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어긋난 주시원의 수작질
“건우야 게 있느냐? 대답을 하거라.”
건우가 아공간에서 밖의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절벽의 석문 안에서 주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남다른 재주가 있음을 짐작했지만 설마 흑심반(黑深礬) 압각수(鴨脚樹:은행나무)를 제압할 줄은 몰랐구나.”
주시원의 목소리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 노옴. 사백이 말을 하는데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단 말이냐! 쿨럭! 쿨럭!”
그러다가 문득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소리 끝에는 피를 토하는 듯한 거친 기침 소리도 곁들여졌다.
“크흐흐. 그래, 이해하느니. 내가 너에게 한 짓이 있으니 당연하겠지. 하지만···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주시원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한참 조용했다.
아공간 입구를 열고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건우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입구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다.
“그, 허가 놈의 실력이 만만치 않더구나. 물론 내가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본명 법보도 잃은 놈에게 밀릴 일은 없었을 텐데.”
한참 후, 이전보다 훨씬 명료해진 주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노옴, 건우야. 나는 이제 소생의 가능성이 없느니라. 그러니 마음을 놓아도 된다.”
휘익! 턱!
주시원의 말과 함께 절벽 안에서 뭔가가 날아와 바닥에 떨어졌다.
건우는 아공간 안에서 그것이 뭔지 조심스럽게 살폈다.
“공간낭이네?”
- 무슨 뜻일까요?
“주인님께 주겠다는 말인 거 같습니다.”
끽끼끼끼.
건우와 함께 아공간 입구에 몰려 있던 루야와 용랑, 혈원이 간만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주시원이 공간낭을 던진 이유를 비슷하게 짐작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전부이다. 허가 놈이 숨겨 놓은 회심의 암수에 당해서,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러니, 너는, 그것을 가지고··· 노, 녹림도의 명맥을··· 이어다오.”
주시원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차 가늘고 힘이 없어졌다.
“너는 구, 굳이 이곳으로 들어올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그, 그리하여 언젠가 회회전··· 놈들에게 보, 복수······.”
주시원의 목소리는 그렇게 끊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사흘.
건우는 아공간 입구에서 가부좌를 하고 절벽 안쪽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기다렸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대전에서 주시원과 허미당이 싸운 여파 때문인지 옛 선배 고인이 베풀어 놓았던 금제와 진법이 많이 흔들렸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진법과 금제가 희미하게 힘을 잃어서 절벽의 모습이 밖으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건우는 아공간에서 그런 상황을 지켜보며 고심에 빠져 있었다.
“저 공간낭. 무슨 수작이 걸려 있진 않을까?
- 이상한 건 못 찾았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영체기 수사가 던진 미끼잖아.”
- 미끼가 아닐 수도 있죠. 정말 죽기 직전에 건우 님께 후사를 맡긴 걸 수도······.
“주인님 저는 조금 더 의심을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체기 노괴의 깊은 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루야와 용랑의 의견이 엇갈렸다.
그리고 건우는 그 중에 용랑의 의견이 더 마음에 들었다.
“뭐, 시간이야 넉넉하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 그 동안 이거나 좀 살펴보면 되겠지.”
건우가 손바닥을 뒤집어 이번에 얻은 허미당의 공간낭을 불러냈다.
- 맞아요. 그게 있었죠? 어디 한 번 열어봐요. 뭐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 절벽 안에서 얻은 것들도 거기 들어 있지 않겠습니까.”
- 맞아요. 허미당이 뭔가를 얻었다면 그것도 그 공간낭 안에 있겠네요. 건우 님 대박!
끼끼끼끼끽끽!
건우가 불러낸 공간낭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건우는 허미당의 공간낭에 의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영체기 수사가 주인인 공간낭을 곧바로 열 수는 없었다.
“흐음, 시간이 좀 걸리겠네. 허미당의 의념이 강력하게 스며 있어.”
“불가능한 것은 아니군요?”
“용랑 너는 내 아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몰라서 하는 말이냐? 지금 내 의념 수준은 어지간한 영체기 초기 수사와도 비벼볼 정도는 될 거다.”
“하하. 주인님의 의식이 강한 것이야 저도 알고 있지요. 하지만 영체기 수사의 공간낭까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습니다.”
“너는 나를 조금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구나?”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성단기 초기의 수사를 영체기 초기 수사와 비교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라 그런 것이지요.”
“시끄럽다. 이걸 열어도 네 몫은 없을 게다.”
“주, 주인님.”
건우의 말에 용랑이 꽁지에 불이 붙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했다.
건우는 그렇게 용랑을 놀리고는 허미당의 공간낭을 연화하기 시작했다.
수미산겨자씨가 있는 본공간에 여덟 속성의 영근 공간, 거기에 연체술을 익히며 새로 만든 위성단의 공간까지.
도합 아홉 구역의 아공간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그 드넓은 곳을 장악한 건우의 의념이 허미당의 공간낭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건우가 그렇게 연화 삼매에 빠지자 용랑과 혈원도 제각각 자리를 잡고 수련을 시작했고, 루야는 투명하게 열린 아공간 입구 너머로 바깥을 살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 * *
‘고약한 것!’
주시원은 또 다시 바스러지는 몸의 일부를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허미당과 격전을 치른 절벽 안의 대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곳곳이 파이고 무너지고 갈라진 모습인데, 주시원은 무너진 벽에 기댄 모습이었다.
허리 아래는 사라지고, 나무뿌리가 얽힌 듯한 몸체는 말라비틀어져 조금씩 가루가 되고 있었다.
‘공간낭을 던졌는데도 나타나지 않다니. 정말로 놈이 이곳을 떠난 것인가?’
주시원은 속으로 애가 탔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공간낭에 담아 밖으로 던졌다.
건우란 녀석이 그것을 본다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정말 주시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것이니.
‘그걸 봤으면 내가 진정으로 의발을 전하려 한다고 생각할 텐데?’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공간낭이 그 정도는 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공간낭을 취하지도 않으니 이렇게 되면··· 끝장인데.’
실제로 주시원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미 회회전과의 싸움에서 영체만 겨우 탈출한 이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영체만 빠져나와 겨우 지금의 몸을 회복했다.
하지만 본래 인간의 것이었던 몸을 다시 만들지는 못하고 주력 공법인 토속성과 목속성의 힘을 빌려서 속성에 맞는 몸을 만들었다.
그나마 녹림도의 비고에 숨겨 두었던 보물들로 십이비선봉 밀역에서 잃은 것들은 보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체를 이용해서 새로운 몸을 만드느라 영체를 몸과 분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보통은 영체만 분리해서 움직일 수도 있지만 지금 주시원은 육체와 영체가 뒤섞여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게 지금 주시원이 위기에 빠진 이유였다.
허미당의 공격에 큰 부상을 입어서 자력으로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 진 상황인 것이다.
이럴 때에 성단기 수준의 수사 하나를 양분으로 취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정말 가 버렸단 말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주시원의 눈에서는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말로 건우가 멀리 떠났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 확신은 주시원에겐 사형 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죽는···가?’
* * *
“흐으음.”
- 깨어나셨어요?
“깨어나긴, 내가 언제 잠이라도 잤어?”
- 아이, 왜 또 까칠하게 그러세요?
“너하고 나하곤 원래 이래야 맞는 거 아닌가?”
- 쳇.
“밖은?”
- 아무 변화도 없어요. 공간낭은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고요. 대신에 풀들이 조금 많이 자랐죠.
“그래?”
- 네. 그나저나 건우 님은 어떻게 되었어요? 좀 얻은 게 있어요?
“그럼. 아주 괜찮은 걸 얻었지.”
- 정말요? 그게 뭔데요?
건우의 말에 루야가 반색을 하며 밝은 빛을 만들었다.
“허미당의 익힌 극금문의 특별한 공법.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금은연리옥함의 맞춤 열쇠인 은시 하나.”
- 금시가 없으니 곤란하겠네요.
“그런데 극금문의 특별한 공법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 한 쌍의 열쇠 중에 어느 하나만 있어도······.”
- 금은연리의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그걸 얻으셨어요?
“하하하. 그래. 게다가 떠도는 금시나 은시를 얻으면 그것의 대상이 되는 봉인을 추적할 수 있는 추적진법의 제작 방법도 얻었지.”
- 와! 와! 와! 대단해요.
“거기다가 허미당 늙은이가 맞춤 열쇠도 몇 개 가지고 있더군. 이제 추적진법을 만들고 그 열쇠들을 이용하면 주인 잃은 봉인들을 찾을 수 있겠지. 뭐 진법을 만들기 전에 위가시(僞假匙)를 만드는 방법부터 익혀야겠지만.”
- 위가시요? 그게 뭐예요?
“가짜 열쇠. 반쪽 열쇠를 가지고 봉인과 감응하고, 그에 맞춰서 필요한 반대쪽 열쇠를 만드는 거지. 물론 그러려면 극금문의 여러 공법에 능통해야 하지만, 허미당의 공간낭에 필요한 것은 모두 있더라고.”
- 그렇군요.
“게다가 극금문의 공법들을 익히다보면 자연스럽게 성단기의 경지도 끌어 올릴 수 있겠지.”
- 축하드려요.
“하지만 아직 공간낭을 완전히 열지는 못했어. 허미당이 공간낭 깊은 곳에 금은연리의 봉인 공간을 따로 만들어 뒀거든. 아마 귀한 것은 거기에 넣어 둔 모양이야.”
- 그럼 저 절벽 안에서 얻은 것이 뭔지는 알아내지 못한 거네요?
“뭐, 내가 영체기만 되면 어렵지 않에 열어젖힐 수 있겠지. 게다가 극금문의 공법들을 연구하다보면 더 쉬워질 수도 있고.”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조용히 의념을 퍼트려 용랑과 혈원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수련 삼매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는 아공간 입구를 가까이로 불러 밖의 모습을 살폈다.
우거진 수풀 안에 주시원이 던진 공간낭이 파묻혀 있었다.
“3년이 지났는데 변화가 없군.”
- 그러게요.
“그렇다고 내가 서두를 이유는 없겠지. 용랑과 혈원이 수련을 마치면 나를 불러.”
- 둘을요?
“그래, 시킬 일이 있으니까.”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고 허미당의 공간낭에 집중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 * *
‘고약한··· 것!’
그 말을 끝으로 주시원의 턱이 바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이미 그의 몸은 모두 허물어져 썩어 버렸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머리도 톱밥처럼 분해되어 바닥에 퍼져 버렸다.
“음?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가 잘못 들었나?”
그 시각 건우는 주시원의 공간낭을 들고 웃음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건우는 용랑과 혈원을 먼저 아공간 밖으로 보내서 그 공간낭을 가지고 멀리 떠나도록 했다.
그렇게 한 후에 절벽 쪽의 상황을 살피고, 공간낭을 잡은 용랑의 상태도 확인했다.
하지만 어떤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기에 건우도 아공간 밖으로 나온 것이다.
물론 건우는 절대 절벽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혹시 주시원이 숨겨서 가지고 있을지 모를 보물이 탐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영체기 수사의 위험한 안배가 있을지도 모를 공간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공간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용랑과 혈원이 있는 곳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뭐, 이 정도면 그 동안의 수고비로 충분하지.”
건우는 주시원의 공간낭을 살피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주시원의 공간낭은 허미당의 것처럼 강한 의념으로 보호된 것도 아니었다.
건우를 속이기 위해 공간낭을 던지면서 주시원이 의념을 모두 걷어 낸 덕분이다.
“이건 뭐, 그냥 길가다 주인 없는 황금주머니를 주운 격이지. 하하하. 자, 어서 가자.”
건우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청옥비선을 꺼내 띄우고 그 위에 올라탔다.
이곳이 평량역과 혼돈역의 경계라 위험하지만 허미당의 지도가 있으니 그런대로 안전한 길을 따라갈 수는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건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