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적효의 죽음
“참으로 신묘한 술법이 아닙니까.”
안개 동굴 안으로 들어온 후, 적효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안개를 보며 건우에게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 짙게 깔렸던 운무가 하나도 보이지 않다니, 이곳을 만든 분의 능력을 감히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건우 역시 적효와 마찬가지로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적효와 건우가 있는 곳은 봄날의 그것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산속 길이었다.
석판을 깔아 포장한 그 길의 양 옆으로 몸을 뒤트는 소나무가 울창한데 소나무 아래에는 또 커다란 영지들이 가득 자라 있었다.
적효가 소나무 아래로 가서 그 영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단하군요. 보십시오. 영기가 매우 짙은 영지버섯입니다.”
적효의 말에 건우도 가까운 소나무 아래로 가서 영지에 의념을 집중해 보았다.
적효의 말처럼 영기를 가득 품은 것이 어지간한 영초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건우는 그 영지를 매달고 있는 소나무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소나무와 맞닿은 손을 통해서 소나무의 내면을 살펴보았다.
“으음.”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손을 떼었다.
“적효 수사!”
그리고 영지를 채취하려는 적효를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건우 수사.”
적효가 손을 멈추고 건우를 바라봤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환영(幻影)입니다.”
건우가 적효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건우의 등 뒤로 칠부팔진궤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우의 칠부팔진궤는 그 사이에 몇 번의 개량을 거쳐서 법기의 수준을 넘어 법보에 이르러 있었다.
이전에 일곱 종류의 부적으로 여덟 진법을 만든다 해서 칠부팔진궤라 했지만, 실상 지금은 십이부십육진궤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열두 종류의 법부를 만들고 그것으로 열여섯 종류의 진법을 구성할 수 있는 법보.
파라라라라라락!
칠부판진궤에서 사람 크기의 법부들이 쏟아져 나와 건우를 중심으로 원형진을 만들었다.
법부들은 영기가 응결되어 반투명한 모습이었는데, 원형을 이룬 진법이 건우를 보호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무얼 하는 겁니까?”
적효가 건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건우가 검지와 중지를 붙인 상태로 뻗어 검결지를 만들고 법부들을 조종했다.
건우의 명령에 원형진을 이룬 법부 중에서 몇이 분열되어 건우가 가리키는 소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콰르르르르릉! 콰과과광!
화염과 폭발의 힘이 담긴 법부들이 요란스럽게 소나무를 공격했다.
그러자 따뜻하고 평화롭게 보였던 공간이 뒤흔들리며 칙칙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적효가 사방에서 몰려오는 검은 연기에 깜짝 놀라서 건우를 보며 물었다.
“잘 보십시오. 저 소나무와 버섯들은 실상 아주 작은 벌레들이 모인 것입니다. 저 검은 연기가 바로 그 벌레들이지요.”
건우가 다시 법부를 사방으로 날리며 말했다.
적효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소나무와 검은 연기를 유심히 살폈다.
“저, 정말입니다. 건우 수사의 말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적효도 오래지 않아서 검은 연기처럼 보이는 벌레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너무 작아서 연기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모기를 닮은 날벌레들이었다.
가느다란 대롱 끝에 문어의 빨판 같은 것이 하나 달려 있는, 기이한 주둥이를 지닌 벌레.
“저것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건우가 적효에게 물었다.
적효는 그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저런 것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혼돈역에서 태어난 변종이 아닐까요?”
“하긴, 저것이 뭐가 되었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겠지요. 일단 불에 약한 것 같으니 그걸 염두에 두십시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칠부팔진궤에서 새로운 부적들을 뽑아냈다.
이번에 나온 것은 법부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 모습을 한 것이었다.
훙훙훙훙훙.
불덩이 법부가 이미 만들어져 있던 원형진 밖에서 다시 하나의 원진을 만들고 회전을 시작했다.
그러자 건우를 향해 다가오던 검은 연기가 주춤거리며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그 사이에 적효도 몸에 영기로 만든 붉은 색의 투명한 비늘을 두르고 피리 하나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적효가 그 피리를 불기 시작하자 그의 허리춤에서 손가락보다 작은 뱀들이 기어 나와 발밑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런데 그 뱀이 끝도 없이 자꾸만 나와서 건우를 놀라게 했다.
“이제 준비가 된 듯 하니 가십시다.”
적효가 잠시 피리를 입에서 떼고 건우에게 말했다.
그는 작은 뱀들을 앞세우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몇 걸음 걷기 전에 앞서 가는 뱀들이 덩치를 키워 파도를 방불케 하는 모습을 만들었다.
뱀들은 석판이 깔린 길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징그럽게 뒤엉킨 상태로 검은 연기를 밀쳐내며 앞서갔다.
건우는 검은 안개를 이루는 벌레들이 뱀의 몸으로 흡수되는 것을 알아보았다.
뱀의 몸에 닿은 벌레는 마치 물에 녹는 것처럼 뱀의 몸 안으로 빨려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벌레를 흡수할수록 뱀들은 조금씩 더 굵어지고 있었다.
훙훙훙훙훙!
적효가 그렇게 길을 여는 동안에 건우는 회전하는 불덩이 법부로 좌우와 뒤에서 밀려드는 벌레들을 막아냈다.
그렇게 서로 힘을 모아서 이동하기를 몇 시간.
적효와 건우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사이에 적효가 부리던 뱀들도 수가 많이 줄어 있었다.
벌레를 흡수하다 한계에 이른 뱀들이 하나씩 독액으로 녹아버린 탓이었다.
“지독합니다. 끝도 없이 영기가 소모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둔술을 쓸 수도 없으니 빠르게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은근히 공간 전체에 압력도 상당합니다. 축기기 수사였다면 바닥에 눌러 붙어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적효의 말에 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무섭습니다. 마치 안개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시나브로 당하고야 알아차렸으니 말입니다.”
적효가 지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적효 수사, 방법을 달리해야 하겠습니다.”
“방법을 달리하다니요?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건우의 말에 적효가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게 수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러자면 적효 수사의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건우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제 도움이요?”
“제가 괜찮은 법기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쓰기 위해서는 강력한 화염 속성을 지닌 자원이 필요합니다.”
“화염 속성 자원을 써서 그 법기를 발동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리고 건우 수사는 법기는 있어도 그런 수준의 자원은 없다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 법기를 쓰면 확실하게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마땅한 자원만 있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검은 연기는 모두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으음.”
적효는 건우의 제안에 잠시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소매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으음. 그것은?”
“오랜 세월 용암 호수의 바닥에서 열기를 흡수한 호박(琥珀)입니다.”
“신기하군요. 호박이 용암에 녹지 않고 도리어 열기를 흡수하다니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성단기 후기를 뚫기 위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걸 제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이걸 가지고 있어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좋습니다. 그럼 저도 준비를 하지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공간낭에서 꺼내는 척하며 아공간의 극화조(極火鳥) 연단로(鍊丹爐)를 꺼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적효가 물었다.
“보시는 것처럼 단로(丹爐)입니다. 여기에 그 호박을 넣어, 호박이 품고 있는 열기를 일순간에 팽창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이 호박이 아무리 강한 열기를 품고 있어도 이 공간 전체를 불태울 정도는 못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단로가 그 열기를 증폭시켜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단로가 품은 힘을 대부분 잃게 되겠지만 그 정도 손해야 각오한 바입니다.”
연단로에 들어 있는 극화조의 기운이 그 정도에 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건우는 엄살을 부려서 극화조 연단로의 가치를 낮추었다.
“어쩌겠습니까. 위기 상황이니 손해를 보더라도 살 길을 도모해야지요.”
적효도 건우가 법기의 기운이 쇠하는 것을 감수하고 일을 벌인다는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린 듯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자신만 보물을 잃고 건우는 별 손해가 없다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여기 있습니다.”
적효가 붉은 빛을 품은 호박을 건우에게 내밀었다.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호박은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건우는 길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쇠막대를 꺼내 연단로의 뚜껑을 열고 호박을 그 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다시 뚜껑을 닫고 연단로에 손을 올렸다.
우우우우우우웅!
두우웅! 두우웅! 두우웅!
건우가 연단로에 손을 올리고 의념을 집중하자 붉은 화염의 기운이 연단로에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건우를 감쌀 정도로 부풀어 오른 화염의 기운이 마치 북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맥동을 시작했다.
부풀었다 줄어들었다하는 반복적인 움직임.
적효는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점차 화염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 잠깐만!”
그러다가 적효는 뭔가 잘못된 것을 느끼고 급히 건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푸화화화화확!
건우에게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이, 이 노옴! 끄아아아아아악! 쉬쉬쉬쉬쉿! 치르르르르르!”
갑작스럽게 염화(炎火)의 공격을 받은 적효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다가 땅바닥을 굴렀다.
그런데 바닥을 구르는 적효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더니 어느 순간 한 마리의 붉은 뱀으로 바뀌었다.
길이가 10미터 정도 되는 붉은 뱀의 머리는 여전히 적효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는 희미하던 비늘이 뚜렷하게 돋아 있었다.
적효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크게 벌린 입에서는 두 갈래로 갈라진 혀가 보였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극화조 연단로에서 뿜어진 극한의 화염은 적효는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쯧쯔. 적효 수사. 그러기에 왜 이런 짓을 했답니까.”
여전히 염화를 뿜어내는 연단로에서 손을 뗀 건우가 적효를 보며 말했다.
그런 건우의 손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뱀 하나가 잡혀 있었다.
투명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뱀은 건우의 머리카락처럼 가늘었다.
“치리릿! 아, 알고 있었더냐? 쉭쉭!”
적효가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건우를 보며 물었다.
“이런 것이 머리카락에 숨어드는데 어찌 모를까.”
“그, 그러···얼···리가···. 가, 가장 은밀하······안······.”
“쯧,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서 의념이 몇 배는 강하지. 그래서 어지간한 수작은 통하지 않아. 의식이 강력하니 기운을 느끼는 것도 훨씬 예민한 편이고.”
콰직!
건우는 영기를 집중해서 손에 들고 있던 투명한 뱀을 뭉개버렸다.
“크아아아악!”
그러자 적효가 이전보다 훨씬 큰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건우는 투명한 뱀과 적효가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투명한 뱀이 죽으면서 영혼에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겠지?”
투명한 뱀을 죽인 건우는 곧바로 적효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쒜에엑! 푸욱!
그러자 어디선가 검은색의 단검 하나가 나타나 적효의 이마에 박혔다.
건우는 이어서 다시 몇 번의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같은 모양의 단검이 적효의 몸에 틀어박혔다.
건우는 다섯 개의 단검을 날려 적효의 숨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그리고도 죽은 적효를 다시 확인해서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없는가 확인하고 적효의 몸을 완전히 불태웠다.
적효가 부리던 뱀들 역시 마찬가지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함께 불태웠다.
“이러고도 살아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일을 마치고 적효의 공간낭과 피리 법기를 챙기고, 적효를 불태운 재 안에서 요단 하나를 주워든 건우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수작을 부렸을까. 함께 힘을 모아서 위기를 넘기자면서 나에게 상대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뱀을 붙이다니, 쯧.”
적효가 처음 피리를 불기 시작할 때부터 건우에게 스며든 뱀이었다.
건우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꾸만 투명한 뱀이 머릿속으로 파고들려고 해서 벌레와 적효를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적효는 설마하니 극화조 연단로가 그토록 강력한 염화를 뿜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다가 어이없이 당해 버렸다.
사실 적효는 몰랐지만 건우가 연단로를 발동시키며 의도적으로 극화조의 기운을 적효에게 집중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적효가 그토록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
삐이이이이이이이익!
건우가 적효의 뒤처리를 하는 동안에 극화조 연단로는 건우가 명령한 대로 미세한 모기 마물들을 깔끔하게 녹여 전멸시켰다.
흡기(吸氣)의 능력이 있어 위험한 마물이지만 대신에 개체 하나하나가 강한 것은 아니어서 극화조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그렇게 모기 마물이 전멸하자 건우가 있던 공간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 균열이나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
건우는 급히 극화조 연단로를 아공간에 챙겨 넣었다.
그 직후 건우는 자신이 커다란 절벽 앞에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절벽 앞에는 원주 수사와 허미당 수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오호라, 벌써 통과를 했습니다 그려.”
“제가 뭐라 했습니까. 재주가 있는 녀석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원주 수사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험한 일을 겪은 모양입니다.”
건우가 나타나자 허미당과 원주가 기뻐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