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보광(寶光)이 솟고, 배후가 드러나다
보광(寶光)이 솟아올랐다.
건우는 문득 둔술을 멈추고 멀리 솟구치는 보광을 바라봤다.
은밀역의 사막에서 출발한 건우는 열흘을 달려 막 사막을 벗어난 참이었다.
그런데 목적지 방향에서 보광이 충천하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은밀역의 보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것이 아니면 어쩌면 영계로 비승하는 수사의 기운일지도 모른다.
건우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보광의 정체를 구경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또 서둘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면 어디서 화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난리가 나겠군.’
어쨌거나 은밀역에 들어와 있는 수사들이 너나없이 보광을 향해 몰려 들 것은 불을 본 듯 뻔했다.
건우도 이전보다 더욱 주변을 살피는데 신경을 쓰며 다시 둔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정도를 더 나아가자 드디어 다른 수사들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서로를 알아차렸지만 최대한 충돌을 피해서 움직였다.
당장은 보광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긴 것이다.
게다가 보광이 솟구친 상태에서 은과문의 지도 따위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지도를 모으겠다고 싸울 이유도 없는 셈이다.
‘생각보다 은밀역에 들어온 수사들이 많군. 축기기 수사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성단기야. 영체기나 화신기는 내가 알아차리기 어려우니 알 수 없고.’
보광에 가까워질수록 수사들의 수는 많아지고, 당연히 서로간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때문에 간혹 신경질적인 영기 파동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가까워지는 상대에게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광을 향해 몰려드는 형국에서 자신의 주변만 수사가 없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다보니 결국 수사들끼리 뭉치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안녕하신가.”
건우에게도 그런 의도로 다가오는 수사가 있었다.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장년 수사 하나가 건우를 찾아온 것이다.
“요족 수사께서 저에게 볼 일이 있으십니까?”
건우는 다가오는 수사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보고 그렇게 물었다.
검은 수염의 장년 수사는 앞이마에 작은 뿔이 나 있었다.
짧고 뭉툭하게 똬리를 튼 것 같은 뿔의 모양이 뭔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건우는 이마에 똥덩어리 두 개를 달고 있는 것 같은 수사의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하필 뿔의 색까지 누런색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보광에 가까워질수록 수사들이 서로 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함께 할 분을 찾지 못했지요. 그건 수사께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그러니 함께 움직이자고 제안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어찌 믿고 함께 움직이자는 것입니까?”
“하하하. 사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뢰를 바라겠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되지요.”
“그럼 무슨 이야깁니까?”
“함께 움직여도 서로 경계하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다만 적이 나타나면 힘을 모아 적을 상대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 중에 뒤통수를 칠 일이야 있겠습니까.”
“수사께서 다른 동료를 숨겨두지 않았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요.”
“하하하. 물론입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서로 잠깐의 동행을 하자는 것인데 그게 문제될 것은 없겠지요. 길우몽이라 합니다.”
“적아섭입니다.”
“적 수사셨군요. 당분간 잘 지내 봅시다.”
건우는 그렇게 말하고 슬쩍 손을 모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적아섭도 마주보고 공수하며 같이 인사를 했다.
이후, 건우와 적아섭은 조금씩 동행의 수를 늘렸다.
보광에 가까워지면서 수사들이 맨 눈으로도 드문드문 보일 정도로 많아져서 수를 늘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건우와 함께 움직이게 된 수사들은 모두가 성단기 초기에서 중기 수준의 수사들로 거대 수도 문파의 제자는 없었다.
다들 홀로 수련하는 산수들로 떠도는 소문을 따라서 은밀역까지 들어온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은밀역에 들어갈 수 있는 은과문 비도에 대한 이야기가 비밀스럽게 나돌았다.
그러다가 그 소문이 확 퍼지면서 은과문 비도가 없이도 은밀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들불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모르게 또 다시 십이비승봉 밀역과 그 안에 있다는 은밀역에 대한 이야기가 다도해역 전체에 퍼진 것이다.
건우는 수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모든 일에 배후가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수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우리도 십이비승봉의 일에 배후가 있음을 짐작합니다. 하지만 위험을 피해서야 보물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우리같은 산수들에게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기연과 같지요.”
“아주 없는 것은 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음모를 꾸미려면 미끼를 던져야 하는 법이지요. 사실 우리야 그 미끼가 목적이지요.”
“그런데도 이렇게 욕심에 눈이 멀어 보광을 쫓아 온 것은 사실 위험한 짓이긴 합니다.”
적아섭을 비롯한 동행 수사들도 배후설을 내세우는 건우의 말을 인정하며 그렇게 말했다.
건우는 그런 수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로불사, 역천의 길에 들어선 수도자가 위험을 피하기만 해서야 어떻게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설 수가 있겠는가.
매 번 쫄보라고 하면서도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은 건우 자신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으음, 잠시 기다리십시오. 앞쪽의 수사들이 이상합니다.”
그 때, 동행중에 하나인 갈 수사가 일행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갈 수사는 자신의 성이 갈씨란 것만 이야기하고 다른 소개는 하지 않은 수사였다.
어차피 이런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모인 동행에 어떤 이름을 쓰건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앞이 막힌 모양입니다.”
갈 수사의 말에 호정 수사도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호정 수사는 요족 중에서도 여우 계열의 남성 수사였다.
“그러네요. 다들 모여서 움직이질 않고 있네요. 우리도 가 보죠.”
다섯 중에 유일한 여성 수사, 주메이 수사가 둘의 뒤를 이었다.
건우와 적아섭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고 훌쩍 몸을 날렸다.
그렇게 다섯 수사가 안쪽으로 다가가자 백색의 성벽이 나타났다.
높이가 10미터 정도 되는 성벽은 아담한 규모로 안쪽에 백옥으로 지은 건물을 보호하고 있었다.
백옥 건물은 기단 위에 여섯 개 씩, 여섯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2층 누각을 올린 모양이었다.
그 모두를 백옥으로 만들었는데, 수사들은 지금 성벽 밖의 허공에 떠서 백옥 건물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보광은 그 백옥 건물에서 치솟고 있었다.
“으음. 영체기 수사들이에요.”
주메이 수사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슬쩍 한 곳을 바라봤다.
건우도 그녀가 보는 곳에서 한 명의 수사를 발견했다.
그는 성벽에 가장 가까이 있는 수사들 중에 하나였다.
건우는 조금 더 몸을 솟구쳐 위로 올라가서 백옥 건물을 둘러싼 성벽 전체를 눈에 담았다.
이미 건우만큼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수사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건우 곁으로 동행들이 모두 따라 붙었다.
“아, 영체기 수사가 여섯 명이나 있네요.”
주메이가 성벽을 따라서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는 수사들을 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백색 성벽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영체기 수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뭘 하는 거지?”
적아섭이 궁금한 듯이 중얼거렸지만 답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런 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수사들을 찍어 누르는 듯한 압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건우는 급히 몸을 피해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동행들은 물론이고 다른 수사들 역시 분분히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 깜냥도 모르는 것들이 아니냐.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들 몰려드는 것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마치 불꽃에 뛰어들려는 하루살이 같지 않습니까.”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있는 수사들 중에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온 세상을 찍어 누르며 등장한 두 사람.
그들은 건우도 익히 아는 령령 수사와 능염선자였다.
“크, 큰 스승님들을 뵙습니다.”
“서, 선배님을 뵙습니다.”
“인사드립니다.”
그 순간 땅바닥에 내려섰던 수사들이 일제히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건우도 분위기를 살피며 모두를 따라서 땅에 엎어졌다.
‘젠장!’
그렇게 모든 수사의 인사를 받은 두 화신기 수사는 고개를 들어 한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서 회회전의 화공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공공은 여전히 거대한 장미꽃 위에 앉은 모습이었지만 주변에 다른 회회전 수사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은밀역의 비처에서 모두 만나게 되었군.”
화공공이 령령과 능염선자를 보며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3:1로 싸웠어도 동수를 이루었던 상대인데, 지금은 둘 밖에 없으니 이전보다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화사갈! 여기서 또 보는구나.”
령령이 화공공을 매섭게 노려봤다.
사갈(蛇?)은 뱀과 전갈처럼 독한 여자란 의미로 쓰이는 말이었다.
“령령 수사, 진정하세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랍니다.”
그런 령령 수사를 능염선자가 말렸다.
그리고 사갈이란 욕을 들었음에도 화공공 역시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대치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건우는 그런 모습에 뭔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 허공에 또 다른 수사 하나가 먹빛 둔광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조금 늦었나?”
그는 이전에 화공공과 맞서 싸웠던 다도해역의 세 화신기 수사 중에 하나인 요족수사였다.
“어서 오세요. 미우천왕(眉宇天王).”
능염선자가 웃는 얼굴로 그 요족 수사를 반겨 맞았다.
미우천왕은 그 이름처럼 눈썹이 몹시 길어서 마치 처마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요족 수사였다.
하지만 그의 본신이 어떤 종족인지는 아는 이들이 없다고 했다.
“자, 내가 왔으니 이제 상황을 정리하지.”
미우천왕은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서 품에서 뭔가를 꺼내 앞으로 던졌다.
손에 꼭 들어갈 정도로 작았던 것을 내던지자 곧 부풀어 올라서 커다란 쇠우리로 변했다.
그리고 그 우리 안에는 건우도 잘 아는 수사 하나가 갇혀 있었다.
그는 유운이었다.
“그 자인가요?”
능염선자가 물었다.
“그렇다. 십이선문의 마지막 제자놈이지.”
“저 놈이 이번 사달을 일으켰다고?”
미우천왕의 말에 령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렇다.”
“겨우 성단기 초기에 불과한 놈이?”
“그렇다.”
“그런 놈이 오래 전에 죽은 녹림도의 장로를 이용해서 십이비승봉에 녹림도를 끌어들이고, 그 이야기를 퍼트려 완합종을 움직이고, 또 그걸 이용해서 다도해역 전체의 수사들을 들썩이게 했다고?”
“그렇다.”
“겨우 저 놈의 줄에 매달려 우리와 저 화사갈이 춤을 췄다는 말이네?”
우우우우웅.
령령의 질문과 미우천왕의 짧은 대답이 오고간 후, 령령의 몸에서 엄청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찮은 수사에게 농락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하지만 령령의 영기는 유운을 가둔 쇠우리에 막혔다.
“아직 아니다. 저 놈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미우천왕이 손을 저어 쇠우리의 기운을 한층 보강하며 말했다.
유운은 쇠우리 안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태연한 얼굴로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 놈이 보궁의 열쇠를 가지고 있구나?”
그 때, 화공공이 미우천왕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유운이 감았던 눈을 뜨고 화공공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