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완합종의 수사들이 나타났다
“수미산겨자씨.”
건우는 그렇게 조용히 뇌까리고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있는 수미산겨자씨를 바라봤다.
원래는 작은 겨자씨 모양이었던 것이 지금은 산 모양의 수석처럼 보인다.
작지만 오밀조밀 세밀함이 살아 있는 산의 모습.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그 형상이 흐릿하고 모호해지며 존재감마저 줄어든다.
결국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으로 두고 봐야 하는 대상이 수미산겨자씨다.
- 그러니까요, 수미겨자씨와 의식 연계를 이루고 죽은 것처럼 변했잖아요. 게다가 건우 님은 수미산에서 100일 넘게 있다가 왔다고 했고요.
루야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건우의 말을 재촉했다.
“잘 기억이 안 난다. 뭔가 엄청난 것을 봤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그저 63빌딩보다 큰 비석을 봤던 기억이 있고, 그 뒤엔 스승에게 끌려가 목영근 수련을 했다는 것이 전부다.”
- 거대한 비석, 스승, 목영근 수련이요?
“정리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하지만 그 사이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아, 수미선문. 비석에 새겨져 있던 이름이 그것이고, 내 스승이란 사람과 나, 그러니까 수미겨자씨 속에 있는 어린 나는 그 수미선문에 속해 있었다.”
- 꿈 같은 걸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실제로 내가 수미겨자씨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기억 밖에 없으니까.”
- 그래요?
“그래, 그 안의 소년 건우는 목영근 수련 경지가 연신기 완경이었는데, 축기기로 넘어가는 도전을 했지. 실패하긴 했지만.”
- 그런데 건우 님의 목영근 수련 경지는 수미겨자씨와 의식 연계를 이루기 전후가 같았다는 거군요? 그래서 꿈과 같다고 하신 거고요.
“물론 정말 꿈하곤 다르겠지. 내가 목영근 수련법을 완전하게 얻은 걸 보면.”
- 뭔가 비밀이 많으네요. 건우 님의 수련 경지에 맞춰서 영기를 생산하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의식 연결로 건우님을 끌어가는 것도 그렇고. 참, 그런데 지금도 의식 연결을 할 수 있는 건가요?
루야의 물음에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가볍게 시도를 해 봤지만 수미겨자씨는 건우의 의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념이 파고들어야 연계를 이룰 수 있으니 지금으로선 확실히 불가능했다.
“의념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 그러니 의식 연결도 불가능하지.”
- 그렇군요. 그럼 그것도 뭔가 방법이 있거나 조건이 있겠네요.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알 수 있겠지.”
-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음? 뭘?”
건우는 루야의 말뜻을 짐작하지 못해서 멀뚱히 되물었다.
- 굉장한 목영근 수련법을 얻으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다른 영근들 때문에 수련을······. 아!”
- 어휴, 영근들을 격리 분할 시켜 놨으니까 목영근 수련에 걸림돌이 없잖아요. 그걸 이제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목영근 수련에 집중을 할 거냐고 묻는 거네?”
- 그런 거죠. 다만 문제는 밖에 있는 늑댄데, 그걸 마무리 하고 수련을 하실지 어떨지 묻는 거예요.
“음, 그 놈 팔팔한 거 보니까 쉽게 잡힐 놈은 아닌 거 같던데? 그냥두고 수련이나 할······. 이것도 아니네. 그 원숭이 녀석 열흘 정도 후면 오지 않나?”
- 그냥 오지 말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그 정도 거리면 분혼을 통해서 명령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건우의 말에 루야가 다시 방법을 제시했다.
건우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결국 당장은 목영근 수련에 집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수도계의 수사가 가장 바라는 것은 경지의 상승이었다.
건우는 지금 연신기 완경의 수사였다.
하지만 건우의 영근 여덟 종류는 모두가 연신기 중기 수준에 머문 상태.
건우가 연신기 완경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것일 뿐, 진염결이란 특이한 수련 공법 덕분에 의식의 힘이 강해서 연신기 완경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 상태에서 축기기로 넘어가려면 영근들 중에 하나라도 축기 초기로 끌어 올려야 한다.
같은 연신기라면 중기의 영근으로도 육체는 완경까지 이룰 수 있다.
건우가 진염결의 공능으로 연신기 완경에 이른 것이 그 예였다.
하지만 연신기를 넘어 축기기가 되려면 반드시 축기 수준의 영근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건우에게 바로 그 방법이 생겼다.
그것도 높은 확률을 가진 가능성이.
“그래, 뭐니 뭐니 해도 수련 경지를 올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원숭이 놈은 그냥 채집이나 시켜서 수련에 도움이 될 자원이나 마련하라고 하고, 나는 당분간 목영근 수련에 집중해야겠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 축기의 경지를 이루고 싶다.”
- 그 뽕 맞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으신 거죠?
“법열이라니까.”
- 딱 걸렸거든요? 진짜 사람이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완전 맛이 간 표정이었다고요.
“시끄럽고!”
- 조금만 불리하면 매번 그런 식이죠.
“아무튼 원숭이 놈은 채집이나 시키고, 늑대는 당분간 그대로 구궁연무살진에 가둬두고. 나는 한동안 수련을 해야겠다.”
- 원숭이에겐 무슨 채집을 시키실 건데요?
“목영근 수련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영단을 만들어 봐야지. 그 재료들을 모아보라 할 거다.”
- 하긴 목영근이면 풀쪼가리들이 주재료니까 나쁘지 않겠네요. 그 두목 원숭이 밑에 작은 원숭이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놈을 멀티의 일꾼으로 택한 거 아니냐. 음, 늑대까지 잡으면 그 놈은 행동대장으로 삼으면 될까?”
- 잡념이 드시는 모양이네요. 수련이나 하시죠.
“음? 그래, 그러자.”
건우는 루야에게 원숭이의 분혼을 가지고 오게 해서 분혼을 통해 숲에서 요양중인 혈모원 우두머리에게 명령을 전했다.
의식으로 전해지는 명령은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건우의 생각이 곧바로 혈모원 우두머리에게 전해졌고,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에 맞춰서 부하 원숭이들을 부리기 시작했다.
몸이 나으면 혈모원 우두머리도 직접 나서서 건우의 명령을 수행할 것이다.
그렇게 일처리를 한 건우는 잠시 아공간을 열어 녹각독랑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수미겨자씨 밑에 자세를 잡고 수련을 시작했다.
* * *
“사숙, 저기가 그 세절도(歲切島)입니까?”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중년의 사내를 보며 물었다.
질문을 받은 중년 사내는 비행법기인 청옥비선(靑玉飛船)의 선수 아래쪽으로 보이는 섬에 시선을 두었다.
원형에 가까운 섬은 중앙에 높은 산이 있고, 북쪽이 옴폭하게 파여 나간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비행법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보는 것이라 섬의 전체적인 모양이 드러나지만 실제로 세절도라 불리는 섬은 지름이 천 리가 넘는다.
작다고 할 규모는 아닌 셈이다.
물론 큰 섬이나 대륙에 비하면 모래알 같다고 할 수준이지만 다도해역에서는 무시할 크기는 아니다.
다만 섬의 위치가 워낙 해역의 외각에 있고, 근처에 다른 섬들이 없어서 찾는 이들이 드물어서 종종 수사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지곤 하는 섬이다.
이번 나들이도 중년 수사, 경진후가 종문의 오래된 기록에서 세절도란 섬에 대한 기록을 발견해서 나오게 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세절도에 과거 종문의 장로 한 사람이 수련 거처를 꾸렸다고 했다.
그런데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연을 끊은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경진후는 그 기록이 이상했다.
아무리 외부에서 들어온 객경장로라 하더라도 장로에 대한 기록이 그렇게 맥없이 끊길 수는 없다.
그래서 다시 살펴보니 그 시기에 완합종이 다른 종파와 큰 싸움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에 많은 기록들이 소실되어 결국 객경장로 한민에 대한 것도 전해지지 못한 것이었다.
“옳다. 저 아래가 바로 세절도가 분명하다.”
경진후는 질문을 던지고 기다리는 공여려의 강렬한 눈빛에 대답이 늦었음을 깨닫고 그렇게 대답했다.
공여려는 사매인 경미후의 제자로 이번 나들이에 떼를 써서 싸라온 연신기 중기의 아이였다.
“그럼 사부님을 모셔 와야 하지 않을까요?”
공여려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사매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경진후가 그렇게 대답을 하는 순간 산들바람이 일어나며 공여려의 곁에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20대 후반의 외모를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 수사 경미후였다.
경진후와 경미후, 공여려는 모두 백색의 천에 은과 금으로 수를 놓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건우가 해골 수사에게서 얻었던 설상잠의 실로 짠 옷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사실 그들이 모두 완합종에 속한 수사들이니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비록 해골 수사가 죽은 지 벌써 1만년 이상이 흐르긴 했지만, 수도계의 시간은 범인들의 시간보다는 느린 듯, 변화가 그리 빠르지 않은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섬 어디에 선배의 수련거처가 있을까요?”
경미후가 눈빛을 반짝이며 사형인 경진후에게 물었다.
이번 나들이의 정보를 제공한 것이 경진후였으니 그에게 묻는 것이 당연할 일이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경진후도 시원한 답은 해 주기는 어려웠다.
그가 아는 것은 1만 년 전쯤에 이곳 세절도에 완합종의 객경장로 한민이란 수사가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거기에 조금 더하자면 그 장로가 갑자기 연락이 끊긴 것으로 봐서는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짐작 정도였다.
“오래 전의 기록이라 상세하진 않았다. 그저 성단 후기의 경지에 올랐던 분으로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원영기에 도전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사숙, 그럼 어떻게 해요?”
공여려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쩌긴, 조심스럽게 섬을 살펴야지.”
“조심스럽게요?”
“나나 네 사부나 결국 축기기의 수사일 뿐이다. 이곳 세절도에 단을 이룬 성단기의 존재가 없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느냐. 그러니 매사 조심스럽게 행동을 해야지.”
“네? 성단기 수사가요? 그런 분이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고요?”
사숙인 경진후의 말에 공여려가 깜짝 놀라 눈을 똥그랗게 떴다.
성단기 수사란 소리에 어지간히 놀란 모습이었다.
“꼭 인간 수사만 수사겠느냐? 너는 지금껏 종문 안에서만 지내서 그리 생각이 좁아진 모양인데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건 네 사숙의 말이 옳다. 수도계에서 인간 수사의 위치는 그리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이곳 다도해역에서야 인간 수사가 성세를 이루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선 기를 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진후의 따끔한 한 마디에 공여려의 스승인 경미후도 가르침을 더했다.
그들의 말처럼 공여려는 어려서부터 완합종에서 자랐기에 세상 물정에 많이 어두웠다.
“그럼 이 섬에 인간 수사가 아닌 다른 수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공여려는 도리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눈빛을 빛냈다.
“쯧, 오랜 세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지만 과거의 기록에 의하면 이 세절도에는 제법 많은 영물, 영수, 마수, 괴수, 요수가 있었다. 그런 것들이 세월에 의지해 수련을 쌓았다면 능히 단을 이루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지.”
경진후는 다시 한 번 어린 제자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공여려는 여전히 호기심 넘치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 사매, 이번 여행에서 저 녀석의 버릇을 좀 고쳐줘야겠다.
- 네? 여려의 버릇을요?
- 고작 연신기 중기에 겨우 발을 걸친 주제에 세상 무서운 것을 모르니, 이후에 저런 성격으로는 큰 화를 입을 것이야.
- 알겠어요. 무슨 말씀인지.
- 그러니 저 녀석 홀로 섬에 버려두고 어찌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좋겠어. 그러자면 마땅한 변명거리가 있어야겠지?
- 네, 마침 저기 멀리서 태풍이 불어오는 모양이니, 청옥비선에 문제가 생겨 추락을 하면 되겠군요.
- 너와 나는 청옥비선과 함께 날려가는 것으로 하자꾸나.
- 호호. 그럼 여려만 빼고 저희 둘은 청옥비선의 보호 금제 안에 갇혀야겠군요?
- 태풍에 먼 곳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이곳을 찾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테지. 그 동안 여려는 혼자 섬에서 지내야 할 것이고.
- 어머나 가엾어라. 혼자 어찌 지낼지 걱정이네요. 호호 하지만 재미는 있겠네요.
짧은 순간 경진후와 경미후 사이에 공여려의 버릇을 잡기 위한 계획이 급조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마침 검은 비구름과 함께 엄청난 바람이 청옥비선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스승님, 태풍이 오고 있어요. 어서 섬으로 내려가요.”
공여려가 그것을 발견하고 급히 스승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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