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4화 (14/499)

13. 유적! 덴저러스한 유적!

“아무리 봐도 생각을 잘못한 거 같지?”

- 그런 거 같습니다.

“저거 은근히 나를 한 방향으로 유인하는 건데?”

- 북동쪽입니다.

“그 방향으로 가면, 여기 있는 두 봉우리 사이지?”

건우의 손가락이 루야가 만든 지도의 한 부분을 콕 찍었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이라 두루뭉술하게 지형만 대충 나와 있지만 두 개의 봉우리가 마주보고 있는 곳이었다.

다만 두 봉우리 사이에 안개가 가득해서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두 개의 산봉우리만 안개인지 운해인지, 그 위에 섬처럼 떠 있는 곳이었다.

- 지금까지 지나온 경로를 고려하면 그 두 산봉우리 사이로 가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루야도 건우와 생각이 같았다.

“함정일까?”

-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요즘 그 원숭이가 하는 짓을 보면 적대적인 태도는 없는 듯합니다.

“그런가?”

- 확신은 아니지만 느낌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공간이 있으니 위험은 어찌어찌 피할 수 있겠지?”

건우는 원숭이가 유인을 한다면 거기에 따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한동안 지켜본 결과 원숭이가 별로 위험하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그래도 주변 정찰을 더 세심하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특히 눈으로만 하지 말고 의식을 넓게 펼쳐서 살펴야 합니다.

“그게 쉽냐? 아공간 안에서 밖으로 의념을 펼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냐?”

- 그게 전부 수련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와서 수도자가 되었으면 수련이 답인 거 아니겠습니까?

“젠장. 아무튼 저 두목 원숭이 놈이 그냥 저러는 건 아닐 거야. 함정이든 아니든, 뭔 짓을 하려는 건지 한 번 알아보자.”

- 그건 대놓고 원숭이를 따라 가겠다는 뜻인 거죠?

“시간 끌면서 쫓아가 봐야 뭐 하겠어? 나를 끌고 가고 싶은 모양이니 한 번 끌려가 보지 뭐.”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건우의 행동은 그 후로도 그리 변한 것이 없었다.

조심, 또 조심.

이전에 열 걸음 걸었던 것을 이제 한 걸음 더 걷는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전보다 빨라지긴 빨라진 걸까?

끼끼끼이 끽끽끼이이익!

‘성질 같아서는 그냥 확 잡아서 머리통을 뽑아버리고 싶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몇 번이고 그런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이 일 때마다 인간 수사의 배후에 있을 위협을 떠올렸다.

산을 부수고 태우고 녹이는 능력을 지닌 존재.

저 놈이 사라지면 그런 존재가 이곳을 찾아와 자신과 자신의 무리를 모두 쳐 죽일 것이다.

그러니 참고, 또 참으며 저 놈을 그 동굴로 안내해야 한다.

끼끼끼

‘제발 그 동굴에서 일을 무사히 마치고 떠나줘야 할 텐데.’

우두머리 혈모원의 바람은 오직 그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주워 먹은 알약과 잃어버린 몽둥이에 대해선 자신도 모르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 누구도 자신이 그 동굴에 들어갔다 온 것은 모른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답이다.

혹시라도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또 그 때 생각해 볼 문제다.

솔직히 지금도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프다.

끼이이이이

‘잘 되어야 할 텐데.’

* * *

“어라? 저거 보여?”

건우는 아공간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안개에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계곡 안쪽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붉은 털 원숭이 두목이 저 앞쪽에서 사라진 것이 벌써 사흘 전이다.

그 놈은 건우와 루야의 예상대로 두 개의 산봉우리 사이로 건우를 데리고 와서는 안개가 가득한 계곡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목적지가 그 계곡이란 사실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쫄보 건우는 안개 가득한 계곡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개가 가득하면 당연히 시야가 좁아진다.

그럼 상황 대처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느닷없이 달려드는 뭔가에 순삭 당할 수가 있다는 소리다.

게다가 안개 안쪽으로는 의념도 제대로 뻗지 못했다.

뭔가 건우의 의식을 방해하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곡 입구에서 머문 것이 벌써 사흘이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 날씨가 좋더니 안개가 제법 걷혔다.

이전엔 해가 머리 위에 떠올라도 자욱하게 끼어서 흩어지지 않던 안개가 오늘은 왠지 흐릿해지더니 안쪽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쪽의 모습은 건우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런 곳에 유적이 있어?”

건우가 보기엔 영락없이 그곳은 분명히 유적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유적.

길을 따라 세운 돌기둥은 여기저기 무너져 있고, 계곡 입구 양쪽에 서 있는 거대한 짐승 조각상은 배와 다리에 검은 이끼를 가득 둘렀다.

건우는 계곡의 초입부터 돌로 잘 다듬은 길이 안쪽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안개가 그 안쪽까지 모두 걷힌 것은 아니어서 더 많은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바닥까지 돌로 포장을 해 둔 것을 보면 안쪽에 제법 그럴듯한 유적이 있을 것은 분명했다.

“봉도 아마 원숭이 놈이 저 안에서 가지고 온 거겠지?”

-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럼 그 붉은 털 원숭이 두목은?”

- 네? 무슨 말이에요? 왜 또 말의 맥락이 널뛰기를 해요?

루야가 건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그 놈이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느냐고 묻는 거야.”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혹시 그런 걸까?”

-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요?

“저기 안에 오래전에 죽은 해골이 있는 거지.”

- 그래서요?

“그 해골이 기르던 원숭이가 있었는데······.”

- 그 원숭이가 지금 그 두목 원숭이요?

“에이, 여길 봐. 세월이 얼마나 흘렀겠어? 그 두목 원숭이는 그 해골이 기르던 원숭이의 후손인 거지.”

- 그래서 그 후손 원숭이가 건우님을 일부러 이곳으로 안내했다?

“그렇지.”

- 왜요?

“그야 내가 인간이니까. 여기 안쪽에 있는 해골도 인간. 나도 인간. 그래서 주인의 뜻에 따라서 인간을 발견하면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거지.”

-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저길 들어가면 엄청난 기연이 기다리는 거야. 막 퍼 주는 거지.”

- 그런 말 하면서 무슨 생각이 들어요?

“저 안으로 들어가다 절벽에서 떨어지면 백퍼 기연이 있을 거란 생각?”

- 하아, 그건 지나도 한참 지난 무협 클리셰 아니에요? 그러고 싶어요?

“야, 내가 저길 들어가야겠어? 안 들어가야겠어?”

- 들어가겠죠.

“그렇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갈 거 같지? 또 그래야 할 거 같고.”

- 그렇죠.

“그래서 내가 이러는 거야. 이런 핑계라도 대야 들어갈 이유가 생기지.”

- 그냥 뭔가 주워 먹을 거 없나 싶어서 들어간다고 하죠? 그거나 뭐가 달라요?

“달라! 오래 된 안배를 따라서! 응! 그렇게 들어가는 거 하고. 니 말처럼 저렴하게 그냥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하고 들어가는 게 같냐? 같아?”

- 얼굴 빨개지고 있어요.

“젠장! 이건 그냥 더워서 그런 거야.”

- 이런 걸 두고 그런다죠? 추우야 건하다.

“뭔 소리?”

- 모르면 말고요.

“내가 반드시 시간과 정신의 방을 만들어서 너를 거기에 넣고 만다.”

- ······.

* * *

“후우. 가 보자.”

건우는 몇 번이나 주변을 확인하고 아공간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계곡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 날이다.

사흘 혹은 나흘에 한 번씩 계곡의 안개가 옅어졌다.

그걸 확인하느라 보낸 시간이 한 달이 가깝다.

사실 그 한 달의 기간은 혹시 모를 위험을 걱정해서 기다린 시간이기도 했다.

안개가 가득한 계곡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붉은 털 원숭이 두목이라도 숨어 있으면 어쩌나.

그래서 아예 아공간 밖으로는 나오지도 않고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원숭이 두목이 한 달이나 숨어서 기다릴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아공간에서 느긋하게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원숭이 털 끝도 보이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되리라.

“가 보자.”

건우는 다시 한 번 혼잣말을 하며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최대한 의념을 넓게 펼치고 계곡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 좌우에 서 있는 커다란 짐승 석상이 불청객을 위협하듯 노려봤다.

건우의 지식으로는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이다.

하지만 석상 따위에 겁을 먹을 이유는없다.

건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석상이 있는 입구를 지나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는 좌우로 돌기둥들이 허리나 밑동이 부러져 기울어져 있다.

한쪽에 열둘씩, 도합 스물네 개의 기둥인데 받치는 천정이나 이어진 벽이 없다.

그저 기둥만 길을 따라서 좌우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번갈아가며 서 있었던 모양이다.

건우의 걸음이 그 쓰러진 기둥들을 지나갔다.

그런 중에 근래에 쓰러진 기둥 하나를 발견했다.

제일 안쪽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그것은 쓰러진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부러진 면의 색이 속살을 보이듯 깨끗했다.

부러진 단면에 세월을 흐름이 묻어 있지 않은 것만 봐도 부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혈모원 우두머리가 이곳에 왔을 때, 환상에 빠져서 난동을 부리다가 부러뜨린 것이지만 건우도 혈모원 우두머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건우는 그 마지막 기둥을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계곡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건우가 스물네 개의 기둥을 지나 안쪽으로 몇 걸음 옮기자 돌로 포장된 길 위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니 이미 돌기둥들도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이거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아공간에서 상황을 살펴야 하나?’

불안감이 엄습한다.

하지만 갈등은 짧았다.

건우는 곧바로 아공간을 열고 뛰어들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몸을 사리는 것이 최선이다.

개복치 건우의 멘탈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 무슨 일이에요? 뭔 일 있어요?

루야가 건우를 보며 물었다.

건우는 대꾸 없이 아공간 입구를 만들어 은막을 투명하게 바꿨다.

- 우와아아아, 뭡니까?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네.

잔뜩 기대하고 달려들던 루야가 순식간에 풀이 죽어 비 맞은 솜사탕처럼 바닥에 늘어졌다.

건우는 안개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안개는 생각 외로 금방 걷혔다.

문제가 있다면 건우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 안개가 다시 자욱하게 핀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시험했지만 건우가 아공간에 있을 때는 안개가 사라지고, 밖으로 나가면 안개가 짙어졌다.

뭔가 있다.

* * *

“정상이 아니지.”

- 넵. 그 만큼 해 보고도 그걸 모르면 그게 이상한 거죠.

“내가 나가기만 하면 안개가 생겨. 하지만 그게 꼭 나 때문은 아니겠지.”

- 건우님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들어오면 그렇게 되겠죠. 건우님이 뭐라고 꼭 짚어서 건우님만 괴롭히겠어요?

“말은 맞는 말인데, 기분은 은근 나쁘다?”

- 그러려니 하세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리고 어떻게 좋은 말로 해 줘도 태클이예요?

“그 어디에 좋은 말이 있는데?”

- 항상 존대하잖아요.

“······.”

- 뭐예요? 그?! 지금 그게 숙녀에게 할 손가락질임?

건우는 루야가 발끈하거나 말거나 다시 아공간 밖을 보며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한다고 선계의 술법이니 뭐니 하는 것은 쥐뿔도 모르는 건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실 건우는 그곳에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 상상조차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뭐, 위험하거나 그런 건 없었으니까.”

- 아니, 그 손짓의 의미를 밝히란 말이지. 그냥 가면 어케요?

“뭔 헛소리야?”

건우는 루야의 항의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불안감을 억누르며 아공간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건우가 돌길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자욱하게 차오르는 안개.

건우는 그 안개는 무시하겠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자신이 아공간에서 보던 방향, 즉 계곡의 안쪽을 향해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셋······ 열!”

건우는 눈을 감은 상태로 열 걸음을 걷고는 곧바로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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