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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장 통수 선협전-2화 (2/499)

2. 전부 같은 하나가 문제였다

“끄응!”

- 일어나세요. 정신 차리세요.

“끄으응!”

건우는 자신을 깨우는 낯선 목소리에 늪에 잠겨 있는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으으윽, 머리야.”

정신을 차리는 것과 동시에 건우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두통을 느꼈다.

그리고 눈의 초점이 잡히지 않아서 주변을 살필 수가 없었다.

두통 때문에 눈앞이 어두운데 온갖 별들이 명멸했다.

-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끄으응. 누구십니까?”

건우가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 반갑습니다. 저는 도우미, 혹은 가이드? 네, 그런 역할을 하는 루야라고 합니다.

“루야?”

- 네. 그 이름이 맞습니다. 다시 한 번 반갑습니다.

“그런데 넌 형체가 없는 거냐?”

- 아, 저는 정보집합체입니다. 사실상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란 의미입니다.

“그럼 정령이나 유령 계열이라는 건가?”

던전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나 소환 스킬을 가진 헌터들의 소환 대상 중에 그런 계열이 있다.

그걸 알고 있으니 부드럽게 명멸하는 빛의 덩어리가 눈앞에 있다고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헌터의 마법 스킬 중에 광구, 그러니까 빛덩이와도 비슷하다.

라이트 스킬로 만든 빛 덩어리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 아닙니다. 저는 건우님께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안배된 가이드 루야입니다.

“그러니까 날 위해서 안배 되었다고?”

- 그렇습니다.

“그, 누가 널 나에게 보냈는데?”

- 얼마 전에 건우님의 각성을 주관하신 그 분이요.

“그 분?”

건우는 그 분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래봐야 실체는 없이, 막연히 절대자 혹은 신(神)이란 존재에 대한 모호한 개념일 뿐이었다.

- 그 이상은 정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정보도 건우님껜 의미가 없습니다.

“응? 왜?”

- 건우님은 이제 그 분의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세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건우는 그 분의 세상과 전혀 상관없는 신세가 되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특히 건우에게 거슬린 것은 ‘신세’라는 루야의 표현이었다.

그건 절대로 긍정적인 표현으론 느껴지지 않았다.

- 건우님은 그 분의 세상에서 튕기셨습니다. 음, 정확하게는 그 분께서 건우님을 튕겨버리셨죠. 인간들의 이미지로 말하자면 요롷게요.

빛덩이 루야가 하얀 손을 만들어서 손가락으로 뭔가를 튕겨버리는 모습을 만들어준다.

그 손가락이 튕겨 낸 것은 작고 까만 알갱이 하나였다.

그 알갱이는 멀리 날아가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뭐라는 거야, 지금!”

건우가 빽하고 고함을 질렀다.

- 진정하세요. 그래서 제가 있는 거랍니다.

손이 사라지고 다시 빛덩이만 남은 루야가 말했다.

그 루야의 느리고 부드러운 빛의 명멸이 건우에게 전해졌다.

그것이 건우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너,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최면? 뭐 그런 거냐?”

하지만 까칠한 건우는 루야의 빛에서 느끼는 안정감마저 의심스럽게 보였다.

- 아닙니다. 저는 건우님의 정신이나 사고, 판단 등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빛의 파장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흥분은 건우님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루야는 그런 건우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래서 지금 상황을 설명해 봐. A부터 Z까지.”

건우는 일단 당장 위험한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상황 파악을 먼저 해 보기로 했다.

- 음, 그거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뭐 그런 건가요?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다. 우선 여기가 어딘지부터 확인하자. 짐작이 가긴 한다만.”

건우가 주변을 들러보며 말했다.

흙으로 된 바닥만 있을 뿐, 벽과 천정은 없다.

그저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안개가 있을 뿐이다.

마치 안개 이글루 안에 들어온 듯하다.

시야는 몇 미터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의외로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는 공간이었다.

- 그래서 여기가 어딘 거 같으세요?

루야가 물었다.

“내가 마지막에 아공간으로 뛰어들었어. 그건 기억하거든? 당연히 내 아공간 안이겠지. 설마 아공간 안에 내가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보통 아공간에는 생명체를 넣을 수 없다.

그건 건우도 자신의 아공간에 직접 확인을 해 봤던 것이다.

생명체는 식물까지가 아공간에 넣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이었다.

그 이상은 벌레 한 마리도 아공간에 넣을 수 없었다.

- 네, 정답입니다. 건우님 생각처럼 이곳은 건우님의 아공간입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뭐 그 덕분에 살긴 살았네.”

건우는 던전 붕괴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 그렇죠. 아공간 덕분에 건우님께서 지금까지 살아 계신 거죠.

“그래, 어쨌거나 살았으니 좋은 건데, 아까 뭐라고? 요롷게?”

건우가 손을 내밀어 뭔가를 튕겨 내는 흉내를 냈다.

바둑돌을 가지고 알까기를 하듯이.

지금 건우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 네, 그것 때문에 제가 태어났죠. 건우님께 상황 설명을 하라고요.

루야가 조금 더 밝은 빛으로 반짝이며 대답했다.

“이제 나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거 같으니까 설명을 들어보자.”

건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루야는 그런 건우의 얼굴 앞쪽에 조금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허공에 떠 있는 빛의 덩어리.

부피가 정확하진 않지만 주먹 크기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빛이 나는데 눈에 부담이 없고,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아 마음이 놓였다.

- 우선 건우님의 각성부터 말씀을 드릴게요.

“그래.”

- 건우님께서 그 분이 주신 기회에 뭐라고 답하셨는지 기억하세요?

“기회라면 설문 조사?”

- 네. 사람들이 설문조사라고 부르는 그거요.

“그건 정확히 기억하지. 분명히 전부 같은 하나를 달라고 했지.”

건우가 아닌 누구라도 인생 로또를 맞은 날을 기억하지 못하긴 어려울 것이다.

건우 역시 각성 공간에서의 일을 몇 번이나 되새김질 한 보통사람이었다.

- 네, 그래서 그 분께서 건우님의 바람을 들어 주셨죠.

“설문의 답을 들어 주셨다고? 그게 겨자씨야?”

- 어? 어떻게 아셨어요?

“칭호에 겨자씨의 주인이라고 되어 있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 아, 네. 맞습니다. 그 분께서 주신 것이 바로 그 겨자씨입니다. 전부 같은 하나가 겨자씨였죠.

“그냥 겨자씨가 아니라 수미산을 삼킨?”

- 네.

“설명.”

건우는 다시 한 번 이해 부족을 느끼며 루야에게 명령을 내렸다.

- 수미산은 무한 세계 중에 하나입니다.

“무한 세계는 또 뭐야?”

- 한계가 없다는 거죠. 그냥 건우님이 살던 지구보다 수억 배는 넓은 세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게······.”

건우는 지구보다 수억 배 넓다는 말에 이번에는 상상력의 부족까지 느끼며 뭐라 반발을 하려 했다.

- 지구가 있던 그 분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아세요?

하지만 건우의 반발 보다는 루야의 질문이 먼저 나왔다.

“으음?”

- 네. 그런 겁니다. 아시겠지만 그 분의 세상이 지구만은 아니죠. 건우님이야 고작 지구, 그것도 지표면 정도가 세상의 전부였겠지만요.

“야, 그건 아니지. 나도 던전을 알고 차원의 비틀림도 안다고!”

- 네네. 그래봐야 수준 미만 잡이죠.

아니라고 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루야의 비웃음 뿐.

“······.”

- 아, 이건 아니죠. 죄송합니다. 제 직분에 충실하지 못한 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야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곧바로 사과를 해 왔다.

건우는 다시 한 번 이 루야라는 존재가 고분고분한 놈이 아니란 것을 느꼈다.

그 ‘신세’ 운운할 때부터 느꼈던 ‘쎈’ 느낌이 착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계속 해 봐. 내 겨자씨가 어쨌다고? 무한 세계?”

그래도 일단은 정보 수집이 우선이라 생각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건우였다.

- 아뇨, 그건 수미산이고요, 그 수미산이 들어있는 겨자씨요. 그걸 건우님이 가지신 거죠.

“그 분이 그걸 주셨다고?”

- 이 아공간은 바로 그 겨자씨를 보관하기 위한 곳이기도 하고요.

“끙. 그래서 그 다음은?”

- 중요한 건 그 겨자씨 때문에 그 분께서 골치가 아프셨다는 거예요.

“그 분, 그러니까 신이나 뭐 그런 존재 아녔어?”

- 그렇죠. 그 세상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죠.

“그런데 겨자씨 따위 때문에 골치가 아파?”

- 겨자씨가 원래 그 분 세상의 것이 아니거든요. 다른 세상의 것인데 어쩌다가 흘러 들어온 거죠.

“음. 그러니까 그 골치 아픈 걸 나한테 주셨네? 그치?”

- 건우님이 원하셨잖아요. 전부 같은 하나를 달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분께서 딱 겨자씨를 떠올리신 거죠.

“그래서 결과는 그거잖아. 골치 아픈 그걸 나한테 떠넘기신 거?”

- 아니라곤 못하죠. 그래도 저를 만들어서 건우님께 붙여 주신 걸 보면 미안하긴 하셨던 모양이에요.

루야는 조금이라도 그 분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모양이라고 건우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그걸 따질 때는 아니었다.

루야가 그 분인 것도 아니고.

“계속 해 봐.”

- 원래 건우님은 그 분의 세상에서 던전 붕괴로 죽으셨을 운명이에요.

그런데 루야가 건우의 명치를 제대로 때리는 정보를 내 놓았다.

“아, 그건 좀 충격이네.”

- 그런데 각성에서 그런 소원을 비신 덕분에 죽음은 면하신 거죠.

“대신에 겨자씨 들고 그 분의 세상에서 튕겨진 거네?”

- 겨자씨를 그냥 튕겨 버릴 수가 없었거든요. 어디 넣어서 던져야 하는데, 그게 건우님이 되신 거죠.

“어차피 죽을 놈, 살려주면서 처치 곤란의 겨자씨도 해결하자?”

건우는 거기까지 상황을 정리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상황이 자신에게 손해인지 이득인지.

그런데 죽음이란 상황을 대입하면 어떤 상황이든 살아 있으면 이득이란 결론만 나온다.

그러니 그 분에 대한 원망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 네. 그래서 던전 붕괴와 차원의 비틀림을 이용해서 건우님을 튕겨 내신 거죠.

건우가 침묵을 지키자 루야가 잠시 후에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어디로?”

- 네?

“어디로 튕겼냔 말이지. 그냥 아무대로는 아니었을 거 아냐. 내가 알까기를 해도 알을 날려 보낼 방향을 한 번은 확인을 하고 까는데, 그 분이라고 안 그랬을까.”

- 우와. 똑똑하시네요?

“씁!”

루야의 말에 건우가 눈을 부라렸다.

- 네네. 맞아요. 그 분께서도 방향을 보고 튕기셨죠. 바로 겨자씨가 원래 있던 곳으로요.

“그래? 지금 겨자씨가 있던 곳으로 가는 중이라고?”

- 네.

“정말?”

-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묻고 싶은 건, 그 분의 알까기 솜씨가 어떠냐는 거지. 좀 잘 맞추시냐?”

- 아······.

루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루야도 그 분의 알까기 실력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건우의 안색이 푸르죽죽 죽어 나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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