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어라? 그건 생각을 못했네?
- 이제 대교류회도 1년 남짓 남았네요.
“그렇지.”
- 그 때까지 여기 계속 계실 거예요?
“객관 예약도 대교류회가 끝날 때까지로 해 뒀잖아.”
- 솔직히 객관 따위는 별 필요도 없었잖아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들어와 계시면서.
“하긴, 좀 아깝긴 하지. 그러니 더더욱 기간 끝날 때까지는 머물다 가야지.”
- 괜한 고집은.
“하하, 걱정하지 마라. 사실은 따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
건우는 루야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루야의 말이 맞았다.
대교류회는 건우의 예상과는 많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원래 3년을 기약한 것은 화신기 수사들의 설법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높은 경지의 수사들이 후배들을 위해서 설법을 한다는데, 그런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
그런데 여섯 번으로 계획되어 있었던 화신기 수사들의 설법은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화신기 수사들은 너나없이 십이비선의 유산을 두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미 삼맹과 회회전, 다도해역연합처럼 큰 세력이 확보한 여덟 개의 유산은 어쩔 수 없으니 남은 것들을 취하기 위한 물밑 다툼이 치열했다.
건우가 듣기로도 대교류회 2년 동안에 십이비선의 유산 중에서 두 개가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게 다 그 십이비선의 유산 때문이지. 그거 때문에 대교류회가 엉망이 되었어.”
- 그건 그렇죠. 그래서 건우 님은 더욱 조심을 하셔야 하는 거죠.
“그래. 만약 내가 가진 검선의 유산이 드러나게 되면 그 즉시 엄청난 수사들이 몰려들겠지.”
- 그러니까 그건 절대 아공간 밖으로 꺼내선 안 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유산에 대한 추적 술법이나 금제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는 거.”
- 그러니까요.
“그래서 따로 계획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 그래서 그게 뭐냐구요.
“이참에 평량대륙으로 넘어가서 한동안 있어 볼까 한다.”
- 평량대륙이요? 아, 그 금은연리옥함 때문에요?
“음. 겸사겸사. 유산 추적도 뿌리치고 옥함도 열고. 그런 거지.”
- 흠.
“금은연리옥함을 열려면 극금문에서 만든 금시와 은시가 필요하고, 다도해역을 떠나면 유산의 추적 따돌릴 수 있을 테니까.”
- 그렇긴 한데요. 그래서 어떻게 넘어가시려고요?
역과 역 사이에는 화신기 수사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금지들이 존재한다.
숲이나 사막, 바다 혹은 화산지대나 밀림, 늪, 호수 등등.
그냥 듣기에는 일반적인 지형인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높고 깊고 험한 곳이다.
그래서 그저 지나는 데에만 수 백 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마수나 요수, 영수 혹은 알려지지 않은 위험들은 상상할 수도 없다.
물론 그런 위험을 뚫고 역과 역을 오간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 덕분에 각 역들이 서로 알려지게 되고 또 교류를 이어가다가 결국 역과 역 사이에 전송진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다행히 지금은 역을 오가는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다.
전송진이라는 멋진 수단이 있으니까.
“듣자니 대원본성에 역(域) 간(間) 전송진이 있다더라고.”
- 전송진이요?
“다도해역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역 간 전송진이 세 곳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곳 대원본성에 있다는 거지. 극염종과 회회전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전송진.”
- 그래요?
“원래는 나 같은 성단기 수사가 알긴 어려운 정본데, 이번에 십이비선들의 유산 때문에 전송진 사용이 많이 늘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소문이 나고 말았지. 원래는 영체기는 되어야 그나마 들을 자격이 되는 정보였던 모양인데.”
- 그렇군요. 그런데 그런 거라면 건우 님이 알아봐야 소용없는 거 아니에요? 성단기 수준으로는 알 수도 없는 정보면 사용은 꿈도 못 꿀 거 같은데요?
“원래는 그렇지.”
-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네요?
“다른 역에서 이곳 다도해역으로 들어온 이들이 많다고 했잖아.”
- 그게 왜요?
“많은 수사가 들어와서 반대로 보내야 할 수사가 늘었지.”
- 네?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나도 몰랐는데 역간 전송진은 법칙에 의해서 균형을 맞추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야. 일정 기간 안에 오고가는 수사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거지.”
- 아! 그런 규칙이 있었어요?
“그냥 자주 사용하는 거라면 또 문제가 아니지. 사용자가 넘치면 균형을 맞추기도 쉬우니까.”
- 그건 그렇죠. 그런데 역과 역을 오가는 것은 수사들도 부담이라는 말씀이군요?
“홀가분하게 오갈 수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도해역에 익숙한 이들은 다른 역으로 가길 꺼리는 경향이 많겠지.”
- 그래서 성단기 밖에 안 되는 건우 님도 역간 전송진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이에요?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있지. 그렇게 소문이 났으니까.”
- 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평량대륙으로 갈 수 있는 건 확실해요?
“회회각의 점원에게 이야기를 해 뒀으니 조만간 답을 가지고 오겠지.”
- 아직은 모른다는 말이네요?
“하하하. 극염종과 회회전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곳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적당히 기름칠 해 두고 결과를 기다리는 거지.”
- 하긴······.
“어째 네 말투가 무척 거슬리는데?”
- 기분 때문에 그런 걸 겁니다.
“······.”
* * *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건우라합니다.”
건우는 제 신분을 숨기지 않고 밝혔다.
전송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분 확인이 필요했다.
건우의 또 다른 이름인 길우몽은 그런 신분 확인에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길우몽이란 수사의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건우는 완합종에 속했던 적이 있어서 그것으로 신분 증명을 할 수 있었다.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면 아무리 영석이 있다해도 전송진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 건우 수사라. 출신은?”
“부끄럽지만 과거에 완합종에 잠시······.”
당연히 과거 완합종에 속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형편이다.
“완합종이라······.”
“그 때는 축기기일 때였습니다. 회회전에서도 완합종을 떠난 제자들에 대해서는 과거를 묻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사실 제가 완합종 출신인 것 때문에 다도해역에서 지내기가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생겼을 때 평량으로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 이해할 법 한 말이로군. 그런데 성단기 주제에 영석을 제법 모았구나?”
“얼마 전부터 전송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급히 가진 것을 모두 털었습니다.”
“작정하고 다도해역을 떠나겠다 마음을 먹었다는 말이군?”
“그러니 선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건우가 전송진을 관리하는 영체기 수사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허어,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다. 신분을 속이지 않았으니 내가 너를 제지할 이유도 없지. 전송 비용도 합당하게 치루었고.”
그런 건우에게 회회전에서 나온 전송진 관리 수사는 손을 저어 건우의 허리를 펴게 하며 말했다.
그는 건우를 바로 서게 하고는 황금색으로 법술문이 그려진 부적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을 가슴에 넣고 있게. 몸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전송 후에 후유증이 적을 것이네.”
그것은 전송진 사용에 반드시 필요한 법부였다.
그것이 있어야 전송진과 호응할 수 있고,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부작용을 막을 수 있었다.
마냥 전송진이 작동하는 순간에 난입한다고 무사히 반대쪽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소리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야 규칙에 따라서 허가를 하는 것일 뿐, 딱히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다.”
건우의 인사에 영체기 수사는 손을 내저었다.
건우는 다시 한 번 공손히 인사를 하고 전송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송진은 대원본성의 분지 북쪽에 있는 극염종의 금지에 있었다.
평소 극염종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는 곳인데, 전송진 사용이 활발해지면서 내막이 알려진 곳이었다.
건우는 석실 통로를 따라서 수백 미터를 걸어간 후에야 전송진이 있는 공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한 수사들이 전송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건우는 품에 넣었던 법부가 전송진의 한 지점과 감응하는 것을 느끼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백옥으로 만든 좌대가 희미한 영기를 뿜고 있었다.
건우는 그곳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성단기 따위가 평량까지는 무슨 일로 가는 것이냐?”
그 때, 건우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나이든 늙은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건우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건우는 그 수사가 영체기 이상의 수사임을 깨닫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럴 필요 없다. 그저 시간을 보내기가 무료해서 묻는 것이니 대답이나 하거라.”
그런데 등 뒤의 수사는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영기로 억눌렀다.
건우는 굳이 반항하지 않고 힘을 빼며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후배가 과거 완합종에 잠시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다도해역에서의 수련이 힘겨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송진이 열리는 기회에 평량으로 가서 수행을 이어갈까 합니다.”
“호오? 그렇구나. 그런 이유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재미있구나. 그럼 고작 성단기에 불과한데 의식의 힘이 매우 강렬한 것은 완합종의 그 진염결 덕분이더냐?”
“진염결을 아십니까?”
“크흐흐. 알지. 잘 알고말고.”
건우는 등 뒤의 수사가 진염결을 잘 안다며 뭔가 여운을 남기자 그 뒤가 궁금했다.
하지만 감히 그것을 묻지는 못하고 가만히 뒷말을 기다렸다.
“너는 재미가 없구나.”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러하다. 너는 재미가 없어. 그런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
“건우라합니다.”
“음? 건우?”
“저를 아십니까?”
“내가 진염결을 아는데 건우란 이름을 모르겠느냐?”
“저를 아신다니······.”
건우는 혹시 그가 완합종에 속했던 수사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영체기의 완합종 수사라면 지금도 여전히 수배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런 이에 대해서 캐물어 좋을 것이 뭐가 있을까.
“클클, 눈치가 있는 아이구나.”
그런 건우의 모습에 뒤에 앉은 영체기 수사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후로 그 영체기 수사는 건우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질문의 대부분은 십이비선의 밀역 혈사 이후에 건우가 어떻게 지냈는지 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건우는 은밀역의 일을 쏙 빼놓고 밀역 혈사에서 빠져나와 세절도에서 수련을 했다는 정도로 이야기를 조합해 냈다.
= 자, 이제 자리가 다 찼으니 전송진을 가동하겠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그렇게 반나절이 지날 무렵, 전송진이 있는 공동에 관리 수사인 영체기 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송진에 앉은 수사들의 좌대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영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연이어 전송진을 이루는 법문과 문양, 선들이 일제히 부풀어 올랐다.
= 다들, 평량에서 좋은 연을 만나거라.
전송진이 부풀어 올랐다 싶은 순간 관리 수사의 덕담과 함께 엄청난 빛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가 한동안 유지되었다.
건우는 이미 전송진의 발동에 대해 주의를 들어서 그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워낙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송될 이들을 특별한 공간에 담는 과정이었다.
안전하고 튼튼한 방을 만들어 그 안에 있는 이들을 평량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대원본성에서 난리가 났다.
* * *
“사, 사라졌다!”
“뭐가?”
“검선의 유산이 조금 전에 다도해역에서 사라졌어!”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 전송진?”
“맞다. 오늘 평량으로 가는 전송진이 열린다. 딱 지금이 그 때다.”
“머, 멈춰야 한다! 검선의 유산이 평량으로 가게 둘 수는 없다!”
“이런!”
십이비선의 유산을 감시하던 수사들이 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은 삼맹과 다도해역수사연합 뿐만이 아니라 회회전에서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당연히 전송진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도 회회전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력은 거리도 멀었지만 회회전과 극염종의 눈치를 아주 안 볼 수가 없으니 윗사람을 모셔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멈춰라! 전송진을 멈춰!”
그리고 유산을 감시하던 회회전의 영체기 수사가 가장 먼저 전송진에 도착한 것이 또 하나의 사달을 만들고야 말았다.
발동중인 전송진을 급히 멈추려다가 공간 이동에 비틀림을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이런!”
뒤늦게 도착한 화신기 수사들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전송진은 망가졌고, 전송되던 이들은 아마도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당장, 전송진을 이용한 자들의 신분을 파악해서 가지고 와!”
“서둘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