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반영세계 가챠는 이제 그만
수도계의 시간은 범인과 다르게 흐른다.
잠깐만 눈을 감았다가 뜨면 며칠, 혹은 몇 달이 훌쩍 흐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건우는 하루하루를 최대한 알차게 보내려 애썼다.
축기기에 올라 수명이 500년 이상으로 늘었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저계 수사일 뿐이다.
수도계에 발을 디딘 이상 불로불사의 목표는 달성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쉴 틈이 없다.
쿨 타임이 차는 대로 반영세계로 들어간다.
그렇게 한 번 들어가면 꼬박 하루가 지나간다.
반영세계에서 한 시간을 보내든, 이틀을 보내 든 상관없다.
매 번 한 번에 하루다.
그래도 건우는 쉬지 않고 반영세계의 문을 두드렸다.
몸과 정신이 허락하는 한.
- 요즘, 건우님 하시는 꼴을 보면 완전히 도박 중독자 같아요. 멍뭉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컹컹! 컹!
반영세계에 들어갔다 나오자마자 루야와 멍뭉이의 말을 들은 건우는 어두워진 안색에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꽤나 벌고 있거든?”
건우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며 공간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 이번에는 그래도 수확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이번에 쓴 하급 영석 값은 해야 할 텐데요?
“걱정 하지 마라. 이거 양금온석(陽錦溫石)이라는 귀한 돌이니까.”
- 그걸 어디 쓰는 건데요?
“연단술과 제련술에 모두 쓰지. 축기 이상의 수련에 도움이 되는 단약, 특히 화속성 영기 계열수련 영단을 만들 때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치가 높은 것은 제련술 쪽이지.”
- 제련술이요?
“돌이잖아. 먹는데 쓰는 것 보다는 법기나 법보를 만드는데 쓰는 게 정상 아니겠냐?”
- 그러니까 법기뿐만이 아니라 법보를 만들 때도 쓴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비싸지. 이거 중급 영석 세 개는 받을 수 있을 걸?”
- 중급 영석이 세 개······.
“하급 영석 하나 써서 중급 세 개면, 자그마치 서른 배나 되잖아. 대박이 난 거지.”
- 하지만 그런 시도를 벌써 몇 번이나 했다는 것이 중요하죠. 공친 경우도 많고요. 전체적으로 따지면 고작 하급 영석 열 개 정도 이득이네요.
“열 개면 많이 번 거지.”
- 그렇죠. 하지만 앞으로 또 얼마나 허탕을 칠지 모른다는 것이 함정이죠.
“뭐, 솔직히 복불복이긴 하지. 하하하.”
건우도 루야의 말을 아주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 건우와 루야가 하는 이야기는 수미산겨자씨의 반영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수미산의 반영세계는 언제든 대가만 지불하면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 어떤 대가를 지불하느냐에 따라서 반영세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달랐다.
최하급은 두 시간 정도, 하급은 네 시간, 중급은 이틀의 시간을 반영세계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영세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영석의 등급에 따라서 일정하지만 반대로 진입하는 반영세계의 위치는 완벽한 랜덤이라는 것.
어떤 때에는 땅 속 깊은 지하수맥 안쪽일 때도 있고, 용암이 들끓는 화산 속일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막 한 가운데가 될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수도자의 수련 거처가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
완전히 복불복.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모든 반영세계에 인적이 없다는 것이다.
인적뿐만이 아니라 식물 이외의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도자의 거처를 발견하면 그곳의 주인을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것을 멋대로 챙겨 올 수가 있었다.
물론 그곳에 위험한 금제들이 가득하다면 그것을 해체하거나 혹은 파괴할 수 있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하면 눈앞에 보물을 두고도 가지고 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건우는 몇 번 반영세계에 드나들며 그런 사실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반영세계로 들어가 일확천금을 노리는 중이었다.
“야, 그래도 따지고 보면 이건 엄청난 기연이라고.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한 번만 터지면······.”
- 네, 그게 바로 도박중독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죠.
“하지만 내가 처음에 가지고 나왔던 것들을 생각해 봐라. 아직 이름도 모르지만 그 엄청난 효능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썼던 영석들이 하나도 안 아깝지. 솔직히 손익 계산에서 뺀 몇 가지를 고려하면 완전히 남는 장사였지.”
- 그래요.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건우님 수련이 완전히 멈춘 건 어떻게 하실 건데요? 벌써 2년 동안 수련이라곤 하나도 안 하고 계속 그 가챠 놀음만 하고 있잖아요.
“으음.”
건우도 그 점에선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복불복, 도박이 워낙 재미있어야 말이지.
건우가 그 동안 얻은 영초와 영과, 연단이나 제련 재료들을 꽤나 많았다.
거의 하루에 한 번, 꼬박 2년을 반영세계에 드나들었으니 꽝을 빼고도 얻은 것들도 제법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수련 자체는 완전히 멈춰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휴우, 좀 심하긴 했나?”
건우는 루야의 따끔한 한 마디에 차가운 물을 정수리에 맞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도박 아닌 도박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그 모든 것이 수련 경지를 올려서 좀 더 높은 도를 얻기 위함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목적을 잃고 그저 과정에만 매달린 꼴이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오래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이에 목적을 잊고 도박성 그 자체에 빠졌다는 것이 문제군.’
건우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모든 영근 영역을 아공간에 연결했다.
기본 아공간에 여덟 영근의 영역이 모두 연결되고 건우의 의식은 크게 확장되었다.
건우는 그 상태에서 진염결을 외우며 의식 수련을 시작했다.
이번 수련에서 영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의념만 끝없이 불태우고 또 불태우며 염(念)을 소진시키고 또 소진시켰다.
불타고 또 불타는 의념.
광대한 넓이의 아공간이 온통 벌겋게 달아오르는 듯 했다.
- 휴우, 이제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시는 걸까? 멍뭉이, 어떻게 생각해?
컹컹컹!
- 그렇지. 이젠 정신 차리겠지?
컹컹컹!
- 원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어. 네가 착각한 거야.
왕왕! 왕왕왕!
- 아니라니까. 그렇게 대단하진 않아! 좀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소심하고 좁쌀 같은 면이 있는 거 너도 알잖아?
컹컹컹컹!
- 에휴, 맘대로 해라.
루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멍뭉이의 저항에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 사이에 건우는 의념을 계속 불태우며 그 동안 깃들었던 삿된 기운들을 모두 정화하는 중이었다.
도박에 몰입되어 스스로를 컨트롤 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념에 지저분한 것들이 제법 끼어들었다.
계속 그렇게 두었다면 언젠가는 탈이 나도 크게 났을 것이다.
그나마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지워 낼 수 있는 것이 천운이었다.
“휴우우우우. 고맙다.”
며칠 동안 진염결 공법을 돌리며 의념을 정화한 건우가 긴 날숨 후에, 눈을 뜨며 말했다.
그런 건우의 눈앞에는 반짝거리고 있는 루야가 있었다.
루야는 며칠 전 보다 훨씬 맑고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 저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개운해졌네요.
“그래?”
- 저도 몰랐는데 제가 건우님의 정신과 많이 연결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건우님의 정신이 맑아지니 저도 몸이 편해진 느낌입니다.
“색다른 정보네?”
- 그러게요.
“자, 그럼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제대로 수련 계획을 세워 봐야겠지?”
- 당연히 그래야죠.
컹컹컹!
건우의 말에 루야와 멍뭉이가 모두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자, 그럼 뭐부터 해야 할까? 영근 수련부터 해야 하나? 지금 가지고 있는 여덟 영근의 수련 공법이 나쁘지 않으니 이대로 수련에 들어갈까?”
- 곧바로 축기기 완경까지 영근을 끌어 올리시게요?
“음. 그럴 생각인데?”
- 그게 그냥 영근에 속성 영기만 때려 넣는다고 다 되는 건가요?
“왜? 무슨 깨달음이니 그런 게 필요할 거 같아서?”
- 그럼 아니에요? 그냥 영기만 때려 넣어서 경지가 올라가는 거면 수사들이 그렇게 고생을 할 이유가 뭐겠어요?
“하하하. 그건 그렇지.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그게 아니기도 해.”
-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거지. 나한테 좋은 수련 공법이 있어. 그리고 영기 가득한 수련 장소가 있지.”
- 그건 그렇죠. 반영세계에서 수련 공법도 얻어 오고, 수련 장소도 떼어 왔으니까요.
“그러면 거의 끝이지. 사실 깨달음이란 게 그냥 오진 않지만 해답지를 들고 있으면 좀 쉽게 얻을 수도 있는 거거든.”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련 공법에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는 말이야. 그래서 좋은 수련 공법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지. 지금 내가 가진 각 영근들의 수련 공법은 최대 성단기 완경까지는 가능한 것들이거든?”
- 그러니까 그걸 제대로 익혀 내기만 하면 성단기 완경까지는 따로 깨달음이 필요 없다고요?
“공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거, 그게 곧 깨달음이 되는 거지.”
- 뭔가 반칙 아니예요?
“그게 아니면 왜 그렇게들 수련 공법에 목을 매겠어? 특별한 수련 공법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 하아, 그렇군요.
“물론 공법을 얻었다고 거기서 끝은 아니지. 그조차도 제대로 익혀내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니까.”
- 뭐가 그래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하하. 아무튼 나는 지금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란 말이지. 그런데 여기서 이보다 더 좋아질 수도 있지.”
- 더 좋아 지는 건, 더 빨리 수련 경지를 올리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지.”
- 역시 답은 그건 가요? 수도계의 수사들은 모두 약쟁이다, 뭐 그거요.
“맞아. 여기에 영단까지 더하면 수련 속도를 미친 듯이 올릴 수가 있는 거지.”
- 아니 각 속성별로 뛰어난 수련 장소도 있고, 공법도 있는데 뭐하러 영단 같은 걸 구한다고 시간을 허비해요? 그렇게 버리는 시간이 더 많지 않을까요?
“음. 솔직히 지금부터 죽어라 영근 하나 잡고 공법 수련을 하면 아마 축기기 완경까지 오래 걸리지 않겠지.”
건우도 루야의 말을 인정했다.
- 그러니까요.
“하지만 그래선 빈 수레가 될 뿐이야.”
- 빈 수레요?
“이곳 대천세계의 수사들은 틈만 나면 싸움을 벌이지. 완합종의 영역 밖으로 나가면 소속이 다른 수많은 수사들이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어.”
- 그야 그렇겠죠.
“그런데 내가 축기기 완경 혹은 그보다 높은 성단기 초기가 되었다고 치면? 같은 수준의 수사들과 경쟁을 해야겠지?”
- 그러니까 공법 수련만 해서는 그런 수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축기기 중기까지만 경지를 끌어 올리고, 그 다음에는 녹영림의 제자들과 교류를 좀 해 봐야지. 녹영림 안에 교류를 위한 장소도 있다니까 그곳에 가서 거래도 할 수 있으면 좀 하고. 솔직히 지금 가지고 있는 자원들로는 영단 하나도 제대로 만들 수가 없잖아. 제대로 된 연단로도 없고.”
- 그렇긴 하죠. 법부나 법기를 만들 재료나 도구도 없고요. 확실히 그런 면에선 교류가 좀 필요하긴 하네요.
“그러고 보면 반영세계의 가챠도 그렇게 헛짓은 아니었어. 거기서 얻은 것들을 밑천 삼아서 거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 정진 제자로 두 번 들어온 공헌 점수도 있잖아요.
“그거 수련 동부 유지비 내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았어. 그건 그냥 생색일 뿐이지.”
- 그런데 진염결에 대한 공헌 점수는 언제나 나오는 걸까요?
“이번에 허빈자 사부를 만나게 되면 여쭤 봐야지. 2년이면 결과가 나올 때도 된 거 같은데 말이지.”
- 하지만 녹림도에서 본산이 있는 원주도까지는 갔다 오는 데에만 몇 년 걸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2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죠.
“그게 또 그렇기는 하지. 확실히 수도계의 시간은 적응이 쉽지 않네. 그러고 보면 2년 동안 가챠 좀 한 건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던 거 같지?”
- 왜 말이 그렇게 됩니까? 조금 전에 고맙다고 한 건 뭡니까?
“음음. 하하하. 자자.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고, 이제부터 영근 수련을 시작해야지? 뭐가 좋을까?”
- 뭘 물어보고 그러세요? 벌써 목영근만 꺼내 놓고 다른 건 다 치워 버리시고는.
“목영근, 화영근, 수영근. 요 세 개의 영역이 가장 속성 영기가 강하잖아.”
- 그렇긴 하죠. 도대체 그 황금수 문양 영초는 뭔데 그렇게 목속성 영기를 강하게 뿜어내는 걸까요? 홍옥빛 자두도 그렇고요. 그것도 화속성 영기가 장난 아니죠?
“그것들도 좀 찾아 봐야지. 등급이 높은 희귀 재료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 어디서 나오긴 하겠지. 그게 하나씩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귀한 건 아닐 수도 있어.”
- 약초밭 하나에 네 뿌리가 있었던 영초고, 나무 하나에 일곱 개나 달렸던 열매니까 그렇게 귀한 것은 아닐 거라는 말씀이네요?
“어쩌면 경지를 높여서 한민 장로의 녹색 옥간을 보면 내용이 또 늘어나 있을 수도 있고, 거기에 그것들에 대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겠지.”
- 그럴 수도 있겠네요. 건우님 수준보단 높은 영초와 영과라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하는 말이지. 나 같은 축기기 따위에겐 귀하겠지만 성단기를 넘어서 영체기나 그 위의 화신기 정도 되면 그리 귀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 하긴, 그건 모르는 일이죠.
“자, 일단 수련부터 하자. 축기 중기는 되어야 나가서 무시를 당하는 일은 없지 않겠냐?”
- 맞는 말씀입니다. 정진 하십시오. 정진 제자님.
“끄응, 되도 않는 말장난을! 니가 아재냐?”
건우는 루야의 말에 인상을 쓰며 가부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목속성 영근을 눈앞에 두고 수련을 시작했다.
목속성 영근은 공법 수련과 함께 빛을 머금고 부풀어 올라 숨을 쉬며 영기를 끝없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뿌리와 가지, 잎이 무성하게 자란 목속성 영근은 점차 크기를 키워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건우의 몸 안에도 영기가 쌓이며 차곡차곡 밀도를 높이는 중이었다.
축기 중기를 향해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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