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5화 (15/499)

14. 안개 속에서 한 땀 한 땀

“저봐. 루야 저거 보이냐고.”

- 사과하지 않으시면 파업입니다.

“사과? 뭔 사과?”

- 아까 이렇게 했던 그거 말입니다.

루야가 빛으로 손가락 하나를 펼친 손을 만들어냈다.

“지금 나한테 뻑큐 먹인거냐?”

- 건우님이 좀 전에······.

“난 그런 적 없다.”

- 수도자는 기본적으로 범인과 달라서 치매 따위는 안 걸립니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떼는 인성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그런 험악한 손짓을 했다고?”

- 아니, 없는 이야기를 제가 만들어 냈다는 겁니까?

“니가 오해를 한 거겠지. 무심코 지나간 손동작을.”

- 그럴 리가 없습니다!

“솔직히 이쪽이 훨씬 쉬운데 뭐하러 손가락으로 그러겠냐?”

- 우아악, 하지 마요. 설마 그 지푸라길 치우겠다는 건 아니겠···. 잘못했습니다. 제가 오해를 한 게 확실합니다아.

“그렇지? 너도 생각을 해 봐. 이게 있는데, 뭐하러 그렇게 민망한 손가락질을 하겠냐고.”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간이면 그런 걸 내 놓을······.

“사람 사이에서야 그렇지만, 넌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야외에서 목욕은 어떻게 하냐? 새도 보고 쥐도 보고 그러는데.”

-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샙니까? 아님 쥐예요?

“시끄럽고. 내가 조금 전에 밖에서 열 걸음을 옮겼어. 딱 보고 확인 좀 해 봐.”

- 열 걸음을 걸었다고 하셨어요? 그럴 리가. 혹시 뒷걸음질 치신 거예요?

“니가 보기에도 그렇지? 내가 분명히 열 걸음을 옮겼는데 지금 있는 위치가 왼쪽 대각선으로 서너 걸음 밖에 안 움직인 거란 말이지.”

- 밖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뭐라 말을 못하겠지만 확실히 열 걸음에 이동한 거리론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좀 세밀하게 알아보자고. 이번에도 똑 같은 방향으로 열 걸음 걷고 들어올 거야. 그럼 루야 니가 보고 변화를 체크해 둬.”

- 알았습니다.

“음. 그리고 난 절대로 그런 흉악한 손짓은 안 했다. 그래도 선은 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거든.”

- 일단 믿어 봅니다.

“그래. 우리가 남이냐? 죽을 때까지 떨어질 수 없는 영혼의···.”

- 어디! 진드기 해 보십시오.

“···동반자 아니냐. 커엄.”

건우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아공간 밖으로 나갔다.

- 분명히 진드기라고 하려다가 말 바꾼 거야.

루야가 아공간 안에서 혼자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건우는 다시 돌길 위에 섰고, 피어오르는 안개를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딱, 열 걸음.

그리고 다시 아공간으로 입장해서 루야와 함께 전과 후의 위치를 비교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열 걸음을 걸었다기에는 문제가 있는 이동거리와 방향이 나왔다.

안개 속에서의 이동은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이미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공간에서 보면 건우가 들어온 방향과 반대쪽 방향이 분명히 보이는데 밖에서는 어디로도 뜻하는 대로 갈 수가 없다.

나가서 걸음을 옮기면 제 멋대로 도착지점이 정해진다.

어떤 때에는 열 걸음으로는 절대 이동할 수 없는 먼 거리를 전진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도리어 후퇴하기도 했다.

그 변화에 규칙은 전혀 없어보였다.

“안개 속에 갇힌 거네? 그 시뻘건 원숭이 새끼가 나를 함정에 밀어 넣은 거야! 이 원숭이 새끼!”

건우는 안개 속과 아공간을 넘나들 때마다 신경질을 부렸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규칙이 없어 보여도 뭔가 찾아내지 않으면 평생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판이다.

분명히 뭔가 수가 있을 거다.

건우는 그렇게 믿었고 믿어야만 했다.

* * *

- 이런 걸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하는데?”

- 장인의 손길로 엮은 한 땀, 한 땀의 승리라고 합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한 땀, 한 땀.”

- 그래도 성과가 있었다는 게 어딥니까?

“그 성과, 헛짓을 두 달이나 해서 겨우 감 잡은 거고. 그러고도 다시 100일이나 지나서 이제야 겨우 성공한 거다.”

안개를 벗어나는데 꼬박 다섯 달 하고도 열흘이나 걸렸다.

그리 길지도 않은 돌길.

정확하진 않지만 고작 300미터 정도 될 거리다.

거길 다섯 달이 넘도록 뺑뺑 돌았다는 말이다.

- 그래도 나온 게 어딥니까? 죽을 때까지 못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게 전부 누구 덕?

“끄응. 그래. 확실히 루야 네 힘이 컸다. 그건 쿨하게 인정한다.”

- 그런 태도! 아주 좋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 웃으면서 좋게좋게 지내면.

“그래, 그렇게 하자. 싸워 봐야 뭐 하겠냐. 끙차, 이젠 또 나가 봐야지?”

- 조심하십시오. 앞에 또 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 조심해야지.”

건우는 루야의 걱정 어린 배웅을 받으며 아공간 밖으로 나섰다.

안개가 피어나는 돌길.

그곳에는 큰 비밀이 있었다.

일정한 순서로 발을 옮기지 않으면 계속해서 일정 범위 안을 헤매게 되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건우나 루야는 진법의 진도 모르는 상황.

그래서 두 달 동안이나 안개 속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장 작은 단위부터 변화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것이 안개를 벗어나는 열쇠가 되었다.

한 걸음.

딱 한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변화를 살폈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각 한 걸음씩.

그리고 그 다음에는 두 걸음씩.

또 다음에는 한 걸음 딛고 방향을 바꿔서 한 걸음.

그런 식으로 가능한 모든 이동 방법을 실험하고 그 결과를 기록했다.

걷는 것은 건우가 걷고 이후에 나타는 현상은 루야가 기억하는 방법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아공간을 드나들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일정한 방향으로 걸음 숫자를 맞춰야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알아낸 것이 하루 전, 그리고 안개 속을 빠져 나온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사실 300미터 거리를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십분.

다섯 달이 넘도록 갇혀 있던 곳에서 그렇게 겨우 빠져 나온 것이다.

그러니 탈출에 대한 지분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루야의 힘이 컸다.

건우가 루야의 건방진 언행을 이번만은 참아주고 있는 이유였다.

“풀밭과 연못 그리고 2층 누각이라.”

건우는 자신이 가야 할 방향, 즉 계곡 안쪽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안개 지역을 벗어나면서 확인했던 모습이지만 이제부터는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입장이었다.

포장된 돌길은 곧게 뻗어서 2층 누각의 입구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누각을 바라본 상태로 길의 오른쪽에는 넓게 풀밭이 무성했고, 길 왼쪽에는 계곡의 절벽이 가까이 있었다.

그 왼쪽 절벽 밑에는 깎은 돌과 자연석을 섞어서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계곡의 전체 모습은 오른쪽 절벽이 사뭇 멀리까지 빙 돌아서 크게 공간을 만든 후, 누각의 뒤쪽을 지나 길 왼쪽 벽과 만나는 모양이었다.

계곡은 전형적인 호리병 모양인 셈이다.

결국 입구만 막히면 들지도 나지도 못할 지형이다.

건우는 심호흡을 하고 의념을 넓게 펼쳤다.

의식의 힘이 퍼져 나가며 계곡 안의 모든 것을 건우에게 알려줬다.

“일단은 고요하네.”

의념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없다.

안개 속에서 제약이 심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그곳에선 의식의 힘이 뻗지 못하고 안개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러니 안개 속을 살필 수가 없어 더더욱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의념을 가로막는 것이 하나도 없다.

건우가 용감하게 누각으로 가 보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건우는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안개지역에서 고생을 격하게 하고 나니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다.

돌길은 제 멋대로 생긴 옅은 회색의 판석을 깔아 만들었다.

세월의 흐름에 간혹 쪼개진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크게 상한 곳은 없다.

그런 길이 2층 누각의 입구까지 곧바로 이어진다.

누각은 높은 단 위에 올라 앉아 있는데 돌길 끝에는 그 단을 오르는 다섯 개의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을 오르면 두어 걸음 앞에 양쪽으로 열리는 나무문이 있었다.

건우의 걸음은 바로 그곳에서 멈췄다.

다섯 개의 계단 앞이었다.

“으음, 괜찮겠지?”

건우는 발꿈치를 들고 계단 너머로 누각의 안쪽을 살폈다.

나무로 된 문 한 짝이 기우뚱하게 열려 있는 상태라 누각의 대청 내부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난장판이네.”

안쪽을 바라본 건우의 첫인상은 그랬다.

대청은 두 줄의 기둥으로 삼분 되어 있었다.

두 줄의 기둥은 각각 네 개씩이었는데 다행히 부러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대청 끝에 있는 제단 위에 있어야 할 향로가 대청의 바닥에서 뒹굴고 있고, 벽을 장식하던 그림들은 귀퉁이 곳곳이 찢겨 있었다.

그나마 정면 벽의 중앙, 즉 제단 뒤쪽 벽에 붙은 인물화 하나가 온전할 뿐이다.

게다가 건우가 난장판이라 한 이유는 더 있었다.

대청 바닥 여기저기가 푹푹 꺼지고, 의자들이 부서진 상태로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바탕 난리법석이 난 것은 분명했다.

“원숭이 새끼!”

건우는 대청에서 난동을 부린 것이 붉은 털 원숭이 두목임을 짐작했다.

대청 바닥에 원숭이 발 모양으로 뚫린 구멍들이 여럿 보였다.

그 외에 박살난 의자나 찢어진 그림들은 일을 당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을 속살의 색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세월의 때가 묻은 겉 표면과 새로 드러난 속살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원숭이 새끼가 여기도 또 무슨 함정을 파 놓지는 않았겠지?”

건우는 안개지역을 만든 것이 원숭이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하는 의심에 의념을 더욱 강하게 펼치며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라? 안으로 들어오니까 확 달라지네?”

그런데 대청에 발을 디디자 밖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의념을 자극했다.

“영기를 품은 것들이 제법 많은데?”

건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뭔가 득템의 느낌이 강하게 왔다.

건우의 시선이 빠르게 대청 안을 훑었다.

의념으로 파악한 영기들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확인을 하는 것이다.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걸린 인물화였다.

제단 위쪽에 걸려 있는 인물화는 실제와 같은 크기로 그려진 것이었다.

기암괴석이라 부를 바위를 깔고 앉아 한 다리는 늘이고 한 다리는 허벅지 위로 올려 접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선비들이 입었을 것 같은 소매가 넓은 한복이었다.

물론 건우가 기억하는 한복과는 조금 달랐지만 현대적인 복장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빛이 바래긴 했지만 녹색 바탕에 금색의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대청을 내려다보는 모습.

바로 그 그림에서 영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제단 아래에서 뒹굴고 있는 향로.

이상한 것은 옆으로 누워 뒹구는 향로의 뚜껑이 닫혀 있는 상태라는 것.

세 개의 발을 가진 향로는 흑금색의 금속으로 되어 있었는데 표면에 복잡한 여러 문양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 외에 세 개의 옥 조각이 영기를 품고 있었는데 하나는 제단 위에 있었고, 다른 두 개는 대청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