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원숭이 섬? 아니, 원숭이 숲
“아! 그게 있었지?!”
- 그것들도 몸에 영기를 품은 연신기 괴수들입니다. 심지어 건우님보다 많은 영기를 품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한쪽에 쌓아둬도 썩거나 하지 않으니 일단 모아두길 권하는 겁니다. 의외로 영기를 품은 신체는 쓸모가 많다고 합니다.
“하긴, 가죽이라도 벗겨서 허리에 두르면 좋겠네.”
건우도 루야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냉큼 동의했다.
- 풀쪼가리 보다는 가죽이 좋긴 하겠네요. 하지만 원숭이들 있는 곳에서 그런 짓은 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잘못하면 원숭이를 만나자마자 마빡이 터질 수가 있습니다.
“아, 그 생각은 깜빡 했다. 기억해 둬야겠네. 그건 그렇고 마빡이 뭐냐? 마빡이!”
건우도 생각지 못한 문제였다.
그래서 루야의 어투를 타박하면서도 원숭이 가죽을 쓰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제는 풀잎으로 가리고 다니는 것에 건우도 루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 자, 그럼 작업을 시작합시다. 물론 주변은 잘 살피시고.
“어차피 이동을 해야 하니까 걸어가면서 모으면 되는 거지. 그나저나 며칠 지났는데도 멀쩡할까?”
방망이를 연화하느라 제법 시간이 흘렀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보면 알겠지만, 영기를 품은 것들이라 괜찮을 겁니다. 다른 놈들이 와서 뜯어 먹지만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확인부터.”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곧바로 아공간 입구를 열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제는 원하는 방향에 아공간 입구를 열 수 있으니 모든 방향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투명한 입구는 건우 이외에는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과거 지구에선 은색 막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곳에선 달랐다.
건우는 몰랐지만 은색 입구는 영기를 품은 존재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녹각독랑도 은색 입구를 볼 수 있었기에 건우가 연못으로 뛰어들 때, 미리 예상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건우는 아직까지 그런 사실은 알지 못했다.
건우가 아공간 안에서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꼼꼼하게 살폈지만 밖의 상황은 늑대와 원숭이가 싸우고 난 뒤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행히 따로 뭔가가 나타나서 원숭이들의 사체를 뜯어 먹거나 한 흔적은 없었다.
건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낮게 흘러 나왔다.
* * *
“아깝네.”
건우는 조심스럽게 숲길을 걸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아쉬움은 원숭이 사체의 대부분이 쓸모가 없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원숭이 두목이 특수 능력을 사용하느라 죽은 놈들의 피를 뽑아가서 그런지 대부분의 원숭이 사체가 퍼석퍼석 말랐고 품고 있는 영기도 없었다.
그나마 싸움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피가 빨리지 않은 사체 다섯 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죽은 원숭이가 서른이 넘는데 고작 다섯만 얻었으니 아쉬울 법도 했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숲을 뒤져서 원숭이 사체를 아공간에 넣고, 이후에는 곧바로 원숭이들이 돌아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 중이었다.
다행히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지구와 같아서 가고 있는 방향이 동쪽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니 아침저녁이면 해를 보고 방향을 잡을 수 있어서 낮에 조금 어긋나게 움직여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음, 저것도 약촌가? 제법 기운이 강하네.”
건우는 걸음을 옮기면서 틈틈이 자신의 감각에 걸리는 식물들을 뽑고 있었다.
영기를 느끼게 된 후로는 세상 만물에 담긴 기운들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숲속 여기저기에서 강한 기운을 품은 약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약초들을 뽑아서 흙과 함께 아공간에 던져 넣는 것은 숲을 걸으며 생긴 새로운 재미였다.
그렇게 던져둔 약초는 날이 저물기 시작하며 아공간에 들어가 함께 넣은 흙으로 연못 주변에 심었다.
루야는 수미산겨자씨를 감싸고 있는 여덟 영근의 기운을 북돋워줄 영초가 있으면 가까이 심어보라 했지만, 아직 그런 제대로 된 영초는 찾지 못했다.
그저 영기를 약간이라도 품어서 영초가 될 태를 지녔다 할 수준, 딱 그 정도의 것들만 몇 뿌리 얻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범인들이나 좋아할 약초 수준일 뿐이었고.
- 답답해 죽겠음.
연못가에 약초를 심고 있는 건우에게 루야가 다가와 투덜거렸다.
“어쩌라고? 니가 아공간 밖으로 못 나가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 나도 밖을 보고 싶다고요.
“이걸 어쩌나? 방법이 없네? 그건 너도 알잖아.”
- 건우님이 안에 들어와 있을 때에는 밖을 볼 수 있게 입구를 열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지랄. 내가 왜 내 힘 빼가면서 그 짓을 하는데?”
아공간의 입구를 열어 놓는 것도 나름 힘이 드는 일이다.
이곳 대천세계에 온 후로, 건우가 원래 쓰던 각성자로서의 힘은 사라졌다.
지금 건우가 쓰는 능력의 근원은 영기였다.
아공간을 열고, 그 입구를 투명하게 하는 것도 당연히 영기를 소모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 그것도 수련입니다. 아공간을 연화하기 위한 의념 수련임과 동시에 영기를 세심하게 사용하기 위한 수련이 아니겠습니까.
“됐다. 그렇잖아도 낯선 숲에서 바짝 긴장하고 움직이느라 녹초가 되는데 여기 들어와서까지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선 그냥 푹 쉬고 싶다는 말이지.”
- 수련은 한 순간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어느 세상이든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걸 모르십니까?
“네네, 오늘의 투정은 여기까지. 난 쉬어야겠네요.”
건우는 손을 휘휘 저어서 루야를 물리치고 수미산겨자씨 가까이로 다가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언제부턴가 잠자리는 겨자씨 밑으로 정한 건우였다.
그곳이 수미산겨자씨에서 나오는 영기가 제일 먼저 닿는 곳이라 제일 명당인 까닭이었다.
루야는 건우가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아버리자 더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고 한쪽으로 날아가 꼼짝도 않고 정지해버렸다.
평소보다 빛의 명멸이 느려진 상태가 되어서.
일종의 대기모드인 셈이었다.
* * *
혈모원의 우두머리는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녹각독랑과 싸울 때 입은 부상이 심상치 않았다.
가슴의 상처는 물론이고 허리에 찔린 것도 아물지 않았다.
녹각독랑의 독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놈의 몸에서 비늘이 돋은 다음에는 그 독이 더욱 강해질 것은 예상치 못했다.
이전 같으면 아물어도 벌써 아물었어야 할 상처가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도지곤 했다.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은 부하 원숭이들이 애를 쓰는 덕분이다.
혈모원의 영역은 물론이고 주위의 다른 요수(妖獸)의 영역까지 목숨을 걸고 들어가 약초를 구해오고 있다.
무리의 생존을 위해 우두머리의 치료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우두머리 혈모원은 아직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어야 했을 것이다.
끼끼끼끼 우끼기이
부하 중에서 서열 2위의 암컷이 우두머리 혈모원에게 다가와 털을 고르며 소식을 전한다.
숲에 퍼져 있는 혈모원들이 들고 온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하나도 숨기지 않고 들은 대로 전하기 때문이다.
이전 서열 2위의 암컷이 제 멋대로 이야기를 거르고 전하다가 우두머리의 방망이에 머리가 깨졌다.
우두머리는 자신보다 똑똑하지 않은 부하가 멋대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듣고 판단하는 것은 우두머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똑똑한 자신의 결정이 가장 나은 결과를 만든다.
우두머리는 그렇게 믿었다.
우끼, 우끼, 끼이이이.
그런데 오늘 이야기 중에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들어 있다.
새끼를 닮았지만 새끼가 아닌 짐승이 영역 내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두머리 혈모원은 그 이야기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두머리 혈모원이 기연을 얻은 곳.
그곳에서 뭔가를 만지면서 스쳐갔던 기억들.
거기에 서열 2위가 말하는 새끼를 닮은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얻은 기연을 만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두머리 혈모원은 새끼를 닮았지만 동족이 아니고, 몹시 작은 생명체인 그것이 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섬에 인간이 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간에 대해서 아는 금수(禽獸)나 충(蟲)은 많이 있었다.
보통 금단기 이상은 되어야 섬 밖으로 나가서 정식으로 다른 섬의 수도계 수사와 교류를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교류를 하고 싶어도 수사가 아니라 짐승으로 취급하는 지라 할 수도 없다.
그런 상황이니 혈모원의 우두머리가 인간이나 수도계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혈모원도 오랜 세월 우두머리가 우두머리에게 전한 지식이 있었다.
거기에 기연을 얻으면서 인간 수사들에 대해서 조금은 배운 것도 있었다.
끼이이이이
우두머리 혈모원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결정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끽끽 끼끼끼 우끼깍
우웩웩웩웩! 우롹우롹!
우두머리 혈모원이 서열 2위 암컷의 말에 버럭 화를 냈다.
잡아먹다니.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자칫하면 일족 전부가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우두머리 혈모원은 인간수사가 만든 동굴에서 알약과 방망이를 얻은 것만으로 축기기에 올랐다.
연신기 후기의 자신을 단박에 축기기로 만들어준 능력을 지닌 것이 인간 수사였다.
그런데 그런 인간 수사를 잡아먹어?
물론 지금 숲에서 돌아다니는 놈은 별 것 아니라 한다.
하지만 자신도 일족이 잡아먹히면 복수를 다짐하지 않나.
녹각독랑 역시 언젠가는 잡아서 뿔을 뽑고 가죽을 벗기리라 맹세를 했다.
그 놈이 동족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우두머리의 자식이 있었던 이유도 있고.
어쨌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자신도 그러한데, 엄청난 동굴을 만들고 한 번에 수련을 증진시키는 약을 만든 그 일족을 잡아먹다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우끼이이
‘설마?’
우두머리 혈모원은 문득 그 인간이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이 방망이를 얻은 동굴을 찾기 위함일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끼이이이 끼이이
‘어쩌나?’
동굴에서 훔쳐 먹은 알약이 생각났다.
그리고 허락 없이 들고 나왔다가 잃어버린 방망이도.
방망이를 찾으러 그 늑대 놈의 영역에 다녀와야 하나?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그걸 숲을 찾아온 인간에게 돌려주면 괜찮을까?
이미 먹어버린 알약은 어쩌나?
우두머리는 머리에 열이 오를 정도로 생각이 많아졌다.
끼이이익 퍼더덕!
그리고 혼란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서열 2위의 암컷을 후려쳐서 벽에 처박았다.
난데없는 횡액에 깜짝 놀란 암컷이 머리를 흔들다가 후다닥 밖으로 도망쳤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따뜻한 햇살에 꾸벅거리던 혈모원들이 일제히 불판 위에서 튀는 콩처럼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우두머리 혈모원이 발작하면 몇 놈 팔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잠깐 도망갔다가 분위기를 봐서 돌아올 일이다.
숲의 가장 큰 나무, 혈모원들의 거점이 그렇게 소란스러워졌다.
우두머리 혈모원도 그 소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며 어디론가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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