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다들 나한테 어부지리를 원하더라고
“너는 허미당이 어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허미당이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을 모를까?”
“제 생각에는 허 수사께서 어떻게든 대비는 할 것 같습니다. 사백께서 허 수사를 노리지 않는다고 해도 미리 대비해서 손해 볼 것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나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일 것이다. 그럼 건우야.”
“네, 사백님.”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느냐?”
건우는 주시원의 물음에 마땅히 답을 하지 못했다.
성단기인 건우로선 영체기 수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짐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차피 기본은 같은 것이다. 나는 저 문에서 허미당이 나오면, 그를 기습할 것이다. 그리고 허미당도 그럴 것을 예상하고 있겠지.”
“그건 그렇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와 허미당의 수준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큰 변수가 되는 것이고.”
“그렇습니까?”
“그러하다. 이제부터 너와 나는 이곳에 거대한 진법을 구축할 것이다.”
“······.”
“자, 이것을 받아라.”
진법을 만든다는 말에 말없이 서 있는 건우에게 주시원이 옥간 하나를 던졌다.
건우는 옥간을 받아들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읽었다.
“이 진법을 만드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보면 알겠지만 너와 나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대상을 공격할 수 있는 진법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왜? 내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불만이더냐?”
그렇게 묻는 주시원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사백께서 진을 관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 표정이 좋지 않으냐?”
“저는 고작 성단기 초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진법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제가 사백님의 일을 망칠까 걱정이 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크크크. 그런 걱정은 하지 말거라. 진법을 내가 통제하니 당연히 허미당의 공격을 적절히 분담할 수 있도록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백님. 저는 그저 사백님만 믿을 뿐입니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크크크크.”
주시원은 건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동안 길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곧바로 건우를 부려서 절벽의 굳게 닫힌 석문 앞에 진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건우는 옥간에 있는 내용에 따라서 부지런히 진법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주시원이 진법 재료들을 아끼는 것에 속으로 열불이 났다.
진법을 만드는 데에는 영기 흡수가 잘 되는 수련 자원들이 많이 필요했다.
금속 가루를 쓰기도 하고, 녹이기도 하고, 영초나 요단을 연화시켜 진법에 흡수시키기도 했다.
그런 중에 건우의 공간낭이 홀쭉해졌다.
주시원은 건우가 보여주기 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공간낭이 텅텅 빌 정도로 건우의 자원을 요구했던 것이다.
당연히 건우가 뱃속에 갈고 있는 검(劍)은 나날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자, 이제 마무리가 된 것 같구나.”
진법을 만들고 그 진법의 중추를 자신의 의념으로 연화시킨 주시원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건우는 만들기는 대부분 자기 손으로 만들었는데, 그 주인은 주시원이 되는 상황에 이를 갈면서도 표정을 공손하게 유지했다.
“모두가 사백님의 고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나도 네가 속에 불만이 있음을 알고 있다.”
건우가 입에 꿀을 바른 소리를 했지만 주시원은 그런 수에 속지 않았다.
“아닙니다. 절대 불만은 가지지 않았습니다.”
건우가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쯧, 나도 어린 너를 핍박하거나 못살게 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골수에 박힌 회회전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이리 괴팍해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이런 나를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한다. 이게 전부 우리 완합종을 위한 것이 아니더냐.”
“네. 알겠습니다. 사백님.”
건우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주시원은 그런 건우를 보며 뜻모를 미소를 짓고 눈빛 깊은 곳에서 이채로운 빛을 번뜩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진법의 축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두 수사가 명상에 잠긴 지 수십 일이 지났을 때, 드디어 굳게 닫혔던 석문에 변화가 생겼다.
영기가 짙어지며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마자 주시원과 건우가 눈을 뜨고 문을 노려봤다.
그르르르르르 그르르르르륵!
“가거라!”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주시원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콰드드드드득! 쿠르르르릉!
그와 함께 건우와 주시원이 앉은 진법 중앙에 분재 하나가 나타났다.
윤택이 나는 검은 빛의 바위에 기기묘묘하게 뒤틀어진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은갈색의 뿌리에 연녹색의 줄기를 가진 분재 나무는 특이하게도 갈색의 잎을 지니고 있었다.
건우는 그 잎의 모양을 보고서야 그 나무가 은행나무임을 알아봤다.
‘은행나무를 분재로 만들기도 하나?’
건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급히 잡념을 떨치고 진법 위에서 크기를 부풀리는 은행 나무 분재를 쳐다봤다.
지금은 오직 주시원 홀로 허미당을 상대하는 중이고, 저 은행 나무 분재는 주시원의 법구였다.
나무의 분재를 무기로 쓰는 것이 특이하긴 했지만 수도계에 건우가 알지 못할 것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럴 줄 알았다 원가 놈아!”
진법에서 은행 나무 분재가 부풀어 오르며 갈색의 기운을 석문 안쪽으로 쏟아 붓는 것과 동시에 허미당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르르르르르릉! 콰과광!
그리고 석문 밖으로 허미당의 법보인 금은색의 궤짝이 날아왔다.
궤짝 전체에 수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고, 그 구멍마다 금은의 열쇠들이 박혀 있는 그것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쉬쉬쉬쉬쉭 쉬쉬쉬쉭!
카르르르르릉! 콰과과광!
허미당의 금은색 궤짝에서 수많은 열쇠들이 쏟아져 나와 주시원의 갈색 기운을 거둬내기 시작했다.
주시원의 분재가 뿜어내는 갈색 기운은 강력했지만 열쇠들은 파도를 뚫고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진법의 영역을 침범했다.
건우는 주시원이 허미당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을 보고 손에 진땀을 흘렸다.
이렇게 쉽게 밀려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크크크크. 허가야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주시원도 숨겨 놓은 것이 있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고함을 지르고 진법을 향해 손바닥을 뒤집었다.
우우우우우웅!
콰과과과곽!
그러자 진법에서 굵은 나무 뿌리들이 수십 미터나 치솟아 오르더니 은행 나무 분재와 금은색 궤짝을 둘러쌌다.
“이게 무슨?”
그 순간 석문 안에서 허미당의 낭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건우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어엇!? 사백님!”
진법에서 솟구친 나무 뿌리들이 은행 나무 분재와 금은색 궤를 가두면서 건우를 향해서만 통로를 열어 놓은 것이다.
정확하게는 두 개의 법구가 부딪히는 충격을 진법의 힘으로 가두고 그 안에 건우를 함께 던져 넣은 셈이다.
그 말은 두 법구가 충돌하는 힘을 건우에게 전가 시키겠다는 이야기였다.
“복수를 위함이니라!”
주시원이 그렇게 말을 하고는 진법에서 몸을 띄워서 석문을 지나 대전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리고 석문 너머에서 주시원과 허미당이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크하하하. 허미당, 네 본명 법보를 봉인했으니 이제 네가 무엇으로 나를 상대하겠느냐. 그만 보물을 내어 놓거라.”
“헛소리! 어디서 맞아서 골병이 든 늙은이가 감히 나를 노려? 어디 네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붙어 보자.”
콰과과광 콰과과광! 콰르르르릉!
절벽 안의 대전에서 두 영체기 수사가 싸움을 벌일 때, 건우는 진법 안에서 영체기 수사들의 법보가 대치하는 힘을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주시원이 없음에도 은행 나무 분재는 바닥에 깔린 진법과 동조하며 금은색의 궤짝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은색의 궤짝 역시 허미당이 신경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진법과 분재의 힘에 대항하며 사납게 날뛰는 중이었다.
“크으으으으.”
그런데 문제는 금은색의 궤짝이 날뛸 때마다 건우에게 엄청난 충격이 전해진다는 것이었다.
원래 진법을 만들 때에 주시원과 건우가 외부의 공격을 분담해서 막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주시원을 진법을 떠나는 바람에 건우 홀로 그 충격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주시원이 진법을 벗어나면서 건우는 꼼짝도 할 수 없도록 진법이 바뀌었다.
바닥에서 뿌리들이 솟구칠 때에 건우의 움직임을 막는 힘도 생겨난 것이다.
‘결국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하지만 건우도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리어 진법 안에 주시원이 없다는 것은 도리어 건우에게 호재였다.
‘어디 한 번 당해봐라.’
홀로 진법에 있으니 눈치를 볼 것도 없다.
건우는 곧바로 천라패갑방패(天羅貝甲防牌)를 끌어냈다.
도봉포대와 포공공마를 더하여 최상급 법보까지 끌어 올린 천라패갑방패(天羅貝甲防牌)였다.
우우우우웅 투우웅 투우웅!
건우는 천라패갑방패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불러냈다.
이번에 나오는 천라패갑방패는 은행 나무 분재와 금은색 궤짝, 그것을 묶고 있는 나무뿌리 진법까지 뒤덮었다.
마치 진법 전체에 뚜껑을 씌운 듯이 나타난 천라패갑방패.
반투명한 금색의 천라패갑방패는 그대로 지면으로 내려오며 진법과 두 법보를 집어 삼켰다.
파라라라라라락! 쉬쉬쉬쉬쉬쉭!
은행 나무 분재와 금은색 궤짝이 위기를 느꼈는지 나뭇잎을 날리고 열쇠를 뿌려댔다.
하지만 은행잎과 열쇠들은 천라패갑방패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라패갑방패에 흡수시킨 도봉포대의 효용이었다.
투우웅! 투우웅!
천라패갑방패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속이 빈 배를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바닥으로 내려오는 천라패갑방패는 그 범위에 포함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중이었다.
은행 나무 분재나 금은색 궤짝도 그것을 피하진 못했다.
콰지지지지직!
그리고 천라패갑방패에 짓눌린 나무뿌리들.
원래 진법을 변형시켰던 나무뿌리들이 천라패갑방패의 힘에 바스러져 사라지자 건우에게 여유가 생겼다.
두 개의 법보를 제압하고 진법도 파괴했으니 이제 자유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콰과과과광!
“커어억!”
그 때였다.
건우가 막 진법을 벗어난 순간 절벽의 석문 안에서 허미당이 피를 토하며 밖으로 날아왔다.
건우는 그 순간 허미당의 몸에서 작은 영체가 빠져나와 허미당의 허리에서 공간낭을 빼들고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감히!”
건우는 곧바로 손을 뻗었다.
검은 색으로 변한 건우의 손과 팔이 주욱 늘어나 허공으로 날아오른 영체를 잡아챘다.
“이런! 노옴!”
그 순간 허미당의 영체가 크게 노하며 고함을 질렀지만 그 때는 이미 그의 공간낭이 건우의 손에 들어간 뒤였다.
“놓칠 것 같으냐? 허가야, 여기서 그냥 죽어라!”
그 때, 절벽 안에서 주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미당의 영체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다시 허공을 찢고 금은의 빛과 함께 사라졌다.
영체만으로 둔술을 펼쳐 모습을 감춘 것이다.
‘이런, 주시원 저 늙은이에게 잡히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건우도 아공간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주시원에게 잡히면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 같아선 주시원 저 놈도 어떻게 하고 싶지만, 이쯤에서 만족할 줄도 알아야겠지.’
건우는 아공간으로 들어오자마자 긴장된 표정으로 절벽의 석문 쪽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