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렇게 또 교훈을 씨게 주시네
- 아무 문제도 없는 거였어요? 그냥 헛고생 한 거예요?
루야가 슬쩍 시비를 걸었지만 건우는 신경 쓰지 않고 공간낭 안의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공간낭에는 굉장히 많은 물품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서 대부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된 것이 많았다.
건우는 혀를 차며 그래도 멀쩡해 보이는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옥간 몇 개와 부적 몇 개가 나오곤 도자기로 된 병 두 개와 광물 몇 개가 이어서 나왔다.
- 그게 전부에요?
루야가 고작 그거냔 투로 물었다.
건우는 고개를 흔들고는 남은 것을 꺼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종류뿐이었다.
- 이게 그거 맞아요? 영석?!
루야가 아공간 바닥에 주르륵 쌓이는 보석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맞아. 영석, 이게 하급 영석, 이건 중급, 이게 상급 영석이다. 이 위로 최상급 영석이 있다는데 여긴 없네. 영석을 다르게는 영찬(靈璨)이라고 하기도 하지. 영기로 반짝이는 옥구슬이란 의미로.”
- 옥처럼은 안 보이는데, 정말 옥이에요?
“영기를 머금은 것이라 일반 옥으로 볼 순 없지. 그냥 영석이라고 따로 구별하는 것이 옳아.”
- 이거 광산에서 캐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수사가 만드는 경우도 있고.
“그래, 천지자연에서 생성되는 영석은 영기가 많은 곳에서 발견이 되지. 그 외엔 수사가 공을 들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영기를 품은 것들을 연화해 녹인 다음 그것으로 영찬을 만드는 거라고.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더라. 최상급 같이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 필요할 때, 상급 영석을 엄청나게 쏟아 부어서 최상급을 만드는 경우가 있긴 하다는데, 그런 경우도 제작 방법에 따라서 효율이 다르다 했지.”
- 어쨌거나 이 영석들이 수도계의 화폐 아에요? 우리 이제 부자 된 거죠?
“화폐로 쓰기도 하지만 수련 자원으로도 많이 쓰지. 급하게 영기를 보충해야 할 때에 영석을 희생해서 영기 충전을 할 수도 있고, 법기나 법보를 만들거나 사용할 때에 쓰기도 하고. 아무튼 쓰임이 굉장히 많은 것은 분명하지.”
- 아무튼 부자 된 거잖아요?
“너하고 나밖에 없는데 부자는 무슨. 그냥 수련에 도움이 되긴 하겠네. 여기저기 쓰이는 곳이 많으니까.”
-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 또 뭐가 들었어요?
루야는 공간낭을 무슨 화수분 보듯 하는 모양이었다.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남은 것은 쓰레기뿐이다. 이 아공간에 꺼내 놓아도 좋을 거 같은 건 없다.”
건우는 공간낭 안을 의식으로 확인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간낭에 들어 있는 것들을 그냥 내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 쓰레기들 사이에 건우가 알아보지 못한 보물이 끼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 그럼 이제 그것들을 확인하면 되는 거에요?
루야는 볼 것이 남지 않았다는 공간낭에서 바로 관심을 끊었다.
건우는 그런 루야의 말에 공간낭에서 꺼내 무릎 앞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바라봤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히 옥간들이었다.
녹색, 백색, 청색, 흑색, 적색으로 각각 색이 다른 옥간들이 하나씩 있었다.
크기도 조금씩 달랐고, 표면에 완합종이란 글씨가 있어 그나마 출처를 알 수 있는 것은 백색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아무 글씨도 없이 아지랑이 같은 무늬만 희미하게 떠 있을 뿐이었다.
“이거부터 확인을 해 보자.”
건우가 그 중에 완합종이란 글씨가 있는 옥간을 들어 올렸다.
* * *
“와, 세상 믿을 놈이 없네.”
건우가 탄식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건우의 손에는 검은색의 옥간이 들려 있었다.
그 옥간에는 아주 위험스러운 법술이 적혀 있었다.
옥간이 검은색이 된 것은 그 내용이 품고 있는 기운이 어둡고 탁하기 때문이었다.
건우도 옥간의 색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색의 옥간들을 보면서 새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건우는 검은색의 옥간을 제일 마지막으로 확인했는데, 그 내용이 기가 막혔다.
일반적으로 수도자의 수명은 그 경지에 따라서 한계가 있다.
연신기의 경지는 200년 정도를 살고 축기기는 500년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수사의 평균 수명을 말한다.
그보다 조금 일찍 죽을 수도 있고, 조금 늦게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수사들은 어떻게든 수명을 늘려서 수련 시간을 더 얻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역천의 수사들이라고 하지만 멋대로 수명을 늘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니 수사들의 수명은 수련 경지에 따라서 급격하게 늘어나지 않던가.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또 다른 수단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천지 법칙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경지에 따른 수명 연장부터가 역천인데, 거기에 더하다니.
하지만 수명 연장에 대한 연구가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사들 중에서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그럴 때에는 다른 사람의 몸을 훔쳐서라도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수도계에 그런 종류의 술법은 꽤나 다양하게 창안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그리 떳떳한 공법은 아니니 비밀스럽게 퍼지긴 했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수사라면 최후의 구명 수단으로 한두 가지의 방법은 알고 있는 것이 그런 류란다.
건우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검은색 옥간의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건우가 화를 내는 이유?
그건 건우가 바로 구명수단의 희생양이 될 뻔했기 때문이다.
“저 밖에 있는 해골 그 놈이 이걸로 수작을 부렸단 말이지.”
- 영혼을 옮긴다고요?
“맞아. 정확하게는 수도자의 혼이지. 범인과는 다르거든.”
- 어떻게 다른데요?
“수도자의 몸은 영기로 연화되어 범인의 탈을 벗어. 그건 알지?”
- 알고 있어요.
“그렇게 몸이 연화될 때, 영혼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그러면서 몸과 영혼이 서로 섞이게 되지.”
- 몸과 영혼이 섞여요?
“계속 들어 봐. 그래서 축기기가 지나고 성단기가 지나고 영체기가 되면 그 때는 완전히 몸과 영혼이 하나 된 상태가 만들어져. 그게 영체(靈體)이야. 성단기 다음의 영체기가 바로 그 영체을 만드는 경지를 말하지.”
- 그거하고 지금 혼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수사는 몸이 죽어도 영혼만 살아 있으면 완전히 수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 혼까지 윤회에 들어야 완전히 죽은 게 되는 거야.”
- 그래서 몸은 죽어도 영혼이 살아 있으면 뭔가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검은 옥간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는 거예요?
“맞아. 아주 무서운 사람인 거지.”
- 정확히 어떻게 된 건데요?
“저 밖에 있는 해골,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선배라고 했던 그 수사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거지. 곧 죽을 상황이 된 거야.”
- 왜요?
“모르지. 아마도 성단기 완경에서 영체기로 오르려다가 실패한 모양이지. 그게 제일 가능성이 커. 아무튼 죽을 상황이 되었다. 이게 팩트.”
- 네. 알았어요.
“그래도 당장 죽기는 싫잖아. 게다가 수명도 많이 남았는데.”
- 몸은 죽어 가는데 자기 수명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몸을 옮기겠다는 생각을 했겠네요?
“그래. 그게 바로 대청에 있는 자화상, 그리고 진염결과 수련용 단약이었지. 마지막으로 비밀 공간에서 기다리는 해골까지.”
-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세요.
“대청에 걸린 자화상은 일종의 최면을 건다. 그것도 수련용 단약이라고 남긴 것과 강력하게 호응을 하면서.”
- 그러니까 단약을 먹으면 그 자화상의 최면에 더 잘, 강하게 걸린다고요?
“그런 거지.”
- 그래서요?
“일단 이곳 대청에 들어온 사람은 연단로와 옥간을 얻겠지. 그리고 선배 수사의 배려에 감사하며 수련을 한단 말이지. 수련에 도움이 된다는 단약도 꿀꺽 삼키고.”
- 그렇겠죠.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면요.
“그렇게 되면 진염공의 성취가 부쩍부쩍 올라가서 어느 수준이 되면 자화상의 최면이 발동된다. 바로 이곳 비밀공간으로 들어가게 하는 거지.”
- 이곳에 와서 해골을 만나게 되면 뭔가 일이 벌어지는 거네요?
“해골에 깃들어 있던 수사의 영혼이 그 불쌍한 희생양의 몸을 차지하는 거지. 이건 빼박이야. 최면과 단약의 효과 때문에 저항도 못하게 되어 있어. 게다가 진염결을 익혔는데 해골 수사의 경지가 더 높잖아? 같은 공법을 익혔기 때문에 경지가 높은 쪽이 우위에 있지. 그냥 훅 가는 거야.”
- 해골이 된 수사가 그런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고요?
“그렇지. 그런 안배를 해 두고 오랜 시간 해골에 잠들어 있었다는 거지.”
- 그런데 어떻게 건우님은 멀쩡한 거죠?
“크크크크.”
루야의 물음에 건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붉은 털 원숭이. 옥간에서 말한 혈모원 때문이지. 그 놈이 단약을 먹었거든.”
- 아, 그래서 건우님이 초상화의 최면에 걸리지 않았군요?
“살짝 걸리긴 했지. 하지만 단약을 먹지 않아서 심하진 않았어. 거기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비밀 공간에 그 원숭이 두목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왔다가 갔다는 거야.”
- 그게 왜요?
“최면에 걸린 원숭이가 들어올 때마다 해골에 깃든 영혼이 원숭이의 몸을 강탈하려는 시도를 했을 거 아냐.”
- 네? 사람도 아닌데 그걸 왜요?
“그것까지는 따질 수 없는 공법이야. 해골에 잠든 영혼은 그저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영혼 강탈을 시도하게 되어 있는 거지.”
- 사람도 아닌 원숭이에게 영혼 강탈을 몇 번이나 시도했다는 말이군요?
“게다가 매번 실패를 했겠지. 대상이 인간이 아니고, 진염결을 익히지도 않았으니까.”
- 하지만 건우님도 해골과 눈빛을 마주쳤다면서요?
“그래. 그게 바로 영혼 강탈을 위한 시도야.”
- 그런데 멀쩡하셨던 이유가 있겠네요?
“응, 해골에 담긴 영혼의 힘이 너무 약해진 거지. 그래서 영혼 강탈이고 뭐고 할 수가 없었던 거야. 배터리가 방전된 해골이었던 거지.”
- 그 밧데리는 원숭이 우두머리가 그렇게 만든 거고요?
“밧데리가 뭐냐 밧데리가, 저렴하게. 아무튼 그것만은 아니야. 원숭이 역할이 크긴 했지만 그보다는 세월의 힘이 더 무서웠을 거야.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난 거지. 아니었으면 해골의 영혼이 원숭이 몸을 차지했을 수도 있고, 내 몸을 차지했을 수도 있어. 조건에 맞지 않더라도 무시하고 결과를 만들어 낼 힘이 있었다면 말이야.”
- 그렇군요.
“아무튼 내가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 뭘요?
“뭐겠냐? 이 대천세계, 엄청 무서운 곳이란 거지. 솔직히 내가 선배 수사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냐? 덕분에 까막눈도 면하고 대천세계에 적응할 수도 있게 되고. 정말 고마운 일이지.”
- 그런데 함정이었네요?
“그런 거지. 와, 저 형님. 정말 마지막까지 크게 교훈을 주시네.”
- 그래서 이젠 괜찮은 건가요?
“뭐, 준비해 둔 수작들이 모두 박살이 났으니 이젠 끝이지. 여기서 더 뭐가 남았으면 저 해골 형님은 정말 갑중 갑이다. 그 정도면 인정해야지.”
- 이젠 건우님이 당해도 인정하시겠다고요?
“아니지. 좀 더 조심하겠다는 이야기지.”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색색의 옥간들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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