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58화 (59/61)

제 58 장       한   가  지    조  건  이   있  다

1

방립동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방유아는 벌써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방유아는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나 방립동은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동방유아는 말없이 방립동을 바라보았다.

방립동은 그 동안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오랫동안 수염을 깎지 않아 턱에 수염이 수북했고, 뺨은

홀쭉파여 있었다.

눈빛은 예전보다 침착해져서 중년인의 차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동방유아의 시선은 방립동의 얼굴에서 턱으로, 그리고 서서히

왼쪽 팔로 향했다.

방립동의 왼쪽 소매는 유난히 펄렁거렸다.

외팔이가 된 방립동은 예전과 다른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동방유아를 응시하는 눈빛이 특히 그랬다.

예전의 방립동은 감히 동방유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동방유아는 한동안 방립동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변했구나."

방립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동방유아는 다시 말했다.

"네 팔이 잘려진 것은 노부의 불찰이었다."

방립동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래서 동방유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점에 대해서 노부는 너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방립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방유아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는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방립동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다.

방립동은 문득 웃었다.

"아버님도 변하셨군요."

동방유아는 되물었다.

"노부가 말이냐?"

방립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같으면 절대로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설사

제 목이 잘려나간다 해도 말입니다."

동방유아는 물끄러미 방립동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사람이란 원래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니까."

"아버님만은 변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네가 잘못 본거다. 노부도 사람이니 변할 수 있지."

"그래서 변하지 않을 줄 안 겁니다."

동방유아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섬광이 피어 올랐다. 하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도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너는 변했구나. 확실히. 예전같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립동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사람이란 원래 세월이 흐르면 변하니까요."

그는 동방유아가 한 말을 그대로 사용했다.

동방유아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비꼬는 소리로 들렸다.

방립동도 그런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동방유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방립동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부자(父子)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서먹하고 어색한 사이였다.

하나 그들은 누가 뭐래도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한참후에야 동방유아는 입을 열었다.

그때 그의 음성은 평소의 그처럼 담담한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잘 있느냐?"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방립동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방립동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동방유아는 방립동을 쳐다보았다.

방립동은 다시 말했다.

"매일 시녀들에게 그녀에 대해서 듣지 않습니까? 그녀가 무슨

음식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저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동방유아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예의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믿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죽은 네 에미를 닮았다."

"저도 압니다."

"그래서 노부는...."

동방유아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 방립동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동방유아는 다시 망연히 방립동을 쳐다보았다.

방립동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두 남자는 한참동안이나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먼저 눈을 돌린 사람은 동방유아였다.

"그건 너의 오해다. 노부는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댄 적이

없다."

방립동의 음성은 여전히 냉랭했다.

"오해 따위는 없습니다. 육체적인 관계만이 사랑은 아니지요.

아버님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동방유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결코 방립동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굳이 숨길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 부인했던 것은 단지 쑥쓰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외에는 없었다.

한참후에야 동방유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녀를 어쩔 셈이냐?"

방립동은 되물었다.

"아버님은 그녀를 어쩔 셈이십니까?"

동방유아는 왠일인지 약간 머뭇거렸다.

그것은 전혀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는 너희들이 떠났으면 한다."

순간 방립동의 눈에서 더이상 빛날 수 없을만큼 강렬한 빛이

번뜩거렸다.

방립동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동안이나

동방유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동방유아의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어 방립동은 그의

말의 진위(眞僞)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동방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너희들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려고 한다."

방립동은 자신의 가슴이 맹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하자 하고 생각했다.

"아무 때고 말입니까?"

동방유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때고 너희들이 원하면..."

"어떤 곳이던지?"

"그렇다. 너희들이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다."

방립동은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우리들이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저희들을 찾지 않으시겠습니까?"

동방유아는 조금 머뭇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두 번 다시 찾지 않겠다."

방립동은 강렬한 눈으로 동방유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버님은 그녀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동방유아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잊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있다."

방립동은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노부가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게

아니냐?"

방립동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가 그녀를 포기하다니....

동방유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어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어른이 된 후에는 더욱 쉬웠다.

누구도 그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동방유아가 자신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포기한다고

말한 것이다.

자식과의 혈연(血緣)을 끊으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여인을...

방립동은 일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일이 이루어 졌건만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심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심정을 비웃기나 하는 듯이 동방유아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2

노독행은 금릉이 빤히 보이는 관도위를 걷고 있었다.

이제 한 시진후면 산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방유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노가살수문에 대한 마지막 부채(負債)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방립동은?

그도 그곳에 있을까?

노독행은 감히 그녀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생각이 미치기만 해도 그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려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관도위를 걸어가던 노독행은 문득 관도의 한 가운데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검은 흑의를 입고 키가 훤칠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이목구비는 상당히 수려했고, 턱에는 가슴까지 이르는

검은 수염이 탐스럽게 자라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무척 충후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하나 노인을 본 순간 노독행의 외눈은 더이상 빛날 수

없을만큼 무섭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흑의노인의 두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흑의노인의 투명하도록 맑은 두 눈은 은은한 금광(金光)을

띄고 있지 않은가?

그 금안(金眼)은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노독행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흑의노인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노부를 알아보는군."

그의 음성은 부드러운 가운데 한 줄기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담고 있었다.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구유천자 양무극."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바로 양무극이다."

이 흑의노인이 바로 육십년 전에 마도제일고수이며 무림역사상

신법(身法)의 제일인자라는 구유천자 양무극이었던 것이다.

양무극의 나이는 이미 백 살이 훨씬 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겉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칠십을 넘지 않았다.

이것은 그만큼 그의 내공이 정순(正純)하면서도 지고(至高)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노독행은 한때 양무극을 찾아 강남을 이잡듯이 뒤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자신의 앞에 불쑥 나타나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다행히 양무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부가 너를 찾아온건 한 가지 해결할 일이 있어서이다."

해결할 일이라!

도데체 양무극이 그와 해결할 이라는게 무엇일까?

양무극은 한동안 노독행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너는 동방완아를 알고 있느냐?"

노독행은 그의 난데없는 말에 약간 의아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노부의 뒤쪽 수풀에서 잠자고 있다."

노독행은 처음에는 그가 동방완아를 인질로 잡아 자신을

위협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양무극의 다음 음성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노부는 그녀의 외할아버지다. 그녀는 노부에게는 천하에서

둘밖에 없는 핏줄이지."

양무극이 동방완아의 외할아버지다!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노독행은 구유곡에서 동방완아가

갑작스럽게 실종되었던 내막을 알 수 있었다.

"노부는 그녀가 너를 따라 구유곡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그곳에 있다가 그녀를 데리고 왔다. 너는 지금

포호산장으로 가는 길이지?"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동방유아를 죽이러 가는 길이냐?"

노독행은 부인하지 않았다.

"핏빛은 피로 갚아야 하니까."

양무극은 한동안 금빛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도 강호인(江湖人)이므로 네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단지 한 가지 제안을 할 뿐이다."

노독행은 묻는 시선을 던졌다.

양무극은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수를 포기하고 동방완아를 데리고 떠나라. 그러면 노부는

너를 건드리지 않겠다."

전혀 뜻밖의 말에 노독행은 외눈을 번쩍이며 양무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녀는 산장에 와서도 계속 네 이야기만 했다. 그녀는 불쌍한

아이다. 평생을 어둠속에서만 살다가 비로소 누군가를 알게

된거지. 그 누군가가 바로 너다."

"......."

"네가 그 아이의 아버지를 죽인다면 그녀는 더욱 불행해질

것이다. 노부는 그녀의 외할아버지로서 그녀가 불행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그래서 네게 온 것이다."

노독행은 양무극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방완아는 한 평생을 암흑(暗黑)과 고독(孤獨)속에서 지내온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노독행과 들판에서 보낸 하룻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 사이에 아무런 육체적 교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난생 처음 어떤 감정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동방유아와 노독행이 격돌하게 된다면 둘 중 한 사람은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 쓰러지든 그녀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며, 그녀는 평생을 고통속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하나 노독행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녀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방유아는 그의 집안을 피로 씻은 원흉이었다.

그로 인해 너무도 많은 사람이 불행에 빠졌고 고통에 신음하게

되었다.

그 대가는 반드시 받아내야만 한다.

남들이 흘린 그 많은 피와 눈물의 가치를 그가 알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안되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절대로 굽힐 수 없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양무극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네가 감히 노부의 말을 거역하느냐?"

노독행은 양무극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는 노독행의 집안의 혈겁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노독행에게

어떤 해악(害惡)도 끼치지 않았다.

그의 앞길을 가로 막은 이유도 단지 사랑하는 외손녀를 위한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 뿐이다.

노독행이 아무런 말이 없자 양무극은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장님이어서 네가 꺼려한다면 노부가 반드시 일 년내에

그녀의 눈을 낫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겠다. 목숨을 걸고 서라도

반드시 그녀의 눈을 뜨게 해 주겠다."

그의 음성은 절실한 무엇이 있었다.

노독행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게 아니오, 양노인."

양무극은 금광을 번쩍거리며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노독행은 천천히 말했다.

"그녀가 장님이라거나 싫어서가 아니오.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오."

"그럼 무엇이 문제냐?"

"원인과 결과의 문제요. 동방유아가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이런

결과가 생긴거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그가 져야

하오.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소."

양무극은 한동안 노독행을 응시하다가 돌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옳다는 건 노부도 안다. 또 노부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아이가 너무

불쌍해진다."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소, 양노인. 나는 물러설 수 없소."

양무극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노부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거절한단 말이냐?"

노독행은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양무극은 발연 대노했다.

"네 놈이 끝까지 노부의 말을 무시하다니...!"

노독행의 음성도 냉정해졌다.

"나는 양노인의 사정을 많이 봐주었소. 더이상 나를 강요하지

마시오."

노독행으로서는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히 말했을 뿐이다.

하나 양무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새카맣게 어린 녀석이 자신을 능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비교하면 자신은 그의 삼대조(三代祖)뻘이었다.

자신이 강호를 횡행할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놈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자 양무극은 도저히 솟구치는 노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눈에 무서운 살광을 번득이며 노독행을 향해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네 놈에게 언젠가 한 번은 쓴 맛을 보여주려고

했다. 어디 네 놈의 무공이 소문처럼 대단한가 한 번 보자."

노독행의 표정도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후회하게 될거요."

그 말은 끓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미친 놈!"

양무극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노독행을 향해서 덤벼들었다.

3

양무극의 신법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대로

강호제일(江湖第一)이었다.

지금도 양무극은 분명 노독행을 향해서 몸을 날렸는데

노독행은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무언가가 눈앞에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 노독행은 가슴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꽝!

어느새 양무극의 손이 그의 가슴을 강타하고 지나갔던 것이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퍼펑!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노독행은 다시 양 쪽 어깨에 쌍장을

격중당했다.

도대체가 보이지가 않았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장력만 우박처럼 그의 전신으로

퍼부어지고 있었다.

노독행은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양 팔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콰쾅!

바로 그 순간 그의 팔뚝에 양무극의 무쇠 같은 주먹이

격중되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노독행은 정통으로 머리를

강타당하고 말았을 뻔했다.

노독행은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이 자신의 팔뚝을 강타한

양무극의 주먹을 잡으려 했다. 하나 어느새 주먹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에 옆구리에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번의 일격은 상당한 위력이 있었다.

노독행은 한 순간 숨이 막혔다.

위력으로 보아 이번의 공격은 발을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노독행은 문득 상대 공격에 대한 파해법(破解法)을

생각해 냈다.

그는 양손을 늘어뜨렸다.

파파팍!

순식간에 그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등으로 번개 같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노독행은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상대의 주먹에

강타당했다.

그의 입술이 찢어져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뺨과

아래턱도 퉁퉁 부어 올랐다.

그래도 노독행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손을 쓰지 않았다.

다시 양무극의 주먹이 그의 턱을 강타했다.

쾅!

노독행은 순간적으로 아찔했다.

뒤이어서 하나의 기운이 빠르게 오른쪽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순간 노독행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 속도와 위력으로 보아 그것은 발이 분명했다. 노독행은

지금까지 양무극이 발을 사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독행은 양 손으로 옆구리를 감싸며 그대로 발이 날아오는

곳을 향해 몸을 던졌다.

퍽!

양무극의 발은 정확하게 노독행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찰나,

노독행의 몸이 쭈욱 펴지며 전신이 수평으로 뉘어져 빠르게

휘전했다.

그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빠르고 신속한

것이었다.

바닥에서 다섯 치 높이에서 풍차처럼 회전하는 그의 오른쪽

다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노독행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세차게

걷어차 버렸다.

우둑!

뼈마디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하나의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큭!"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신음이 흘러온 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방금전에 노독행은 상대의 다리에 격중당할 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가 주먹을 쓸때는 도저히 위치를 예측할 수가 없다.

허공에서든 옆에서든 바닥에서든 어디서든 자유롭게 주먹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은 달랐다.

발차기를 하려면 반드시 다른편 발은 지면(地面)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발차기 본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독행은 상대가 발차기를 하는 순간 그 일대를 완전히

몸으로 에워쌌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비록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노독행은 양무극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시야에 처음으로 양무극의 모습이 들어왔다.

양무극은 왼쪽 종아리를 노독행의 발에 걷어차이고 채 신형을

안정시키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노독행이 바짝 그의 앞으로 다가들었을 때 양무극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인간의 몸은 앞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뒤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어려운데, 양무극의 몸은 앞으로 움직일 때와 다름없이 빨랐다.

노독행은 더욱 맹렬히 그를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 그를

놓치면 언제 또다시 그의 종적을 잡게될 지 몰랐다.

양무극은 뒤로 날리던 몸을 허공에서 뒤집으며 벼락 같은

삼십이장(三十二掌)을 폭포수처럼 퍼부었다.

노독행이 그 공세에 조금이라도 멈칫하면 그 순간 양무극은

다시 보이지 않는 무영지경(無影之境)의 신법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는 피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위로 퍼부어지는 삼십이장의

공세속으로 뛰어들었다.

파파파팡!

등과 어깨, 가슴에 북치는 듯한 음향이 연거푸 터져 나오며

삼십이장중 절반 이상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노독행의 입과

코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나 노독행은 그 대가로 양무극의 숨소리가 들릴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지며 양무극의 늑골을

잡아왔다.

양무기의 신형이 부르르 떨리더니 어느 사이엔가 그의 몸이 이

장밖으로 가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같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동작이었다.

노독행은 포기하지 않고 그쪽으로 신형을 날리며 양 손을

휘둘렀다.

찌익!

양무극의 장포 한 자락이 그의 강철 같은 손가락에 찢겨져

나갔다.

양무극은 다시 허공으로 삼장을 이동하는 신기(神技)를

보였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이 수평으로 뉘여지며 두 발이 양무극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양무극은 황급히 머리를 뒤로 움직였으나

두건이 끊어지며 반백의 머리가 허리아래까지 우수수 풀어져

내렸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이 기이하게 꺾이며 그의 팔꿈치가

뇌전처럼 양무극의 허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천하의 양무극으로서도 더이상은 피할 수 없었다.

쾅!

양무극은 정통으로 허리를 팔꿈치에 격중당하고 한차례

허공에서 신형을 휘청거렸다.

노독행의 또 다른 팔꿈치가 양무극의 명치 끝에 작렬했다.

퍽!

"큭!"

양무극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이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는 어느새 붉은 선혈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기도 전에 노독행의 몸은 폭풍처럼 그를

향해 쏘아져 왔다.

양무극의 얼굴에 암담한 절망감이 감돌았다.

막 그의 몸이 노독행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짓이겨지려는

찰나,

"멈춰요!"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달려나와

양무극의 몸을 감싸안았다.

노독행은 돌진하던 몸을 비틀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했다.

쉬악!

한차례 돌풍이 양무극과 그를 감싼 여인의 신형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만 보아도 방금 노독행의 돌진하던 기세가 얼마나 맹렬한

것인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멈춰요...멈추란 말이에요...."

여인은 바닥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양무극의 몸을 꼬옥

끌어안은 채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눈물에 젖은 동방완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방완아는 양무극을 안은 채 그의 피묻은 가슴에 얼굴에

부비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외할아버지..."

양무극은 갈비뼈가 다섯 대나 부러지고 가슴뼈가 어긋나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웠다. 하나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동방완아의 흑단 같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완아야...이 할애비는 괜찮다."

동방완아는 도리질을 하며 흐느꼈다.

"흐흑...할아버지...싸우지 마세요...제발 싸우지 마세요..."

양무극은 고통을 억누르며 두 뺨이 눈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모습을 측은한 듯 내려보다가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흐느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꼭 오래전에 죽은 자신의 딸의

모습같았던 것이다.

그는 파란 하늘을 올려본 채 몇 차례나 눈썹을 껌벅거렸다.

그때 노독행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독행은 그들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 나직하게 말했다.

"비켜."

그녀의 몸이 한차례 세차게 떨렸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필사적으로 그가 있는 곳을

돌아다 보았다.

"당신...당신...정말 할아버지를..."

노독행은 말없이 그녀의 몸을 양무극에게서 떼어 놓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그의 팔을 붙잡고 악을 썼으나

노독행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그녀의 몸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이 악마...나도 죽여라...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할아버지를 죽이려면 나도...."

노독행은 그녀의 몸을 한쪽으로 밀치고 양무극을 내려다

보았다.

양무극은 이미 삶을 포기했는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그의 가슴을 향해 손을 내리 눌렀다.

뚝!

그의 가운데 손가락이 양무극의 명치끝을 지그시 눌렀다.

뼈마디가 부딛치는 소리가 들리며 양무극의 어긋났던 가슴뼈가

다시 맞춰졌다.

양무극은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가슴뼈가

이어지며 숨쉬기가 한결 부드러워지자 눈을 뜨고 그를 바라다

보았다.

노독행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양노인. 그녀를 데리고 떠나시오."

양무극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았다.

노독행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외눈은 이상한

적막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강호가 아닌 아주 먼 곳으로 말이오.

그리고 그녀에게 무공을 모르는 아주 순박하고 착실한 청년을

소개해 주시오."

".......!"

"강호인들의 피로 물든 영혼으로는 그녀의 고통을 달랠 수

없소. 나도 마찬가지고 누구라도 마찬가지요.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세계를 함께 가꾸어 나갈 사람이 필요하오."

양무극은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 사람이 냉혈무정인가?

피도 눈물도 없는 그 냉혈무정이란 말인가?

노독행은 한쪽에서 나직하게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모습을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 오빠가 말했었지? 가슴속에 누가 들어오면 다른

무엇으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누구도

내 마음 속의 그것을 대신할 수 없어."

그녀는 흐느끼다 말고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녀를 내려다 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 그 야산에서의 일은 잊어버려. 아니 잊지 않아도

상관없지. 그건 그냥 한 조각 꿈인거야. 여름 밤에 잠깐 졸았을

때 꾸는 그런 꿈 말이야. 단지 그런거야. 그것말고는 아무 것도

아닌거야."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등뒤에서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쳐다보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 있는 양무극이 착잡하고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두 번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사라져갔다.

그의 몸이 아득히 사라져 발자국소리마저 들리지않게 되었을

때서야 그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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