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39화 (39/499)

38. 줍줍줍, 우끽끼는 춤을 춘다

우끽끼!

혈모원 우두머리는 주인이 먼 곳으로 떠난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직후, 주인이 있던 계곡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지는 큰 싸움이 벌어졌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 싸움이 인간 수사들에 의한 것임을 짐작했다.

주인이 얼마 전에 섬을 찾아온 세 명의 인간 수사에 대해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그들을 따라서 먼 길을 떠날 것이라 했었다.

하지만 언젠간 돌아올 것이니 그 때까지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며 기다리라고도 했었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런 주인의 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주인은 심부름을 시키는 대신에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약초와 영초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밭을 만들어 가꾸는 방법은 심부름에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혈모원 무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주인은 의식의 힘과 영기를 늘리는 수련법과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둔술도 알려줬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 중에서도 특히 둔술이 마음에 들었다.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다.

원래 신력을 타고났다고 할 정도로 힘이 강한 혈모원 우두머리가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면 어떨까?

그 생각만으로도 혈모원 우두머리는 절로 기분이 좋아서 우쭐 거릴 수밖에 없었다.

우끽끼 우끽끼! 우끽끼 우끽끼!

하지만 혈모원 우두머리도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태풍에 넘어가버린 나무가 문제였다.

수천 년의 수령을 지닌 그 거대한 나무는 혈모원들의 둥지로 쓰였던 나무였다.

그것이 가로로 누워버렸으니 이젠 다른 거처를 찾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

옆으로 누운 나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썩어갈 것이고, 그런 곳에 살다간 일족 모두가 좋지 않은 병에 걸릴 것이다.

그 일만 아니라면 더 없이 좋을 텐데.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인은 먼 곳으로 떠났고, 주인이 시킨 일은 부하들에게 시켜도 된다.

자신은 그저 관리만 하면 되지 않겠나.

수련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질구레한 일까지 직접 나설까.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끽끼끼끼끼 끼끽?

그러다가 혈모원 우두머리는 문득 주인이 있던 계곡이 궁금해졌다.

얼마 전에 한바탕 난리법석이 났었지만 며칠 동안 조용했다.

그러면 위험할 일도 없지 않을까?

혈모원 우두머리는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다시 며칠 고민하다가 결국 주인의 거처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사실 그 전에 영기도 품지 못한 부하 혈모원 몇 마리를 그곳으로 보내서 상황을 살폈다.

그 결과, 위험해 보이는 것은 없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저 무너진 흙더미와 박살난 바위들만 가득하다는 것.

그런 정찰 결과가 나왔으니 직접 가 봐도 좋을 것이다.

우끼끼끼끼.

혈모원 우두머리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주인의 거처였던 계곡을 찾았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린 계곡의 모습에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곡은 사라지고, 뒤편 양쪽에 높이 솟아 있던 봉우리 둘도 형편없이 무너졌다.

도대체 그 때, 싸움을 벌였던 인간 수사들은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혈모원 우두머리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뭔가 쪼그라드는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다.

끼이이이이익! 왁왁왁왁왁!

혈모원 우두머리는 잠시 후, 공연히 고함을 질러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무너진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겁 따위는 먹은 적이 없다는 듯이.

끼익?

분명히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가 자꾸만 혈모원 우두머리의 감각을 자극했다.

짐승의 본능, 그것도 축기에 오른 혈모원 우두머리의 진화한 본능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우끽! 끼이이익! 끼이이익!

혈모원 우두머리는 본능을 따라서 무너진 계곡의 끝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커다란 바위가 땅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위는 저 뒤쪽의 두 봉우리 중에 하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분명했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런 큰 바위가 여기까지 날아온 것에 놀라며 무심코 그것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이 바위 속으로 허무하게 파고드는 것에 깜짝 놀랐다.

우끼이이? 욱끼 욱끼!

혈모원 우두머리는 몇 번 같은 행동을 해 보고는 그 큰 바위가 일종의 허상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그 허상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고, 그 안에서 환상에 가려진 넓은 공간을 발견했다.

우끽끽끽끼.

놀라운 일이었다.

넓은 공터가 있고, 그 너머에 계곡 끝의 절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공터엔 세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둘은 인간 남녀의 시체였고, 하나는 혈모원 우두머리도 본 적이 없는 괴상한 요수였다.

인간 남녀는 한 몸처럼 붙어 있었는데 뭔가가 둘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딱 붙어 있던 남녀는 한꺼번에 가슴이 꿰뚫려 죽은 것이다.

그에 비해서 요수는 좀 달랐다.

요수는 온 몸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는데 그 근처에 붉은색 단환 십여 개가 뒹굴고 있었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 붉은 단환이 욕심났지만 주인이 떠올라 복용 하지 못했다.

주인이 좋은 것이 있으면 따로 보관해 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표면이 꿈틀거리는 붉은색 단약은 마치 어려서 먹었던 곤충의 유충처럼 먹음직스럽긴 했다.

그래도 혈모원 우두머리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것들을 모아서 죽은 인간 여자의 손에 들린 넓은 은빛 보자기에 싸 놓았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반쯤 찢어진 그 보자기가 죽은 경미후의 법기인 것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단약을 챙긴 혈모원 우두머리는 다시 인간 수사의 시체와 요수의 시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까?

결국 혈모원 우두머리는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았다.

축기기와 성단기의 경지에 오른 수사의 시체와 요괴의 사체다.

어디든 쓸 곳이 있으리라.

그 역시 주인님이 말한 좋은 것에 해당할 거 같았다.

게다가 인간과 요괴 모두 몸에 뭔가 걸친 것들이 있다.

요괴도 보아하니 배주머니에 뭔가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자신이 그 배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낼 수 없다는 것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건 주인에게 주면 주인이 알아서 할 것이다.

아니어도 자신의 잘못은 없는 거고.

혈모원 우두머리는 세 시체를 계곡에 나 있는 동굴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경미후가 태풍을 피하기 위해서 임시로 만들었던 동부가 그 난리 속에서도 무사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동부의 방 하나를 주인을 위한 보물창고로 삼았다.

그리고 넓은 거실을 자신의 거처로 정했다.

이제 일족들 모두를 바위 허상 안쪽의 공터에 모여 살게 하며 좋겠다.

우끽끼 우끽끼! 우끽끼 우끽끼!

혈모원 우두머리는 쓰러진 나무 대신에 일족이 머물 안전한 공간을 찾았고, 주인에게 줄 귀한 것들도 챙겨 기분이 좋았다.

서둘러 부하들을 찾아가는 혈모원 우두머리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우쭐우쭐 춤을 추고 있었다.

* * *

“각자 떨어져 동부를 세우고 수련을 하자는 말씀인가요?”

공여려가 뾰족한 목소리로 건우에게 물었다.

“청옥비선은 지금으로선 너와 내가 힘을 모아도 운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요? 그래서 사형이나 저, 둘 중에 아무라도 축기기는 되어야 청옥비선을 쓸 수 있다는 거잖아요.”

“옳다. 그래서 서로 수행에 집중하자는 것인데, 너는 그것이 불만인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십여 리나 떨어진 곳에 따로 동부를 마련할 이유가 없잖아요.”

“너는 수속성을 수련해야 하고, 나는 목속성을 수련해야 한다. 그러니 그에 맞는 곳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

“사형도 수속성 영근을 가지고 있잖아요.”

“하지만 내가 가장 높은 수련 경지를 가진 것은 목영근이지. 축기기에 이르기 위해선 당연히 그 목영근에 집중하는 것이 옳고.”

“아이, 정말. 왜 그렇게 고집이 센지 모르겠네요. 그냥 가까운 곳에서 함께 수련을 해도 좋을 텐데요.”

“네 스승님이자 어머니인 경미후 사숙께서 너와 내가 쌍수수련을 하라고 하셨지.”

건우는 문득 쌍수수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공여려가 움찔하며 살짝 기세가 꺾였다.

“그런데 너는 쌍수수련비법이 완합종의 거처에 있어서 지금은 그것을 행할 수가 없다고 했다.”

“설마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아니, 네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쌍수수련을 할 것이 아니면 너와 내가 가까이 있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어째서요?”

“네가 그 이유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수련에 잡념이 끼어서 좋을 것이 있더냐?”

건우는 살짝 날카로운 목소리로 공여려를 질책했다.

그러자 공여려가 움찔하며 머리를 어깨 사이로 숨겼다.

“쌍수수련은 함께 수련을 하는 것인 모양이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각자의 수련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절대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하고.”

“하지만 망망대해, 지도에도 없는 작은 섬에 사형과 제가 단 둘이 있는데 조금 가까이 있는 것도 좋지 않아요?”

“고집 피우지 마라. 어차피 아무도 없는 섬. 위험 또한 없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알아서 경지를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꾸나. 어차피 너와 나는 비슷한 수련 경지라 서로 조언을 해 줄 상황도 아니니 각자 알아서 수련을 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 벽창호네요.”

“어서 축기에 올라 청옥비선을 부릴 수 있어야 종문으로도 돌아갈 것이 아니냐.”

“알았어요! 알았으니 그만하세요.”

“각자 수련에 힘쓰고 누구든 축기기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찾아가기로 하자. 그 전에는 절대 서로를 찾지 않기로 맹세하고.”

건우는 막무가내에 제멋대로의 성향이 있는 공여려에게 확실한 선을 그었다.

공여려는 축기기에 오르기 전에는 서로를 찾지 말자는 건우의 말에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연신기 중기인 자신과 완경인 건우.

따지고 보면 건우의 말은 건우 자신이 축기기에 오를 때까지 공여려에게 찾아오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두보 봐요. 내가 사형보다 먼저 축기기에 오르고 말 테니까. 저에겐 사부와 사숙이 준 수련 영단들이 잔뜩 있다고요! 정말 두고 봐요!”

공여려는 그렇게 ‘빽’ 소리를 지르고는 곧바로 둔술을 펼쳐 하얀 빛을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건우는 공여려가 그녀의 수련동이 있는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수련을 하는데 함께 붙어 있을 이유가 뭐람. 최대한 수련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동부를 만들자는데 왜 저리 앙탈인지 모르겠네.’

공여려는 어떻게든 건우를 가까이 두고 부려먹을 생각을 한 것이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건우는 공여려의 앙큼한 속내를 짐작조차 못했다.

‘자, 이제 간단하게 굴이나 파 볼까? 어차피 공여려가 찾아온다고 해도 전실 공간만 보이면 될 테니, 다른 공간은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지.’

수련은 아공간에서 하면 된다.

건우에겐 애써 수련 공간을 만드는 수고를 할 이유가 없다.

그저 나중에 공여려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꾸미면 끝이었다.

건우는 토속성의 영력을 움직여 절벽을 파고, 넓은 전실 공간과 그곳과 연결된 방들 몇 개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방들은 공간만 만들었을 뿐 공을 들이지 않았다.

그저 동부 입구에만 겹겹이 보호 금제와 방어 금제를 둘렀다.

그것을 위해서 건우는 몇 남지 않은 하급 영석까지 사용했다.

아공간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혹시라도 동부에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시간을 끌어줄 정도는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중급이나 상급 영석은 손대지 않았다.

그것들은 아공간에 넣어두고 경진후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겨우 연신기의 낮은 수준에선 제대로 쓰지도 못할 귀물이기도 하고.

- 어서 오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렇게 대충 준비를 마치고 건우가 아공간에 들어가자 루야가 쪼르르 다가와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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