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먹을 것? 먹을 것!
선계와 영계, 인계로 구분되는 대천세계에서 제일 아래쪽을 차지하는 인계.
그 인계에 속한 많은 세상들 중에 한 곳에 몇 개의 대륙과 그 대륙들 사이에 펼쳐진 바다, 그 바다 위에 점점이 뿌려진 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섬 중 한 곳에서 묘한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 섬의 수도 괴수들 중에 하나인 녹각독랑이 때 아닌 난동을 부렸다.
갑자기 광기가 든 것처럼 제 영역의 숲과 산과 계곡을 박살내고 뛰어 다녔다.
섬의 많고 많은 괴수, 영수, 영충, 마수들 중에 녹각독랑은 고만고만한 수준의 수도괴수(修道怪獸)일 뿐이다.
경지를 따져 봐도 고작 축기 초기 정도라 섬의 먹이사슬에서도 어중간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 영역을 구축하고 나름 그 안에서 왕 노릇을 하며 잘 지냈던 것은 주변에 있는 괴수나 영수, 마수도 고만고만한 수준이라 서로를 침범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차도 특별한 횡액만 당하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수록 수련 경지가 오를 것이고, 언젠가는 축기 중기, 후기를 거쳐 금단을 만들 수 있을 창창한 미래를 가진 녹각독랑이었다.
시간만 지나면 무사히 금단을 만들고 수도계의 일원이 될 수도 있을 녹각독랑.
이성이 거의 없고 본성만으로 영기를 다루는 수(獸), 충(蟲), 조(鳥), 어(魚) 따위가 수도계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면 금단을 만들어 영성이 제대로 눈을 떠야 한다.
섬에 사는 대부분의 수도계 괴수, 영수, 마수 등등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금단을 만드는 성단기를 넘어서 영체을 만들고 화신을 만드는 경지에 이르거나 그 까마득한 경지를 넘어 영계로 올라가는 것도 있지만 그것까지는 언감생심이다.
인계를 넘어 영계로 비승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연과 기연의 중첩을 얻어도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자신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녹각독랑을 놓고 보면 주변 상황이나 여건을 봐도 나름 괜찮은 미래를 가진 수련 괴수였다.
그런 놈이 난동을 부리니 주위의 눈이 그에게로 쏠릴 수밖에.
그래서 녹각독랑은 한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다.
감히 혈모원의 새끼가 태어났던 영천(靈泉) 근처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크르르르릉
‘그것이 뭐였든 엄청난 것이었다. 이 몸이 두려워 몸을 피했을 정도였으니 그 품은 기운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 놀라울 뿐이다.’
녹각독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특별한 방식으로 태어난 혈모원의 새끼였다.
그리고 그 놈이 태어난 순간, 녹각독랑 자신이 꼬리를 말고 도망을 갈 정도로 엄청난 무언가를 느꼈다.
아마도 그 새끼 혈모원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선천지기였을 것이다.
크르르르르
‘이곳 인계의 세상에서는 감히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상계의 기운일 것이다. 혈모원의 새끼는 그런 기운을 품고 태어난 것이 분명해. 아니 어쩌면 혈모원 새끼가 아닌 특별한 혈통의 뭔가일 수도 있어’
그러니 그것을 약간이라도 취해서 수련에 쓸 수 있다면 자신의 수련 경지는 얼마나 오를 것인가.
원래 수도계의 수련이란 것이 두루뭉술한 덩어리에서 티끌 같은 터럭 하나를 찾아내어 올올이 풀어내는 것이 아니던가.
그 혈모원 새끼가 가진 기운을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연화해 낼 수 있다면, 어쩌면 영계로의 비승이 꿈만은 아닐 수도.
녹각독랑은 주위의 시선에 일단 혈모원 새끼로 부르기로 한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몸을 사리는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그런 결론을 내렸다.
크르르르
‘문제는 그 혈모원을 먹을 수 있는가 하는 건데.’
녹각독랑은 사실 그 문제에서 자신이 없었다.
기운을 느낀 것만으로 줄행랑을 쳐야 했던 기억이 분명했다.
그런 혈모원 새끼를 감히 삼킬 자신이 없었다.
녹각독랑은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속내를 털어 놓았다.
크르르릉
‘감당할 수 없다. 욕심을 내다가는 한 줌의 독액으로 녹아내리고 말 것이다.’
스스로 독을 품은 늑대인 녹각독랑이었다.
태고적에 푸른늑대에게서 난 선조들이 여러 혈맥으로 갈라져 나오던 중에 독룡과 짝을 지어 후손을 본 선조가 있었다.
그 때 태어난 것이 녹각독랑의 시조가 되었다.
푸른늑대의 피와 독룡의 피가 섞인 혈통.
그래서 늑대의 머리에 용의 뿔이 있고, 피에는 독룡의 독이 흐른다.
뿔이 녹색인 것은 유독 그 뿔에 독이 짙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녹각독랑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기운이라니.
그것도 강렬하기 짝이 없어 독처럼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크르르르르
‘먹지 못하는 것이라면 훔쳐 가질 수는 없을까.’
녹각독랑은 그런 궁리를 하며 자신에게 붙었던 주위의 시선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한 것들이라 제법 오래 자신이 난동을 부린 이유를 찾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녹각독랑은 정신을 차린 후에도 두서없이 영역 곳곳을 박살낸 터였다.
어디서 시작이 되었는지, 어디서 끝이 났는지를 다른 것들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덕분에 혈모원 새끼에 대한 것은 무사히 숨기는데 성공했다.
이제 자신을 살피던 눈도 사라졌으니 움직여도 될 것이다.
크르르르
‘정말 먹으면 안 되는 걸까? 한 번 시도를 해 봐도 되지 않을까?’
혈모원 새끼가 있는 영천으로 향하며 녹각독랑은 욕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 * *
“아이고 미치겠네.”
건우는 연못가에 앉아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건우의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은 나뭇잎을 엮어서 만든 치마였다.
야생의 숲에서 건우가 구할 수 있는 재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사실 다양한 재료를 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것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건우의 활동 범위는 오로지 연못 근처뿐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건우는 연못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연못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건우가 저 쪽 세상에서 품고 있던 모든 것이 녹아 있었다.
건우도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루야도 일의 전모를 알고는 기가 막혀 했다.
그 분의 배려인지 뭔지 건우의 몸에 깃들어 있던 그 분 세상의 기운.
루야 말로는 그 기운을 풍기면 한동안은 대천세계의 존재들이 건우를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특히 영기를 다루는 수도계의 존재들은 건우가 품은 그 기운을 못 견뎌 할 거라고.
그러니 적당히 사람들 사는 곳을 찾아 움직일 여유는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것.
그것이 그 분의 계획이었을 거라고 했다.
“계획은 개뿔, 누구나 계획은 가지고 있지. 닥쳐서 깨져 보기 전까지는.”
건우의 시선이 연못으로 향했다.
그 연못에 건우가 품었던 기운이 몽땅 녹아 있었다.
루야 말로는 연못의 물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 영기를 가득 품은 것이라 그렇게 된 것 같단다.
연못이 평범치 않아서 건우가 품고 있어야 할 기운을 몽땅 씻어 낸 것.
그나마 그 기운이 어디 다른 곳으로 간 것은 아니고 연못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어쨌건 건우가 연못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렇게 생겨났다.
자칫 연못에서 멀어지면 전에 봤던 그 괴물 같은 놈에게 한 입에 삼켜질 위험이 컸다.
물론 아공간이라는 대피 장소가 있긴 하지만 루야 말로는 반응도 하기 전에 괴물의 입에 들어갈 수도 있단다.
그게 아니어도 마주치는 것만으로 몸이 굳어 버릴 수도 있다나.
그러니 건우가 연못을 쉽게 떠나지 못할 수밖에.
“그나마 당장은 굶어 죽을 걱정이 없다는 건 다행인가?”
건우는 연못가의 흙무더기 속에서 풀뿌리를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연못에 연(蓮)잎을 닮은 것이 떠 있기에 혹시 해서 파 보니 영락없이 연근처럼 생긴 것이 나왔다.
그걸 아공간으로 가지고 들어가 루야에게 물어보니 독은 없다고 했다.
루야 역시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먹어서 탈이 날 것 같지는 않다고 해서 눈을 꼭 감고 먹었었다.
사실 뱃가죽이 등가죽과 들러붙을 정도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게 맛이 괜찮았다.
그래서 건우는 되는대로 연못에 있는 식물의 뿌리는 물론이고 줄기, 잎을 가리지 않고 뽑고 뜯어다가 아공간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당연히 루야는 잔소리를 했지만 그래도 건우의 바람대로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 줬다.
게다가 그 중에서 영기를 많이 품고 있는 것도 있어서 특별히 알려줬다.
루야의 말대로라면 약초 중에서는 상급이고 영초 중에서 최하급에 걸칠만한 것이라 했다.
범인이 쓰는 기운 좋은 식물이 약초고 그 약초가 영기를 머금으면 영초가 된다는데, 연못에서 영초가 나온 것이다.
건우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욕심껏 그 영초를 모두 뽑아다가 아공간에 널어놓은 참이었다.
루야 말로는 아공간에선 영기를 품은 것은 변질이 되지 않는다고 했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지나면 조금씩 영기가 빠져나가고 결국 그것이 가장 큰 문제지만 당장은 해결 방법이 없으니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 했다.
“자, 다시 고민을 해 보자. 언제까지 이 연못에 계속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건우는 뽑은 약초 뿌리를 아공간 너머로 던지고는 연못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사실 방법은 이미 생각을 해 뒀다.
연못의 물에 위협을 쫓아줄 기운이 녹아 있으니 그 물을 가지고 가면 된다.
하지만 마땅히 물을 담을 그릇이나 통이 없다.
그리고 연못의 물을 한두 통 들고 간다고 될 문제도 아닐 것이다.
물의 양에 따라서 품고 있는 기운의 양도 달라질 텐데.
그리고 위험할 때마다 물을 주위에 뿌린다고 치면, 물은 많을수록 좋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연못물을 모두 아공간에 담는다.”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
물론 안에 있을 루야가 뭐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그건 일단 머리에서 지웠다.
“자, 그럼.”
건우는 연못의 수면에 아공간 입구를 열었다.
원형의 은빛 입구는 절반이 물에 잠긴 상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연못물이 아공간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은빛의 막은 건우가 넣는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는다.
건우는 연못의 물과 은빛 막이 닿은 부분에 손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물과 막을 동시에 손으로 만지며 생각했다.
물을 아공간으로 넣고 싶다고.
철퍼덕!
“아, 이런 젠장!”
그 순간 연못의 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건우가 연못 바닥으로 떨어져 처박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바닥이 진흙이어서 상처를 입는 일은 피했다.
“우아, 이거 노다지다!”
건우가 대뜸 고함을 지르면 곧바로 연못 바닥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진흙이 가득한 연못 바닥에 온갖 생명체가 가득했다.
그 중에 유독 건우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건우의 몸통만큼 큰 잉어였다.
그런 잉어가 여섯 마리나 있고, 뻘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는 조개가 수십 개, 미꾸라지와 붕어는 물론이고 가물치와 메기를 닮은 어류도 여기저기서 펄떡거리고 있었다.
“진정, 진정해라. 자자 곧 살려 줄 테니까. 기다려. 응, 기다려.”
건우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손에 잡히는 것들을 순서 따지지 않고 아공간으로 던져 넣었다.
의외로 쑥 들어간다.
“그런데 이것들이 왜 지금까지는 전혀 보이질 않았을까? 봐봐, 이렇게 사나운데.”
가끔씩 건우의 손을 물어뜯으려는 물고기도 있었다.
이제 보니 꽤나 위협적인 이빨을 가진 것들이 많았다.
메기나 미꾸라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좀 많이 다른 종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건우였다.
하지만 물 밖으로 나와서 그런지 힘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서 무사히 눈에 보이는 것들 모두를 아공간에 던져 넣을 수 있었다.
그 때까지도 건우는 식물성이 아닌 생명체를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은 건우의 오해가 많았다.
사실 영천에 사는 생물들은 제법 영기를 머금은 것들이라 일반 동물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들이었다.
범인들에겐 무척 위험한 것들이 그것들이었다.
그 중에 잉어들와 메기, 조개 몇 개는 사실 건우와 비슷한 연신기의 수준에 있는 것들이었다.
비록 아직 영성은 생기지 않았지만 일반인의 손에 잡히는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인 셈이다.
범인이 봤다면 영물이라 했을 것들.
사실 그것들이 아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영기를 품고 있다는 것.
거기에 반쯤은 죽은 것과 같은 상태라는 것이 합쳐진 결과였다.
어쨌거나 그렇게 영기를 품은 것들이 건우의 손에 맥없이 잡힌 이유?
그건 너무 단순했다.
건우의 기운을 씻은 연못에 잠겨 있는 동안 기절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는데 건우가 다시 잡아서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 아공간에는 예의 그 연못물이 가득하고.
“뭐 더 없나?”
건우는 그것도 모르고 저 쪽 세상에서의 습관대로 먹거리 최대 확보라는 명제 달성을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결국 얼마 후에 연못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덩이 하나만 남았다.
건우는 심지어 연못의 개흙까지 모두 아공간에 챙겨 넣었던 것이다.
“으드드득. 아이고 죽겠다. 아주 그냥 안 움직이다 격하게 움직였더니 죽겠네.”
일을 마친 건우는 몸서리를 치며 아공간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혈모원 새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행차한 녹각독랑은 바닥까지 사라져버린 영천의 모습을 발견했다.
크와와와와왕!
‘도대체! 어떤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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