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34화 (34/499)

33.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건우를 제자로 받아들인 경진후는 곧바로 일행을 이끌고 한민 장로의 거처였던 무너진 전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태풍을 막는 진법을 전각 폐허 위에 깔고는 전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경진후의 손짓 한 번에 이리저리 목재들이 날아갔다.

그렇게 큰 덩어리들이 정리 되자 거기에 경미후의 괴뢰들이 들어가 세세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인간 형태의 괴뢰는 경미후의 손짓에 따라서 세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건우는 그 도자기 괴뢰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경미후가 자주 괴뢰들을 조작하기 위해 영기를 뿌리는 것 때문이었다.

수시로 그렇게 조작을 해 줘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괴뢰가 수동적이란 의미였다.

‘내가 가진 괴뢰술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것 보다는 나은 괴뢰를 만들 수 있겠군. 그럼 괴뢰술이 기록된 옥간도 가벼히 여길 것은 아닌 모양이네.’

건우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수도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모자란 것을 깨닫고 반성했다.

건우와 공여려는 두 수사가 전각을 헤집는 동안 뒤쪽에서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공여려가 심심했는지 건우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에헴, 이제 같은 종문의 사형제가 되었으니 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되겠군요?”

“너는 이전부터 나를 오빠라 하지 않았느냐.”

“그야 그렇지만 이건 공식과 비공식의 차이가 있다고요. 그 때는 허락을 못 받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허락을 받은 것과 같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아직은 아니지. 종문의 정식 허락은 아직 받지 않은 거니까.”

“헤, 그래도 사부와 사숙께선 정식으로 인정을 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은 거예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하자꾸나.”

건우는 공여려라는 아이가 꽤나 고집쟁이에 제멋대로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굳이 사소한 문제를 따져가며 심력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건우는 경진후와 경미후가 자신을 의심할 거리를 찾아내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이 더 급했다.

혹시라도 경진후가 건우가 챙긴 다른 물건들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여기 대천세계의 수사들의 능력은 워낙 다양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건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초초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경진후와 경미후를 지켜보았다.

“사형, 이건 그림의 일부였던 거 같은데요?”

그 때, 경미후의 괴뢰가 무언가 발견해서 가지고 왔다.

경미후는 그것을 받아들어 살피고는 경진후에게 말했다.

경진후도 경미후에게 다가와 그것을 받아 의념을 불어 넣어 보았다.

“음, 뭔가 법술을 심어 놓았던 거 같다만, 워낙 오래 되어 그 기운이 모두 사라졌구나.”

“그렇죠? 단순한 그림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기운이 다했다. 게다가 워낙 훼손이 심해서 복원은 불가능하겠구나. 원래 무슨 법술이 들어 있었는지 알 수도 없겠고.”

“그렇죠. 아쉽네요.”

원래 최면 대법을 비롯한 몇 가지 법술이 들어 있던 초상화였지만 경진후와 경미후는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건우는 뒤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각 안에 다른 비밀 공간이 있었다 했는데, 그것도 전각이 무너지면서 망가졌구나. 이래서는 뭔가를 찾는 것은 어렵겠다.”

“그러네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없어 보여요. 전각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이곳 계곡 전체에 깔려 있는 진법이나 금제, 괴뢰 같은 것에도 얻을 것은 없어요.”

“1만 년의 시간이면 성단기 수사에게도 긴 시간이지. 우리 같은 축기기의 저계 수사들에겐 수십 번의 생을 거듭할 시간이고.”

“그러네요. 성단기라 해도 고작 천 년을 조금 넘게 살 수 있을 뿐인데, 1만 년의 시간이라니.”

“되었다. 그렇게 실망할 것은 없다. 수도계의 수사들이 대도에 들어 무엇을 원하느냐? 모두가 선계에 들어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기를 꿈꾸지 않더냐. 우리도 그 큰 길에 올라섰으니 언젠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경미후에게 그렇게 말하는 경진후의 표정은 엄숙하기 짝이 없었다.

수도계 수사로서 대도의 끝에 닿는 바람을 이야기하는데 가벼운 마음을 품을 수는 없었으리라.

“네, 사형.”

“자, 그럼 이제 여기는 그만 마무리를 하자꾸나. 한민 장로께서 다른 곳에 수련 동부를 만드셨을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단서는 여기 없는 것 같구나.”

“아깝네요.”

“나도 그렇다만, 그래도 한민 장로의 수련 공법 하나라도 얻었으니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은 있다.”

“호호. 게다가 제법 쓸 만해 보이는 제자도 하나 얻으셨지요.”

“그래, 어쩌면 저 녀석이 오히려 세절도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일지도 모르지.”

경진후의 시선이 공여려와 나란히 서 있는 건우에게로 향했다.

“연신기 완경의 제자가 공으로 생겼으니 종문에서 나오는 지원도 더 커지겠군요. 한민 장로의 수련 공법을 종문에 바치고 얻을 보상도 여전히 기대가 되고요.”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원정이었다.”

“그럼 이만 정리를 하고 돌아가실 건가요?”

“음, 그래도 세절도가 오래 고립되어 찾는 수사들이 없었다면 쓸 만한 수련 자원이 있지 않겠느냐? 태풍이 그치면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거 같구나.”

“아, 그렇겠군요. 알았어요.”

경미후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전각 폐허를 발굴하는 괴뢰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괴뢰들이 곧바로 계곡 끄트머리의 절벽으로 몰려가 굴을 파기 시작했다.

* * *

태풍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그 중간에는 태풍이 특히 거칠어진 때가 있었는데, 경미후가 만든 동부가 아니었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건우가 슬쩍 혈모원 두목과 의식 연결을 해 보니 혈모원들의 보금자리인 거대한 나무가 태풍에 쓰러져 땅에 누워 버렸다.

그 때문에 혈모원들이 한 바탕 난리가 났지만, 그래도 쓰러진 나무가 어디로 날아간 것은 아니어서 어찌어찌 나무속의 거처에서 버텨 내긴 한 모양이었다.

건우는 혈모원 우두머리와 의식 연결이 된 김에, 앞으로 계속 수련 자원을 모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약초나 영초를 재배하는 것에 대해서 명령을 내렸다.

이제 녹각독랑이 사라진 상황이니, 그 영역까지 더해서 관리를 하며 과거에 파헤친 영천을 복원해서 주변에 약초와 영초를 기르는 밭을 일구게 한 것이다.

건우는 그것을 위해서 약초와 영초를 재배하는 방법을 전하고 아울러서 한민 수사의 진염결과 둔술을 혈모원 우두머리의 머리에 각인시켰다.

어차피 건우가 분혼을 지니고 있으니 혈모원 우두머리는 언제까지나 건우의 부림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마음 같아서는 혈모원 우두머리를 완합종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마땅한 핑계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곳 세절도에 머물며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풀어둘 생각이었다.

물론 혹시라도 약초와 영초를 무사히 길러낸다면 이후 언제고 다시 찾아와 거두어 가면 될 일이었다.

혈모원 우두머리도 그 대가로 건우에게 수련 공법과 둔술을 전해 받았으니 수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건우는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건우 사형, 뭐해?”

건우가 그렇게 혈모원 우두머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진염결 수련에 들려는데 공여려가 찾아왔다.

경미후가 만든 동부에는 중앙에 커다란 거실이 있고, 각각 따로 뚫린 방들이 몇 개 있었다.

건우는 그 중에 하나를 받아서 태풍이 그칠 때까지 지내도록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사실 지금은 스승이 된 경진후가 건우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시켜야 마땅한 때지만 경진후와 경미후는 한민 장로의 수련 공법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때문에 건우도 홀로 지내며 아공간에서 혈모원 우두머리의 분혼을 꺼내서 주변 정리를 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겨우 일을 마무리 했다 싶은데 공여려가 불쑥 건우의 거처에 나타났다.

거처에 설치된 금제 덕분에 거처로 오는 사람을 미리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금제는 경미후가 동부를 만들고 난 후, 각 거처마다 기본적으로 달아준 것이었다.

“어쩐 일이냐? 사부님께서 부를 때까지는 조용히 수련을 하고 있으라 하지 않으셨더냐.”

건우는 그리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공여려를 맞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경진후와 경미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들이 건우를 완합종의 제가로 받아주기로 했지만, 그 대신 공간낭을 가지고 갔다.

경진후는 그후, 아직까지 건우의 공간낭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공간낭이 무척 귀한 물건인 때문이었다.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것도 있지만, 넣은 물건들의 상태를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기능도 함께 들어 있는 공간낭.

그것은 하위 수사들에겐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사실 경진후가 가진 공간낭도 그에 비해선 떨어지는 급이었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건우에게 돌려주지 않으려는 심보도 있었다.

건우도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고, 경진후나 경미후가 자신에게 마냥 호의를 지닌 것이 아니란 사실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중에 살가운 척 다가오는 공여려도 왠지 꺼려지는 건우였다.

철이 없고, 제멋대로에 고집까지 센 공여려는 며칠 지켜보는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 참, 내가 온 게 싫어요?”

건우의 퉁명한 반응에 공여려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애교를 부렸다.

상체를 숙이고 슬쩍 몸을 뒤트는 공여려.

건우는 공여려의 몸짓에서 아이가 아닌 여인의 교태를 읽어냈다.

“네가 온 것이 싫은 것이 아니라, 사부님의 명이 지엄한데 딴 짓을 할 수는 없어서 그런다. 내가 사부님을 모신 것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사부의 명에 태만할 수는 없지 않으냐?”

건우는 그럴 듯한 핑계를 만들어 공여려를 설득하려 했다.

“쳇! 재미없네. 됐어요. 그리고 나도 그냥 온 건 아니에요. 사부님과 사숙께서 수련을 마치고 나오셔서 사형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온 거예요.”

“뭐?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길 해?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빨리 말을 했어야지. 어서 가자. 사부님께서 기다리시겠구나.”

공여려의 말에 건우는 깜짝 놀란 듯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를 나섰다.

건우가 거처를 나서자 곧바로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그곳에 경진후와 경미후가 나란히 돌로 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주변 모습이 확 바뀐 것은 각각의 방을 따로 분리시키는 기본적인 금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수련을 해야 하는데 밖의 기척이 들리면 집중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수사들이 거처를 만들 때에는 각각의 방에 기본적으로 기척을 감추고 공간을 나누는 금제를 걸어두기 마련이다.

“부르셨습니까? 제자 건우가 스승님을 뵙습니다. 제자 건우가 미후 사숙님을 뵙습니다.”

건우는 둘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 건우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경진후와 경미후가 흡족한 표정으로 건우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수련은 좀 했고?”

경진후가 세상 밝은 표정으로 건우를 보며 물었다.

나름 진염결 수련에서 성과가 있었기에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것은 함께 수련한 경미후 역기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마음을 쉽게 가다듬지 못해 제대로 수련을 하지 못했습니다.”

건우는 그런 경진후와 경미후 앞에 고개를 숙이며 송구한 듯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하하. 괜찮아. 당연히 그렇겠지. 갑자기 우리를 만나고 또 완합종의 제자가 되었으니 쉽게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너의 공간낭을 가지고 가서 돌려주지 않으니 그것도 마음이 쓰였을 것이고.”

“아, 아닙니다. 스승님. 어찌 제자가 스승님의 일에 불만을 가지겠습니까.”

건우는 경진후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며 두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그리 애쓸 것 없다. 그런 마음이야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

이번에는 건우도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음, 일단 이것은 네게 돌려주마.”

그런 건우에게 경진후가 공간낭을 내밀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건우가 빼앗겼던 공간낭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도 대부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가 달라졌는데 그것은 진염결이 수록된 옥간이었다.

그 옥간만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건우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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