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63화 (63/499)

63. 유운 수사? 난 길우몽이오

“담도 크십니다. 수도계에서 감히 타인의 행사를 그리 엿보는 짓을 하시다니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공간.

건우는 그곳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각진 얼굴에 양쪽 입꼬리가 쳐져 있어서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날카롭게 째진 눈이 사납게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팔다리가 굵어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허허허. 이거 참,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은신이 들킨 것을 알아차렸는지 비어 있던 허공이 꿈틀거리며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이며 눈썹, 수염까지 모두 하얗게 물들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늙은 모습의 수사였다.

그가 입은 거친 삼베옷은 금방이라도 논밭으로 나가서 김이라도 멜 인상을 주었다.

건우는 그가 축기기의 수사임을 알아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경지인 축기기 후기이거나 성단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축기기 완경일 것이다.

후기와 완경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다만 후기의 끝에 이르러 다음 경지를 바라보는 상태를 완경이라 할 뿐이다.

“그래, 무슨 생각으로 남의 일을 엿보고 있었습니까?”

건우는 모습을 드러낸 삼베옷 수사를 향해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강한 추궁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사실 이 일은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저 십이비승봉 밀역의 곳곳을 구경하던 중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득 강력한 영기 파동이 느껴졌는데 와 보니 수사께서 저 두 수사를 죽이고 계시더군요.”

삼베옷 수사가 특별한 의도가 없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어쨌거나 남의 행사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허허허.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영혼을 걸고 이곳에서 봤던 것을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 말입니다.”

“영혼을 걸고 약속을?”

건우가 늙은 수사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혼 금제는 무척 강력한 수법이다.

일단 영혼에 금제를 걸고 약속을 하면 그것을 어길 일은 거의 없다.

약속을 어기면 영혼에 큰 타격을 입게 되고, 그렇게 되면 수행이 퇴보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폐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경지가 높아지면 낮은 경지에서 걸었던 영혼 금제를 풀 수도 있다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만큼 영혼 금제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제가 실수를 했으니 그 정도는 되어야 수사께서도 안심을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허허허. 저는 믿기 어렵겠지만 영혼 금제는 믿을 수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수사와 제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겠습니까?”

늙은 수사는 자신이 충분히 양보했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상을 요구하면 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내비췄다.

결국 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건우의 모습은 본래 모습도 아니니 공여려와 장무기를 죽인 것이 건우란 사실은 들키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공여려와 장무기에게 본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 때, 눈앞의 늙은 수사는 뒤쪽에 있었으니 건우의 본모습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비슷한 경지의 수사와 목숨 걸고 싸울 일은 없다.

“좋습니다. 그 영혼 금제를 제가 거는 것에 동의하신다면 일을 그쯤에서 마무리 하지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며 손끝에서 검은 색의 영기를 피워 올렸다.

한민 장로의 검은색 옥간에서 익힌 영혼 금제 술법이었다.

“수사께서는 이곳에서 저 두 수사와 제가 얽혔던 모든 일을 어떤 형태로든 발설치 않겠다고 영혼을 걸고 약속하시겠습니까?”

“으음. 좋습니다. 그렇게 약속하겠습니다.”

늙은 수사는 건우가 피어올린 검은 영기를 꼼꼼하게 의식으로 확인하고는 그렇게 약속했다.

그리고 건우가 보내는 검은 영기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늙은 수사는 그 검은 영기에 약속된 이외의 수작이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건우도 늙은 수사가 자신의 금제를 거부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이는지 꼼꼼이 확인하며 영혼 금제의 약속을 완성했다.

“휴우, 이제 되었습니까?”

영혼 금제가 끝나자 늙은 수사가 건우를 보며 물었다.

“되었습니다. 의외로 수사께서는 화통한 면이 있습니다 그려.”

“끄응, 내 실수로 벌어진 일이니 그 책임을 진 것뿐입니다. 하지만 수사.”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내가 수사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수사가 그리 막되 먹은 인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젠, 저를 두고 평가를 하십니다 그려?”

“보통의 경우라면 제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른 척 하다가 기습을 했겠지요. 그런데 수사께선 그래도 대화로 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요?”

“그러니 수사께서 마인이나 악인은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럼에도 저는 수사께서 조금은 손속에 자비를 담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은 저기 죽어 있는 년놈들을 보고 하는 말입니까?”

“으음. 제가 수사와 저들이 얽힌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뭐라 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수도계가 점차 비정해지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하하.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까?”

“대도(大道) 무정(無情)은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말이지만 그것이 꼭 정답은 아닙니다. 수사가 어찌 혼자서 대도를 걸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지금 이 십이비승봉에 다도해역의 수많은 수사들이 몰려드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이 모두 선배 수사들이 남긴 유진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도해의 수많은 수사들이라······.”

건우는 늙은 수사의 한 마디에서 지금 이 밀역에 엄청난 수사들이 몰려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녹림도의 행사가 다도해역 전체에 알려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건우 자신도 그렇게 들어온 산수(散修)인 척 하면 될 것 같았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일입니다. 다도해역의 수도계가 가물게 된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만큼 수사들의 수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3만년 전에 이곳 밀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수사들이 되돌아오지 못하면서 다도해역 전체의 수준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말이 길어지십니다.”

“어허, 조금만 더 들으세요.”

“뭐? 뭐라고요?”

“이는 중요한 말입니다. 수사 한 명의 인식 변화가 뭐가 중요하냐 하겠지만 한 명, 한 명의 인식이 바뀌면 결국 수도계 전체의 인식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뭐, 전도사인가?

건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에게 수사의 뜻을 강요하는 것입니까? 대도 무정을 버리고 서로 돕는 분위기를 만들자, 뭐 그런?”

“허허허. 영민하십니다. 바로 그겁니다. 수사도 아시지요?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수사께서도 혼자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다른 수사의 도움이 없다면 무엇을 이루겠습니까? 지금 이 밀역조차도 선배 수사들의 도움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그것 참. 누가 그걸 모릅니까? 하지만 이 수도계에서 도대체 누굴 믿는다는 겁니까?”

건우는 늙은 수사의 주장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사귀다보면 가까워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됐습니다. 영혼 금제로 수사와 저의 일은 마무리가 되었으니 서로 제 갈 길을 가면 될 일입니다. 저는 밀역의 보물들을 더 찾아야 하니 이만 헤어지지요. 수사도 이리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허허허. 저야 보물들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성단은 요원하니 이번에 밀역 구경을 하다가 조용히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뭐라고요?!”

“아, 저는 유운이라 합니다. 짧은 인연이라도 서로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 참, 묘하게 질척거리는 분이십니다. 저는 길우몽(吉愚夢)이라 합니다.”

건우는 급히 가명을 만들어 유운에게 알려주었다.

“우몽 수사였습니까? 허허허 반갑습니다.”

“반가울 게 뭐가 있습니까. 이제 헤어지면 다시 보기도 어려울 텐데.”

“허허허. 그건 그렇지요. 그러니 당분간 함께 다니시지 않겠습니까?”

“뭐요?”

“제가 우몽 수사의 일을 다른 이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사가 보물을 찾는데 도움을 드리지요.”

“도움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허허허. 사양하지 마십시오. 보물을 찾더라도 제 몫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유운 수사의 제안이 몹시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입니까? 어느 수사가 보물에 관심이 없답니까? 그것도 이런 밀역까지 찾아 들어온 수사가 말입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제 곧 죽을 몸입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난 참입니다. 아마도 이곳 밀역이 제 마지막 종착지가 되겠지요.”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수사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났지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렸답니다. 자자, 우몽 수사. 내 필요하다면 영혼을 걸고 다시 약속을 할 테니 함께 다닙니다. 사실 마지막 가는 길에 벗이라도 한 명 사귀면 좋을 거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유운 수사!”

건우는 도무지 의심스럽기만 한 유운의 말과 행동이 거북스러웠다.

그런데 굳이 그런 사람과 함께 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자자, 그러면 이렇게 하십시다. 내가 먼저 영혼 금제를 걸겠습니다. 그저 동행이나 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너무 의심스럽다 하시니 만약 보물을 찾게 되면 제게도 조금 부스러기를 나눠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것 참,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운 수사는.”

건우는 당장이라도 유운이란 늙은 수사를 떼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유운에게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동행하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함께 움직이면 수정패의 금선을 이용할 수가 없는 생각이 들자 건우는 단호하게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자, 이걸 보십시오. 이걸 보시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그 때, 유운이 품속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건우가 가진 수정패와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재질이 옥으로 되어 있고, 중앙에 호두알 크기의 수정구술이 박혀 있었다.

유운은 그 패에 영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건우의 수정패가 뽑아냈던 것과 같은 금빛 선이 유운이 들고 있는 패의 수정구슬에서 뻗어 나왔다.

“어?”

“허허허. 어떻습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패를 얻고도 보물을 찾기를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아시겠지만 밀역의 입장패 중에서도 이런 것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운이 좋아 제가 하나를 얻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나에게 보물을 나눠주겠다는 겁니까?”

건우는 정말 놀란 표정으로 유운을 보며 물었다.

금색 선이 있다면 안전하게 보물을 챙길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런데 그걸 자신에게 보여준다고?

“우몽 수사께서 저를 떼어내려 하시니 제가 이렇게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혹시 이미 다녀왔는데 능력이 되지 않아 보물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를 이용해서 보물이 있는 곳까지 뚫고 들어가려는 게 아니냔 말입니다.”

“허허허 의심도 참 많으십니다. 일단 가서 확인을 하시지요. 저도 가 보지 않은 곳입니다. 그리고 위험이 있다면 그것을 뚫는 것도 제가 하겠습니다.”

“그것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유운 수사는.”

건우는 이해할 수 없는 유운의 행동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유운에게서 느껴지는 호감에 내심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자자, 가십시다. 나야 욕심이 없지만 우몽 수사께서는 마음이 급하지 않겠습니까.”

유운이 슬쩍 건우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건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런 유운에게 이끌려 금색 선을 따라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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