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이번 일에도 배후가 있어?
“도대체 어떤 놈이 장기로를 죽였단 말인가. 내가 다 잡아 놓은 것을!”
허빈자가 버럭 성질을 내며 발을 구르더니 둔술을 펼쳐 훌쩍 사라져 버렸다.
“아? 그냥 가 버리면 곤란한데?”
건우는 급히 아공간 밖으로 나가 허빈자를 쫓으려다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에는 허빈자가 어딘가 숨어서 상황을 살피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심성 없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건우는 경솔한 자신의 태도를 자책하며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이거나 좀 살펴보자.”
건우는 장기로의 공간낭에서 은과문(銀鍋文)이 가득한 피지(皮紙)를 꺼내 들었다.
무슨 가죽으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지만 가죽은 무척 부드러웠고 강한 영기가 깃들어 있어 질기기까지 했다.
“루야, 이거 해석 좀 해 봐.”
건우는 곧바로 루야에게 피지를 내밀었다.
은과문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듯이 쉬지 않고 조금씩 모양이 바뀌고 있었다.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가 많은 뜻을 담고 있었고, 그것이 또 다른 글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 알았어요. 어디 봐요. 음, 그러니까 이런 거네요.
[우리 열두 수사들은 뜻을 모아 십이선문을 열었다. 이곳 밀역은 십이선문의 본산이며 은밀역은 십이선문의 금지로 허락받은 제자만 출입이 가능하다.]
“뭐? 그러니까 십이비승봉 밀역이 원래는 십이선문이라는 수도문파가 있던 곳이라고?”
- 네, 그렇다네요.
“계속 읽어 봐.”
[우리 열두 명이 드디어 영계 비승의 길을 열 수 있는 공법을 창안하고 그것을 시험하다 비승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비승의 기회를 어찌 놓칠 것인가. 제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고 비승을 하게 되니, 후에 남을 십이선문의 앞날이 걱정이다.]
“그러니까 수련 공법을 창안해서 익히다가 영계로 올라갈 기회를 얻었다는 거네? 그리고 그걸 미루기 아쉬워서 그냥 올라가기로 한 거고?”
- 네, 맞아요.
“도대체 어떤 공법인지 정말 궁금하네.”
건우는 쉽게 영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수련 공법이 무척 궁금했다.
영계로 비승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탈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건우도 당장은 그 경지에 대해서는 감도 잡지 못하는 상태지만, 어쨌거나 공법이 있다면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이에 우리는 제자들을 위해서 비도를 남기고 제자들이 우리의 뒤를 이어 영계 비승의 꿈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그게 끝이야?”
- 사설은 이게 끝이고요. 그 다음에는 은밀역 지도가 들어 있어요.
“지도?”
- 네. 그런데 지도가 음 일부만 나와 있어요.
“지도의 일부? 그래서 비도 조각이라고 한 건가?”
- 그건 거 같아요. 그런데 이거 지도를 일부를 지운 거 같은데요?
“지도를 일부러 지웠다고?”
- 네, 맞아요. 원래 온전하게 있던 내용을 지우고 일부만 남긴 거 같아요. 그리고 이 피지 자체도 복사품이고요.
“피지도 복사품이라고?”
- 보세요, 이게 십이비선들이 남긴 거라면 정말 오래 되었을 텐데요, 이 피지는 그렇게 오래 돼 보이진 않잖아요.
“음, 어디······.”
루야의 말에 건우가 은과문 피지를 손에 들고 의념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피지 안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건우는 은과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니 글자가 영상처럼 떠올라도 그림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그림들 너머에 있는 은밀역의 지도는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피지를 살피던 건우는 루야의 말처럼 피지에 뭔가 수작이 가해진 것을 알았다.
“이거 오래 된 거 맞다. 그런데 거기에 근래에 내용을 수정한 것이 있네. 수정이라기 보다는 지웠다는 것이 맞겠지만.”
건우는 피지 자체는 아주 오래 된 것임을 알아보았다.
피지에 담겨 있는 영기로 그 세월을 짐작해 본 것이다.
다만 근래에 그 영기들이 훼손된 부분이 많았다.
“누가 이 피지를 수정해서 뿌렸다는 이야기군.”
건우가 중얼거렸다.
- 왜 그랬을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이곳 이 은과문 피지는 원래 한 장으로 완성된 형태였을 거야. 십이선문의 제자들에게 굳이 내용을 나눠서 보관하게 하지는 않았을 거 같아.”
- 제자들 여럿에게 같은 내용을 나눠준 거라고요?
“그랬을 거 같은데? 뭐, 나중에 다른 피지를 얻어서 확인을 해 보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
- 어쨌거나 그런 피지를 뿌려서 수사들을 은밀역으로 끌어들인 세력이나 개인이 있다는 소리네요?
“그래, 그런 모양이다. 아무튼 이 노무 세상은 파도파도 끝없이 넝쿨이 이어져 나오는 거 같다니까.”
- 그래서 이젠 어쩌실 거예요?
“어쩌긴, 이 지도로는 은밀역을 벗어날 방법을 알 수 없으니, 다른 피지를 찾거나, 그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 욕심은 안 내시고요?
“미쳤냐? 허빈자도 버거운 마당에 영체기나 화신기? 그건 장작불에 뛰어드는 하루살이 짓이나 마찬가지지.”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슬그머니 상황을 살피고 아공간 밖으로 나섰다.
* * *
펑! 펑펑펑! 화르르르륵!
“커어억!”
“이런 젠장!”
사방으로 화염구가 날아가고, 일정 부분의 허공에 붉게 타올랐다.
그 속에서 수사 둘이 비명을 지르고 욕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둔술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길우몽은 그런 수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뒤따르며 연이어 불덩이를 날렸다.
“수, 수사. 우리가 잘못했으니 이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깡마른 육십대 노인 수사와 삼십대 외모의 장년 수사가 보호 법기와 술법을 이용해서 길우몽의 화염 공격을 막아내며 애원을 했다.
하지만 길우몽은 그들의 말을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연신 팔찌를 번뜩이며 화염구와 화염공간을 만들어 냈다.
컹컹컹컹! 크와앙!
그런 중에 멍뭉이도 이리저리 번뜩이며 두 수사의 퇴로를 막아내고 있었다.
축기기 완경에 불과한 멍뭉이지만 쫓기는 성단기 수사들을 귀찮게 할 정도는 되었다.
쒜에에에엑! 피이잉!
그런데 어느 순간 뒷골을 섬뜩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검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으와앗!”
장년 수사가 단검이 날아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금빛을 머금은 손을 휘둘렀다.
그는 오른손에 황금색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무척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까아앙!
지금도 그는 황금색 손으로 건우가 기습적으로 날린 단검을 가볍게 튕겨 내었다.
하지만 건우가 날린 단검은 건우가 새로 연화한 중급 법기였다.
장년 수사가 단검을 쳐 냈을 때,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기운이 장년 수사의 아랫배로 스며 들었다.
푸우욱!
“어억? 이, 이게 어떻게?”
장년 수사는 자신의 아랫배에 박힌 단검이 조금 전에 쳐 낸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길우몽의 모습을 한 건우는 그런 궁금증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시 왼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걸린 팔찌가 번뜩이며 장년 수사의 주변을 온통 화염으로 뒤덮었다.
“끄아아아악!”
불에 타서 죽는 소사(燒死)의 고통에 장년 수사가 비명을 질렀다.
케에에엥!
그 사이에 멍뭉이는 노인 수사의 공격을 받고 멀리 튕겨 나갔다.
건우가 장년 수사에게 잠시 몰두한 사이에 어떻게든 몸을 빼려다가 멍뭉이의 방해를 받고 부딪힌 것이다.
“죽어라!”
건우가 다시 빈 손을 허공에 저었다.
그러자 예의 그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단검이 날아갔다.
쒜에에에에에엑! 피이잉!
“내가 같은 수에 당할 거 같으냐?”
늙은 수사는 장년 수사가 당하는 것을 보았던 터라 숨겨진 단검을 겁내며 크게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피한 곳에는 건우가 날린 화염구가 세 개나 들이치고 있었다.
늙은 수사가 몸을 피할 곳을 미리 예상하고 화염구를 날린 것이다.
“이, 이런!”
늙은 수사가 깜짝 놀라며 등에 지고 있던 지우산 하나를 허공으로 띄웠다.
지우산은 하얀색의 빛을 뿜으며 늙은 수사의 몸을 가리는 장막을 펼쳐냈다.
건우가 그것을 보고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그리고 곧바로 품에 손을 넣어 아공간에서 자루 하나는 꺼냈다.
주둥이가 좁고 통이 넓은 가죽자루였다.
건우는 그 늙은 수사를 향해 자루의 입구를 내밀며 법문을 외웠다.
그러자 자루의 입구가 열리며 지우산 법기를 향해 수십 개의 갈색의 영기가 뻗어갔다.
“뭐? 뭐냐?”
늙은 수사가 놀라서 다급하게 영기를 끌어 올릴 때는 이미 자루에서 나간 영기 가닥이 지우산을 옭아 맨 상태였다.
“빼앗길 거 같으냐!”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더욱 영기를 거세게 뿜어냈다.
그리고 그 때, 건우의 손에 있던 자루가 지우산으로 날아가 거대하게 변했다.
포옥!
순식간에 지우산을 삼켜버린 자루 법기.
“아, 안 된다!”
노인이 있는 힘껏 의식을 강화하고 영기를 뿜어 지우산과의 연계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건우는 그 모습을 비웃으며 슬쩍 오른손을 흔들었다.
쒜에에에엑! 피이잉!
푸욱, 푸욱!
“커어억, 이런 개 같은!”
늙은 수사가 몸에 박힌 두 개의 단검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보다가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건우는 곧바로 자루 법기를 수습하고 불에 타서 죽은 장년 수사와 단검에 맞은 늙은 수사를 각각 확인하고 그들의 소지품을 수거했다.
“수도계가 비정하다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수사를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거리낌 없이 나를 죽여 내 재물을 취하려 했으니 이리 죽는 것도 억울해 할 것은 아닙니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두 수사의 공간낭에서 피지 조각 하나씩을 꺼냈다.
그리고 의식을 집중해 그것을 살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같은 것이다. 다만 지도 부분만 다를 뿐이다. 누군가 지도 부분만 다르게 지우고 피지를 퍼트렸다.”
키이이이잉!
건우가 그렇게 은과문 피지를 살피는데 한쪽에 쓰러져 있던 멍뭉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비척비척 건우에게 다가왔다.
“쯧, 애썼다.”
건우는 그런 멍뭉이에게 요상용 단약 하나를 던져주었다.
멍뭉이는 날아오는 단약을 삼키고는 몸을 작게 줄였다.
이전보다 훨씬 작게 몸을 줄일 수 있게 된 멍뭉이는 이제 중형견 정도의 크기까지 작아질 수 있었다.
“들어가 있거라. 필요하면 또 부를 테니.”
건우는 멍뭉이를 아공간으로 보내고 머릿속에 은밀역의 지도를 떠올렸다.
장기로의 것과 지금 얻은 두 장.
그 세 장의 피지 조각에 있는 지도는 마침 서로 연결이 되어서 어느 정도 은밀역의 지형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대충 은밀역의 요지(要地)가 있는 방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건우가 있는 곳이 사막이라는 특수한 지형이라서 방향을 정하기가 쉬웠다.
은밀역의 사막은 한 곳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가 보자. 위험하면 어떻게든 아공간에 숨지 뭐. 그것도 못하고 목이 떨어지면 그건 또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장 은밀역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한적한 곳에 숨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소소하게 전리품을 챙길 일도 있으니 발품을 파는 의미도 있다.
건우는 자루 법기를 들고 안에 들어 있는 지우산 법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자루 법기가 조금씩 지우산에 담긴 의념을 지워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루 법기는 상대의 법기를 삼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의념을 지우는 기능도 있었다.
이대로 두면 오래지 않아서 늙은 수사의 의념이 모두 지워져 연화하기 쉬운 상태가 될 것이다.
건우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장년 수사의 황금색 장갑을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그것 역시 장년 수사의 의념이 깃들어 있어 시간을 내서 연화를 해야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강대한 의념을 지닌 건우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으읍.”
건우는 심호흡을 하고 피지의 지도 내용을 떠올리며 둔술을 펼쳐 청광을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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