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32화 (32/499)

31. 이거슨 밑장 빼기가 아니라 밑장 깔기여

“저 녀석은 뭐지?”

“입은 옷을 보니 설상잠의 실로 짠 장삼입니다. 옷의 문양엔 장로의 표식이 있어요.”

“연신기 수준이 본 종의 장로일 수는 없으니 어디서 주워 입었다는 소리겠군.”

“당연히 이곳 세절도에 있었다는 한민이란 객경장로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한민 장로의 후계라 봐야 하는 건가?”

“그 분이 윤회에 든 것이 벌써 오래 전일 텐데, 저 아이가 한민 장로의 후예일 수는 없겠지요. 그저 이곳에서 한민 장로가 남긴 것을 수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럼 어쩐다?”

“어쩌긴 뭘 어쩐단 말입니까? 감히 본 종의 장로께서 남긴 것을 탐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지요.”

“으음. 그래야 할까?”

“뭐든 한민 장로께서 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사형과 제가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완합종의 정당한 제자이니 당연한 일이지요.”

“하하. 그야 그렇다만, 일단은 상황을 보자꾸나.”

“네? 상황을 보자구요?”

“그래, 저 녀석의 경지를 보아하니 이제 겨우 연신기 완경이다. 그러니 우리가 나선다면 제 놈이 뭘 할 수 있겠느냐.”

“그냥 잡아서 가진 것을 내어 놓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허어, 그랬다가 어디 다른 곳에 숨겨 두기라도 했으면?”

“그야 추혼술이 괜히 있는 것이겠습니까. 혼의 기억을 읽어 알아내면 될 일이지요.”

“끝내 방법이 없다면 그 수도 있긴 하지. 하지만 저 놈의 의지가 강하다면 추혼술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경지도 고작해야 축기기에 불과한데 범인도 아닌 놈에게 추혼술이 제대로 먹히겠느냐?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저 놈이 감히 여려와 저리 다정히 있으니······.”

“보아하니 여려가 진법에 빠진 것을 구해 준 모양인데 그리 못마땅하게 볼 것이야 있겠느냐.”

“아니 사형!”

“왜? 우리처럼 가약을 맺어 함께 수련하는 수도 있지 않느냐.”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딱 봐도 고작 3영근의 자질이 아닙니까. 우리 여려가 쌍영근에 속성이 비슷한 영근을 지녀 수련 자질이 뛰어난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요.”

“그래도 3영근이면 그리 처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종의 많은 제자들 중에 놓아도 상위에 놓을 자질이 아니냐.”

“그래도 여려의 짝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경미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경미후를 보며 경진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나도 마땅치 않겠구나?”

“네?”

“나 역시 너보다는 수련자질이 떨어지지 않느냐.”

“아니, 사형이 어때서요? 저와 같은 3영근이 아닙니까.”

“하지만 나는 영근 속성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 있어서 수련을 쌓기 번거로운 면이 있지. 그에 비해서 미후 너는 서로 보완되는 속성을 지녔고.”

“하지만 사형과 제가 하나가 되어 수련을 하면 그 모두를 상생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형이 제게 부족할 것이 무에 있습니까?”

“그러면서 저 녀석은 어찌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누? 봐라 목속성에 토와 수가 아니냐. 여려가 수속성과 빙속성을 지녔으니 그리 나쁜 속성 궁합은 아니니라.”

“자꾸 이러실 겁니까?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 여려에게 쌍수(雙手)수련(修練)을 시킬 거라면 저 녀석 보다는 나은 자질을 찾아 볼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 참, 네 뜻이 정히 그렇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지. 알았다 더는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마.”

“그런데 듣자하니 사형께선 저 녀석이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경미후가 뭔가 깨달은 듯이 경진후를 추궁하듯 쳐다보며 물었다.

“나도 아직 제자가 없으니 괜찮지 않으냐. 벌써 연신기 완경에 이르러 있으니 내가 잠시 제자로 거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면서 저 녀석이 한민 장로에게 얻은 것은 고스란히 내 놓게 하시고요?”

“내가 스승이 되어 끌어주자면 녀석이 얻은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저 녀석을 종문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수행 대도의 길을 열어주는데 그만한 대가를 받는 것이 과하진 않지.”

“호호. 알았어요. 사형께서 그런 계획이 있으시다면 저도 더는 간섭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한민 장로의 보물이 있다면 당연히 저와 나누셔야 합니다.”

“그야 이를 말이냐. 너와 나는 어차피 하나로 묶여 쌍수수련을 하는 몸이다. 서로가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내가 너를 빼고 무슨 욕심을 부리겠느냐?”

“그거야 저도 알지요.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래, 우리는 항상 하나와 같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 아무렴요 사형.”

경미후는 슬쩍 눈웃음을 치며 경진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런 두 사람이 있는 곳은 구궁연무살진이 펼쳐진 계곡 위였다.

태풍은 여전히 거세게 비바람을 뿌리고 간혹 낙뢰를 떨어뜨렸지만 두 사람은 반투명한 우윳빛 보호막 안에서 태연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진법 안은 원래 보이지 않아야 했지만 두 사람 역시 구궁연무살진을 알고 있었기에 진법의 안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계곡에 펼쳐진 구궁연무살진은 미흡한 부분이 많아서 그들 입장에서는 조잡하게까지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안력을 돋우어 바라보는 건너편 절벽 아래, 건우와 공여려가 제법 넓게 파인 공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말씀이군요?”

공여려가 건우를 보며 물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집은 작은 마을의 촌장집이었던 것 같다. 몇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 넷째 정도였고.”

“그래서요?”

“어찌하다 내게 수련 자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 아마도 집안에 전해지던 고서 중에 선도 수련과 관계된 책이 있었던 모양이지.”

“아, 그런 기연이 있었군요. 범인들 사이에선 그 정도도 큰 기연이지요.”

“그래서 책을 통해서 영기 느끼고 세신(洗身), 그러니까 몸을 씻어 내는 법을 배웠지.”

“그것이 연신기로 가는 첫 걸음이지요.”

“그래, 그렇게 나도 모르게 대도에 발을 디뎠지만 사실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에 불과했다.”

“저도 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영기를 느끼게 된 이들은 대부분 이후에 수도계의 수사들에게 발견되어 대도행(大道行)을 시작하게 된다고요.”

“그래? 그렇게 된단 말이지? 하지만 나는 조금 운이 없었던 모양인지 질이 좋지 않은 선배를 만났던 모양이다.”

“네?”

“그게 정확하진 않은데 나를 몸종으로 부리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던 모양인데, 그 당시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아, 누군가 오빠에게 정신 금제를 걸었던 모양이네요. 일종의 괴뢰처럼 부려 먹으려고요.”

“나도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건 그러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바로 이 섬에 있었지.”

“여기 이 유적이요?”

“아니, 여긴 아니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숲에서 정신이 들었단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 때는 몸을 가릴 실오라기 하나 없었지.”

“어머나!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커어엄. 그리 놀리지 말거라.”

“놀리긴요, 그냥 깜짝 놀라서 여쭤본 거지요.”

“그러면서도 그 눈빛이 무척 장난스럽구나.”

“호호호.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그래서요? 실오라기 하나 없는 상황에서요?”

“커어엄. 이유도 모르고 숲에 떨어졌으니 이리저리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숲을 헤매고 다녔지. 그러다가 우연히 이곳 계곡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나를 살린 거다.”

“아, 다행이네요. 그래서 그 옷도 구한 거군요?”

“옷 이야긴 그만 하거라. 너는 무척 장난스러운 데가 있구나.”

“호호호.”

“이미 네가 말한 바도 있지만 이곳 구궁연무살진은 사실 그 때는 거의 허물어진 상태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단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이십사주환상대진도 모두 무너진 상태였지.”

“다른 진법이 또 있다고요?”

“복원을 하지 못했으니 지금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어쨌건 그런 덕분에 완합종의 객경장로였다는 선배 수사의 배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엔 이미 승천하셔서 해골만 남은 선배까지 찾을 수 있었지.”

“아, 그렇군요. 그런데 선배는 어쩌다 돌아가셨데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원래는 다른 곳으로 수련을 떠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막상 선배의 유해를 발견했으니 중간 과정은 나도 알 길이 없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가 후배를 위해서 옥간을 남겨두셨지. 그걸 내가 얻은 거다. 옥간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완합종에 대한 설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배 수사가 익힌 공법들에 대한 거였지. 그런데 그런 배려를 하고 떠나셨다던 선배가 유골이 되어 발견되었단 말이지.”

“아, 그렇군요.”

“분명 옥간에는 그걸 남기신 선배가 이 섬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신다고 했다.”

“그런데 유해가 나왔다는 이야기죠?”

“어느 정도 수련을 해서 연신기 중기 경지에 올랐을 때, 전각의 숨겨진 공간에서 유해를 발견했지.”

“그 유해가 장로님이란 건 어떻게 아셨어요?”

“커엄. 이 옷 때문이다. 그 분의 초상화가 대전에 걸려 있었는데 이 옷을 해골이 걸치고 있었으니 같은 분이란 것을 알았지.”

“그럼 그 한민 장로님의 보물들도 오빠가 얻으셨겠네요?”

“보물?”

“네. 그 분이 성단기의 장로님이었으니 꽤나 많은 보물을 지니고 계셨을 텐데요.”

“에이, 무슨. 나는 그 분이 남긴 텅 빈 공간낭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그 공간낭에는 몇 개의 영석만 들어 있었지. 물론 그 외에 다른 재료들도 많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모두 공간낭에서도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썩어 가루가 되었더구나.”

“네? 겨우 영석 몇 개라고요?”

“다른 것은 이 장삼과 선배 수사의 유해, 그 분이 깔고 앉았던 방석, 작은 나무 탁자가 전부지. 아, 그 전에 후배를 위한 거라며 남겨 두셨던 옥간 두 개를 거기에 더해야 되겠구나.”

“에? 정말요? 고작 그것 밖에 없었다고요?”

“그게 적다는 것이냐? 그 정도면 굉장하지 않으냐? 무려 영석이 수십 개나 되었는데?"

"하지만 무려 성단기 완경에 이른 장로님이었다고요. 그런 분의 재물로는 너무 작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인 것을 어쩌겠느냐. 그리고 옥간에서 이르기를 그 분께서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수련을 가신다 하셨다. 아마도 보물이 있었다면 챙겨서 떠나시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비밀공간에서 유해를 발견했다면서요?”

“음. 그랬지. 하지만 그 유해 곁에는 아무것도 없었단다. 이 옷이 전부였지. 하물며 신고 있던 신발조차 가루가 되어 바스라질 정도였지. 어쩌면 보물이 있었다 해도 다른 곳에 두신 것이 아닐까?”

“아, 아깝네요. 저는 뭔가 엄청난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요.”

공여려가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아련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봤다.

제 멋대로 상상에 빠진 공여려의 모습에 건우는 살짝 혀를 차고 말았다.

보면 볼수록 정신이 산만한 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리저리 끼워 맞춘 이야기에 허점은 없는지 속으로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건우였다.

건우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달린 공간낭을 더듬었다.

그 안에는 서른 개가 조금 안 되는 영석과 나무탁자와 방석이 들어 있었고, 완합종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는 옥간과 해골 수사의 수련 공법이 적현 옥간만 들어 있었다.

그 외에 연단술이 기록된 옥간이나 해골 수사가 따로 가지고 있던 색색의 옥간은 아공간에 그대로 둔 상태였다.

그리고 처음 얻었던 세 가지 옥간 중에서 연단술에 대한 옥간을 굳이 숨긴 것은 화정을 넣은 연단로에 대한 기록 때문이었다.

그것을 누군가 보게 된다면 당연히 연단로와 연단로를 열 수 있는 열쇠인 봉을 빼앗아 갈 것이다.

그래서 건우는 공간낭에 빼앗겨도 크게 손해가 없을 것들만 넣고, 그에 맞춰 이야기를 꾸며 낸 것이다.

분명 이 꼬마의 사부와 사숙이 찾아올 것이니 그에 대비를 해 두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밑밥 깔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런 계획은 숨어서 둘을 살피고 있는 경진후와 경미후에게 그런대로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그 장로님이 남긴 옥간과 영석을 가지고 수련을 하신 거예요?”

“그렇지. 그게 벌써 제법 되었다. 몇 년을 꼼짝도 않고 수련에만 매달렸지.”

“몇 년이라고요?”

“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꽤 되었을 걸? 그보다 더 되었을까? 솔직히 수련에 빠져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말이다.”

“에이, 몇 년이 뭐가 긴 시간이에요? 한 번 수련을 하면 수십 년을 잡고 하는 것이 보통인데요.”

“수십 년을? 아니 어떻게 그렇게 오래 수련을 하고 있을 수가 있지?”

“호호호. 확실히 오빠는 수도계의 수사로 자각이 부족하네요.”

“자각이 부족해?”

“그렇잖아요. 연신기 완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축기에 오르기만 해도 수명이 500년으로 늘어날 텐데, 고작 몇 십 년의 수련으로 그와 같은 수명 연장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리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음, 그건 그렇구나.”

“그러니 하는 말이지요. 제 사부님이나 사숙께선 한 번 수련을 하시면 수십 년은 기본이라 하셨는데요. 저도 연신기 중기에 오르느라 제법 긴 시간을 폐관한 적도 있고요.”

“사부님과 사숙?”

“네, 우리 사부님과 사숙께서는 쌍수······.”

“여려야! 어찌 그리 입을 가벼이 놀리는 것이냐?”

“쯧, 사매는 여려 저 녀석을 반드시 혼을 내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사형.”

“아, 사부, 사숙!”

공여려가 사부와 사숙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두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내며 호통을 쳤다.

공여려는 자신을 혼내는 두 사람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반겼다.

건우는 그들이 바로 공여려의 사부와 사숙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공여려의 사부가 여자란 사실에 조금 놀랐다.

사부와 사숙이란 소리만 들었지 둘이 남녀로 성별이 다르단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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