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제 발 저린 우두머리 혈모원의 선택
- 오늘도 있었죠?
“보여줄까? 지금도 있을 걸?”
해질 무렵 건우가 아공간으로 들어오자 루야가 다가와 물었고, 건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건우를 쫓는 혈모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건우가 원숭이를 찾아서 숲으로 들어온 것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리고 붉은 원숭이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열흘 전이었다.
그런데 이 붉은 원숭이들이 좀처럼 건우 곁으로 오지 않았다.
게다가 특별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건우가 있는 곳 일정 거리 밖에서 포위망을 만든 붉은 원숭이들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니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원숭이들을 쫓아서 봉의 출처를 알아보겠다는 계획은 시작부터 무너졌다.
건우가 움직이는 대로 쫓아다니는 원숭이에게 무슨 정보를 얻고, 어디로 쫓아간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 동안 숲을 헤매며 풀이나 뽑을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물론 건우도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건우는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그 해결법을 찾기 위해 바둥거리는 성격이다.
지금부터 그 해결법을 이어갈 시간이었다.
잠시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은 건우가 루야를 바라봤다.
“자, 시작하자.”
- 네, 그러죠.
건우의 말에 루야가 기쁜 듯이 밝은 색 빛을 빠르게 반짝이며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건우는 그런 루야 앞에 투명한 아공간 입구를 만들었다.
루야가 밖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입구를 열고 은색 막을 투명하게 하는 것은 영기를 이용하는 것이라 건우의 몸에 녹아 있는 영기를 빼앗기는 일이다.
영기가 줄어들면 기운이 빠지고 불쾌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일정 이상의 영기를 배출하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언제까지나 숲을 헤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지도를 그려야 하는데, 그건 완전 기억 능력을 지니고 있는 루야에게 맡기는 것이 건우가 직접 하는 것보다 백 배는 효과적이다.
그래서 건우는 숲에서 일정 거리를 이동하면 한 번씩 아공간으로 들어와서 루야에게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때마다 루야는 밖을 구경하는 대신에 지도를 업그레이드 해 준다.
루야는 밖으로 보이는 것들을 비교해서 숲과 큰 나무, 계곡과 산봉우리가 진짜 같은 3차원 입체 지도를 만들어 낸다.
이전에 알까기 하는 손을 만들었던 것처럼 빛으로 만드는 지도다.
그런 지도를 만들어 주니 건우도 루야에게 밖을 구경시켜주느라 영기가 고갈 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루야는 세상을 구경하고 건우는 지도를 얻고.
둘 다 만족하는 거래다.
* * *
“지도는 잘 나왔는데.”
- 그런데 뭐가 불만입니까?
“숲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게 문제지. 원숭이 영역에 내가 찾는 게 있다는 보장도 없고.”
- 그게 제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너보고 뭐래냐?”
- 원래, 안 되면 남 탓을 하는 게 인간 아닙니까? 그래서 건우님도 제 탓을 하는가 싶었던 거지요.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 그래도 갔던 곳을 다시 헤매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동쪽으로 계속 가면 될 거 같은데요.
“왜 동쪽인데?”
- 북쪽으로야 산이 점점 높아져서 곤란하고. 남쪽은 아무것도 없을 거 같으니 그런 거지 별 거 있겠습니까?
“남쪽에 아무것도 없어? 왜?”
- 그 동안 지형과 바람을 살펴보니 여기 남쪽이 바다입니다.
“바다?”
- 딱 봐도 육풍과 해풍이 교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 남쪽이 바다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가 봐야 바다만 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육풍과 해풍? 거 어려운 이야기를 하네?”
- 그냥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사는 겁니다. 물보다 땅이 빨리 달궈지고 빨리 식는 것 때문에 생기는 현상도 모릅니까? 아침에 해가 뜨면 땅이 뜨거워져서 공기가 위로 올라갑니다. 그럼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바람이 불지요.
“해가 지면 반대로 땅부터 식어서 바다 쪽의 온도가 높다? 그래서 바다쪽의 공기가 위로 올라가서 땅에서 바다 쪽으로 바람이 분다?”
-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얌마, 나도 배웠어. 학교 다닐 때, 지구 과학 시간에!”
- 배운 걸 다 기억하면 그게 신선이지 인간입니까? 범인은 배워도 까먹고 그러는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여기가 섬이거나 바닷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 맞습니다.
“좋아. 그럼 앞으로 계속 동쪽으로 가는 걸로 하자. 솔직히 딱히 정해 놓은 곳도 없으니까. 어라라? 잠깐만.”
건우는 루야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의념에 뭔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건우가 아공간을 약간 연화한 덕분에 아공간 밖의 기척을 조금 느끼게 되면서 생긴 변화였다.
아공간 입구가 열리는 위치 주변에 뭔가가 나타나면 건우의 의념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건우는 기척을 느끼고 곧바로 아공간의 입구를 열었다.
바늘구멍처럼 작게 만든 구멍이었다.
- 어차피 아공간 입구는 건우님과 저 말고는 못 보는 건데 뭘 그렇게 쫄보처럼 그럽니까?
건우가 바늘구멍같이 만든 아공간 입구를 투명하게 만들어 밖을 내다보느라 매달리자 루야가 한 소리를 했다.
“얌마, 여기가 지구냐? 지구에서야 입구를 못 봤다지만 여긴 온통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잖아.”
아직 대천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은 건우였다.
사실 쫄보라고 놀림을 받아도 할 말은 없었다.
- 그래서 밖에 뭐가 있긴 합니까?
루야가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건우에게 물었다.
정확하게는 허공에 만든 바늘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건우였다.
“두목 원숭이. 붉은 원숭이 두목이 왔다.”
건우가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으로 바늘구멍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혈모원 우두머리가 건우가 사라진 곳에 찾아와서 손을 휘젓고 있었다.
우끼끼?
혈모원 우두머리는 큰 결심을 하고 인간이 있다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런데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인간이 다시 몸을 감췄단다.
그 동안 자주 그랬다고 해서 혈모원 우두머리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숲을 돌아다니다가 가끔씩 모습을 감췄다가 또 얼마 있으면 나와서 돌아다닌다고 했다.
게다가 밤이 되면 어디론가 갔다가 해가 떠야 다시 온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혈모원 우두머리는 인간이 겉으로는 별 능력이 없어 보여도 굉장한 신통이 있어서 어디 먼 곳과 이곳을 수시로 오가는 거란 결론을 내렸다.
지금도 어디 먼 곳으로 가서 볼 일을 보고 있거나 혹은 이곳의 일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런 추측까지 해 내는 자신이 굉장히 대견스러웠다.
확실히 축기기에 오르면서 머리가 더 좋아진 것이 분명했다.
우끼끼끼끼
그나저나 이 인간은 언제 다시 돌아오려나?
혈모원 우두머리는 인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털퍼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인간을 만나면 잘못을 빌고 동굴로 안내를 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 전까지는 인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먹어치울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매번 일정 시간마다 어디론가 가서 이곳의 일을 알리고 있다면 절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칫하다간 일족 전체가 몰살을 당할 수가 있었다.
그 동굴에서 스쳐갔던 기억 중에는 인간 수사들이 산을 불태우고 허물어 녹여 버리는 광경도 들어 있었다.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 모습이 동굴에 설치된 금제 때문임을 몰랐다.
침입자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진법이 있어서 그런 광경을 보게 된 것인데, 혈모원 우두머리는 그 때문에 그것, 즉 인간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숲을 찾아 온 인간에게 동굴의 위치를 알려주고 점수를 좀 따 볼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 * *
“우와, 저 새끼는 왜 갈 생각을 안 해?”
건우가 아공간에서 밖을 내다보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끼끼끼끼이
‘언제 오려나.’
흙바닥에 주저앉은 혈모원 우두머리는 며칠 째 나타나지 않은 그것을 기다리느라 배가 고팠다.
그래서 또 다시 부하들을 불러 먹을 것을 가지고 오라 성화를 부렸다.
보통 축기기 정도 되면 굳이 뭔가를 먹지 않아도 되지만 지금은 부상도 있고 해서 영기가 포함된 것을 직접 먹어서 축난 몸을 보해야 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부상 때문에 더 그랬다.
“도대체 왜 여기서 저러는 걸까?”
- 건우님이 여기서 사라진 것을 알고 저렇게 기다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다리는 이유야 뻔 하겠지?”
- 당연합니다. 나가자마자 그대로 즉삽니다. 존버가 답입니다.
“끙, 그냥 수련이나 해야겠다. 의념공간을 좀 더 명확하게 느끼고 통제할 수 있도록 연습이나 해야지.”
건우는 밖에서 꼼짝 않는 혈모원 우두머리 덕분에 그렇게 강제 폐관에 임하는 신세가 되었다.
우끽 우끽 우끼이이이이이이!
‘도대체 왜! 안 오는 거냐고!’
우두머리 혈모원은 점차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벌써 몇 날이 흘렀는데 인간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분노를 터트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안 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 인간 수사는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건가?
정말 그럴까?
그래도 기다린 것이 아까우니까 며칠 더 있어 볼까?
지금 일어나기엔 기다린 시간이 너무 아깝다.
“어휴,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 도대체 얼마나 버틴 거야?”
혈모원 우두머리가 드디어 떠났다.
건우는 속이 시원하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 그래서 밖으로는 언제 나가실 거예요?
“얌마. 그 놈이 근처에 숨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며칠 있다가 나가야지.”
- 그게 좋을 수도.
루야도 이번에는 건우의 선택을 두고 쫄보라고 놀리지 않았다.
위험은 피해 가야 한다는 건 루야도 동감이었다.
6미터가 넘는 붉은 털 원숭이는 루야가 보기에도 위협적이었다.
* * *
“저 새끼, 나를 놀리는 거지?”
건우는 신경이 날카로웠다.
며칠 째, 근처에서 맴도는 우두머리 혈모원 때문이었다.
놈은 건우가 숲을 걷기 시작하면 오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참을 노려봤다.
물론 건우는 그 놈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다가온다 싶으면 그대로 아공간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대치가 벌써 여러 차례 벌어졌다.
지금도 건우가 아공간에 들어오자 저 멀리서 우두머리 혈모원이 한참이나 건우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다가 나무 위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췄다.
“새끼, 또 어디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건우는 원숭이의 의도가 빤하게 보였다.
분명 어디 숨어 있을 것이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다만 왜 그러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혹시 내가 저 놈이 떨어뜨린 봉을 주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거 아냐? 내가 봉을 챙긴 걸 멀리서 보고 지금 그거 내 놓으라는 걸까?”
건우의 마음속에 혹시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그래서 내어 주실 겁니까?
루야가 물었다.
“못 주지. 내 손에 들어온 건, 내 거야. 저건 주인 없는 걸 내가 주운 거라고.”
건우의 태도는 명확했다.
원숭이 놈이 아무리 그래도 저건 줄 수가 없다.
대천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득한 아이템 아닌가.
그런 걸 내어 줄 수야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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