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23화 (23/499)

22. 계곡을 리모델링 해 보자

“그래야지. 솔직히 이대로는 축기기로 올라가기 어렵잖아.”

- 그렇기는 하죠. 영근 여덟 개를 연신기 완경까지 끌어 올려야 하는데, 그것들이 또 제각각 서로 반발하기도 하고. 쫌 문제가 있죠.

“그래도 물량에는 장사 없는 거다. 거기다가 이제 의념공간을 분리하는 것도 가능할 거 같고.”

- 그게 되면 정말 대단한 거죠. 영근들 따로 분리해서 키우면 적어도 반발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솔직히 그게 정말 되면 그건 사기죠. 영근을 여럿 가진 수도자가 제약 없이 각각의 영근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건, 아마 수도계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일 걸요?

“그건 일단 돼 봐야 아는 거로. 지금 당장은 영근을 성장시킬 물량이 필요하잖아. 영단도 만들어야 하고, 각 속성에 맞는 기물이나 영초, 속성석 같은 것도 구해야 하고.”

- 그러려면 역시 영역이 필요하다 그 말씀이죠?

“일단 이 섬부터 손에 넣고 보자는 거지. 원래 여기 해골 선배가 있었을 때에는 선배가 이 섬의 주인이었다고. 그런데 이것들이 선배가 칩거한 후로 하나씩 고개를 들고 나온 거지.”

- 이제 해골 선배의 후예로서 이 섬을 되찾을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말씀인 거죠?

“그런 거지?”

- 우와, 뻔뻔하기가. 그 해골 선배의 유골이 입은 옷을 빼앗아 걸치신 분이 그런 말씀을?

“왜 벗을까?”

- 그 해골 선배의 뼛가루로 연단술도 하시고?

“그건 아직 안 했지. 연단술 하려면 재료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데.”

- 하긴 할 거잖아요. 그러면서 해골 선배의 후계자를 자처하다니.

“원래, 이 수도계가 선후배가 없는 거야. 후배였다가도 경지가 같아지면 맞짱 까는 곳이라고.”

- 그런 거예요?

“연신기는 축기기의 제자 항렬이지만 그 연신기가 축기기 경지에 오르면 같은 항렬로 대접을 받지, 그런데 그 연신기가 다시 축기기에서 성단기로 오르면? 스승이 제자가 되고, 제자였던 수사가 스승이 되는 막장이 벌어지지.”

- 으아아, 정말 막장이네요. 그럼 지금부터 이곳 계곡을 기지로 해서, 점령전을 시작하는 건가요?

“그런 거지. 제일 먼저 그 혈모원들부터 어떻게 해 볼까 하는데 말이지.”

- 되겠어요? 그래도 혈모원 우두머리가 축기기 괴순데요?

“경지 한 단계가 크긴 하지. 하지만 나는 수사, 그 원숭이는 아직 괴수. 그 차이도 작진 않아.”

- 불안한데요?

“경지는 내가 낮아도 지식은 내가 앞서지. 연신기 완기지만 축기기를 잡을 수단이 아주 없지는 않아. 더구나 나에겐 영석이 꽤나 많이 있지.”

- 영석으로 뭘 하려는 건데요?

“영석을 이용하면 내 경지를 뛰어넘는 진법금제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내가 익힌 진염결이 의식을 강하게 키우는 장점이 있잖아. 비록 축기기 수사에겐 부족할지 몰라도 연신기 완경 중에선 내 의식의 힘을 능가할 수사는 거의 없을 거야.”

- 의식의 힘이 강하니 영기를 조율하는 힘도 강해서 경지가 높은 술법이나 진법금제 같은 것도 어떻게든 재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래.”

- 일단은 믿어 드릴께요. 그래도 조심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누구냐? 자그마치 성단기 완경에 이른 해골 수사의 후계 아니냐. 루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해골 선배에게 배운 것들이 꽤나 많다.”

- 그거 언제 풀어서 나한테 알려줄 거예요? 옥간 내용을 알려준다고 했잖아요?

“그건 좀 기다려라. 내가 옥간을 읽기는 잘 하는데, 옥간을 만드는 것을 서툴다. 이게 또 연습이 많이 필요한 건데, 너도 알다시피 연습에 쓸 옥간도 없잖냐.”

- 어휴, 거짓말을 하는 거면 확하고 엎겠는데 또 그 말이 사실이니 그럴 수도 없고.

루야가 느릿하게 빛을 줄였다가 늘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잖아. 솔직히 옥간에 들어 있는 내용을 입으로 옮겨서 알려 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옥간 하나에 수천 권의 책이 들었다고 봐야하는데 그게 되겠냐고.”

- 네네 알아들었어요. 어서 나가서 할 일이나 하러 가시죠.

건우의 변명에 루야는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건우에게서 멀어져 아공간 끄트머리로 가버렸다.

건우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아공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영역 확장을 위해서 계곡 리모델링을 해야 할 때였다.

* * *

“이런 씁, 쓸게 없네. 쓸게 없어.”

건우는 2층 누각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가며 감탄 아닌 탄식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잠시 등을 돌려 2층 누각을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엔 아직 괜찮아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너질 건물이었다.

벽에 붙어 있던 초상화도 사라졌고, 비밀 공간에 있던 해골도 없어졌다.

그 둘이 그나마 누각을 지탱하던 축이었는데, 그것들이 사라졌으니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꽤나 신경 써서 만든 건물인데 말이지. 2층을 감쪽같이 숨길 정도로 신경 써서.”

해골 선사가 최후를 맞은 비밀 공간.

그곳이 바로 누각의 2층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2층에 오를 방법을 보이지 않게 만든 건물이었다.

공을 많이 들였다는 이야기다.

“그럼 뭐하냐고. 뜯어서 재활용 할 수 있는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데. 젠장!”

건우를 혀를 차고 다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구궁연무살진이 펼쳐진 곳.

“여긴 어떻게 좀 살려 볼 수 있을까? 아니지, 그 원숭이 새끼가 여길 제 집처럼 오갔단 말이지. 절벽을 타고 다니면 구궁연무살진이고 뭐고 쓸모가 없잖아.”

건우가 잠시 궁리를 하다가 아쉬움에 머리를 긁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빛을 반짝거렸다.

“아니지. 이건 그래도 다시 살릴 수 있겠다. 영석을 사용하면 될 거야. 아직 진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니까.”

영석을 쓰면 어떻게든 될 거 같았다.

물론 구궁연무살진(九宮煙霧殺陣)이 원래 성단기 정도는 되어야 건드려 볼 수 있는 것이라 제 성능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빨간 원숭이 두목 새끼는 잡을 수 있겠지.”

건우는 자신이 진법을 고치면 축기기의 혈모원 두목은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당연히 벽을 타고 진법을 벗어나는 편법은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럼 분명히 쓸 만해 지리라.

“자, 그럼 다음으로 가 볼까?”

건우는 구궁연무살진을 되살리기로 결정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건우가 진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짙은 안개가 피어났다.

건우는 곧바로 안개 속에 몇 가닥의 영기를 쏘아냈다.

그러자 안개가 무력하게 흩어졌다.

진법을 잠시 멈춘 것이다.

“히야, 이게 정말 된다는 말이지. 이런 걸 직접 보면 이곳이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니라 대천세계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니까.”

건우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겨 구궁연무살진을 통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건우의 눈앞에 돌로 포장된 길과 그 길 양쪽에 서 있는 기둥들이 보였다.

좌우 열두 개씩, 모두 스물네 개의 기둥.

원래는 이십사주환상대진(二十四柱幻像大陣)을 이루던 기둥이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씩 기능을 잃다가 끝내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혈모원 우두머리의 난동에 부러져 버렸다.

만약 혈모원 우두머리가 왔을 때, 기둥이 세 개만 남아 있었어도 혈모원 우두머리는 진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혈이 메말라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일정한 공간에 대상을 잡아놓고 끝없이 환상을 보여주며 지치게 만드는 것이 이십사주환상대진이었다.

그 진법이 보여주는 환상은 매우 두렵고 끔찍한 것이어서 대상의 심신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게다가 진법 안의 시간은 무척 빠르게 흘러, 밖에서 한 시간이 흐를 때에 안에서는 하루가 지난 듯이 느낄 정도다.

그만큼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느라 더욱 크게 정기가 고갈되는 것이다.

“저것들도 재활용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결국 새로 기둥을 세우고 영석을 박아야지. 아주 그냥, 고치는 게 아니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지. 게다가 내가 만들면 위력이 확 떨어질 것도 감수해야 하고. 쯧쯔.”

건우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뭘 떠올려도 하나같이 다운그레이드 형태의 결과물만 예상되는 까닭이었다.

물론 그것도 연신기 수준에선 과분하고도 넘칠 것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해골 수사가 성단기 수준에서 만들었던 것들을 떠올려 비교하면 한숨이 나올 수준밖에 안 되는 것도 분명했다.

건우의 걸음은 다시 스물네 개의 기둥 사이를 지나서 계곡 입구로 나아갔다.

물론 그런 중에도 건우는 의념을 넓게 펼쳐서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뭐라도 의심스러운 기척이 있으면 곧바로 아공간으로 뛰어들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건우였다.

그것도 각오라고 할 수 있다면.

“쯧, 저것도 못 쓰네. 못 써.”

이번에는 계곡 입구 양쪽에 버티고 선 석상이었다.

흉악스런 네발 괴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은 한 때, 계곡의 입구를 지키는 믿음직한 괴뢰(傀儡)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괴뢰술을 펼치기 위해서 석상에 녹여 넣었던 영기 재료들은 모두 효과를 잃었다.

게다가 괴뢰의 심장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삭아버렸다.

차라리 손대지 않은 순수한 돌이라면 다른 괴뢰의 재료로 써봄직도 하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괴뢰를 만들어 쓰던 것이라 재활용도 되지 않는다.

건우가 성단기라도 된다면 이전과 꼭 같은 괴뢰술을 펼쳐서 되살릴 수 있겠지만 연신기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계곡 입구의 석상조차도 다시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지금으로선 구궁연무살진만 겨우 어떻게 해 불 수 있겠네?”

다운그레이드 이십사주환상대진도 다시 만들려면 그만한 돌기둥을 깎고 다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돌기둥도 구하기 쉽지 않은 입장이었다.

“일꾼들이 필요해. 항상 그렇지만 손 하나 보다는 둘이 좋고, 둘 보다는 넷이 좋지.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기 보다는 남을 시키는 게 더 좋다는 거야.”

‘물론 믿을 수 없는 놈에게 일을 맡겼다가 뒤통수를 맞는 건 끔찍하니까 알아서 피해야 할 일이지.’

건우는 뒷말을 삼키며 계곡 입구에서 남서쪽 숲을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일꾼이 필요해, 일꾼이.”

* * *

혈모원 우두머리는 문득 떠오르는 해골의 모습에 머리를 흔들었다.

안개가 끼는 계곡 안의 동굴.

그곳에 있는 해골은 가끔씩 혈모원 우두머리를 부르곤 했다.

혈모원 우두머리도 그 현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그 해골을 만나고 두통을 크게 느낀 후로, 우두머리는 깨달았다.

무언가 자신을 조종하려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확신이 생기자 계곡으로 달려가 동굴 벽에 붙은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아무래도 그 그림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날은 비밀 공간의 해골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가야만 할 거 같았지만 억지로 그런 기분을 뿌리치고 계곡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 후로 두통이 더욱 심해지고 그 때마다 해골에게 가려는 마음이 수시로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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