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또 다른 모습의 반영세계
녹영림에 동부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수사들은 수련 동부를 만들 때에 동굴을 파는 것을 선호한다.
한민 장로처럼 계곡 안에 전각을 짓기도 하지만 그런 건물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래서 저계 수사들은 굴을 파고 몇 개의 공간을 만들어 수련실과 창고, 침실 등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건우는 그런 수사들의 동부를 흉내 내서 비슷한 공간을 만들었다.
건우가 수련 동부를 만든 곳은 녹영림의 중앙 지역이었고, 그곳에는 유독 수련 동부가 많았다.
당연히 수련 동부가 몰려 있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곳이 녹영림의 영맥 중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녹영림의 영맥은 건우가 삿갓조개의 동굴에서 발견했던 지류와는 다른 본류였다.
그래서 영맥이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영기도 풍성했다.
다만 근처에 수련 동부가 많으니, 그 동부들에서 영맥의 영기를 이리저리 끌어가는 바람에 영기가 많이 나뉘긴 했다.
그래도 녹영림에서도 다른 곳보다 풍성한 영기를 끌어올 수 있으니 수련 동부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건우도 적당히 눈치를 봐서 그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수련 영역을 선포했다.
그렇게 자리를 정하고 동부를 뚫은 건우는 곧바로 방문객을 사절하는 뜻을 내걸고는 동부에 틀어박혔다.
- 다시 영근 수련을 시작하실 거예요?
녹영림에 동부를 만들고 아공간으로 들어온 건우를 맞으며 루야가 물었다.
건우는 그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반영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먼저 어떻게 해 봐야 할 거 같다.”
건우는 수미산겨자씨의 반영세계에 들어갈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수미산겨자씨와 의식 연결이 되고, 당장이라도 다시 반영세계로 갈 수 있을 듯하다.
퍼즐의 작은 조각, 그것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반영세계로 갈 수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건우는 그 동안 쉬지 않고 그 문제를 고민하다가 문득 시험해 볼 방법 하나를 떠올린 터였다.
- 표정이 밝은 것을 보면 무슨 방법을 찾아 낸 거예요?
루야가 물었다.
“문득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건우가 대답했다.
- 공짜는 없다? 그럼 반영세계로 들어가는데 입장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에요?
루야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냔 듯이 희미하게 빛을 뿜으며 물었다.
“그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한 번 시험을 해 보려고.”
- 그래서 뭘로 입장료를 치르실 건데요?
“뭐긴, 수도계의 공식 화폐로 해야지.”
건우가 루야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며 아공간 구석에 쌓여 있던 최하급 영석 하나를 불러왔다.
- 그걸 어떻게 하시게요?
“이걸 들고 의식 연결을 동시에 하는 거지. 이 영석과 수미산겨자씨를.”
- 해 본다고 문제가 될 건 없을 거 같기는 하네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왕왕왕왕!
루야의 말에 눈치를 보고 있던 멍뭉이도 슬쩍 염려의 뜻을 더했다.
건우는 그런 루야와 멍뭉이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살짝 웃음을 보이고 눈을 감으며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건우의 의식은 수미산겨자씨로 들어가는 통로를 따라 흘렀다.
그러다가 항상 막히는 지점에 도착했고, 건우는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는 영석에 의식을 나누어 연결했다.
그리고 그 영석의 기운을 막혀 있는 통로로 끌어 오려 했다.
스화화홧!
- 어머나, 영석이 사라졌네?
컹컹컹!
그리고 그 순간 아공간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건우의 손에서 영석이 사라졌다.
- 정말 입장료가 필요했던 거였어?
커커컹!
루야의 말에 멍뭉이도 기가 막힌 듯이 짖어댔다.
그리고 그 때, 건우는 이전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수미산겨자씨의 반영세계로 들어오면 수미선문의 거대한 비석을 먼저 만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종소리도 없이 곧바로 낯선 공간에 내려섰다.
“어? 빙의가 아니네?”
건우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완합종의 축기기 제자 복장에 허리엔 공간낭 두 개를 차고 있는 건우.
아공간의 수미산겨자씨 밑에 있는 건우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전처럼 소년 건우의 그것이 아닌 것이다.
건우는 현실의 육체를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안개가 가득한 돌계단 위였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돌계단이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뭐지? 여기는?”
건우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계단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오를 것인가, 내려갈 것인가.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올라가야지. 입구가 위에 있지는 않겠지.”
대부분은 계단 위에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건우도 그런 상식에 비추어 위쪽에서 뭔가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건우는 이곳 반영세계에서도 아공간이 열리는지 궁금했다.
소년 건우의 몸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그것은 금방 확인이 되었다.
반영세계에선 아공간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여덟 영근을 포함한 의념 공간은 가지고 있다는 거군. 보통의 수사들은 이런 식으로 의념 공간을 가지는 거겠지.”
건우는 반영세계에서는 아공간이 의념 공간으로만 인식되는 것을 확인했다.
아공간은 쓸 수 없지만 축기기 초기의 수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의 의념 공간이 그대로 있으니 나름 든든했다.
건우는 그것을 믿고 당당하게 계단 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의식을 펼쳐 계단 하나하나를 살피며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했다.
* * *
“여기는 누군가의 수련 거처인 모양이군.”
건우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계단을 올라가서야 겨우 커다란 석조 건물에 닿을 수 있었다.
따로 현판이 달리지 않은 석조 건물은 4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두 개의 초대형 기단석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건우는 기단석 위로는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영기의 흐름이 건물과 기단석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우가 의식을 펼쳐 기단석과 건물을 훑어보려 하면 그 때마다 강렬한 기운이 일어나 건우의 의식을 방해했다.
게다가 건우의 의식이 강해지면 그 기운도 강해지며 금색의 뇌전을 조금씩 뿜어냈다.
만약 건우가 불순한 의도로 의식을 불어 넣으면 석조 건물과 기단석을 보호하는 기운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건우는 그런 위험을 자초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몇 번 의식을 뿌려서 석조 건물 안에 있는 누군가를 불러 내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건우가 신호를 보내도 건물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걸까?”
건우는 결국 석조 건물 안에 주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기단석 옆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약초밭에 눈길을 던졌다.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영초들이 가득한 작은 밭이 거기 있었다.
건우는 자신의 영근들 중에서 목속성 영근과 화속성 영근을 특별히 자극하는 영초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스르륵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약초밭으로 향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의식을 펼쳐 약초밭을 보호하는 결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약초밭에는 특별한 결계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는데, 그것이 이상하게도 해제되어 있는 상태였다.
“왜 여기만 결계를 풀어 놨을까?”
건우는 마침 풀어져 속을 훤히 내보이고 있는 결계의 상태를 보고 의아해 했지만 당장 그것이 건우에게 해가 될 일은 아니었다.
건우는 잠시 결계를 살피다가 곧바로 눈앞의 영초에 관심을 돌렸다.
그것은 고무나무의 잎 하나를 땅에 꽂아 놓은 것처럼 생긴 영초였다.
짙은 녹색의 두툼한 잎이 땅에 꽂혀 있는데 그 잎의 잎맥들이 금색 나무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건우가 자세히 보니 그 금색 나무는 정말 살아 있는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금색 잎까지 달고 있었다.
건우는 그런 영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목속성 영기를 품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네 뿌리나 되니까 그 중에 하나 정도는 내가 뽑아가도 될까?”
건우는 치밀어 오르는 욕심에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며 의식에 걸리는 인기척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건우의 손이 그 진녹색의 황금수 문양의 나무를 향해 움직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건우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런 건우의 눈에는 약초밭 반대쪽에 있는 붉은 색 나무가 걸려 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약초밭의 한 쪽에 영기를 가두어서 따로 키우는 나무였다.
붉은 색 나무는 붉은 색과 은색이 뒤섞인 영롱한 문양으로 가득했는데, 가지가 일곱 개였다.
그리고 지금 그 일곱 개의 가지는 펼쳐진 우산살처럼 늘어져 그 끝마다 열매 하나씩을 달고 있었다.
홍옥으로 만든 자두같은 열매 일곱 개.
건우가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그 열매는 당장이라도 땅에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또 본능처럼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저 열매는 당장이라도 땅에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쓸모없는 거름이 되고 말 것이다.
건우가 훌쩍 몸을 날려 열매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서둘러 나무의 가지를 꺾였다.
순식간에 건우가 세 개의 가지를 꺾었다.
하지만 네 개째 가지를 꺾으려던 건우는 섬뜩한 느낌이 뒷머리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건우는 급히 몸을 피해 원래처럼 약초밭 가장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진녹색 황금수 영초 두 뿌리를 재빨리 뽑아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느낌이 건우의 온 몸을 압박했다.
휘이이이이이잉!
건우는 급히 과일이 달린 나뭇가지와 진녹색 황금수 문양의 영초를 공간낭에 넣으며 몸을 날려 계단 아래를 향해 죽을힘을 향해 둔술을 펼쳤다.
녹색 둔광을 남기고 계단 아래, 안개 속으로 사라진 건우.
하지만 건우는 안개 속으로 들어온 순간 갑작스럽게 자신의 의식이 반영세계에서 쫓겨나는 것을 느꼈다.
- 깨어나셨어요?
이번에도 그런 건우를 반긴 것은 루야였다.
“으음.”
건우는 가부좌를 하고 있던 상태로 눈을 뜨며 짧은 신음 소리를 냈다.
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슨 이윤지 몸이 많이 축이 난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 괜찮으세요?
컹컹컹! 컹컹!
루야가 걱정스럽게 물었고, 멍뭉이도 주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근심어린 의념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지?”
건우가 물었다.
- 하루요.
“이번에도 하루라고?”
건우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루야를 보며 물었다.
- 네, 딱 하루가 지났어요. 반영세계에 갔다 오신 거 맞죠?
루야가 날짜를 확인해주며 되물었다.
“그래, 맞긴 맞는데······.”
건우가 중얼거리며 공간낭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 개의 열매달린 나뭇가지와 두 뿌리의 기묘한 영초를 꺼냈다.
- 어머나, 그건 뭐예요?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이게 뭘까?”
건우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반영세계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에 영근이 축기기에 오르면서 수련 장소가 아공간에 더해진 일은 있었지만 이번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수사의 것을 훔쳐 온 것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건우가 얻은 한민 수사의 연단술 옥간에서도 본 적이 없는 재료였다.
“으음, 이거···. 기운이 너무 강한데?”
건우는 자신이 꺼낸 열매와 영초에서 이상을 느꼈다.
그것들이 반영세계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건우는 당황했다.
- 여, 연화 할 수 없을까요?
왕왕왕!
“그게 될 거 같냐? 이런 건 그냥 날로 먹다간 골로 가는 거지.”
- 그럼 어떻게 해요?
“쯧! 나라고 무슨 수가 있겠냐? 그냥 땅에서 자라던 것이니까 땅에 묻어야지.”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 당장 너무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 무슨 탈이 나기 전에 그것부터 어떻게 막아봐야 했다.
건우는 곧바로 진녹색 황금수 문양 영초는 목영근 영역의 나무 아래에 심고, 열매가 달린 세 개의 가지는 화영근 영역의 용암 개울 옆에 꽂았다.
- 그러면 괜찮을까요?
루야가 걱정을 했지만 건우도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그 뿐이었다.
우우우우우우웅!
화화화화홧 후루루루룽!
그리고 그 임기응변이 그나마 최악의 수는 아니었는지 목영근의 영역과 화영근의 영역에서 각각의 속성 영기가 한층 강해졌다.
영초와 나뭇가지는 살짝 시들었지만 당장 말라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과가 나쁘진 않은 모양인데? 속성 영기가 훨씬 강해졌어. 저것들을 직접 먹지는 못해도 각 영역의 속성을 강하게 했으니 나중에 수련할 때에는 엄청 도움이 되겠네.”
- 그러게요. 그런데 도대체 저것들은 어디서 가지고 왔어요? 설마 반영세계에서 가지고 온 거예요?
“뭐 그렇지.”
건우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던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반영세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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