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조양성의 불한당?
건우는 청옥비선의 선수에 앉아 있었다.
지금 건우의 모습은 여전히 길우몽의 그것이었다.
극금문의 허미당과 척을 진 상태니, 평량역에선 될 수 있으면 길우몽의 모습으로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처진 입술과 눈꼬리, 거기에 두툼한 광대뼈와 그 위에 찍힌 커다란 점.
겉으로 봐서는 그리 호감이 갈 인상은 아니지만 나오금강체술을 그 모습으로 익힌 뒤로는 그것이 건우의 또 다른 외모가 되었다.
길우몽의 외모는 특별히 술법이나 영기를 사용해서 바꾼 것이 아니었다.
건우가 원하지 않으면 길우몽의 외모는 절대 원래 건우의 모습으로 변할 일이 없으니 그것은 또 다른 본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십이비선의 밀역에서 얻은 금은연리옥함, 이게 문제란 말이지.”
중얼거리는 길우몽의 입꼬리가 한층 더 늘어졌다.
꽤나 상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위가시(僞假匙)의 술법을 익혔는데도 그 금은연리옥함은 열지 못했어.”
위가시의 술법은 가짜 열쇠를 만드는 방법이다.
맞춤 열쇠 중에 한 쪽만 있을 때, 다른 한 쪽을 가짜로 만들어 금은연리의 봉인을 풀어내는 술법.
건우는 허미당의 공간낭에서 그것을 익혀냈다.
그런데 그 위가시의 술법이 건우가 얻은 금은연리옥함에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필 안쪽에 있는 인공 영체가 그 금은연리의 봉인과 하나가 되어 버렸어. 이건 맞춤 열쇠 한 쌍이 다 있어도 풀 수 없는 봉인이 된 거지.”
“그걸 극금문에 가면 해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건우의 독백에 용랑이 선실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영기 수련을 마치고 나오는 참이었다.
“금은연리의 봉인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곳이 극금문이잖아. 그러니 그곳에 가서 물어볼 수밖에.”
“그 인공 영체란 것이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허미당과의 악연을 생각하면 극금문을 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극금문을 찾아가 봉인을 풀어야 할 정도로 인공 영체가 중요하냔 질문이었다.
“내가 이번에 영체기에 올라보니 알겠더구나. 영체를 만든 수사와 그렇지 못한 수사는 그 격 자체가 다르다.”
“그렇습니까?”
“간혹 성단기 수사가 영체기 수사를 해칠 수는 있다. 상황에 따라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성단기 수사와 영체기 수사의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인 차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격의 차이다. 인간이 수사가 되었다고 인간이 아니게 되지는 않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영체를 만든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종이 되었다.”
“영체를 만드는 것이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리 느끼고 있다.”
“그것이 인공 영체의 가치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금은연리옥함에 들어 있는 인공 영체를 내가 취할 수 있다면, 나는 두 개의 영체를 지닌 몸이 된다.”
“그렇습니까?”
“그 의미를 모르는구나. 내가 둘이 된다는 뜻을.”
“분신을 쓰는 수사들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용랑은 영체가 둘이 된다는 것이 분신을 만드는 것과 뭐가 다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물었다.
“영체가 둘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나누는 것과는 다르다. 스스로 하나의 영체를 여럿으로 나누는 것과도 엄연히 다르지. 이는 나를 이루는 근원이 둘이 된다는 의미다.”
“어렵습니다.”
“그래, 나도 아직 영체에 대한 깨달음이 많이 부족해서 자세히 설명하기 어렵구나. 하지만 금은연리옥함에 들어 있는 인공영체의 봉인을 풀어서 내가 취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50년 내로.”
“그 50년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번에 내가 만든 영체가 온전히 안정되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 전에 인공 영체와 지금의 영체를 만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의 완전한 합일이 불가능해지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서로 다른 닮았지만 조금은 다른 영체가 되겠지. 하지만 이는 위험한 일이다. 온전히 같은 둘과, 서로 다른 둘의 차이는 크겠지.”
“서로 다르다면 주인님이 서로 싸울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온전히 같은 하나라면 그럴 일이 없겠지만 서로 다른 하나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건우의 말에 용랑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완전히 같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50년 내에 봉인을 풀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내가 금은연리옥함의 인공 영체를 발견하고 연구한 결과는 그렇다.”
“시간이 많지는 않겠습니다. 평량역은 드넓고 극금문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습니까?”
“그러니 전송진을 이용할 생각이다. 평량역은 다도해역과 달리 규모가 큰 수도문파마다 장거리 전송진들이 있어서 역 내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오랜만에 도시를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건 가 봐야 알겠지. 허미당이 가지고 있던 기록이 수백 년 전의 것이니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어찌 알겠느냐.”
“아,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고작 200년 정도이니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렇겠지.”
* * *
“말이 씨가 된 건가?”
건우가 십여 리 떨어진 지평선 위에 있는 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네가 죄송할 게 뭐냐? 네가 성을 허문 것도 아닌데.”
용랑은 제 입이 화를 불렀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지만 건우도 그것이 용랑과는 상관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원래 지평선 위에 보이는 성은 조양성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평량의 서남쪽, 혼돈역에 가까이 있는 대성(大城)으로 평량역 서남부에서 번창한 성들 중에 한 곳이었다.
당연히 그 성에는 평량역 곳곳으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었다.
비용이 크기는 하지만 이동 시간이 비용보다 귀한 이들이 많으니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건우가 보는 조양성은 성벽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죽은 시체들이 살아 움직이는 마경(魔境)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용랑이 의식을 펼쳐 조양성 내부를 살피며 건우에게 물었다.
“음,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 조양성을 차지한 것은 분명하구나.”
“네? 조양성을 차지했다고요? 그냥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까?”
“보아하니 아주 흉악한 공법을 수련한 마계 수사가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그럼 그 수사가 조양성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말씀입니까?”
“죽이기만 했겠느냐? 봐라, 저기 돌아다니는 시체들이 모두 조양성을 지키는 병사가 되지 않았느냐.”
건우가 손가락으로 무너진 조양성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 조양성과 그 주변을 서성이는 시체들은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저만한 대성이라면 못해도 백만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죽여 저리 만들다니 심보가 고약한 수사인 듯합니다.”
용랑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를 드러냈다.
용랑의 기분에 따라서 송곳니가 조금 길어져 있었다.
“과하긴 하구나. 하지만 수도계에서 하룻밤에 나라 하나가 피로 물드는 것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인데, 고작 대성 하나 따위가 대수겠느냐.”
“그러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다만 저 성의 전송진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수십 리 떨어져 있는 조양성을 향해 의식을 펼쳤다.
그러면서 한 쪽에 아공간 입구를 열어 놓는 준비는 당연히 잊지 않았다.
조양성에 혹시라도 화신기 수사가 있을까 싶어 미리 몸을 피할 구석을 마련해 둔 것이다.
쿠구구구구궁!
콰르르르르릉!
건우가 조양성으로 의식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양성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조양성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검은 번개가 다발로 지상을 향해 내리쳤다.
그리고 그 번개가 지면을 훑으며 뻗어가더니 거대한 진법을 만들었다.
= 누가 감히 나를 귀찮게 하느냐?
그리고 그 진법이 완성되자 조양성 하늘의 먹구름이 지상으로 내려 쌓이며 거대한 형상을 하나 만들어 냈다.
머리에 뿔이 돋은 괴물 형상의 머리는 물소의 이마에 상어의 입을 달아 놓은 듯 했다.
게다가 상체는 네 개의 팔을 지녔고, 엉덩이 뒤로는 악어의 꼬리를 달았다.
두꺼운 두 다리는 우람하기 짝이 없었는데 발목 아래가 진법에 박혀 발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던 산수가 조양성의 변한 모습에 궁금증이 일어 살피던 중이었소.”
건우는 크기가 이삼백 미터는 될 듯 한 괴물의 모습을 잠시 자세히 살피다가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 말했다.
= 지나가던 길이면 그냥 가면 될 것이지, 왜 남의 일에 간섭을 한단 말이냐?
괴물이 건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따지듯이 말했다.
건우는 그 즈음 그 괴물의 역량을 대충 가늠해 내었다.
상대는 영체기 초기인 건우의 능력으로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사실 건우는 상대가 화신기만 아니라면 어떻든 자신이 위험할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적의 역량을 대충 파악하니 건우의 마음에 여유와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나도 굳이 다른 수사의 일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소. 그런데 당신 때문에 내게 번거로움이 생겼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 뭐라? 나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겨?
“원래, 이 조양성에 전송진이 있어 많은 수사들이 그 혜택을 보았었소. 그런데 마침 내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수사께서 그 혜택을 막아버렸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 내가 네 놈의 사정을 보아줄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전송진을 쓰고 싶으면 다른 성으로 가서 알아보거라.
“흐음. 수사께선 이 길모의 불편을 살펴주실 생각이 없는 모양이오?”
= 크하하하하. 꺼져라! 내가 이 성을 차지한 후로, 너와 같은 놈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놈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느니라. 그러니 너도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꺼지거라.
조양성의 괴물은 건우의 말에 네 개의 손을 허리와 옆구리에 붙이고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이에 길우몽 모습의 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각진 얼굴에 아래로 쳐졌던 입꼬리와 눈끝이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그러면서 길우몽의 몸이 점차 검은 색으로 물들었다.
= 놈, 감히 나와 붙어 볼 생각이냐?
그런 건우의 변화에 조양성 괴물이 웃음을 멈추고 건우를 노려봤다.
뿔 밑에 송곳으로 찍어 놓은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수 십 리를 뛰어넘어 길우몽을 노려봤다.
“누군지 모르지만 네가 감히 조양성을 차지하여 내 일을 방해하고, 양해를 바라는 내 바람을 짓밟고 비웃었으니 나도 마냥 참아 넘길 수는 없지 않으냐. 일단 한 번 싸워 보자꾸나. 그러다가 내가 부족하면 물러날 것이고, 네가 부족하면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나오금강체술(娜烏金剛體術)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쿠구구구구구구국!
그러자 갑자기 길우몽의 몸이 크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고작 2미터도 되지 않던 길우몽의 몸이 수십 미터의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오른 길우몽의 몸 피부는 오금(烏金) 즉 검은 황금을 연상시키는 색을 머금고 있었다.
나오금강체술이 영체기 수준으로 오르면서 체격을 키울 수 있게 되었고, 몸의 색이 더욱 영롱한 검은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어디 붙어 보자!”
쿠릉!
길우몽이 변신을 마치고 외치는 순간, 그의 몸은 검은 황금빛을 남기고 사라져 조양성의 괴물 앞에 나타났다.
쿠과광 콰과광! 콰과과광!
길우몽은 다른 특별한 술법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거의 백여 미터에 가깝게 커진 육체로 괴수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주먹질 발길질 한 번 한 번에 산악을 허물어뜨릴 힘이 담겨 있었다.
= 감히! 죽여버리겠다!
괴물은 자신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크기의 길우몽이 이리저리 허공을 밟고 움직이며 공격을 하자 분노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분노는 몸을 휘감는 검은 번개로 드러났고, 이어서 조양성 곳곳에서 시체들이 모여들어 길우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체들은 괴물의 검은 번개를 흡수하며 강해졌다.
연신기 초기도 되지 않을 것 같았던 시체들이 번개를 흡수할수록 축기기를 넘어 성단기 수준의 힘을 내기도 했다.
그런 시체가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시체들의 공격은 나오금강체술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길우몽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귀찮구나!”
하지만 시체들이 끝없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길우몽이 허공에서 쇠몽둥이 하나를 불러냈다.
그것은 아공간에서 불러낸 극화조 연단로의 쇠몽둥이였다.
그런데 그 크기가 거대해진 길우몽의 체격과 맞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훙훙훙훙훙! 후우웅! 후우웅!
퍼벅! 퍼버버버버벅!
파각! 콰직!
길우몽이 쇠몽둥이를 가볍게 휘두르며 주위에 몰린 시체들을 날려버리더니 이어서 진법에 뿌리 박힌 괴물의 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고작 진법에 의지해서 힘을 부풀리는 놈이! 나를! 비웃어! 응?!”
콰작! 콰직! 콰직!
= 이 노옴! 멈춰라! 정녕 죽고 싶으냐!
건우의 몽둥이질에 괴물이 네 개의 팔을 휘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검은 안개가 휘감긴 네 개의 팔은 건우의 몽둥이를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막아 낸다고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닌 듯.
진법에 흐르는 검은 번개가 조금 약해진 듯이 보였다.
건우도 그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비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네 놈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네 놈 때문에 내 일정에 차질이 생겼는데 도리어 네가 안하무인으로 설쳤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르거라!”
건우는 봐 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몽둥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 빌어먹을 놈! 좋다! 내가 네 놈이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그러니 이만 싸움을 멈추자.
결국 몽둥이질을 이기지 못한 괴물 형상이 타협안을 내 놓았다.
길우몽의 모습을 한 건우가 그 말에 괴물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멀어져 공격을 멈췄다.
“당연히 다른 보상도 있겠지?”
입꼬리와 눈끝이 다시 조금씩 처지기 시작한 길우몽이 괴물 형상을 향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