겠소.”
“이곳에서 의뢰 내용을 이야기하고, 이후에 해봉당에서 그 문제를 다시 의논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양경이 의뢰 접수를 하겠다고 하자 건우가 불퉁한 표정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되물었다.
길우몽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우의 입술이 조금 앞으로 튀어나왔다.
“문제가 있소?”
양경이 물었다.
“의뢰 내용을 굳이 접객청에 말하고, 다시 해봉당에 알릴 이유가 있는가 싶어서 묻는 것이오. 봉인에 대한 것은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소?”
건우도 살짝 심기가 뒤틀어진 듯 존대의 수준이 낮아지고 있었다.
“하하, 그게 걱정이라면 마음을 놓아도 되오. 의뢰 접수라 하지만 그저 간단한 내용만 적으면 그만이오. 나머지야 해봉당의 일이지 우리 접객청이 나설 일이 아니니 말이오.”
“그렇습니까? 그건 다행이군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양경이 날린 옥간을 받아 그 안에 내용을 적당히 기록해 되돌려 주었다.
“좋소. 이 옥간은 곧바로 해봉당에 전하겠소. 그리고 이것은 길 수사께서 이곳 난란성에 머무는 동안에 써야할 신분패요. 신분패가 없으면 간혹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오.”
“음, 위치를 알 수 있는 술법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알아보실 줄 알았소. 하지만 그게 문제될 것은 아니오. 우리가 위치를 추적하면 그 패에도 변화가 생겨서 우리의 행사를 알게 되오. 그것은 그저 일처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오.”
“쯧, 내키지는 않지만 극금문의 행사에 토를 달 수는 없겠지요. 알겠습니다. 신분패는 꼭 지니고 있도록 하지요.”
건우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신분패를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 불쾌하게 여기실 이유는 없소. 우리가 굳이 수사를 감시하거나 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오.”
“그렇겠지요. 그런데 해봉당의 연락은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사나흘 안에 기별이 갈 것이오. 그러니 그 동안 난란성 곳곳을 다니며 견문을 넓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요.”
“그래요? 난란성에 대단한 것이 있습니까?”
건우는 난란성이 극금문의 본거지란 것은 알지만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포란산맥은 여러 개의 알을 품고 있소. 사실 그것은 태고의 신수와도 관계가 있는 이야기라 하오. 포란은 즉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이 아니오?”
“그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포란산맥이 품고 있는 알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떠도는 구름처럼 실체가 없지 않습니까.”
건우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냔 눈빛으로 양경을 쳐다봤다.
“태고 신수(神獸)의 알에 대한 것이야 감히 우리같은 인계의 수사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긴 하지요. 하지만 난란성의 알에 대해서는 감히 욕심을 내어 볼 만도 하지 않겠소?”
“확실히 이 길모가 견문이 짧은 모양입니다. 난란성의 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말입니다.”
건우는 그렇게 에둘러서 양경에게 난란성의 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 청했다.
“하하, 그것 참. 멀리서도 오신 모양이오. 포란산맥과 난란성의 알에 대해서 모른다니 말이오.”
양경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뒤이어 간단하게 그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태고에 포란산맥에 신수가 여러 개의 알을 낳아 품었는데, 그 중에 하나만 깨어나 어미를 따라 선계로 올랐다.
그리고 남은 알들은 그대로 버려져 산맥 여기저기에 묻혔다.
그런데 또 수 억 년이 흘러서 그 알들 중에 하나가 깨어나고, 이후에 또 다른 알이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포란산맥에 묻혔던 신수의 알들이 간혹 깨어났는데 어미의 가호를 받지 못해서 완전한 신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런 중에 그렇게 뒤늦게 깨어났던 반신수들이 또 때가 되어 알을 품을 시기가 되면 포란산맥을 찾아 왔다.
수 억 년, 혹은 수천 만년에 한 번씩 벌어지는 일이지만 포란산맥에선 분명히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 중에 난란성은 부화되지 못한 알들이 가장 많은 곳이라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에 부화되지 못한 알들이 쌓이고 쌓여 있는 곳이 난란성인 것이다.
다만 그 알들은 신수에 버금간다는 어미들이 펼쳐 놓은 결계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계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중첩되었기에 좀처럼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하니 사실상 난란성 지역은 그 알들을 찾기 위한 수사들이 모여들었고, 그 수사들이 결국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소. 그것이 극금문이오.”
“그러니까 신수들의 중첩된 결계를 풀기 위해 모인 이들이 극금문을 만들었다는 거군요?”
“하하하. 봉인을 잘 푸는 이들이 또 봉인을 잘 만들지도 않겠소?”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이 길모에게 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는 없소. 난란성을 오가는 영체기 수사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고, 또 우리 극금문이 굳이 신수의 결계나 그 안에 있는 알들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오.”
“그렇습니까?”
“하하하. 우리 극금문이 포란산맥의 알을 독점하겠다고 욕심을 냈다면 이미 평량에서 씨가 마르지 않았겠소? 과유불급이라,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지킨다오.”
양경은 크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했고,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그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그것을 극금문이 독식하려 했다면 문제가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적당히 나누고 있다니 극금문의 처세가 나름 현명해 보였다.
건우는 그 뒤로 양경과 얼마간 더 대화를 나누다가 신분패를 들고 접객청을 나섰다.
* * *
건우는 접객청을 나온 뒤, 아공간에서 용랑을 불러내여 시중을 들게 했다.
그래서 둘은 난란성의 번화가를 함께 걷는 중이었다.
둘이 걷고 있는 곳은 난란성에서도 수사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수 만 명의 수사들로 북적거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평량 수도계의 규모가 크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건우에게 포란과 난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용랑이 말했다.
“그래?”
“신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실 다도해역에는 신수와 얽힌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용랑 네 선조가 신수(神獸) 중에 하나인 청랑(靑狼)이었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독룡의 피가 섞였고, 이후로도 대를 거듭하며 혼혈이 중첩되었습니다.”
용랑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연신 의념을 펼쳐서 자신의 피와 감응하는 것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이전에 빙담흑혈리(氷潭黑血鯉)의 비늘로 크게 성장한 경험이 있는데다 마침 신수와 연관된 장소라니 기대치가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기연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닌지 용랑의 피와 감응하는 것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청랑과 독룡이라. 그런데 청랑은 늑대인데 알을 낳던가?”
건우는 문득 신수의 알이란 것에 의문을 느끼고 용랑에서 물었다.
“알이란 것이 새나 뱀의 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인간조차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에는 알에서 시작하여 태아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건우의 말에 용랑은 그렇게 대답했고, 건우는 작은 깨달음에 무릎을 쳤다.
용랑의 말처럼 모든 생명의 가장 초기 모습은 알이라 칭해도 될 것 같았다.
수정란(受精卵)도 알이라면 알일 테니까.
“그렇군.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곳 포란산맥이나 난란성에 있다는 알도 내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었던 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를 수도 있겠군.”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건우와 용랑은 난란성을 오가는 수사들을 위한 객관에 자리를 잡았다.
길을 가던 중에 회회각이 있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건우는 그곳을 외면했다.
굳이 회회전에서 운영하는 객잔에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회회전의 세력이 강대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회회전과 얽히는 일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하고 거리를 두려 한 것이다.
그 뒤, 건우는 극금문 해봉당의 연락을 기다리며 며칠 동안 난란성의 상점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몇 가지의 쓸모없는 물건들은 판매를 하고 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해서 아공간에 쌓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난란성을 돌아다니다보니 생각지도 못하게 소문 몇 가지가 귀에 들어왔다.
“주인님, 새로운 포란처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홀로 나갔던 용랑도 밖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객관으로 돌아오자마자 건우에게 물었다.
건우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그래. 그리고 그 때문에 해봉당에서 내 의뢰를 뒤로 미룬다는 연락이 조금 전에 전해졌다.”
용랑의 말에 대답하는 건우의 목소리에 짜증이 담겨 있었다.
극금문에서 해봉당 전체가 나서 이번에 발견된 포란처의 결계를 뚫는다고 했다.
그러니 금은연리의 봉인을 풀어 달라는 건우의 의뢰는 기약없이 뒤로 밀리게 생겼다.
평소라면 몇 십 년 정도 밀리는 것이야 문제도 아니겠지만 지금 건우에겐 50년이란 시간 제약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걸 어떻게 한다지?”
건우의 고심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