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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장 통수 선협전-6화 (6/499)

5. 아공간 입구가 대천세계로 가는 문이다

녹색 뿔 두 개가 머리에 나 있는 괴수, 녹각독랑(綠角毒狼)은 앞발을 모아 턱을 받치고 엎드려 있었다.

녹각독랑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작은 샘 위쪽의 텅 빈 허공이었다.

하지만 녹각독랑이 괜히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틀 전, 녹각독랑은 토실토실한 약토(藥兎) 한 마리를 잡아먹고 입가심으로 영기 가득한 샘물을 마시러 이곳에 왔다.

이곳엔 녹각독랑의 영역에서도 가장 깨끗한 영수(靈水)가 나오는 샘이 있었다.

그런데 샘물을 마시던 녹각독랑은 문득 허공에서 뭔가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호기심이 돈 녹각독랑은 그것을 유심히 살폈고, 결과적으로 어떤 생명체의 일부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녹각독랑의 기억에 있는, 나무를 잘 타고 떼를 지어 사는 혈모원(血毛猿)의 손가락과 무척 닮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녹각독랑이 뛰어 올라 물어뜯기 전에 다시 허공으로 씻은 듯이 사라졌다.

녹각독랑으로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영역에서 원숭이 따위가 몸을 숨기고 있다니.

분노한 녹각독랑은 몇 번이나 그 허공을 발톱과 이빨로 난자했는지 모른다.

물론 성과는 전혀 없었다.

헛힘만 뺀 셈이다.

그렇게 한바탕 날뛰다가 목이 말라 다시 샘물을 마시는데 또 다시 같은 위치에서 이번에는 다섯 손가락이 달린 손이 나왔다.

그 때, 녹각독랑은 그 손이 혈모원의 그것보다는 무척 작고 또 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혈모원의 새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렇듯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이면 혈모원의 새끼 중에서도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

녹각독랑은 자신의 경험의 비추어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의 온갖 영수, 괴수 중에는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스스로 태어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까마득한 태고에 녹각독랑의 선조가 그렇게 태어났다고 했다.

녹각독랑의 선조인 그 푸른늑대는 고대진령으로 모든 늑대들의 선조라고도 했다.

피의 전승을 통해서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녹각독랑은 허공에서 태어나는 혈모원의 새끼에 지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 특별한 새끼를 잡아먹으면 단번에 수련 경지가 뛰어 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녹각독랑은 기다리기로 했다.

그냥 손가락이나 손 정도를 먹어 치우는 것은 손해가 분명했다.

완전한 몸이 모두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손이 나왔다가 들어가고, 팔이 길게 나오고, 다음에는 어깨까지 나와도 모르는 척 보고만 있었다.

스스로 늑대의 끈질김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녹음이 짙은 나무그늘에 앞다리를 겹치고 턱을 올린 상태로 숨어서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서 혈모원의 새끼가 쑤욱 나올 것이다.

그 때는 저 특별한 혈모원 새끼를 감춰주고 있는 법칙의 보호도 사라지겠지.

녹각독랑은 그렇게 확신했다.

무릇 모든 생명은 태어나기 전까지는 보호를 받더라도, 태어난 후에는 세상의 흉흉함에 내던져져 인고를 겪기 마련이다.

손가락에서 시작해서 어깨까지 나왔다 들어갔으니 이제 곧 몸통 전부가 나오리라.

* * *

- 뭐 하시는 겁니까?

“뭐긴, 팔을 어깨까지 내 놔 봤으니까 이번에는 발을 내 보려는 거지.”

- 발이라고요?

“정확하게는 발가락부터.”

- 쫌 적당히 하시죠.

“야, 니가 나갈 거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응? 그러다가 내가 쾍하고 죽어버리면 어쩔 건데?”

- 하아, 네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다가 정말 굶어 죽어도 저는 모릅니다.

“수도자는 아무것도 안 먹어도 산다면서?”

- 그거야 영기를 흡수해서 그걸로 대신하는 거죠. 그래서 건우님은 영기 흡수를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건 배워야 하는 거라고요. 수련 공법을 익혀야 하죠.

“아니, 그래도 아직은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거나 하지도 않는데?”

- 네네. 쩌리라도 수도자는 수도자죠. 겨우 며칠에 그렇게 되진 않죠.

“그럼 아직 시간이 있다는 거잖아.”

- 어휴, 정말 내가 나갈 수 있으면 나가서 상황을 보고 오고 싶네요.

루야는 건우의 조심성이 너무 심하다 싶었는지 답답함을 그렇게 터트렸다.

“너무 그러지 마라. 솔직히 아공간 입구가 수천 미터 허공에 떠 있을 수도 있다며? 안 그래도 최대한 내뻗은 손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우울하구만.”

- 네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할 수 있을 만큼 해 보세요.

루야는 결국 건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리고 건우는 밖에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발가락부터 허벅지까지 차례로 내밀어 보았다.

- 자, 이제 확인 끝났죠?

발까락에서 다리까지, 다시 확인이 끝나자 루야가 바닥에 앉아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 건우에게 물었다.

“기다려 봐, 이젠 정말로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야 한다고. 그랬는데 여기가 수천 미터 허공이면 어떻게 하냐?”

- 그럼 뛰어 내려야죠.

“죽으라고?”

건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까마득한 공중에서 뛰어 내리라니.

- 조금 떨어지다가 아공간으로 들어오면 되지 않겠어요? 그럼 추락사는 면하겠죠.

“어? 천잰데?”

생각해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다.

아공간의 입구는 건우의 몸에서 2미터 거리까진 어디서나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떨어지는 아래쪽에 만들면 아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밖이 어떤지 확인을 해 보세요. 솔직히 빈 허공이란 것도 확인했고, 산들바람이 부는 것도 확인했잖아요. 기온도 그렇게 낮지 않고. 괜찮을 겁니다.

“으음. 그래, 내가 너무 쫄보처럼 겁이 많았네. 까짓 해 보자. 언제까지 여기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거지.”

건우는 루야의 도발인지 격려인지에 힘을 얻어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머리 하나가 나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입구를 만들었다.

구멍이 넓지 않으니 머리를 내밀어도 어깨가 걸릴 거다.

그러니 원치 않게 밖으로 끌려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후우, 후우. 루야, 나 지금 확인한다!”

건우는 루야에게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는 재빨리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크르르르릉!

녹각독랑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았다.

손이나 발이 아닌 머리가 나왔다.

정말 발가락이 나왔다 들어갔을 때에는 다음에 나온 발을 콱 깨물어 뜯고 싶었다.

하지만 먹으려면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꾹꾹 참고 견뎠다.

그리고 드디어 그 결실이 보이고 있었다.

생명이 태어날 때, 머리부터 나온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저 혈모원의 머리털이 검은 것은 좀 이상하지만 가끔 혈모원 중에서 털 색이 흰 것도 나오곤 했으니 검은 것도 나올 수 있다고 여겼다.

크르르릉

‘자 어서 나오너라.’

녹각독랑은 머리만 나온 혈모원 새끼의 몸이 어서 빨리 쭈욱 뽑혀 나오길 기대했다.

더구나 그 밑에는 영기를 머금은 샘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물에 빠지는 순간, 그냥 한 입에 물고 삼키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잔뜩 기대를 했다.

그런데 혈모원 새끼의 머리가 다시 허공을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새끼 늑대도 머리가 나온 후에 다시 어미 뱃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다.

잘못 되어서 발이 나왔다가 들어갈 수는 있다.

그것까진 이해를 해 준다.

하지만 머리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다니!

절로 분노가 터질 노릇이다.

쿠아아아아앙!

녹각독랑이 결국 포효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공간으로 다시 들어간 건우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녹각독랑도 분에 겨워 포효를 터트렸다가 제 소리에 제가 놀라서 움찔 몸을 움츠렸다.

혹시 혈모원 새끼가 제 소리를 듣고 다시 나오지 않으면 어쩔까 싶어서.

- 어때요? 뭘 보셨어요? 입구가 높은 곳에 있어요?

건우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다시 들어오자 루야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높은 곳은.”

- 우아, 그래요? 다행이다.

“그런데 입구 밑에 연못이 있어.”

- 연못이요?

“그래, 3미터? 4미터 정도 아래에.”

- 우아, 정말 잘 됐네요.

“잘 돼?”

- 그렇잖아요. 솔직히 아공간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

“샤랍! 닥쳐!”

- 아무튼 그런 상태니까 깔끔하게 몸도 씻고 그러면 좋지요.

“그래, 밀림 한 가운데서 목욕을 하라는 거지? 그러다가 호랑이나 사자가 나타나서 어흥 하면? 먹기 좋게 깨끗하게 씻은 몸이라고 좋아 하겠네?”

- 밀림이요? 밖이 밀림이에요?

“잠깐 본 거지만 숲이야. 그것도 아주 울창한 숲.”

- 숲에 있는 샘이라고요?

“숲에 샘이 있는 작은 공터가 있는 거지.”

- 그렇군요.

“근데, 잠깐이지만 공기는 정말 좋은 거 같아. 숨만 쉬어도 막 몸에서 힘이 나는 것 같아.”

- 영기 때문이겠네요. 영기를 호흡해서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영기라고?”

- 태어나 처음으로 대천세계에 노출이 된 거잖아요. 영기라곤 모르던 몸이 처음으로 영기를 접했으니 반응이 빨리 온 거죠.

“팔다리를 내밀었을 때는 반응이 없었는데?”

- 쩌리 수도자는 피부로 영기를 흡수하지 못하죠? 피부호흡 못하는 거죠? 입이나 코로 숨 쉬면서 영기를 빨아들이지 못하면 아모거토모타는 거죠?

“적당히 하자! 상호 존중의 자세가 언제부터 그렇게 상대를 놀리는 걸로 바뀐 거냐?”

- 아, 넵. 그럼 이정도로 그만.

“잠깐, 이번에는 좀 더 길게 한 번 나갔다 오마. 주변을 잘 살펴야지.”

- 네네. 그러세요. 그래도 너무 오래 머리 내밀고 있진 말고요.

“그건 또 왜?”

- 외기에 오래 노출되면 지금 구현된 그것들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제대로 안구 테러를 당하는 거라서 꼭 말리고 싶네요.

“내가 걸치고 있는 것들?”

- 그렇죠. 여기 아공간의 기운이 대천세계의 것들로 바뀌면 결국 지금 구현된 것도 무너질 수밖에요.

“아, 지랄! 그럼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는 뭐가 됐든 몸을 가릴 것은 걸치고 들어와야 한다는 소리잖아!”

- 제가 간절히 바라는 바죠. 절대, 절대로, 그러지는 마세요.

“그러지 말라는 게 내가 상상하는 그거?”

- 저는 상상 같은 거 안했어요! 절대로! 네버!

“아무튼, 밖을 내다보는 것도 너무 오래 할 수는 없다는 거네?”

- 호흡으로 영기를 받아들여서 그걸 여기 아공간에 자연스럽게 퍼트리는 거라, 대책도 없어요.

“알았다. 반드시 명심하지.”

건우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구멍을 만들어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허공에 머리만 나와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습을 노려보는 녹각독랑은 최대한 기척을 감추며 숨소리도 조심하는 중이었다.

크르르 크르르릉 크르릉

‘어서 나와라. 어서! 나오기만 하면 내가 너를 뜨겁게 반겨주마.’

녹각독랑은 신심을 다해서 바라고 또 바랐지만 건우의 머리는 다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녹각독랑은 한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노의 포효를 터트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들어간 놈은 반드시 다시 나온다.’

녹각독랑은 이제 그것을 확신했다.

같은 자리에서만 드나드는 혈모원의 새끼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네 놈이 나올 구멍은 저기 밖에 없는 것이다.

크르르르릉!

‘어쩌면 구멍이 작아서 저러는 건가? 조금씩 구멍을 넓히고 있는 것인 겐가? 그렇군. 그런 거였어.’

녹각독랑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긋한 마음이 되어서 앞발에 턱을 올리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깨달음을 얻으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놈은 어차피 나올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는 것 따위야 특별한 태생의 새끼 혈모원을 취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크르르르릉 크르르르릉

절로 목울림이 생길 일이다.

* * *

-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되셨습니까??

루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건우에게 물었다.

“그래, 까짓 겁낼 거 없지. 나에겐 아공간이 있다고.”

건우는 겨우 세운 각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리고 몸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입구를 만들었다.

이제 입구로 나가기만 하면 몇 미터 아래의 연못으로 떨어질 것이다.

물도 제법 깊은 것을 확인했다.

고작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다칠 일도 없을 것이다.

“가즈아아아!”

건우가 고함을 지르며 아공간 입구로 뛰쳐나갔다.

- 가즈아아아아아. 아, 정말 갔네? 괜찮을까?

루야가 함께 고함을 지르다가 건우가 사라진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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