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45화 (45/499)

44. 멍뭉이, 우리 멍뭉이

[깨어나라!]

크르릉?

[깨어나라!]

크르르르릉?

[깨어······.]

크와와왕!

녹각독랑은 자꾸만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의념에 짜증을 내며 포효를 터트렸다.

하지만 우렁찬 포효와 함께 녹각독랑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번개 치는 느낌으로 깨달았다.

크와와와왕!

= 안 된다. 나는 깨어나선 안 돼!

녹각독랑은 정신이 깨어나면서 곧바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제 스스로 속을 뒤집어 까서 창자를 가죽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무엇이 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녹각독랑은 그것이 너무도 끔찍했다.

그래서 절대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녹각독랑의 정신을 깨우고 있는 것은 평범한 의념이 아니었다.

강력한 의식이 뒷받침 되어 피할 수 없는 의념.

게다가 그 의념에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의 기운까지 담겨 있었다.

크르르르르르릉!

녹각독랑은 제 의지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의념의 뜻에 따라서 정신이 수면위로 부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꼬리가 말려들어 뱃가죽에 붙었다.

다가올 끔찍한 무엇을 떠올리며.

크르르르릉?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각오했던 그 끔찍함은 없었다.

녹각독랑은 정신과 육체가 이어진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녹각독랑의 의식이 주변 공간을 장악하며 정보를 전해 주었다.

크와왕!

녹각독랑이 벌떡 일어나며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예전에 봤던 인간 수사가 있었다.

“휴우, 힘드네. 깨우면 발딱발딱 일어나지, 뭘 그렇게 꾸물거려?”

녹각독랑은 인간 수사의 말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인간 수사가 하는 말은 곧바로 의념이 되어서 녹각독랑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말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분명하게 전달된 것이다.

크르르릉!

녹각독랑은 그 때서야 이마에 뭔가 붙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 수사의 말이 뜻이 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녹각독랑은 앞발을 들어 이마를 긁으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인간 수사의 한 마디에 무산되고 말았다.

“멈춰!”

크릉?“

짧은 외침과 함께 녹각독랑에게 전해진 구속감.

녹각독랑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바로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인간 수사의 술법이 자신의 몸에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와와왕!

고작 축기 초기의 수사가 축기 중기에 이른 자신을 핍박하다니.

그런 건방진 놈은 그냥 둘 수 없다.

녹각독랑의 분노가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아 올랐다.

뿔의 색이 짙어지고 피부에 검은 색의 비늘이 돋았다.

뿔에서는 진득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고, 검은 비늘은 상대를 제압하는 기세를 담고 있었다.

“어쭈? 반항을 해?”

그런 녹각독랑을 보며 건우가 눈을 부릅떴다.

쿠구구구구구궁!

그러자 수천 근의 무게가 녹각독랑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건우의 아공간, 그 의념공간에서 건우와 싸우려면 건우보다 강력한 의식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녹각독랑의 의식은 건우의 기본 의념 공간이 지닌 힘보다 약했다.

축기 초기라 해도 진염결을 수련한 건우의 의념은 일반적인 동급 수사들에 비해서 두세 배는 강하다.

그런데 지금 건우는 목영근과 수영근, 토영근의 세 영근 영역을 개방한 상태였다.

간단한 계산으로도 일반 축기기 초기 수사가 지닌 의식의 힘보다 열 배 이상은 강력한 의념을 지녔다는 이야기다.

그런 건우를 건우의 의념 공간 안에 있는 녹각독랑이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녹각독랑의 이마에 붙어 있는 법부도 평범한 것이 아니다.

상대의 의식을 제압하여 행동을 구속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법부였다.

크르르르릉!

온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녹각독랑이 몸부림을 치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녹각독랑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제압한 힘은 감히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수준이란 사실을.

움직이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움직이려는 순간 강철로 된 주물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영기를 쓰지 않고 설렁설렁 움직이는 것은 제약이 없지만, 영기를 끌어 올리면 몸이 굳는다.

“가만히 있어. 너도 알겠지만 지금 네 처지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야. 기억 나지? 붉은 털 원숭이 두목을 쫓다가 결국 나한테 잡혀서 정신을 잃은 거. 그리고 그 뒤에······.”

크르르르릉 크르르르 크와와왕!

“어라? 지금 뭐 하는 거냐? 왜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고 그러는데?”

건우는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꼬리를 배에 철썩 붙이고 엉거주춤 뒷다리를 구부리는 녹각독랑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겁에 질린 강아지 꼴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건우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 그거 때문 아닐까요?

그 때, 건우가 녹각독랑을 제압하는 것을 구경하겠다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던 루야가 다가왔다.

“그거라니?

- 연못이요. 거기 넣어 뒀었잖요.

“그랬지.”

- 왜 하필 거기 넣었던 건지 기억하세요?

“혹시라도 정신을 차리면 그 연못에 녹아 있는 끔찍한 무언가 때문에 격하게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거였지.”

- 그렇죠. 그런데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마냥 죽은 듯이 있었단 말이죠. 그 오랜 시간을.

“하긴 그게 이상하긴 했지. 그 시간이면 내가 저 놈에게 걸어뒀던 의식 봉인은 풀려도 예전에 풀렸어야 했으니까.”

- 그런데 건우님이 걸었던 의식 봉인이 풀리고도 깨어나지 않았던 건 무슨 이유일까요?

“그게 연못물 때문이라는 거구나? 지금 저 놈이 저렇게 겁을 먹은 것도 그것 때문이고?”

- 그렇죠.

“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럴 때는 확인을 해 보면 되겠지.”

- 확인요?

“별 거 있냐? 다시 한 번 넣어 보면 되는 거지.”

- 아, 그러네요.

건우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녹각독랑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 순간 건우는 녹각독랑의 가랑이 사이에서 주르륵 흐르는 노란 물줄기를 발견했다.

“뭐? 야, 야! 그건 아니지. 네가 그래도 축기기 영순데 오줌은 좀 아니지 않냐?!”

크르르르릉!

건우가 뭐라고 하건 녹각독랑은 정신이 없었다.

괴상한 빛덩어리와 인간 수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빛덩어리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간 수사가 자신을 다시 연못에 넣어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지만 만약 아주 조금이라도 뱃속으로 들어온다면 제 스스로 목구멍에서 창자를 뽑아내고 싶어질 그것에.

절대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축기기 영수건 뭐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런 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방뇨를 했지만 녹각독랑은 그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크와와왕!

= 그러지 마라. 절대로 그러지 마라. 뭐든, 뭐든 할 테니 그러지 마라.

녹각독랑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인간 수사에게 애원을 했다.

녹각독랑의 의념은 곧바로 건우에게 전해졌다.

“어라? 저 녀석 정말로 연못 때문에 겁을 먹었던 모양인데?”

- 그럴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면 일이 쉬워지네? 이번에 새로 익힌 종속 각인 술법을 써 볼 수 있겠다.”

- 그 검은 옥간에 있던 내용 말입니까?

“그래, 내가 주인이란 사실을 영혼에 각인시키고 절대 배신할 수 없도록 금제를 거는 거지.”

- 건우님 보다 경지가 높은데 가능할까요?

“의식의 힘은 내가 더 강하잖아. 그리고 저 놈이 스스로 내 술법을 받아들이면 가능하겠지. 물론 거부하고 저항하면 힘들어지겠지만, 설마 그러진 않을 거야. 그렇지?”

건우가 녹각독랑을 보며 물었다.

왕왕왕!

= 물론. 뭐든 한다. 인간 수사, 네가 대장이다. 시키는 대로 한다.

녹각독랑은 건우의 물음에 열렬한 화답을 보냈다.

심지어 배에 붙이고 있던 꼬리까지 뒤로 들어 요란하게 흔들었다.

건우는 그 모습에 떠오르는 한 단어가 있었다.

“멍뭉이냐?”

- 그러네요. 저 모습을 보면 딱 주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하는 강아지가 떠오르네요.

왕왕왕!

녹각독랑도 인간 수사와 빛덩어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멍뭉이가 뭔지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받아만 준다면 그래서 끔찍한 연못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좋아. 무조건 항복이라는데 굳이 괴롭힐 이유는 없지. 자, 그럼 이제 복종 각인을 하자.”

건우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손을 휘저어 뭔가를 불러냈다.

아공간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법부들 중에 하나를 가져온 것이다.

의념 공간이라 거리의 제약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필요한 것들을 언제든 불러낼 수 있었다.

“자, 얌전히 있어라.”

건우는 그렇게 불러낸 법부를 녹각독랑의 이마에 붙였다.

이전에 있던 법부 위에 새로운 법부를 붙이자 두 법부가 서로 합쳐지며 환한 빛을 냈다.

검은 색의 법부 두 장을 붙였는데 붉은 기운이 도는 법부로 바뀌었다.

= 네 영혼에 깊이 새기거라. 이제부터 내가 너의 주인이다.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겠느냐?

건우의 의념이 녹각독랑의 영혼 깊은 곳에 울려퍼졌다.

녹각독랑의 본능은 그 명령과 요구를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연못의 끔찍한 기억에 그 본능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녹각독랑의 영혼은 건우의 복종 각인을 단 한 올의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여 영혼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녹각독랑은 건우의 사역영수(使役靈獸)가 되었다.

왕왕왕!

하지만 녹각독랑은 어쨌거나 좋았다.

다시는 그 끔찍한 연못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청랑의 후손이며 독룡의 피를 받은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그 끔찍함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만이 중요했다.

왕왕! 왕왕왕! 헥헥헥헥!

“저거 아무리 봐도 멍뭉이 같은데? 음, 그런데 저 뿔은 조금 거슬리네. 멍뭉이 머리에 사슴 뿔은 좀 아니지 않나?”

- 그러게요.

“맞아. 역시 아닌 거 같다.”

케에에엥!

건우는 녹각독랑을 보며 뿔이 거슬렸고, 그저 가볍게 그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녹각독랑에는 엄청난 압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녹각독랑은 죽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곧바로 영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뭐 하는 거래요?

“뭐가 되었던 우리에게 해가 될 짓은 안 할 테니까 괜찮아.”

건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녹각독랑이 무슨 짓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봤다.

- 우와, 뿔이 작아지고 있네요?

“그러게, 뿔이 보기 싫다고 했더니 줄이는 모양인데? 몸 안으로 넣는 건가?”

- 저거 보세요. 뿔이 짧아져서 귀 뒤쪽으로 찰싹 붙었어요.

“괜찮네. 저 정도면, 거추장스러워 보이지도 않고.”

왕왕왕!

건우의 말에 뿔을 줄여서 귀 뒤쪽으로 붙인 녹각독랑이 신이 난 듯이 짖어댔다.

건우는 그런 녹각독랑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던졌다.

“야, 너. 이왕 하는 김에 몸집도 좀 줄이지? 지금 이건 너무 크지 않냐?”

바닥에서 어깨 높이까지만 4미터가 넘고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10미터가 넘는 녹각독랑이었다.

당연히 크기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키이이잉!

건우의 지적에 귀가 축 쳐진 녹각독랑이 다시 영기를 움직였다.

하지만 덩치를 줄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겨우 정반 정도까지 줄이고는 힐끔힐끔 건우의 눈치를 살폈다.

“뭐, 됐다. 수련 경지가 오르면 변신 따위야 자유롭게 할 때가 오겠지. 지금은 그 정도 성의를 보인 걸로 만족한다. 잘 했다.”

컹컹컹 헥헥헥!

건우의 칭찬에 녹각독랑이 몇 번 짓더니 제 자리에서 꼬리잡기를 하며 빙빙 돌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멍뭉이 과에 속하는 거 같다.”

- 그러네요.

“어쨌거나 쓸만한 강아지 한 마리 분양받았네.”

- 억지로 복종 각인을 시켜놓고 분양을 받았다고요?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그렇잖아. 멍뭉이 한 마리 생겼다는 거.”

- 네네, 이번에도 세상은 건우님을 중심으로 돈다는 거죠?

“뭐? 그게 어때서? 어차피 대도(大道)는 독행(獨行)이다.”

- 언제는 무정이라면서요?

“그럼 대도는 무정 독행이지.

- 네네네. 그러시겠죠.

컹컹컹!

건우와 루야의 대화에 녹각독랑도 소외되지 않겠다는 듯이 울음소리를 더했다.

건우는 녹각독랑 한 마리가 늘어났을 뿐인데, 어쩐지 아공간 안의 온기가 많이 늘어난 듯이 느껴져 마음이 푸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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