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수미세계의 반사된 그림자, 반영세계
- 무슨 일이세요?
건우의 색다른 반응에 루야가 쪼르르 다가왔다.
“수미겨자씨에 변화가 생겼다.”
- 변화요? 왜요? 이전보다 영기가 더 짙게 나와요?
수미산겨자씨는 건우의 성장, 정확하게는 영근들의 성장에 따라서 조금씩 뿜어내는 영기의 질이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 건우의 아공간 안쪽은 인계의 평균 영기 농도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수미산겨자씨가 영기를 뿜어내도 그것이 아공간에 그대로 계속 쌓이지는 않는 탓이다.
수미산겨자씨와 아공간 사이에는 일종의 영기 순환이 일어난다.
그래서 아공간 내의 영기 농도는 항상 비슷하게 유지가 되고 있었다.
루야는 건우의 말을 듣고 그 영기 농도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물어본 것이다.
“그런 게 아니야. 저 수미겨자씨에 내 의념이 스며들었어.”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지금까지는 이빨도 안 먹혔잖아요. 아주 그냥 철벽처럼 막혔던 거 아니었어요?
“분명 그랬지.”
건우는 자신의 영근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영근은 곧 또 다른 건우 자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미산겨자씨와도 소통이 가능할까 싶어서 몇 번이나 의식 연결을 시도했었고, 그건 최근까지도 계속 하고 있던 일이었다.
안 된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어떻게든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수미산겨자씨에 의념이 흘러들었다.
그러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 괜찮을까요?
루야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런 루야의 빛은 낮은 조도로 어두운 색을 띄고 있었다.
“일단 느낌이 나쁘진 않았어. 뭐라고 할까? 마치 옥간에 의식이 연결될 때와 비슷한 느낌? 그랬던 거 같아.”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미산겨자씨와 의식 연계를 이루었던 건우는 그 순간의 상황을 그렇게 파악했다.
- 그래도 의식이 빨려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정말 곤란할 수도 있다고요.
“그렇다고 수련을 안 할 수도 없잖아. 게다가 여긴 내 의념공간이기도 해. 밖에서 수련을 한다고 해도 의념 공간을 계속 닫아두고 있을 수는 없지. 그래선 수련이고 뭐고 의미가 없으니까.”
- 그건 그러네요. 건우님이 무슨 수련을 하든지 의념 공간과 의식이 연결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런 상황에서 수미산겨자씨와 자동으로 의식 연결이 되는 거면 피할 방법도 없고요.
“그래, 지금 상황이 바로 그런 거지. 그러니까 결국······.”
-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네요. 그럼 즐기셔야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나 그거 무지 싫어하는데. 그래봐야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거잖아. 씁!”
건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눈을 감았다.
수련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수미산겨자씨와 정면으로 마주해 보리라 결심한 것이다.
* * *
건우가 수련을 시작하자 그의 의식이 진공청소기에 빨려 드는 공기처럼 수미산겨자씨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깐의 어지러움을 느낀 후, 건우는 거대한 비석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비석은 건우가 저 쪽 세상에서 봤던 가장 큰 빌딩보다도 컸다.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비석에는 수미선문(須彌禪門), 이 네 글자가 돋을새김으로 쓰여 있었다.
“무슨 비석이 저렇게······.”
하지만 비석은 단지 그 글자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비석을 꾸미고 있는 현묘한 문양들은 건우로선 감히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이치를 품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저 글씨, 아니 비석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 비석을 스치는 바람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법칙을 품지 않은 것이 없어. 어떻게 저럴 수가······.”
건우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감탄만 터트렸다.
데에에에에엥!
“커억! 쿨럭!”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엄청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종소리는 건우를 찍어 누르며 건우의 의식을 비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날려 보냈다.
“아, 안 돼!”
건우는 비석에서 멀어질수록 조금 전까지 비석에서 보고 느끼며 깨달았던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건우는 그것이 너무도 서러웠다.
마치 어미의 품속에서 쫓겨나는 어린 아이의 심정과도 같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조차도 지금의 서러움에는 비하지 못할 거 같았다.
그렇게 건우는 다시 한 번 까무룩, 어지럼증을 느꼈다.
“여긴 또 어디야?”
정신을 차린 건우가 주변을 둘러봤다.
“뭐 하는 것이냐? 서둘러라!”
그런 건우에게 누군가 호통을 쳤다.
건우는 그 사람이 배불뚝이에 대머리, 장비 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란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가 아니라면 저렇듯 사납게 눈알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진 않을 테니까.
또 주변엔 그 사내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저,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개복치, 쫄보 건우는 조심스럽게 사내에게 물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상황을 만났으면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보아하니 지금 건우의 몸은 원래 자신의 몸도 아니었다.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어린 아이, 열 살을 겨우 넘겼을까 싶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진염결을 익혀 의식의 힘이 강하고 굳건해지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에서 당황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공황상태에 빠지진 않았으니 차분하게 상황 파악을 해 볼 일이다.
“건우 이 놈! 무슨 일이라니! 네 놈이 그간의 수련에서 성취를 얻었다고 시험을 청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무슨 일을 해야 하냐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여쭌 것은 첫 시험의 내용이 어찌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허어, 그걸 왜 묻는단 말이냐? 네가 영근 수련에 성취가 있어 시험에 응했으니 당연히 목영근 시험장으로 가서 시험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아, 그렇게 된 것이군요.”
“이놈, 오늘 정말 어디 다른 곳에 정신을 놓고 온 것이더냐?! 냉큼 따르거라.”
건우의 대처가 적절하지 못했던지 사내는 불만스런 표정을 감추지 않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건우의 시험을 중지시킬 권한은 없었던지 앞장서서 건우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갈색 둔광을 흘리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건우가 따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건우도 사내의 뒤를 쫓아 둔술을 펼쳤다.
완합종의 공법들이 들어 있는 백색 옥간에서 배운 둔술이었다.
그런데 막상 둔술을 펼치고 보니 소년 건우의 몸에는 영근이 목영근 하나뿐이었다.
팔영근은 지닌 건우와 달리 이곳의 소년 건우는 단일 영근을 지니고 있는 기재였던 것이다.
건우는 원래 사내가 시험장으로 안내하는 것이 정상인지, 아니면 시험 응시자가 스스로 시험장을 찾아가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사내가 시험장으로 데려다 준다니 다행이라 여기며 조심스럽게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건우 네가 어린 나이에 높은 수련 성취를 얻은 것은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네가 단일 영근을 지녀 수련 진도가 빠르다고 해서 방만한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내는 앞서 가면서도 뒤따르는 건우의 기척을 살피며 조언을 해 주었다.
건우는 그 말에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주려는 듯하니 고맙게 받아들일 일이다.
게다가 사내가 말을 많이 할수록 이곳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수미선문에도 일영근을 지닌 제자는 수 천 년에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제자라 하더라도 결국 단을 만들지도 못하고 끝을 보는 일이 허다하다.”
건우는 단을 만든다는 말이 성단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이제 겨우 연신기에 불과한 저계 수사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성단기란 그야말로 까마득한 하늘일 수밖에.
“네가 이제 목영근으로 축기에 도전하려 한다니 이 스승의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으나, 한 번에 축기에 성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더욱 정진해서 다음에 성공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스스로 건우의 스승이라 하니 건우도 그에 맞춰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내 이름이 건우인 것으로 봐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곳은 아닌 듯한데.’
건우는 자신이 수미선문이라고 하는 문파의 제자란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시험장으로 가는 동안에 자신이 거대한 산맥의 어느 곳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어린 몸은 대체 누굴까? 정말 신기하네. 단일 영근을 지녔다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거였군.’
건우는 둔술로 몸을 날리면서 몸 안에서 휘도는 영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목영근 하나만 지닌 소년 건우는 그 영근을 온전히 연신기 완경의 수준까지 키워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근을 이용해서 영기를 돌리는 소년 건우는 팔영근의 건우보다 훨씬 크고 강한 영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요 꼬맹이보다 못하네. 그것 참.’
건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스스로를 나무랐다.
“자, 저기가 시험장이다. 알고 있겠지만 시험이라고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저 시험장에 가득한 목기(木氣)를 이용해서 경지를 끌어 올리면 되는 것이다.”
“저곳에서 공법 수련을 통해 축기를 이루란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하지 않더냐. 대신 네게 주어진 시간은 100일이다. 그 동안에 축기기에 오르지 못하면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크게 실망할 것은 아니다.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니 기회는 많을 것이다.”
“네, 스승님.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가지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래, 그러면 되었다. 이제 가 보거라.”
장비 수염의 스승은 이번엔 건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고는 건우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건우는 지구에서라면 소설 속의 세계수라고 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향해 떠밀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그 거대한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나도 모르는 공법인데?”
그리고 건우는 소년 건우가 수련하는 공법이 낯설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자칫 공법 수련을 망칠 뻔 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수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건 목영근을 키우는데 적합한 수련 공법이다. 다른 것에는 쓸모가 없어도 영근을 성장시키는 데에는 최고의 수련 공법인 거 같다.’
건우는 소년 건우의 수련을 통해 새로운 수련 공법을 익히며 기뻐했다.
하지만 소년 건우는 100일이 되도록 결국 축기기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100일 동안 멀찍이 떨어져 소년 건우의 시험을 지켜보던 장비 수염 스승이 낙담한 소년 건우를 데리고 시험장을 떠났다.
그리고 소년 건우가 떠난 자리에 건우가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 소년 건우의 몸에서 의식이 분리되어 남은 것이다.
데에에에에에엥!
“커억! 젠장 또?!”
건우는 거대한 종소리에 다시 한 번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신음 소리를 내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 때, 그는 이미 종소리에 떠밀려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건우님, 괜찮으세요? 건우님, 정신 차리세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어지러운 머리를 흔드는 건우를 루야가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건우는 낯선 세상에서 다시 자신의 아공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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