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7화 (7/499)

6. 대천세계, 으아아아아

크릉!

‘왔다!’

이전보다 은색의 막이 크게 생겼다.

저 정도면 그 작은 머리의 혈모원 새끼도 충분히 나올 수 있을 크기다.

녹각독랑은 슬쩍 몸을 일으키고 뒷다리를 굽혀서 도약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은빛의 막을 뚫고 혈모원 새끼가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내렸다.

“즈아아아아아아!”

녹각독랑의 뛰어난 동체시력은 짧은 순간 허공에서 떨어지는 혈모원 새끼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했다.

역시나 갓 태어난 혈모원의 새끼는 털이 없었다.

머리에 검은 털이 짧게 나 있는 것은 태생의 특별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그 나머지야 대수롭지 않다.

털이 없는 맨 몸뚱이에 버둥거리는 팔다리가 조금 가늘고 길고 매끈하지만 그것 역시 갓 태어난 새끼인 탓이리라.

덤벙!

짧은 체공을 마친 혈모원 새끼가 시원하게 샘물에 떨어졌다.

물방울이 거칠게 튀지만 곧 잠잠해 질 것이다.

자, 이제는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혈모원의 새끼를 취할 때다.

크르르르릉.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녹각독랑은 서둘러 샘에 빠진 혈모원 새끼를 한 입에 씹어 삼키고 싶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힘차게 도약해야 할 뒷다리가 꼼짝을 하지 않는다.

녹각독랑은 그 느낌을 알고 있었다.

본능이 전해주는 거부감.

그것이 분명했다.

크르르르릉

‘????’

녹각독랑의 고개가 갸웃했다.

“어푸, 어푸. 젠장 물 먹었네. 생각보다 깊었어.”

그 사이에 샘에 빠졌던 혈모원 새끼가 버둥거리며 물 가로 나왔다.

그리고 두 팔로 땅을 짚고 엎드려 물을 게워 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한 입에 꿀꺽 해야 하는데, 녹각독랑의 본능은 그것을 거부하고 근육을 틀어막고 있었다.

크르르르릉

‘이게 무슨 냄새냐?’

순간 녹각독랑은 태어나 처음이고 피의 전승으로도 전해 받은 바가 없는 기이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잠시 후.

크롸롸롸롸롸뢍!

엄청난 포효 소리와 함께 녹각독랑이, 숨어 있던 숲그림자에서 뛰쳐나와 순식간에 숲속으로 사라졌다.

우지지직 우직끈 콰직 콰지직!

녹각독랑이 뛰쳐나가는 행적을 따라서 숲의 나무들이 꺾이고 부러지고 터져 나갔다.

“뭐, 뭐야 저건? 사, 사슴인가?”

뿔이 달린 것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건우가 아는 동물은 아닌 듯 싶었다.

건우가 아는 중에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10미터 가까이 되는 동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구에 나타났던 던전 속 몬스터라면 또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지구도 아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아까 그 엄청나게 큰 괴물이 지금 저기 나무 그늘 밑에 있었던 거? 그러다가 갑자기 뛰쳐나간 거지??”

건우는 잠시 숲에 일직선의 가르마를 그려놓고 사라진 동물의 정체를 궁금해 하다가, 그것이 코앞의 나무 그늘에 숨어 있었던 것을 떠올리고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 미쳤어. 그렇게 큰 놈이 숨어 있었는데도 몰랐다고?!”

건우는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즉시 아공간 입구를 열고 몸을 던져 넣었다.

- 으아아악!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썅!

루야가 뭐라고 한 거 같지만 건우는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떨리는 팔다리로 아공간에 뛰어든 건우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녹각독랑의 강렬한 존재감이 뒤늦게 건우의 몸과 정신을 뒤흔든 까닭이었다.

- 뭡니까? 지금 쑈하는 겁니까? 그렇게 엎어져 있으면 용서가 될 거 같습니까?

루야가 정신을 잃은 건우에게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말을 걸었다.

하지만 건우는 루야의 말을 듣지 못했다.

- 설마 죽은 겁니까? 그건 아니겠네요. 아공간이 멀쩡한 걸 보면. 그럼 정신을 잃은 건데, 아, 몰라, 몰라요. 이젠 의복 구현도 안 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난 절대로 가까이 가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그렇겐 못합니다. 남자의 벌거벗은 몸뚱이 따위를 보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루야는 혼자서 누가 듣지도 않을 혼잣말을 떠들었다.

그 혼란 속에 건우는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온 몸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한기에 몸을 떨며 깨어나기 전까지 계속.

* * *

“독한 것!”

- ······.

“안 들리는 척 하는 거냐?”

- 설마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럼 누구겠냐?”

- 제가 지금 그 쪽은 볼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나 너한테서 등 돌리고 앉아 있거든? 나라고 너한테 내 지금 모습을 보이고 싶겠냐?”

- 그건 다행이네요. 서로 생각이 일치한다니.

“시끄럽고, 도대체 내가 왜 기절을 한 거냐? 설마 대천세계가 나하고 안 맞는 거냐?”

-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부 건우님이 부실한 탓이죠.

“부실? 내가? 응? 내 어디가 부실해?!”

건우는 루야의 ‘부실’이란 한 마디에 발끈했다.

솔직히 벌거벗은 몸으로 깨어난 순간 번데기 한 마리에 충격이 컸던 탓도 있었다.

“아니, 솔직한 말로, 어떤 놈이든 안 그럴 거 같으냐?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 다 그렇게 응, 응, 그렇게 되는 거라고!”

- 네네. 알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까 열 내지 마시고요. 제가 부실하다는 건, 밖에서 만난 상대가 그만큼 엄청난 놈이었단 소립니다.

“엄청난 놈?”

- 건우님의 증상을 떠올려 보면 일종의 쇼크입니다.

“내가? 쇼크를?”

- 밖에서 엄청나게 큰 괴물을 봤다면서요?

“그랬지.”

- 그게 가까운 나무그늘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발작을 하며 뛰쳐나갔고요?

“그렇다니까. 미친 것처럼 숲의 나무들을 박살내면서 달려갔지. 숲에 일직선으로 길이 났어.”

- 그럼 생각을 해 보자고요.

“뭘 생각해?”

- 그 괴물이 갑자기 발작을 하며 뛰쳐나갔다는 게 팩트죠.

“그렇지.”

- 보통, 생명체가 그런 발작을 일으키면 자연스럽게 기운이 뿜어져 나옵니다.

“기운?”

- 지구의 저렴한 맹수도 정작 정면으로 마주하면 범인들이 제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게 일종의 기운 때문이라고?”

- 옛날 이야기 모르십니까? 어린아이가 산에서 호랑이와 마주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제법 많습니다.

“그래, 나도 들은 거 같네.”

- 그런데 건우님이 보셨다는 그 괴물은 호랑이 같은 평범한 맹수 따위완 비교도 되지 않을 놈이죠. 아마 높은 확률로 영기를 축적한 종류일 겁니다.

“음. 그래서?”

- 그래서는 뭐가 그래섭니까? 연신기 초기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건우님이 그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생명체를 만난 겁니다. 그런데 그 놈이 뭔가에 놀라서 험악한 기세를 뿜었죠.

“내가 그 기세에 노출이 되어서 정신을 잃은 거라고?”

- 심각한 건, 그걸 건우님이 자각하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의 기세에 노출되어서 벌벌 떨다가 꼴까닥 한 거죠.

“꼴까닥은 꼭 죽었다는 말 같잖아.”

- 죽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아공간으로 들어와서 산 겁니다.

“아공간에 들어와서?”

- 이곳은 건우님의 의념 세계이며 영근이 있는 곳입니다. 건우님께 최적의 요양장소인 셈입니다. 물론 영기가 풍부했으면 더 좋았겠지만요.

“영기?”

- 괜찮습니다. 쥐꼬리의 쥐꼬리 같은 영기라도 자연발생을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건 또 뭔 소리?”

- 수미산겨자씨께서 기브 앤 테이크의 도리를 하실 모양입니다. 앞으로 건우님이 수미산겨자씨를 깨울수록 점점 많은 영기를 만들어 낼 거 같습니다.

“그거 좋은 거지?”

-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따로 영기를 가져오지 않아도 수미산겨자씨께서 내 놓은 영기로 수련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거 좋네. 그럼 여기서 안 나가도 굶어 죽진 않겠네? 영기를 흡수하면서 살면?”

- 네네. 어디 가서 허접한 수련공법이라도 하나 얻어오고 말씀하시죠? 그럼 가능성이 있긴 하겠네요. 아, 아직 수미산겨자씨께서 그만한 영기는 뿜어내지 못하는군요. 이래저래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겠는데요?

“그, 그러냐?”

- 거기다가 그게 된다고 해도 연신기 수도자의 수명은 고작해야 200년 정도입니다. 금방 죽는다는 말이죠.

“200년이면 오래 사는 거 아니냐?”

- 축기기만 되어도 500년을 삽니다. 성단기에 오르면 천 년을 넘게 살 수 있고 그 위의 수련 경지가 되면 수명이 급격하게 늘어나죠. 200년을 어디 가져다 붙입니까?

“쯧,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정 떨어지게.”

- 그래서 결론은 어쩔 수 없이 건우님은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놀라서 펄쩍 뛴 기운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 그런 놈들이 있는 곳으로?”

- 아니면 그냥 여기서 굶어 죽으시던가요.

“씁! 닥쳐!”

- 일단 그 괴물이 뭔가에 놀라서 도망을 갔다면서요? 그럼 위험한 건 없다는 소리 아닙니까?

“너, 머리 나쁘지. 그 괴물을 놀라게 만든 뭔가가 있다는 소리잖아!”

- 그래도 나가 보세요. 들어보니까 조금 짐작이 되는 것이 있네요.

“응?”

- 아마도 건우님이 위험할 일은 당분간 없을 거 같으니 안심하고 나가 보세요.

“이상한데? 너, 뭐 아는 거 있지? 응?”

- 짐작 가는 것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확실하진 않아도 가능성은 높은, 뭐 그런 것이 떠올랐습니다.

“뭔지 말해 봐. 불안에 떨면서 나가게 만드는 것보다는 안심시켜서 내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 너, 가이드로 나한테 붙은 거라며?”

- 아, 네. 그것도 그러네요. 어차피 짐작일 뿐이지만 그래도 건우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수는 있을 거 같으니까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루야는 건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 건우님은 그 분의 세상에서 이곳으로 오셨어요. 아시죠?

“그걸 모르겠냐?”

- 쫌, 협조적인 태도로 저를 대해주시면 안 됩니까?

“끄응. 그래. 그래서?”

- 하아, 그냥 하죠. 건우님은 그 분의 세상에서 오셨고, 이곳 아공간과 건우님의 몸에는 그 분 세상의 뭔가가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건 이쪽 대천세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죠.

“일종의 독 같은 걸까?”

- 그 정도는 아니겠죠. 그런 거면 그 분도 이곳에 못 보내죠.

“그럼?”

- 그냥 떼 같은 겁니다. 아니면 오염물질? 엄청나게 독특한 오물?

“야!”

- 아니 비유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어느 정도 희석될 때까지는 대천세계의 생명체들이 건우님을 무척 싫어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늘에 숨어 있다가 도망간 그 놈도?”

- 숨어 있던 것이 아니라 쉬고 있었을 수도 있죠. 그러다가 날벼락 맞은 걸 수도.

“뭠마?”

- 그렇잖습니까. 잘 자고 있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썩은 거시기 냄새를 수억 겁 농축시킨 그런 것이 떨어졌으면.

“내가 그러니까 수억 겁 썩은 거시기를 농축시킨 거라고?”

- 아니요. 썩은 거시기 냄새라고 했는데요? 그걸 농축한 거라고.

“씨앙! 아주 너 죽고 나 죽고 해 볼까?”

- 스톱! 스토옵. 지금 뭘 하려는 겁니까? 설마 몸을 돌릴 생각? 그 꼴을 하고? 정말로요?

“이판사판인데 그런 걸 신경쓸까보냐?!”

- 타, 탐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내가 만들어지길 그래도 여성체로 만들어졌는데, 건우님 변태예요?

“니가 아주 매를 버는구나? 까짓 이미 버린 몸인데 내가 뭐가 무서울까보냐? 수억 겁 썩은 거시기 냄새를 농축한 오염물질이 된 이 마당에!”

- 멈춰요. 정말 나하고 끝장을 보고 싶지 않으면 최소한의 선을 지키자고요!

“그래서 넌 선을 지킨 게 그 모양이고?”

- 아니, 그 훅하고 이해될 정도로 확실한 비유를 든 것뿐인데 뭘 그렇게 발끈하고 그래요? 누가 건우님이 정말 수억 겁···.

“샤랍! 닥쳐!”

- 네네. 알았어요. 이제 조금 진정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보세요.

“휴우, 좋아. 그러니까 내가 그 분 세상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이 세상의 존재들에겐 엄청나게 가까이 하기 어려운 그런 거란 거지?”

- 네. 아마도 그게 맞을 겁니다. 어쩌면 그 분께서 건우님이 대천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벌어주시기 위해서 모종의 조치를 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

-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게 대천세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런 것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독은 아니고, 그냥 엄청나게 거시기한 그런 거일 거란 말이지?”

- 네. 높은 확률로 그럴 겁니다.

“푸우, 미치겠네. 그 말을 믿고 나가봐야 한다는 거지?”

- 못 믿어도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잖아요?

“니미럴.”

건우는 루야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인정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워진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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