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반영세계는 열리지 않고, 악연은 슬그머니 다가온다
건우는 객사에 깃발로 결계 진법을 펼치고, 오랜만에 아공간으로 들어왔다.
- 어서 오세요.
왕왕왕!
그런 건우를 루야와 멍뭉이가 달려와 반겼다.
“많이 기다렸던 모양이네? 이렇게 반기는 것을 보면?”
- 그닥 그렇지도 않거든요? 건우님 없어도 멍뭉이하고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었거든요?
왕왕, 왕왕왕!
루야는 뾰로통한 음성으로 아니라고 했지만 멍뭉이는 충성스럽게 주인을 많이 기다렸다는 의지를 전해왔다.
- 넌, 그런 식으로 배신하면 안 되는 거지!
루야가 그런 멍뭉이가 못마땅한지 머리를 쥐어박았다.
5미터가 넘는 늑대의 머리에 붙은 루야는 반딧불이처럼 작아 보였지만 그래도 멍뭉이보다는 루야의 서열이 높은 듯 했다.
건우가 보기엔 서열 정리가 이상하게 된 거 같지만, 어쨌거나 잘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한 건우는 곧바로 수미산겨자씨 밑으로 몸을 이동했다.
건우가 아공간에 들어오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수미산겨자씨에서 뭔가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우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머리 위에 위치한 수미산겨자씨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반영세계에 입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건우는 이번에도 반영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수미산겨자씨와 의식 연결이 가능하다는 느낌은 오는데 반영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는 상태.
어떻게든 의식을 집중하며 방법을 찾아보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역시 같은 상황이네.’
이것은 삿갓조개의 섬을 떠나기 전에 확인했을 때와 같은 상태였다.
더구나 영근을 하나만 꺼낸 상태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그 때는 아예 수미산겨자씨와 의식 연결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나마 복수의 영근을 꺼내 놓으면 의식 연결이 가능했는데, 반영세계로의 입장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 이번에도 안 됐어요?
건우가 눈을 뜨자 루야가 물었다.
반영세계에 들어가면 하루가 지나야 나올 수 있는데, 이번에도 그 전에 눈을 뜨니 어렵지 않게 상황을 짐작한 것이다.
“그래, 어찌어찌 감은 오는데 결국 반영세계로는 갈 수가 없네. 분명히 가능할 거 같은데 뭔가 부족해.”
-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런 거면 시간 문제는 아닌 거죠?
이 상황은 건우가 여덟 개의 영근을 모두 축기기로 끌어 올린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로 계속 의식 연결과 반영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매번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꽤나 오랜만에 시도했는데도 실패한 것을 보면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 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이유를 모르니 답답해 죽겠네. 그렇다고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고.”
- 이제 완합종의 제자가 되었으니 경지가 높은 수사들에게 에둘러서 물어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루야가 그래도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건우를 위로했다.
“그것도 친한 사람이 있어야지.”
- 그건 그러네요. 그나저나 이젠 정말 완합종의 정식 제자네요?
하지만 심드렁한 건우의 반응에 결국 화제를 돌리고 마는 루야였다.
건우는 아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루야에게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알려줬다.
루야와 의식 연결을 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루야는 삿갓조개 섬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대부분 전달 받은 상태였다.
당연히 장로인 섭주구가 건우를 완합종의 정식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알고 있었다.
“겨우겨우 그렇게 된 거 같다. 어쨌건 이제 완합종에 들어 왔으니 목적을 달성해야지.”
- 세력이 큰 수도 문파에서 꿀을 빠는 거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루야의 말에 건우가 뻔뻔스럽게 박수까지 치며 대꾸했다.
앞발을 턱에 괴고 엎드려 있던 멍뭉이가 그런 건우의 말을 듣고 발을 머리 위로 올렸다.
키이이이잉!
아무리 주인이라도 너무 뻔뻔하다 싶었던 모양이다.
“뭠마? 이 세상에 연고 하나 없이 떨어진 몸인데, 첫째도 나, 둘째도 나, 셋째도 나! 응? 그렇게 살아야지.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럼요, 누가 뭐래요? 저 녀석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떤 경우에도 건우님 스스로를 챙기셔야죠. 그게 맞아요.
대뜸 루야가 건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루야 너 밖에 없다. 역시 내 영혼의 동반자답다.”
- 당연하죠. 건우님과 저는 하나라고요.
“뭐, 그건 좀 표현이 이상하긴 하다만.”
- 그냥 넘어가죠. 표현이 뭐 중요하겠어요? 속에 담긴 뜻이 중요한 거죠.
“그래. 그래.”
- 그런데 완합종의 정식 제자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좀 번거롭고 그렇지 않아요?
어떤 곳이든 단체에 소속되면 그의 대한 의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일을 시키지 않으면서 그저 지원만 해 줄 호구는 없다.
당연히 완합종의 제자가 되면 그에 따라서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의무는 줄이고 권리는 많이 챙기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고 그건 건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건우에게 믿을 구석 하나가 있기도 했다.
“공헌 점수란 것이 있다잖아. 종문에서 부여하는 임무를 수행하거나, 나처럼 특별한 것을 종문에 바치면 그 보상으로 공헌 점수를 받기도 한다지.”
- 그러니까 이번에 진염결을 종문에 바친 걸 믿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아마 공헌 점수가 제법 되지 않을까? 몇 백 년은 수련 거처에 머물고만 있어도 될 정도의 점수는 주지 않을까 싶은데?”
- 에이, 그 정도는 아니겠죠. 설마 그렇게 많이 주겠어요?
“무슨 소릴! 모두들 진염결이 대단하다고 호들갑을 떨던데 싸구려 취급은 안 하겠지.”
-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걸로 필요한 재료들도 사야하고, 이런저런 공법이나 술법 같은 것도 구해야 하지 않아요? 그런 것도 공헌 점수를 주고 얻는다면서요?
“그것뿐만이 아니지. 특별한 수련 거처를 얻으려면 또 그만큼 공헌 점수가 많이 필요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공헌 점수는 많을수록 좋겠지.”
- 와, 건우님 지금 눈빛 반짝이는 거 내가 봤어요. 특별한 수련 거처란 것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네요?
“당연하잖아. 그 삿갓조개의 섬에서 본 영맥 맛을 어떻게 잊겠냐? 그 덕분에 내가 지금 이렇게 축기에 올라서 사람대접을 받고 있는데.”
건우는 완합종에서 특별히 제공한다는 수련 거처가 무척 궁금했다.
갈군모가 지나가는 말로 수련에 아주 좋은 특별한 동부들이 있고, 그런 곳을 거처로 얻으려면 많은 공헌 점수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 정말 필요하면 중급이나 상급 영석을 바치면 되잖아요. 영석도 곧바로 공헌 점수가 된다면서요?
“뭐 일종의 현금 기부 형태라고 할까? 그런 것도 있다더군. 그리고 거꾸로 종문의 일을 맡아서 하면 공헌 점수를 얻을 수도 있고, 그걸 또 영석으로 바꿀 수도 있고.”
- 역시 그것만 봐도 완합종에 들어온 것이 잘 한 일이네요. 일단 종문 내에서도 제법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거잖아요. 건우님 혼자였으면 꿈도 못 꿀 일이죠. 진염결을 공헌 점수나 영석으로 바꿀 방법도 없었을 거구요.
“그렇다니까. 그래서 수도계도 서로 교류가 중요하지. 혼자서는 절대 발전할 수 없는 세상인 거야.”
- 정말 그러네요.
“아, 누가 찾아온 모양이네?”
건우가 말을 하다말고 아공간 밖에서 전해지는 신호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건우가 아공간에 들어와 수미산겨자씨와 의식 연결을 시도하고, 이후에 루야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하룻밤이 지났다.
아침이 되자 객사에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 나가보세요.
“그래, 다시 여유가 되는대로 들어오마. 그 동안 잘 지내고 있어.”
-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멍뭉이도 있어서 심심하지도 않으니까 괜찮아요.
왕와왕! 왕왕! 끼이잉!
건우가 나간다는 말에 멍뭉이도 벌떡 일어나 아쉬운 듯이 건우의 몸에 머리를 비볐다.
“야야, 네 덩치를 생각해야지. 이건 아니지. 아무튼 잘 지내고, 멍뭉이 너는 수련 빼 먹지 말고.”
컹컹컹!
- 다녀오세요.
건우는 멍뭉이와 루야의 인사를 받으며 급히 아공간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객사의 거실로 나오자마자 곧바로 영기를 쏘아서 객사 안에 설치한 깃발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의식을 객사 밖으로 펼쳐서 찾아온 손님이 누군지 확인했다.
‘역시 갈군모 사형이군.’
그 외에는 얼굴을 익힌 제자가 없으니 그럴 거라고 짐작하긴 했었다.
건우는 객사 밖으로 나가 정원에서 객사의 대문으로 방문 허락의 뜻을 심어 영기를 쏘아냈다.
그러자 대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갈군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사제, 내가 너무 일찍 온 것은 아닌가?”
갈군무가 건우를 보며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닙니다 사형. 여행으로 지친 심신을 가다듬다보니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게 흘렀습니다.”
“이런, 그럼 내가 사제의 정양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제가 어디 크게 탈이 난 것도 아닌데요.”
“그래? 그럼 다행이지.”
“그런데 사형께선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 문제에 대한 결과가 벌써 나왔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만.”
설마 하룻밤 사이에 진염결에 대한 가치 판단이 끝나고 건우의 임무 배정과 스승 배정까지 마무리가 되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이네. 나도 사정은 잘 알 수 없지만 사제의 일에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네. 다만 정식 제자가 되었는데 굳이 객사에 머물며 갇혀 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셨지.”
“섭주구 사숙님께서요?”
“어? 아니, 섭사숙님이 아니라 장기로 사숙님이라고 있네. 그 분이 사제의 문제를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지.”
뜻밖에도 갈군모의 입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건우가 깜짝 놀라며 갈군모를 보았다.
“장기로 사숙이라고요? 저는 알지도 못하는 분이신데요?”
“나도 그게 이상하긴 하더군. 어디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갑자기 섭사숙께 찾아와서 자네를 사의전(死醫殿)에서 쓰게 해 달라고 했다네.”
“사의전(死醫殿)이라니요? 거기가 뭐 하는 곳입니까?”
“아, 사의전은 생의전(生醫殿)과 함께 종문의 의술을 연구하는 곳이네.”
“의술이라고요? 수사가 무슨 의술입니까?”
“무슨 의술이냐니? 수사들이 가장 많이 쓰는 수련 단약들이 다 그 의술에서 나온 것들이 아닌가. 당연히 의술 연구는 무척 중요하지.”
“아, 연단술이 의술에 포함이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그리고 수사들 역시 여러 가지 병에 걸린다네.”
“수도자가 병이라니 그럴 수도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모두 수련 중에 생기는 이상 증세들이지. 그 역시 몸에 생기는 이상이니 병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렇군요. 범인의 병이 아니라 수사들의 병도 있을 수 있겠군요.”
“역천의 길을 걷는 수사들이니 당연히 그 병도 일반적이지 않지. 그러니 그에 맞는 연구도 필요한 법이고.”
“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기로라는 사숙께서 저를 사의전(死醫殿)으로 데리고 가시고 싶다 하셨으니 그 분이 사의전과 관계가 있으시겠군요?”
“그렇지. 사의전의 전주시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인데, 어찌 저를 부르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섭 사숙님께서 저를 사의전에 보내기로 하셨습니까?”
이 일은 건우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완합종의 제자가 되었으니 멋대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애초에 단체에 소속되기로 했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긴 했다.
그럼에도 입맛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내가 왔지. 어차피 자네도 소속은 정해야 할 것이고, 사의전이면 종문에서도 나쁘지 않은 곳이라 자네의 생각을 물어보려고 말이야.”
“제 생각이라니요? 사문의 어른들이 시키는 것인데 제가 거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건우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떠밀려 가기 보다는 자신이 선택해서 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 봐야 좋을 것은 없을 듯 했다.
“섭사숙께서 자네를 좋게 보신 모양인지 사의전에 가기 보다는 당분간은 정진 제자로 수련에 힘쓰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시더군.”
그런데 갈군모가 뜻밖에도 또 다른 선택지를 내밀었다.
“정진 제자가 무엇입니까?”
건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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