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어라 장기로? 응? 또 장기로?
- 결국 나가시는 건가요?
루야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컹컹컹!
멍뭉이 역시 지금은 때가 아니란 듯이 건우를 말렸다.
하지만 건우는 밀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공간이 화신기 수사의 탐색에도 걸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이쯤이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기습을 당해서 한 순간에 꼼짝달싹 못할 상황만 아니라면 언제든 아공간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게다가 의식만 깨어 있다면 제 한 몸을 아공간에 넣는 것이야 숨 쉬듯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것까지 막아버리는 수법이 나온다면, 그건 자신의 운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쫄보처럼 웅크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나 간다.”
건우는 결국 말리는 루야와 멍뭉이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도 역시 복장은 청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장삼에 길우몽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건우는 아공간 밖으로 나오자마자 의식을 최대한 펼쳐서 이상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건우의 의식에 걸리는 이상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석실 통로 안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움직임이 조심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
석실 통로를 따라서 움직이던 건우의 걸음은 십이각의 면을 가진 넓은 석실에서 멈췄다.
건우는 석실로 들어가지 않고 눈과 의념으로만 그 공간을 파악했다.
그 결과 건우가 들어온 통로와 같은 통로들이 열두 방향으로 뚫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아니 밀역 밖으로 나갈 길이 있기는 한가?”
건우는 의념을 최대한 펼쳐봤지만 역시 뭔지 모를 힘에 석실 통로 어디쯤에서 의식이 막혔다.
“어디 보자.”
건우는 토속성 영근에서 영기를 끌어내어 석실 벽을 통해 구조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식 탐지에는 걸리지 않던 것이 보였다.
석실의 바닥, 십이각 평면 밑에 복잡한 술법 문양과 글자들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천정 중앙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영석들이 여럿 숨겨져 있었다.
“미쳤군. 상급 영석들을 저렇게나 많이 썼다고?”
건우가 천정을 바라보며 눈빛을 빛냈다.
하지만 천정에 숨겨진 영석을 뽑아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 영석들은 이곳만이 아니라 십이비승봉 밀역 전체의 금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이곳 공간 전체에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지금 건우가 있는 곳이 바로 십이비승봉 밀역 전체 금제를 이루는 축들 중에 한 곳이 아닌가.
그것도 다른 축들과는 달리 은밀역(隱密域)이라는 곳으로 들어갈 통로까지 있는.
“응?”
그 때, 건우에게 다른 쪽 통로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성단기 수사 같은데? 축기기도 있고.”
건우는 잠시 고민하다 급히 아공간 안으로 몸을 감췄다.
- 누가 온다고요?
“그래, 성단기 수사가 축기기 몇과 함께 오고 있어. 어, 왔다.”
건우가 루야의 말에 대꾸하며 아공간 밖을 바라봤다.
그곳에 건우도 아는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저거 장기로잖아요.
루야가 바로 그 수사를 알아봤다.
검은 장삼에 해골을 꿴 목걸이를 걸고 있는 어두운 안색의 수사.
건우 역시 장기로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갈군모의 모습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숙,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석실 중앙에 도착한 장기로와 갈군모 일행.
장기로와 갈군모 이외에도 축기기 제자 둘이 더 있었지만 건우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통로가 여기로 통할 줄은 몰랐군. 으음, 어디 보자.”
장기로는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듯이 품속에서 피지를 꺼내 들여다 보았다.
가죽으로 만든 종이인 피지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문자들이 복잡하게 아롱거리고 있었다.
건우는 그것이 아주 오래 된 수도계의 문자임을 알아봤다.
- 저거 알아요. 인계에선 거의 쓰는 일이 없는 은과문(銀鍋文)이에요.
“맞다. 그거네 솥 모양을 바꾸어서 글자로 만들었다는 그거.”
- 네네. 그거예요.
“읽을 수 있어?”
- 전부 보이는 건 아니니까 보인 것만 기억해 뒀어요.
“그래서 내용이 뭔데?”
- 정확하진 않아요. 아시잖아요. 은과문에서 모르는 글씨가 많아요.
“쯧.”
- 그래도 어느 정도 해석한 걸 말씀드리면 이래요. 진의 중추, 들어가다 뭐 그런 거요. 다른 글씨들은 워낙 앞 뒤가 잘려서 해석이 너무 많아요.
“결국 장기로 저 놈도 십이선의 보물을 찾아 왔다는 소리네?”
- 그야 당연하겠죠. 그게 아니면 여기 나타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저 놈 깜냥에 그게 되나? 겨우 성단기 주제에 영체기와 화신기가 설치는 곳엘 들어와? 욕심에 눈이 멀었나?”
건우가 그렇게 걱정을 할 때였다.
“그런데 사숙, 정말 괜찮겠습니까?”
갈군모가 장기로를 보며 물었다.
“뭐가 걱정이란 말이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십이선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 나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른 수사들이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어허, 그럴 일은 없다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언제까지 계속 나를 사숙이라 부를 참이냐?”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래, 그리 부르도록 해라. 이제 여기서 보물을 찾으면 나도 영체기에 올라 개파를 할 것이다. 너는 내 장제자로 내 문파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고.”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너도 알겠지만 기댈 곳이 없는 산수의 입장이란 항상 곤궁하다. 제자가 많고 번성한 문파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지 않느냐. 내가 영체기에 올라 개파를 하면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인 즉, 너는 그런 문파의 대사형이 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러니 잔말하지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준비나 하거라.”
“네, 스승님.”
장기로와 갈군모는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는 곧바로 뭔가를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간낭에서 영석과 검은 말뚝들을 꺼냈다.
갈군모는 장기로의 명령에 따라서 바닥에 검은 말뚝을 푹푹 박아 넣었고, 장기로는 그 말뚝 머리에 중급 영석을 내려 놓았다.
검은 말뚝 머리에 올려진 영석은 금새 말뚝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대신에 말뚝에서는 흉흉한 사기(邪氣)가 흘러나왔다.
“되었다. 모두 모이거라.”
그리고 준비가 끝나자 장기로가 갈군모와 두 축기기 제자를 석실 중앙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장기로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 올라 석실을 가득 채우더니 일순간 섬광이 튀었다.
그것도 검은 빛이 번뜩이는 섬광이었다.
“사라졌군.”
건우는 곧바로 석실의 상황을 알아봤다.
장기로가 석실의 전송진을 발동시킨 것이다.
“곤란하네. 수정패에 기록되어 있던 전송진이 아니야. 완전히 달라졌어. 령령과 능염선자가 밀역 밖으로 나가는 전송진을 지워버렸어. 대신에 은밀역으로 가는 전송진을 활성화 시킨 거야.”
- 그런데 장기로는 어떻게 은밀역으로 가는 전송진을 발동한 걸까요? 역시 그 은과문이 적힌 피지가 답일까요?
“내가 보기에 그 놈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모르고 온 거야. 밀역 밖으로 나가는 전송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거 같았잖아. 그냥 은밀역으로 가는 전송진만 발동하고 사라졌어.”
- 거기다가 이미 그 쪽에 화신기 수사가 셋이나 들어간 것을 모르고 있었죠. 회회전의 다른 수사들도 많이 들어갔는데, 그것도 모르고요.
“아마 반대쪽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다면 크게 낭패를 봤겠지. 하지만 어쩌면 저 전송진이 무작위 전송이면 상황이 나을 수도 있을 거야. 나도 그걸 기대하고 있고.”
- 에? 저길 들어간다고요?
“장기로가 전송진을 발동하는 방법까지 알려줬는데 못 들어갈 것이 뭐야?”
- 위험하다고요!
“아까도 위험했는데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어차피 밀역 밖으로 나가는 전송진은 사라지고 없어. 내가 여기서 그 전송진을 되살릴 수 있을 거 같아?”
-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장기로 따위가 여길 왔는데 다도해역의 다른 수사들이 은밀역에 대한 것을 모를 거 같아? 수도계는 비밀이 넘치지만 또 그게 쉽게 지켜지지도 않지.”
- 다른 사람들이 여길 또 온다고요?
“은밀역에 대한 이야기를 장기로만 알았을 거 같지는 않거든.”
- 뭐가 그래요? 또 한 바탕 난리가 난다고요? 저번 혈사 이후로 겨우 10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요?
“뭘 그런 걸 물어? 이놈의 대천세계 수도계에 피가 마를 날이 있기나 하겠어? 아무튼 나도 가 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건우는 조심스럽게 아공간 밖의 기척을 살피고 석실로 나갔다.
장기로와 갈군모가 박아 넣었던 검은 말뚝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건우는 그것들을 한 번은 다시 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의외로 전송진을 작동시키고도 중급 영석의 기운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사람 숫자에 따라서 쓰이는 영기의 양이 달라서 그런 거군. 이 정도면 나 하나 정도는 충분하겠어.”
건우는 판단이 서자마자 곧바로 영기를 끌어 올렸다.
원래 건우가 지닌 팔영근으로 장기로와 같은 사기(邪氣)를 뿜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한민 장로가 남긴 흑색 옥간에는 사기(邪氣)나 독기(毒氣), 마기(魔氣) 따위를 사용하는 술법들이 제법 있었다.
그 덕분에 건우도 무속성 영기를 변형시켜 그 술법들을 사용하는 수법을 익혀 두었다.
영근의 지원 없이 무속성 영기를 다른 속성 영기로 바꾸면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
당연히 건우가 무속성 영기를 사기(邪氣)로 바꾸는 과정에서 낭비가 심해졌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 하다.
건우의 의념 공간은 같은 성단기 수사에 비해서 수십 배는 넓다.
그리고 의념이 강하다는 것은 곧 활용할 수 있는 영기의 양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우우우우우우!
사기(邪氣)를 품은 건우의 영기를 받고 검은 말뚝들이 울부짖었다.
건우는 그 말뚝들의 반응에서 장기로가 혼을 다루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말뚝들에서 미약한 혼의 울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혼을 소모품으로 써먹었군.’
윤회에 들지도 못하고 구천을 떠돌다가 소멸할 망령들을 잡아 쓴 것이 분명했다.
한민 수사의 흑색 옥간에도 비슷한 법술이나 비전이 있었다.
건우가 그렇게 말뚝의 반응을 살피는 가운데 장기로가 만든 말뚝 진이 건우의 영기에 반응했다.
스화홧! 쿠릉!
이번에도 검은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은은한 뇌성이 울리며 건우가 석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그 후, 십이비승봉 곳곳에서 통로를 타고 십이면(十二面) 석실로 다도해역의 수사들이 수시로 몰려들었다.
운이 좋은 이들은 다른 무리를 만나지 않고 전송진을 발동시켰고 운이 나쁜 이들은 다른 무리를 만났다.
다른 무리와 마주친 이들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힘을 모아서 전송진을 발동시켰다.
그렇게 다시 십이비승봉의 은밀역(隱密域)으로 피바람의 전조가 깔리기 시작했다.
* * *
“역시 무작위 전송이었나?”
건우가 드넓은 사막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전송진을 통해 도착한 곳이 이곳이었다.
“으음. 수정패에도 은밀역에 대한 내용은 없군.”
건우가 입역패인 수정패를 꺼내 확인했지만 이전과 달라진 내용은 없었다.
새로운 곳에 들어왔으니 숨겨진 내용이 드러나지 않을까 했는데, 이제 더는 숨겨진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건우는 수정패를 품에 갈무리하고 다시 의식을 최대한 펼쳐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수백 킬로미터까지 펼쳐지는 의식에 특별히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선택의 여지도 없네. 그냥 한 방향으로 움직여 볼 밖에.”
건우는 사막의 태양을 등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은밀역에서 둔술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아쉬운 것은 비행 법기는 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비행 법기에 대한 금제가 은밀역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쉬지 않고 둔술을 펼쳐 며칠을 갔을 때, 건우는 제법 먼 곳에서 터지는 영기의 폭발을 감지했다.
“뭐지? 장기로 일행이 회회전 수사와 싸우나?”
영기의 파장이 화신기의 충돌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건우는 기본적인 은신술법으로 허공에 몸을 감추고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대로 장기로 일행을 만났다.
하지만 장기로 일행과 싸우고 있는 이들은 회회전의 수사가 아니었다.
의외로 장기로는 허빈자와 다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