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싸우고 그런댜? 어부지리?
커거컹! 컹컹! 크르릉!
‘못된 것들! 감히 나를!’
녹각독랑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연신 울음소리를 냈다.
호기롭게 혈모원의 숲으로 달려갔던 녹각독랑.
하지만 생각과 달리 떼로 덤비는 혈모원들의 공세에 꼬리를 말고 도망쳐 오는 길이었다.
혈모원의 우두머리가 그 사이에 축기기에 올랐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그걸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다니.
그나마 녹각독랑이 축기에 오른지 오래 되어 경험이 앞서지 않았다면 혈모원의 숲에서 비명횡사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크르르르릉!
‘이게 전부 그 새끼 혈모원 때문이다. 어쩌면 혈모원 대장놈이 축기기에 오른 것도 그 새끼 혈모원이 원인이 아닐까?’
녹각독랑은 혈모원의 숲을 빠져나와 자신의 영역에 들어선 후에도 계속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녹각독랑의 발걸음이 혈모원 새끼가 태어난 영천으로 향했다.
비록 지금은 영천이 뿌리까지 파헤쳐져 흉물스런 흔적만 남았지만.
크르르르릉
‘두고 봐라. 내가 몸만 회복하면 혈모원 그것들을 하나하나 잡아 죽이고 말리라. 아주 씨를 말려 버릴 것이다.’
떼로 몰린 놈들과 싸우지 않으면 된다.
늑대는 끈질긴 사냥꾼이다.
무리를 이루는 사냥감을 잡을 때에는 무리 중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를 노리는 지혜가 있다.
그러니 지금껏 별미삼아 혈모원을 가끔씩 잡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성급히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봤을 뿐이다.
크르르륵!
‘몸만 회복되면!’
녹각독랑은 폐허가 된 영천가에 앉아서 몸에 난 상처를 핥았다.
그리고 상처의 쓰라림을 느낄 때마다 혈모원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슈웅! 퍽! 퍽! 퍽!
케겡! 케겡!
어디선가 날아온 짱돌이 녹각독랑의 몸을 뚜드려 패기 전까진 녹각독랑에게도 계획은 있었던 셈이다.
끼이익! 끽끽끽! 끼이익!
‘죽여버리겠다!’
소리만 들어도 적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녹각독랑은 급히 영기를 끌어 올려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동쪽을 노려봤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에 붉은 열매가 가득 달렸다.
보고 있으면 그 붉은 열매가 이리저리 가지를 넘나든다.
혈모원들이다.
휙휙휙! 휘휘휙!
혈모원들이 있는 숲에서 뭔가가 날아온다.
겉보기엔 별 것 아닌 돌멩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혈모원들이 나무를 뜯어 뭉친 것이다.
나무를 제 멋대로 진흙처럼 다루는 것은 혈모원들이 날 때부터 가지는 능력이다.
그렇다고 나무를 뭉친 것이라 얕볼 수도 없다.
나무 속성의 기운이 가득한 덩어리는 매우 강력하다.
우끼끼끼! 끽끼!
‘오늘 일족의 피 값을 받겠다. 늑대.’
원숭이들의 팔매질 사이로 우두머리 혈모원의 선전포고가 더해졌다.
크와왕!
‘감히 네 놈 따위가!’
녹각독랑이 분노의 포효를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허공에 녹색의 선이 그어졌다.
머리의 뿔이 녹색 빛을 내며 강력한 독기를 뿜어냈다.
끼끼끼끼! 끼이이!
우끼끼끼끼! 우과과과!
나무 위를 평지처럼 움직이는 혈모원도 녹각독랑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감당하기 어렵다.
녹각독랑이 나무를 잘 타지는 못해도 영기의 힘을 빌리면 허공을 밟고 뛰어다닐 수 있는 존재다.
분노한 녹각독랑이 나무에 달린 붉은 열매들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독기 때문에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다가 간혹은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혈모원들도 녹각독랑을 향해서 쉬지 않고 팔매질을 하면서 거리를 벌리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도 절대 완전히 물러나는 법은 없다.
혈모원 우두머리의 뜻은 명확하다.
이참에 자신들을 잡아먹는 녹각독랑을 처치하겠다는 뜻이다.
그간은 경지에서 차이가 나서 녹각독랑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혈모원 우두머리도 연신기 후기를 넘어 축기기에 오른 후 자신감이 생겼다.
시간을 더 주면 녹각독랑이 축기기 중기에 오를 것이다.
그 전에 결착을 봐야 한다.
우두머리 혈모원은 진즉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지능이 뛰어난 종인 덕분에 연신기 때부터 몸을 낮추고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것이다.
우끼끼끼끼끽! 우과곽!
두두두두두두두!
혈모원 우두머리는 소리를 지르며 제 가슴을 힘차게 두드렸다.
자신의 부하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분노의 기운을 끌어 올리는 것이다.
혈모원은 핏빛의 털을 가진 원숭이다.
그리고 그 핏빛의 털에는 선천적인 능력이 숨어 있었다.
혈모원 우두머리가 기운을 끌어올리자 녹각독랑이 죽인 혈모원들의 몸에서 피안개가 솟아났다.
그리고 그 피안개가 혈모원 우두머리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진득하게 흐르는 혈향이 흐르고 혈모원 우두머리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크르르릉
‘위험하다!’
녹각독랑도 혈모원 우두머리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피를 흡수해서 한층 강력한 힘을 쓰는 것은 수도계에서 흔한 수법들 중에 하나다.
하지만 혈모원 우두머리의 수법은 녹각독랑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대단했다.
크르릉! 크왕!
‘먼저 친다!’
녹각독랑의 결정은 신속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움직임은 더 빨랐다.
커다란 나무의 꼭대기에서 피를 흡수하는 혈모원 우두머리를 향해 녹색의 선이 그어졌다.
이전보다 훨씬 강한 빛을 내는 녹각독랑의 뿔.
그 뿔에서 일직선의 녹색 창이 만들어져 혈모원 우두머리를 향해 찔러갔다.
우끼끼끼!
가슴을 향해 찔러오는 녹색 창을 붉은 눈으로 노려보던 우두머리 혈모원이 등 뒤에서 뭔가를 꺼내 휘둘렀다.
크왕?
‘저게 뭐야?’
발톱도 아닌 것이 어디서 솟아났을까.
녹각독랑이 그 생각의 답을 찾기도 전에 혈모원 우두머리는 손에 든 거대한 방망이로 녹각독랑의 머리를 후려쳤다.
콰과과광!
케엥! 우끼끼끼!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확실히 평범한 동물들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다.
우두머리 혈모원은 털 속에 숨겨뒀던 방망이를 꺼내서 녹각독랑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있었다.
우두머리 혈모원이 연신기 후기에서 축기 초기로 일찍 올라선 것은 작은 기연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지금 혈모원 우두머리가 사용한 법기(法器)도 그 기연에서 얻은 것으로 영기를 머금어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혈모원 우두머리가 여러 방면에 요긴하게 써 먹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지능이 부족하고 배움이 일천한 혈모원 우두머리가 그 법기의 효과를 모두 끌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법기를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유리한 상황이 되기엔 충분했다.
크와아아앙!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한 녹각독랑은 커다란 방망이에 호되게 얻어맞고 땅바닥을 굴렀다.
그 서슬에 수십 장 크기의 나무들이 우지직끈 부러져 나갔다.
우끼끼끼끽!
혈모원 우두머리는 승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녹각독랑에게 방방이를 내리쳤다.
화들짝 놀란 녹각독랑이 구차하게 땅바닥을 굴러 방망이를 피하고 숲의 나무들 사이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런 녹각독랑을 향해서 부하 혈모원들의 팔매질이 꼬리를 물고 날아들었다.
퍼버버버벅! 크와와왕!
녹각독랑이 다시 한 번 분노의 포효를 터트리며 뿔을 번뜩였다.
그러자 녹각독랑의 가는 털들이 비늘로 바뀌며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졌다.
그와 함께 녹각독랑의 기세가 돌변했다.
우두머리를 제외한 혈모원들이 그 기세에 주눅이 들고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피가 식어가자 혈모원들이 슬금슬금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천적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혈모원들을 일깨운 것이다.
녹각독랑의 피에 숨어 있던 독룡의 기세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늑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용의 피가 위기 속에서 깨어나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끼이이익? 끽끽끽끼이.
혈모원의 우두머리도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다 잡은 상대를 놓아줄 수는 없다는 고집이 붉은 눈 속에서 피어올랐다.
우끼기!
‘죽어라!’
다시 한 번 커지는 방망이.
둥근 대에 육각의 쇠머리가 달린 방망이는 2장(6미터)을 넘는 혈모원의 키보다 더 길어졌다.
후우웅! 퍼벅!
케엥!
갑자기 길어진 방망이를 녹각독랑은 피하지 못했다.
엉덩이 부분을 맞은 녹각독랑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몸을 움츠리고 물러서는 선택은 이미 생각도 않는 녹각독랑이었다.
녹각독랑은 우두머리의 공격을 피하기보다는 도리어 몸을 날려 우두머리에게 달려들며 앞발을 휘둘렀다.
네 개의 검은 발톱이 길게 자라나며 녹색의 빛을 머금었다.
기묘한 무늬를 품은 녹색 빛이 휘감긴 발톱이 혈모원 우두머리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다행히 기민하게 움직인 혈모원 우두머리는 큰 부상을 피했다.
하지만 상처는 크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녹각독랑의 발톱에 깃들어 있던 녹색의 기운이 혈모원 우두머리의 가슴에 스며들며 뼈와 살을 태웠다.
치지지지직! 치지지지!
우키이이이이이!
고통스런 혈모원 우두머리의 비명이 숲을 뒤흔들었다.
그 틈에 녹각독랑이 두 뿔을 합쳐 창을 만들었다.
마치 일각수의 뿔처럼 길게 뻗은 녹색의 창이 매섭게 혈모원 우두머리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키에에에엑!
화들짝 놀란 혈모원 우두머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무를 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워낙 급했던 탓에 땅바닥에 떨어뜨린 방망이도 챙기지 못했다.
크르르릉!
녹각독랑은 아직 풀리지 않는 분노에 혈모원 우두머리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방망이에 맞은 엉덩이가 문제였다.
비늘 덕분에 겉은 멀쩡했지만 엉덩이의 뼈가 모두 가루가 되었다.
그나마 앞발과 뿔로 했던 두 번의 공격이 최후의 일격이나 다름없는 공격이었던 것이다.
녹각독랑은 혈모원 우두머리를 쫓아가는 시늉만 하고, 몇 번의 포효를 터트리고는 어정어정 자신의 영역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엉덩이의 두 다리 사이로 들어간 꼬리가 배에 찰싹 붙어 있었다.
* * *
“새끼, 쫄았네.”
건우가 녹각독랑과 혈모원들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숲 속으로 사라지는 녹각독랑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 정말 무식한 싸움입니다.
루야가 건우의 얼굴 옆에 가까이 붙어서 한마디를 던졌다.
“야, 진드기, 넌 왜 이렇게 붙어 있어? 징그럽게?”
건우가 그런 루야를 돌아보며 타박했다.
- 그야 건우님이 만든 구멍이 워낙 작으니까 그렇죠. 좀 크게 만들었으면 좋았잖아요.
“나만 보면 되는데 굳이? 내가 왜 그걸?”
-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습니까? 그 의념으로 퍼트려서 밖을 살필 것이 아니라 아공간 입구를 만들어서 그걸 투명하게 하자는 건 제 아이디어였다고요.
“그건 안 가르쳐 줬어도 곧 알아낼 수 있었을 거다.”
- 꼭 누가 먼저 하고 나면 나도 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죠. 따라하는 것은 언제나 쉬우니까요. 이래서 특허가 중요한 건데.
“시끄럽고! 일단 저거 어떠냐?”
- 뭐요?
“원숭이가 몸 안에 숨겨 가지고 있던 저 지팡이 말이다.”
- 저게 지팡이로 보여요? 딱 봐도 봉이구만요.
“그게 그거지. 뭘 따져? 하여간 일단 신기하지 않냐? 원숭이 놈, 저거 없었잖아. 그런데 몸에서 꺼냈단 말이지.”
- 몸이 아니라 털 사이에 끼워 뒀다가 꺼낸 겁니다.
“그러냐? 그걸 봤어?”
- 제가 또 한 번 본 것은 확실하기 기억합니다. 아까 원숭이가 봉을 꺼내는 장면을 떠올리고 세밀하게 살핀 결과 허리 쪽의 털 사이에서 꺼낸 것이 확실합니다.
“그건 좀 쓸 만한 능력이네.”
- 그러니까 저도 밖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시라는 겁니다. 그럼 확실히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딜이 될 거 같긴 하다. 어쨌건 그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고.”
건우는 그렇게 대꾸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바깥 상황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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