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득템 덕에 까막눈 탈출?
건우는 향로와 옥조각들이 제단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 것을 붉은 털 원숭이가 날뛰면서 이리저리 흩어 놓았으리라.
“괜찮겠지?”
건우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붉은 털 원숭이가 날뛴 곳이라면 위험은 없을 법도 했다.
그렇게 짐작을 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세상이라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건우는 우선 옥조각부터 주워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우윳빛의 옥돌은 손가락 두 개를 모아 놓은 크기였다.
납작한 것이 손에 딱 들어올 정도였고 앞뒤에 금색으로 된 무늬가 있었다.
“글씬가? 아니면 그림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 대천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건우였다.
건우는 다시 하나의 옥 조각을 주웠고, 제단으로 다가가 세 번째 옥 조각까지 수습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지금은 그걸 확인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 챙길 것을 챙기고 확인은 나중에 할 일이다.
옥 조각 다음으로 챙긴 것은 향로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향로는 건우의 상체만큼이나 컸다.
영기를 가득 품고 있어서 저번 원숭이의 봉처럼 무거울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가볍게 들렸다.
그것도 곧바로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다음은 벽에 붙어 있는 인물화.
대청에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영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그림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내려고 하다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림이 벽에 붙어 있기는 한데, 어떻게 붙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족자처럼 걸어 놓은 것도 아니고, 벽에 풀칠을 해서 붙인 것도 아니었다.
그림은 아무리 봐도 그냥 붙어 있었다.
이상한 일.
건우는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건드려도 나중에, 일단 챙긴 거부터 확인을 하고.”
건우는 빠르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느낌이 좋지 않은 것을 억지로 건드릴 필요는 없으리라.
그 붉은 털 원숭이조차도 그림은 손도 대지 않았다.
인물화 양 쪽에 다른 그림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원숭이가 그렇게 만든 부분도 있지만, 세월의 흐름을 못 이긴 부분이 더 많아 보였다.
그런데 유독 멀쩡한 그림.
다시 한 번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건우는 뒤쪽으로 대청의 중앙까지 물러났다.
그리고 인물화를 한참 노려보다가 아공간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누각의 대청.
벽에 붙은 인물화 속의 젊은 사람이 건우가 사라진 공간을 노려보는 듯 했다.
* * *
- 수고 하셨어요. 별 일 없었죠?
“일단 밖의 모습부터.”
건우는 들어오자마자 수선을 떠는 루야를 무시하고 곧바로 일부터 시켰다.
아공간 입구를 만들고 은막을 투명하게 했다.
그리고 루야에게 대청의 모습을 볼 수 있게 아공간 입구를 한 바퀴 회전시켰다.
그렇게 하면 대청의 모습 전부를 루야가 볼 수 있다.
그리고 루야는 자신이 본 대청 모습을 먼지 하나까지 기억할 것이다.
다음에 밖으로 나가기 전에 루야의 기억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나가면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 돌 조각 셋, 거기에 화로 하나. 모두 영기를 품고 있긴 한데, 어디 쓰는 물건일까요?
루야가 대청의 모습을 모두 확인하고는 곧바로 건우가 아공간에 던진 물건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
건우는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고는 옥 조각 중에 하나를 들었다.
세 개의 옥은 모두 같은 크기였지만 표면의 무늬는 한쪽 면은 같고, 다른 면은 다 달랐다.
“기억해 놨지?”
건우가 루야를 보며 물었다.
옥 조각이 표면 무늬를 말하는 것이다.
- 물론이죠. 할 일은 하는 루야입니다. 그래야 큰소리도 칠 수 있는 거란 걸 깨달았습니다.
안개지역을 벗어나는데 기여한 덕분에 건우가 어느 정도 양보를 해 준 것을 루야도 안 것이다.
제 몫을 하면 건우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볼까? 이게 뭐 하는 놈인지?”
건우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옥 조각 하나를 들고 조심스럽게 영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기를 따라서 의념이 옥 조각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으윽!”
순간 건우가 신음소리를 내며 옥 조각을 내던졌다.
-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왜요?
루야가 깜짝 놀라서 건우의 주위를 빠르게 오갔다.
“끄응. 깜짝 놀랐네.”
건우는 그런 루야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던져버렸던 옥 조각을 다시 주워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신중하게 영기와 의념을 움직였다.
손에 든 것은 작은 옥 조각에 불과한데 건우의 영기와 의념은 엄청난 공간으로 빨려들었다.
건우가 놀란 것은 옥 조각 안에 광대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머릿속으로 뭔가가 전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놀랍다. 이건 무슨 지식 주입 장치 같은 건가?’
건우는 옥 조각 속의 공간에서 믿기 어려운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옥 조각 안에는 약을 만드는 연단에 대한 지식이 들어 이었다.
그런데 그 지식이 마치 뇌에 정보를 다운로드 하듯이 저장이 되는 것이다.
물론 지식이 건우에게 전해진다고 건우가 그것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칙연산의 기본을 모르는데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연단법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서 대천세계에 대한 기본 지식도 조금 생겨났다.
건우는 점점 심오한 내용으로 들어가는 옥간의 지식 전달을 멈췄다.
얼마나 많은 내용이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뒤에 나올 내용은 머릿속에 넣어 봐야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연단법의 경지가 오른 다음에나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필요하면 언제든 살필 수 있는 내용이니 다른 두 개의 옥 조각에 들어 있는 내용을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에는 어쩌면 이 대천세계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우는 옥 조각과의 의식 연계를 끊고 눈을 떴다.
- 괜찮습니까? 꽤 오래 집중을 하고 있었는데?
“오래?”
- 정확하게 말해 줘요? 여섯 시간 팔분 정도 지났습니다.
“으음. 잠깐이었던 거 같은데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네?”
건우는 살짝 놀랐지만 그 시간에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의 양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건우는 다시 다른 두 개의 옥 조각까지 가지고 와서 세 개의 옥 조각을 모두 무릎 아래에 놓고 그 중에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전에 살펴보지 않은 두 개 중에 하나였다.
건우는 다시 한 번 옥 조각에 영기와 의념을 불어 넣었다.
* * *
“이건 옥간(玉簡)이라고 부른다. 수도계의 수사들이 의념을 이용해서 정보를 저장하여 전달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건우의 말에 루야가 놀란 듯이 빛이 화악 밝아졌다가 흐려지며 물었다.
“이야길 어떻게 들은 거야? 여기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고!”
- 아니 그러니까, 그걸 건우님 당신이 어떻게 읽었느냐는 거죠.
“어떻게 알긴, 옥간은 특별한 금제가 없으면 그 안의 내용을 자동으로 읽을 수 있다고. 의식만 연결하면.”
- 우와, 그런 게 있어요?
“그래. 그리고 안의 내용을 자동으로 머릿속에 전달해 준다.”
- 그 뭐예요? 그냥 옥간? 그것만 있으면 내용을 그냥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쯧,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기억을 시켜준다고 그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더라.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흐려져.”
- 그래도 계속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억시켜주면 빠르게 외울 수 있는 거 아니예요?
“그 말은 맞다. 반복하면 거의 강제로 새기는 것 같은 효과가 있겠지. 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많으면 그것도 곤란하지.”
- 아, 그 조촐한 건우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이죠? 그럼 제가 또 필요하겠네요? 정보집합체인 저는 그런 문제가 없으니까.
“그건 모르지. 이 옥간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보면 되는데?”
- 그건 뭐 재생 한계 같은 거 없어요?
“아, 옥간에 거는 금제 중에 그런 게 있긴 한 거 같더라. 특별한 방식이 아니면 읽을 수 없게 하거나 복사 방지를 해 놓고 몇 번만 읽을 수 있게 하거나. 니 말대로 하면 재생 할 수 있는 횟수를 정해 놓은 거지.”
-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들엔 그런 거 없다는 말씀인가요?
루야가 아쉽다는 듯이 물었다.
“일단은 그러네. 이것들은 일종의 선물 같은 거라서.”
- 선물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여긴 아주 오래 전에 인간 수사가 수련을 하던 수련 동부였는데.”
- 그런데요?
“여기에서 수련하던 선배 수사가.”
- 언제 봤다고 선배예요?
“원래 수도계의 수도자들 사이에선 그렇게 부른단다. 자기보다 경지가 놓은 수사에겐 선배라고 하는 거지.”
- 네, 그렇군요. 그래서 그 선배라는 수사가 선물을 남겼다는 건가요?
“좀 더 들어 봐라.”
- 네.
“그래서, 그 선배는 성단 후기의 수사였던 모양인데, 여기서 수행을 하다가 영체기에 오르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모양이야.”
- 여기서 그냥 하면 안 됐던 거예요?
“여기 수련 환경이 수련 공법과 안 맞았거나 그랬겠지. 여긴 섬이라서 수기(水氣)가 강한 곳이니, 다른 속성의 공법이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긴 자세히 없었어.”
- 그래서 자기 수련 거처를 떠나면서 뭔가를 남겼다는 건가요?
“그렇지. 여기까지 들어오는 후배에게 주는 선물. 대신에 들어오다가 죽어도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거고.”
- 들어오다 죽어도요?
“야, 솔직히 내가 여기까지 온 거, 그거 기적이야.”
- 뭔 소리예요?
“계곡 입구부터 누각 계단까지 금제며 결계가 층층으로 깔렸어. 성단기 중기나 되어야 겨우 뚫어볼 수 있는 곳이었단 소리지.”
- 주인이 성단기 후기라 하지 않았어요?
“영체기를 바라보는 수준이면 성단 중기는 감히 비벼볼 수 없는 수준이란 거지.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 그런데 그 금제며 결계가 다 사라진 거예요?
“맞아. 워낙 오래 되어서 진법이며 술법이며 하는 것들이 모두 망가진 거지. 고작 남은 것이 그 안개였어.”
- 안개도 역시 그런 거였군요?
루야가 놀란 듯이 물었다.
“구궁연무살진(九宮煙霧殺陣)이라는 거다. 아홉 방위의 힘을 조합해서 안개를 만들고 안에 들어온 이를 죽이는 진법이지.”
- 그게 그렇게 위험한 거였어요?
“뭐 제일 위험한 살진이 작동하지 않아서 겨우 살았던 거지. 아니었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죽었어.”
- 살진이란 게 들어온 것을 죽이는 그런 거죠? 그게 죽었다는 건 세월이 흘러서 그런 거구요?
“그렇지. 그거 말고 구궁연무살진 앞쪽에 이십사주환상대진(二十四柱幻像大陣)도 있었어. 그 이십사주환상대진의 마지막 기둥이 깨져서 나는 아무 일 없이 통과했지만.”
- 그 양쪽으로 기둥 열두 개씩 있던 그거요?
“그래. 그건 기둥 하나만 살아 있어도 환각을 보여주는 효과가 유지되는 거거든. 위력이야 기둥 숫자에 따라서 줄거나 늘거나 하지만. 들어오면서 봤지? 제일 마지막 기둥, 부러진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거. 그건 아마 원숭이 놈이 부러뜨리지 않았나 싶어.”
- 그럼 건우님이 그 붉은 털 원숭이 도움을 제법 받은 거네요?
“아니라곤 못하지. 하지만 그 원숭이나 나나, 이곳 계곡의 금제가 제대로 작동했으면 한 방에 훅 가는 거였어.”
- 그럼 지금 말한 거 이외에도 더 있었다는 말씀이에요?
“물론이지. 계곡 입구 양쪽에 있던 석상 기억나냐? 그것도 원래는 석상괴뢰(石像傀儡)라는 건데, 지금은 그냥 돌덩이가 되었고, 바닥에 깔린 포석들에도 금제가 있었는데 없어졌고, 계곡 전체에 일정 높이로는 비행 금제가 있던 것도 힘을 잃었지. 거기에 누각으로 올라오는 마지막 다섯 개의 계단에도 침입자를 막는 술법이 있었다더군.”
- 그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있었으면 건우님 그냥 끝장나는 거였고요?
“그렇지.”
- 다시 한 번 이 대천세계가 무서운 곳이란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진법 하나라도 박살내 준 원숭이 덕을 크게 보긴 했네요.
“그런데 그 원숭이 놈이 중요한 선물 하나를 꿀꺽 한 거 같단 말이지.”
건우가 말 끝에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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