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래서 설명해 봐
“좋아. 제대로 까셨는지 어떤지는 너도 모른다는 거지?”
- 네. 그건 도착해 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공간 입구가 열려봐야 아는 거라고?”
- 네. 말하자면 건우님은 아직 튕겨서 날아가는 중인 거죠. 그래서 아공간을 열 수가 없어요.
“다시··· 돌아가진 못하는 거네?”
건우는 혹시 하는 생각에 슬쩍 질문을 던졌다.
뻔히 대답이 예상되긴 했지만.
- 세상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만, 거의라는 말은 꽤나 많은 곳에 붙곤 하죠.
“차라리 아주 불가능하다고 해. 완전히, 퍼펙트하게 가능성 없음. 0퍼센트. 뭐 그런 게 깔끔하고 좋지 않냐?”
- 그래도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죠. 겨자씨를 그 분의 세상으로 튕겨 낸 존재가 있으니까요.
“겨자씨도 누가 알까기 했던 거라고?”
건우는 루야의 말 돌리기에 낚였다.
어차피 원래 세상에선 죽어야 할 몸이라는데, 굳이 거기 가서 죽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살았던 세상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을 뿐.
이제는 잊어야 할 곳이었다.
그래서 건우도 루야의 말돌리기에 낚여 준 것이다.
- 정확하진 않지만 누군가 그 분의 세상으로 보낸 것은 맞아요. 아, 물론 그 분께서도 그게 의도적인 거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셨어요.
“알까기 실력이 고만고만하니 의도해서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만.”
- 은근히 돌려 까는 거 같아요.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는 양반이라며? 이 정도 원망이야 짐작하시겠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제가 건우님께 별로 반발심이 안 생기는 거 보면 그런 거 같기도요.
“자, 그래서 그 분께서 너를 나에게 붙여 주시고, 가이드를 맡기셨단 말이지? 내가 튕겨 가는 세상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가라고.”
- 넵. 바로 그겁니다. 저는 건우님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소멸의 그 날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소멸?”
- 영혼이 소멸되지 않는 이상은 함께 한다는 말씀입니다.
“음, 그래. 생각지도 않은 영혼의 진드기가 생긴 거군.”
- 그런 태도는 서로간의 동행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 도움을 바라신다면 상호 존중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루야가 진드기란 표현에 발끈했다.
빛이 강렬해지며 깜빡이는 속도도 빨라진다.
“아, 그러냐? 그래, 그러기로 하지. 하지만 내가 그 분에게 고까운 것이 많아서 그게 될까 모르겠네.”
- 저는 그 분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 분이 만들었다며? 그럼 그 분의 딸이거나 아들이거나 그런 거 아냐?”
- 그렇더라도 본인이 아닌 아들이나 딸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뭐, 그것도 그러네. 좋아. 상호 존중, 그거 해 준다.”
-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네 역할을 해라. 가이드.”
- 으음. 건우님의 태도에 변한 건 없는 거 같은데요?
“아니다. 그래도 너를 영혼의 동반자로 인정하려 노력 중이다. 진드기가 아니라.”
- 네. 일단 시작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보자.”
- 그러죠. 중간에 방해만 않으시면요.
“내가? 설마!”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좀 나쁜 소식부터 전하자면 솔직히 그 분의 알까기 실력은 믿기 어렵습니다.
루야는 말장난을 미뤄두고 진지한 투로 말을 시작하면서 대뜸 불안한 소식부터 전했다.
건우는 그것이 루야의 보복이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뭐?”
- 그냥 들으십시오. 그래서 그 부실한 알까기 실력 때문에 저희가 어디에 떨어지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야야, 그건 너무 무책임하지.”
- 그래도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진 않아서 겨자씨가 있던 원래 세상에 떨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건 다행이네.”
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정에도 없던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면 그야말로 난감하다.
루야란 길잡이도 의미가 없게 되지 않겠나.
그나마 지금 믿을 건 루야 밖에 없는 거 같은데.
- 그렇죠. 겨자씨만 하더라도 무한세계인데, 그런 세계가 겨자씨 같은 세상, 그곳 어디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 함정이지만요.
“그건 애초에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상상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규격 아니냐?”
건우는 다시 한 번 이해의 벽과 상상의 한계를 느끼며 말했다.
- 그래도!
“그래도?”
- 겨자씨가 나온 곳으로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건우님의 상태창으로 짐작이 가능하고요.
“내 상태창?”
그나마 루야의 어투에 긍정적인 느낌이 담겨 있다고 느낀 건우는 새삼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상태창을 굳이.
강건우
직업 : 연신기 수도자
칭호 : 수미산을 삼킨 겨자씨의 주인
스킬 : 아공간
“어라? 직업에 잠김이 없어졌네?”
건우가 상태창의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찾아냈다.
- 바로 그거죠. 그 직업이 원래 있던 그 분의 세상엔 없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연신기 수도자란 게 수미겨자씨의 고향에서만 통하는 거란 말이지?”
- 수미겨자씨는 뭡니까?
“내가 가졌다는 전부 같은 하나의 이름.”
- 네네. 마음대로 하시고요. 어쨌거나 맞습니다. 연신기 수도자 직업이 열렸다는 것은 그 분의 알까기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가진 않았다는 의미죠.
“다행이라고 해야 하냐?”
- 차원 미아가 되어 이 아공간 안에서 굶어 죽지 않게 된 건데요? 그 정도면 다행 아닐까요?
“그런가?”
- 당연하죠. 여기서 죽으면 영혼도 여기 갇혀서 영원히 이러고 있어야 해요.
“너하고 같이?”
- 그렇죠. 저하고 같이요. 언젠가 시간의 무게에 건우님의 영혼이 소멸할 때까지요.
“나, 끈질겨서 좀처럼 소멸은 안 할 거 같은데? 영혼만 남아도.”
- 네네. 그러셔야죠. 저도 질기게 오래 살고 싶습니다. 아주 단위도 거창하죠. 수백 억 겁. 뭐 이런 단위니까요. 영혼 소멸까지는요.
“음. 수백억 년?”
- 아니요 겁.
건우의 년이란 시간 단위에 루야가 단호하게 수정을 가해 준다.
당연히 그 의미를 모르는 건우는 루야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설명!”
- 1겁은, 천 년에 한 번 먼지를 쌓아서 태산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빼에에에엑! 지랄!”
역시 좀처럼 피부에 닿지 않는 괴랄한 개념이다.
-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죠. 겁이란 시간은 연신기 수도자 따위에겐 그림의 떡입니다.
“응?”
- 뭐가요? 또 뭐가 궁금한데요?
루야도 이젠 건우의 호기심이 꽤나 엉뚱하게 튀어 나온다는 것을 느꼈는지 곧바로 물었다.
“그럼 연신기 수도자 이상이면 겁이란 시간이 의미가 있긴 해? 네 어투가 그런 거 같아서. 솔직히 그게 어디 실제로 뭔가 연관되긴 어려운 그런 개념 아냐?”
건우는 정말 겁이란 시간 개념이 실제와 연관될 수 있다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야의 대답은 건우의 편견을 가볍게 깨트렸다.
- 아닙니다. 수행이 높은 수도자에겐 겁(劫)도 감당이 가능한 시간 개념입니다.
“미친!”
- 그건 거기까지 하고 이젠 건우님 이야기를 하지요. 일단 건우님의 진짜 직업은 수도자입니다.
루야는 중간에서 곁가지로 빠졌던 이야기를 원래의 주제로 되돌렸다.
“수도자가 직업이면 그 앞에 붙은 연신기는?”
건우의 직업은 [연신기 수도자]였다.
- 수도자의 등급 중에서 최하위 등급입니다.
“그러니까 막 수도자가 된 상태? 쩌리, 쪼렙 수도자?”
- 넵.
“그래서 수도자가 뭔데?”
- 건우님이 아시는 개념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을 쌓는 존재입니다.
“존재? 인간 아니고?”
- 또 중심 화제에서 벗어나시네. 뭐 그래도 설명은 드리죠.
루야가 건우의 호기심에 빛덩이를 고개 흔들 듯이 흔들었다.
그러면서 계속 말을 이어가는 루야.
- 수도자가 인간만 있는 건 아니죠. 동물, 식물, 요괴 같은 생명체는 물론이고 영기가 깃든 물건도 무생물도 수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건? 뭐 빗자루, 벼루, 모루 그런 거?”
- 왜 모두 루입니까?
“그냥.”
여유를 찾고 싶은 건우 나름의 말장난이었다.
지금 건우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어서 그런 식으로라도 여유를 갖고 싶은 것이다.
- 어쨌거나 영기를 품은 모든 존재는 수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지적 능력을 지닌 존재가 훨씬 출발에 유리하긴 하지만요.
“하긴, 방구석에 놓인 보릿자루가 수도자가 되기보다는 그 방에서 태어난 아이가 수도자가 되는 게 쉽겠지.”
- 이번에도 루입니까? 그래도 잘 이해하셨네요. 하지만 의외로 물건이 영성을 얻어서 수도자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수명이 그 쪽이 훨씬 길거든요.
“아, 산봉우리에 놓인 거시기 닮은 바위 같은 거? 그런 게 잘 안 죽긴 하지.”
건우가 뭔가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거시기는 뭡니까?
“동자승 닮은 바위 말한 건데? 아닌 거 같아? 뭘 상상한 거야?”
- 아닙니다. 네네. 그런 걸로 하죠. 아무튼 수도자는 그런 이들입니다. 영기를 쌓아서 신선이 되려는 이들이죠. 물론 진짜 신선이 된 이들도 수련을 멈추지 않으니 여전히 수도자에 속합니다만.
“음, 그러니까 내가 신선이 되는 수련을 하는 수도자라고?”
- 네, 건우님 말씀대로 연신기의 쩌리 수도자죠.
“설명, 연신기.”
건우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았다.
- 끙. 넵. 상호 존중이 부족한 거 같지만 일단 봐 드립니다.
“설명.”
- 에휴, 연신기는 수도의 첫 걸음을 내딛은 수도자를 말합니다. 범인에서 벗어나 선도 수행의 길에 올라선 딱 그런 존재죠.
“범인? 평범한 사람?”
- 넵. 대천세계에도 수도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평범한 생명들에 비하면 수도자는 정말 극소수죠.
“그 대천세계가 수미산겨자씨의 고향을 말하는 거?”
- 그렇습니다.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어서 건우님이 받아들이기 적당한 이미지의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좋아. 계속.”
- 연신기는 선도 수행의 첫 시작으로 영기라고 하는 기운을 몸에 적응시키는 단계입니다.
“영기를 몸에 적응시킨다고?”
- 영기는 선도 수행자의 모든 것입니다. 영기를 느끼지 못하면 선도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죠. 대천세계의 근원에서 나오는 기운이 바로 영기입니다. 물론 영기는 아주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세계의 근원에서 나오는 영기를 느낄 수 있어야 수도자가 될 수 있고, 그 영기를 몸에 적응시키는 것이 연신기 단계다?”
- 그렇습니다. 영기를 몸에 받아들여 완전히 적응시키면 그 다음 단계인 축기기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축기기는 뭔데?”
- 왜 기지도 못하면서 뛰는 거에 관심을 두시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려는 드립니다. 축기기는 영기를 몸 안에 받아들여 쌓는 경지입니다. 쌓을 축(築) 아시죠? 기를 쌓는 겁니다. 어쨌건 이때부터 사용 가능한 영기의 양이 크게 늘어나게 됩니다.
“연신기는 영기를 못 쓰나?”
- 쓰기야 하죠. 몸이 영기에 적응했으니까 몸에 밴 영기를 끌어 쓰는 정도지만요.
“쥐꼬리만큼 쓴다는 거군.”
- 그래도 범인과는 비교 불갑니다. 손에서 불과 얼음, 번개를 만들고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이동하며, 부적이나 법기를 사용하면 그보다 더 강한 이적도 만들어 낼 수 있죠.
“범인이 보기엔 연신기도 신선이겠네?”
- 범인 입장에선 수도자는 모두 신선이라 할 수 있죠.
“내가 그런 수도자가 된단 말이지?”
- 네, 연신기 수도자로 대천세계에 튕겨지신 거죠.
“알까기 실력도 엉망인 그 분이 까셨지.”
- 저도 걱정이긴 하네요. 음, 어쨌건 날아가는 동안 할 건 마저 하죠.
“뭘?”
- 수미산겨자씨를 만나 봐야죠.
“아, 그게 여기 있다고 했지?”
건우는 루야의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장서라.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자.”
그리고 루야를 재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