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아니, 그건, 좀, 아닌 거 같긴 하지만
건우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원주와 허미당은 그런 건우를 힐끗 보고는 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허미당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끝이 나지 않은 것을 보면 희망은 있어 보입니다만.”
“다른 통로에 살아 있는 수사가 없다면 그걸로 끝이라 했지요?”
“그렇습니다. 저 쪽에 밖으로 통하는 새로운 안개 동굴이 나타나지요. 전엔 그랬습니다.”
“그게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분명 남은 통로에서 아이들이 애를 쓰고 있긴 한 모양입니다.”
“그것 참······. 생각보다 아이들의 재주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군요.”
허미당이 그렇게 말을 할 때였다.
그들이 바라보던 빈 공간이 출렁이며 안개 동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허미당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마지막 통로의 통과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으아악! 울컥! 울컥! 사, 살려 주십······.”
“허엇?”
“크으음.”
“아아.”
통로에서 백발흑염의 도부치 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나타나는 순간 건우는 물론이고 영체기의 두 수사마저도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도부치 수사의 모습은 그만큼 끔찍했다.
그는 몸과 상체 일부만 남았을 뿐, 팔다리와 허리 아래가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피부도 모두 벗겨져 근육이 드러난 상태에 갈비뼈 사이로 심장이 뛰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털썩!
도부치 수사는 땅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입을 뻐끔거리다가 조용해졌다.
건우는 급히 그에게 달려가 의념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
아무리 역천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죽은 이를 살려낼 방법은 없었다.
혹여 죽기 전에 무슨 방법을 준비해서 죽음을 유예시킨 경우가 아니라면, 죽음을 되돌리는 것은 건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끄응.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허미당과 원주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건우는 그들이 도부치의 죽음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부치가 죽기 전에 뭐라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애초에 쓰러진 도부치에게 다가갈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입으로만 생색으로 내는 것일 뿐이다.
‘음, 허리 아래가 잘려서 공간낭은 없군. 그나마 챙길 것은 이 수염 밖에 없는 건가?’
그런 중에 건우는 죽은 도부치의 몸에서 관우의 그것처럼 길게 자란 수염을 수습했다.
특이하게 그 수염이 도부치의 법구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는 나중에 살펴보면 되겠지.’
건우는 수염을 공간낭에 밀어 넣으며 몸을 일으켜 허미당과 원주를 바라봤다.
“커엄.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 셋이서 저 안으로 들어가야 되겠구나.”
허미당이 그런 건우를 보며 말했다.
건우가 절벽을 막고 있는 문을 바라보니 이전과 달리 희미한 영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네 곳의 통로가 모두 뚫리면서 문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자, 원주 수사. 그럼 들어가 보십시다. 내 그대에게 약속한 대로 보물이 있으면 그대에게도 섭섭하지 않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허허. 주신다니 마다하지 않겠지만 얻을 것이 없다고 해도 섭섭해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전송진에서 구명의 은혜를 입었는데 보물을 얻고 못 얻고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허미당의 말에 원주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건우를 향해 손짓을 했다.
“아이야, 이리로 오거라. 이왕 온 길이니 너도 함께 들어가자꾸나. 여기 허 수사의 배포가 넓으니 어쩌면 너에게도 보물 하나를 내어 줄지 어떻게 알겠느냐. 허허허.”
건우는 원주의 손짓에 조심스럽게 두 수사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런 건우의 모습에 허미당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 수사가 그 아이를 그리 챙기시니, 나도 신경을 써 보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지요.”
허미당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절벽을 막은 문을 향해 한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투명한 금은의 그림자 열쇠가 나타나 문으로 스며들었다.
건우는 그 열쇠에 허미당의 영기와 의념이 응축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르르르르륵 그르르르르르!
허미당의 힘에 돌로 된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밀려났다.
그리고 그 너머로 휘황한 빛이 가득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은 중앙에 붉은 기가 도는 금색의 융단이 일직선으로 깔려 있었다.
그 융단 끝.
세 개의 단 위에는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고, 태사의에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앉아 커다란 상자를 껴안고 있었다.
“흐음. 저 분이 선배 고인인 모양이군요.”
원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허미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영계로 비승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영면에 드셨습니다 그려.”
“그렇게 남은 육신까지 더해서 금은연리의 봉인을 만드셨군요.”
“저 상태라면 봉인된 상태로 들고 나갈 수는 없겠습니다.”
마지막 허미당의 말에는 짙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봉인을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 안에 뭐가 들었든 상관없이 허미당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봉인을 옮길 수 없는 상황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잠시 대전 안을 바라보던 허미당이 원주를 보며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원주가 나무뿌리 같이 얽힌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허미당을 보며 물었다.
“보아하니 대전에 다른 보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허미당이 말했다.
“그렇군요. 대전을 빛내고 상태를 유지, 보존하는 술법을 담은 법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욕심낼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원주도 허미당의 말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내 원주 수사에게 예를 표해야 하는데, 대전 안에 마땅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허허허. 구명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자 이걸 받으시지요.”
원주의 겸양에 허미당이 공간낭 하나를 허리춤에서 풀어 내밀었다.
“으음? 이게 뭡니까?”
원주가 마지못한 척 슬쩍 공간낭을 받아들며 물었다.
“보시는 것처럼 사소한 것들입니다. 극금문의 금시와 은시 세 벌이 들어 있습니다.”
“아, 주인을 잃은 보물을 발견하면 열 수 있을 테니 이 원주의 운을 시험해 보기에 적당할 듯 합니다.”
“그렇지요. 제가 그런 의미를 담아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허허. 고맙습니다. 그럼 나와 이 아이는 여기서 그만 물러나면 되겠습니다.”
“역시 화통하십니다. 그리 제 뜻을 이해해 주시니 말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가 여기 계속 있어봐야 허 수사를 불편하게 할 뿐이지요. 허허허. 그럼 우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음, 저 아이에겐 마땅히 줄 것이 없으니 이걸 주겠습니다.”
그냥 보내기엔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허미당이 건우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던졌다.
건우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니지만 수련을 할 때 복용하면 경지 상승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단을 키우는데 그만한 것이 없지.”
허미당은 그렇게 생색을 내고는 홀로 대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원주가 건우에게 눈짓을 하고는 절벽에서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르르르르륵 그르르르르!
쿠구궁!
건우와 원주가 입구에서 멀어지자 절벽의 석문이 다시 닫혔다.
“아이야.”
“네, 선배님.”
건우는 원주의 부름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우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영체기 수사가 독한 마음을 먹으면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공간으로 도망갈 틈도 없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클클클. 그리 긴장할 것 없다. 내가 내 제자를 해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네? 제자라니요?”
건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원주를 쳐다봤다.
“원래 너는 내 사손 뻘이 되는 녀석이었지. 하지만 네가 성단을 이루었으니 제자 항렬이 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선배께서 완합종에 속한 분이시란 말입니까?”
“너는 나를 본 적이 있느니라.”
“제가 완합종에서 영체기 사조를 뵌 것은 도주님 뿐이었습니다. 그럼 선배께서 녹림도의 주시원 도주님이란 말입니까?”
“크크크. 바로 그렇다.”
“하지만 외모가······.”
“회회전 놈들이 끈질기게 나를 노리는데 원래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 있겠느냐? 게다가 그 놈들에게 당해서 육체를 잃고 영체만 겨우 빠져 나왔으니 몸을 새로 만들 수밖에 없기도 했고.”
“그, 그렇습니까?”
“이 놈아. 아무리 종문이 망했다지만 그래도 종문의 사조를 봤으면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
“죄, 죄송합니다. 건우가 사백님께 인사드립니다.”
성단기인 건우에게 영체기인 주시원은 사부 항렬이다.
그래서 사숙이나 사백이라 부를 수 있는데 아무래도 녹림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으니 사백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부르면 되겠구나. 앞으로 원주 사백이라 부르거라.”
“네, 사백님.”
“그건 그렇고, 너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건우는 갑자기 정체를 드러낸 주시원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그가 무얼 묻는지 따져볼 정신이 없었다.
“저 허미당 말이다.”
“허 선배가 어쨌다는 말씀인지요?”
“저 안에서 금은연리 궤의 봉인을 풀고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요.”
“그러면 그게 쉽지는 않겠지?”
“보아하니 금시와 은시, 둘 모두를 지닌 것은 아닌 듯 했습니다. 열쇠 한 쪽만으로 봉인을 푸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더구나 궤의 주인이 화신기 선배라면 더욱 만만치 않은 작업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화신기 선배의 보물이 보잘 것 없지는 않겠지?”
“그, 그야······.”
“내가 회회전 놈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영체만 남아 도망을 치면서 맹세했다.”
건우는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주시원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강맹한 기세가 뿜어져 감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신기에 올라 회회전 놈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마땅히 그런 결심을 했을 것이다.
건우야 회회전과 크게 척을 진 것이 없지만 주시원은 다르지 않은가.
빚을 졌으면 갚아 주는 것이 당연하다.
건우는 주시원의 맹세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여, 나는 복수를 마칠 때까지는 인의와 도의를 벗어나는 것도 주저치 않기로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 말씀은 혹시 대전에 있는 허 수사를······.”
“허 수사를 보아하니 나와 비슷한 수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회회전에 당한 내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싸움이 쉽지 않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허가 놈도 나를 업수이 여기고 달랑 공간낭 하나를 던져준 것이 아니냐. 내가 감히 저를 도모하지 못할 것을 안 것이지.”
“허 수사께서 사백님의 상태를 알고 그리 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어찌 저리 당당하게 봉인을 풀겠다고 들어갔겠느냐.”
“그럼 차라리 사백님을 제압한 후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그러기엔 또 내 실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서 주저함이 있었겠지. 어쨌거나 이참에 화신기 수사가 입적하며 남긴 보물을 내가 취하고자 한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건우는 그렇게 묻는 주시원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빛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거부하면 당장이라도 건우의 목을 칠 것 같았다.
“사백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건우에게 주어진 선택지엔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었다.
“클클클 잘 생각했다. 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