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장 십 년 만 에 다 시 ...
1
엽동은 옆구리를 내려다 보았다.
다행히 내장은 삐져 나오지 않았다.
하나 삐져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손이 들락거릴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으니 즉사하지 않은게
다행스런 일이었다.
옆구리 뿐만이 아니었다.
오른팔은 어깨 밑으로 싹둑 잘려졌고, 왼쪽 관자놀이부터
오른쪽 아래턱까지가 길게 베어져 얼굴의 뼈가 드러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아직 두 다리가 성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숲속에서 뼈를 묻게 되었을 것이다.
엽동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심연월이 뒤 아오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심연월은 아마 부상당한 토끼를 쫏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쫏아오고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엽동은 더욱 절박해졌다.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십
년동안에 심연월이 그와같은 가공할 고수가 되어 있을 줄은 정녕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를 죽이지 말고 데려오라는 동방유아의 지시만 없었다면
엽동은 벌써 차디찬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불과 오 초만에 엽동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심연월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심정으로 엽동을 상대한
것이 틀림없었다. 몇번이나 그를 제압할 수 있었는데도 상처만
입힐 뿐 쓰러뜨리지 않았다.
먼저 오른 팔이 잘려지고 이어서 얼굴을 완전히 가로지르는
상처가 생겨났다.
그때 처음으로 엽동은 도망치겠다고 결심했다.
심연월을 피해서 도망친다는 생각은 아예 해 본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피를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 허무하게 쓰러지기는 너무도 억울했던 것이다.
그는 심연월의 방심을 틈타 사력을 다한 반격을 가했다. 하나
심연월은 전혀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왼쪽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단 그의 손을 피해 몸을 뺄 수는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처절한 도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백 리가 넘는 길을 그는 피를 뿌리면서 달려왔다.
그의 신법이 심연월보다 탁월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달릴수록 많은 피가 흘러 내려서 점차로 발이 느려졌다.
아무리 전력을 기울여도 예전의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조금만 더...조금만 더....
엽동은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때 등뒤에서 심연월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엽동.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왔는가? 실망이군. 그래도
도망치는 건 빠를 줄 알았는데..."
치욕스런 음성이었다.
하나 엽동은 창백한 얼굴로 계속 앞만 보고 달렸다.
여기서 잡힐 수는 없었다.
적어도 심연월의 손에 잡힐 수는 없었다.
그때 멀리 작은 초옥이 보였다.
저 곳이다...저곳에 그가 있다. 저곳까지만 가면....
엽동은 젖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올렸다.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의 등을 뚫고 앞가슴으로 삐져
나왔다.
'.....!'
엽동은 고개를 숙이고서야 그것이 하나의 예리한 비수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 그때 그의 몸은 어느새 초옥의 앞까지 쏘아져 가고
있었다.
쿵!
그는 초옥의 앞에 머리를 쳐박고 쓰러졌다.
가슴을 관통한 비수가 반이상이나 앞가슴을 뚫고나와 있었다.
그는 질펀한 피를 흘리며 벌레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초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가 나왔다.
'표향....'
그녀를 보자 그는 일어나고 싶었다. 그녀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 그는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달려왔다.
그녀는 피에 젖은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슴에 안기자 엽동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인의
가슴이란 이토록 포근한 것인가?
"엽동...당신..."
사마표항은 엽동의 가슴에 반쯤 삐져 나온 비수를 보았다.
그녀의 망사너머로 반짝이던 눈빛이 흔들렸다. 그토록
침착했고 평정을 잃지 않았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엽동은 그것으로 만족을 했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뒤에 한 사람이 선 채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훤칠한 키의 백의미남자였다.
엽동은 그를 올려다 보았다.
백의미남자는 엽동의 얼굴에 검은 빛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의 가슴에 박힌 비수와 구멍뚫린 옆구리도 보았다. 그것은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들이었다.
백의미남자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대체 누구의 짓이오?"
엽동은 떨리는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심연월...."
장록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리에서 하늘색 유삼을 걸친 문사가 날렵한 신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신법은 강호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하나 하늘색 유삼의 문사를 보는 장록번의 눈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마침내 하늘색 유삼의 문사는 그의 앞에 당도했다.
그는 제일먼저 엽동을 찾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응시하고 서 있는 장록번과 시선이 마주쳤다.
장록번의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을 보자 하늘색 유삼의
문사는 몸을 흠칫 굳혔다.
그는 한동안 장록번을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장록번?"
장록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연월은 그제서야 엽동이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이곳을 향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비장의 한 수(手)를 남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심연월은 심호흡을 했다.
그런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소."
장록번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나도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소."
심연월은 평소의 냉정을 되찾았다.
"당신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소."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장록번을 응시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요."
장록번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직접 확인해 보시지."
심연월은 냉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셈이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장록번은 뒷짐을 지며 빙그레 웃었다.
"듣자하니 당신은 동방대협의 반혼장 공력중에서 세 가지를
익혔다고 하던데..."
"네 가지요."
"그렇군. 나는 오래전부터 동방대협의 반혼장을 보고 싶었소.
오늘 그걸 볼 수 있게 해 주겠소?"
심연월은 싸늘하게 웃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갑자기 심연월은 오른손을 쭈욱 내 뻗었다.
장록번은 뒷짐을 진 채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꽝!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장록번의 삼 장 뒤에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히 박살나 버렸다.
그 가공할 위력에 한쪽에서 엽동을 안고 있던 사마표향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장록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심연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훌륭한 공력이군. 하지만 이건 반혼장이 아닌 것
같은데..."
"무영벽공장(無影劈空掌)이란거요."
"반혼장 공력은 언제쯤 볼 수 있겠소?"
심연월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때가 되면."
순간 그의 몸은 장록번을 향해 비조처럼 덮쳐 올랐다.
파파파팍!
허공에서 심연월은 장록번을 향해 질풍 같은 십이장(十二掌)을
후려갈겼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섬전같아서 열 두 개의 손이
일제히 장력을 날린 듯한 형상이었다.
"좋은 십이쇄혼장(十二碎魂掌)이로군. 하나 힘이 부족하오."
장록번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두 다리를 슬쩍 움직였다.
아주 간단한 동작같았는데도 심연월의 벼락 같은 십이장은
모두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심연월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광오하군, 장록번! 어디 언제까지 피하기만 하는지 보겠소!"
심연월은 하늘색 유삼자락을 펄럭이며 장록번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쾌액!
그의 양 손이 시퍼런 빛을 뿌리며 장록번의 미간을 찍어왔다.
장록번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청강수(靑剛手)라. 이 정도면 상대할만하지."
그는 슬쩍 오른소매자락을 휘둘렀다.
꽝!
굉음이 터지며 달려들었던 심연월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심연월의 안색이 홱 변했다.
상대가 가벼운 소맷자락으로 자신의 청강수를 격퇴시킨 것에
상당한 충격을 느낀 모양이었다.
"과연 장록번이군. 하나 이번엔 다를 것이다!"
심연월은 비장하게 외치며 양 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일장앞에 있는 장록번의
옷자락이 마구 펄럭거렸다.
심연월이 무영벽공장을 전력으로 펼쳐낸 것이다.
장록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무영벽공장의 공세속으로
뛰어들며 오른주먹을 살짝 흔들었다.
쾌액!
가벼운 동작이었는데 그의 오른주먹은 너무도 간단하게
무영벽공장의 공세를 뚫고 심연월의 콧등으로 날아들었다.
심연월은 황급히 무영벽공장을 거두며 옆으로 이 장쯤
날아갔다.
하나 그의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어느새 장록번의 주먹이
다시 날아들었다.
심연월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같이 주먹을 들어 막았다.
꽝!
세찬 경기가 휘몰아치며 심연월의 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서 두 바퀴나 회전했다.
심연월은 간신히 주저앉지 않고 바닥에 내려섰으나 기혈이
뒤흔들려서 잠깐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몇 차례 숨을
고른 후 장록번을 노려보았다.
"장록번. 귀하의 공력은 확실히 놀랍소."
장록번은 처음의 위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백의를 펄럭거리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 말씀을. 당신의 무공도 나쁘지는 않소."
심연월의 눈꼬리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각오하는게 좋을거요. 나는 반혼장을 쓰겠소."
장록번의 담담하던 눈에 섬광이 피어올랐다.
"기다리던 바요."
그는 뒷짐을 진 채 그자리에 우뚝 섰다.
심연월은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갑자기 양 손을 깍지껴
단전(丹田)위에 올려 놓았다.
우우웅...
그에 따라 무언가 기이한 음향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심연월의 깍지낀 손이 새하얀 빛을 띄기 시작했다.
순간 장내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심연월이 드디어 광세절학(曠世絶學)이라는 반혼장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2
심연월의 손은 순식간에 눈처럼 하얀 백색(白色)이 되었다.
장록번은 두 눈을 반짝인 채 심연월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연월은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입으로 무언가 구결(口訣)을
중얼거리더니 돌연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 그의 눈에서는 사악하리만치 요사스런 광채가
번뜩거렸다. 동시에 그의 양 손이 커다랗게 원(圓)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한 줄기 기이한 기운이 장내에 휘몰아쳤다.
장록번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심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파아아....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있던 자리가 움푹 꺼지며 선명한
손자국이 새겨졌다.
손자국의 깊이는 무려 한 자에 달했다.
바닥에 한 자의 깊이를 남기는 장력이 인간의 몸에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실로 모골이 송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심연월은 그자리에 우뚝 선 채로 다시 양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에 따라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괴이한 기운이 장내의
공기를 마구 뒤흔들었다.
장록번은 마치 허깨비에 쫏기는 사람처럼 아무도 없는 허공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파아...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선명한 손도장이
찍혔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여서 언뜻 보기에는 금시라도
장록번이 더이상 피하지 못하고 그 가공할 장력에 격중되고 말
것같아 보였다.
장록번은 순식간에 허공에서 무려 열 다섯 번이나 몸을
비틀었다. 그에 따라 바닥에는 열 다섯 개의 장인이 새겨졌다.
무섭도록 빠른 동작이었고, 무섭도록 강력한 장력이었다.
갑자기 심연월이 버럭 호통을 질렀다.
"반혼일장(返魂一掌) 측탈혼(測奪魂)을 피하다니 제법이구나.
이장(二掌) 귀색혼(鬼索魂)을 받아라!"
그와함께 심연월의 동작이 돌변했다.
지금처럼 양 손을 크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팔굽의 관절을
굽히지 않고 뻣뻣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전과는 비할데 없이 강한 공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마표향조차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할 정도의
압력을 느꼈다.
그러니 그 압력의 한가운데 있는 장록번이야 오죽하겠는가?
하나 장록번은 조금도 표정이 바뀌지 않은 채 형형한 안광을
뿌리며 심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양 손을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팍!
삽시간에 그의 손에서 벽력 같은 사십팔장(四十八掌)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의 장력은 무척 특이해서 처음의
장력보다 두번째 장력이 빨랐고, 두 번째 장력보다 세번째
장력이 더욱 빨랐다.
그리하여 갈수록 장력의 속도가 빨라지더니 종내에는 사십 팔
개의 장력이 거의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가히 제방의 둑이 무너져 봇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엄청난 광경이었다.
콰쾅!
주위의 땅박닥이 뒤집히며 무지막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세찬 모래바람이 주위를 온통 뒤덮어 버렸다.
사마표향은 망사로 두 눈을 가린 채 장내를 바라보았다.
장록번의 몸이 허공에서 이 장쯤 위로 솟구쳐 올라간 모습이
들어왔다.
심연월 또한 한차례 몸을 크게 휘청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
심연월은 자신이 반혼장을 사용하고도 상대에게 물러나게 되자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다, 장록번! 삼장(三掌) 백락혼(魄落魂)까지 막을 수 있나
보자!"
그는 손목을 고정시킨 채 양 손바닥을 마구 흔들었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손바닥을 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 장록번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한 줄기 암경(暗勁)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밀어닥쳐옴을 느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오른 주먹을 느릿느릿 내 뻗었다.
어찌보면 답답할 정도로 느린 동작이었다. 하나 그 속에는
실로 가공할 위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쿠쿠쿠....
주먹이 앞으로 전진하면서 반혼장의 장세와 격돌하여 무서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장록번이 사용한 것은 소림의 칠십이절예(七十二絶藝)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강한 소림천왕권(少林天王拳)이어다. 소림역사상
소림천왕권을 이 정도 위력까지 연마한 인물은 오직 장록번
뿐이었다.
장록번의 주먹은 반 정도밖에 뻗어지지 못했다.
반혼장의 장세에 실려 있는 암경 때문에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반혼장의 장세 또한 더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순간,
"이젠 마지막이다!"
심연월이 노호성을 지르며 양 손을 쫘악 벌렸다.
순간 소림천왕권과 함께 뒤엉켜 있던 반혼장의 장세가 갑자기
구름처럼 일어나며 천왕권의 경력과 함께 장록번을 향해 휘몰아
쳐오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반혼장의 네번째 초식인 회심혼(廻心魂)이었던
것이다.
장록번의 몸은 금시라도 그 가공할 경력에 갈가리 찢겨
버릴것만 같았다.
장록번은 해일(海溢)과 같은 기세로 자신을 휘몰아쳐오는
회심혼의 엄청난 공세를 우두커니 선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너무도 가공할 공세에 자포자기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막 반혼장의 장세가 그의 몸에 격중되기 직전, 갑자기
장록번은 오른손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이 모두 모아진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장록번은 그렇게 모인 손가락으로 허공을 살짝 찍었다.
갑자기 그토록 노도와 같은 기세로 몰아닥치던 반혼장의
장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장내에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장록번은 여전히 손을 내민 자세로 서 있었다.
심연월 또한 양 손을 활짝 벌린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괴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문득 그의 입이 열리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무슨 무공이오?"
장록번은 내밀었던 손가락을 거두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뢰결인."
심연월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오뢰결인이라....정말 무서운 무공이군. 사부의 반혼장이면
천하무적(天下無敵)일 줄 알았는데..."
그의 입에서 시커먼 선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선혈은
이내 꾸역꾸역 흘러나오더니 나중에는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연월의 몸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입 뿐만 아니라 코와 귀로도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는 신음 한마디 내지르지 않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장록번은 심연월의 싸늘히 식어가는 시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장록번은 고개를 들었다가 사마표향의 영롱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별거 아니오."
그래도 사마표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장록번은 왼쪽
소매를 들어올렸다.
그의 왼쪽 소매는 어느새 옷자락이 모두 없어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장록번은 맨살이 훤히 드러난 왼 팔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반혼장이 이 정도로 위력적일줄 몰랐소. 네번째 초식이
이정도라면 마지막 초식은 얼마나 무섭겠소?"
사마표향은 별빛 같은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의 오뢰결인이라면 능히 물리칠 수 있겠죠?"
장록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었소. 나의 오뢰결인으로 과연
반혼장의 마지막 초식을 상대할 수 있을지..."
"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섣불리 장담할 수 없소. 더구나 동방유아
본인이라면 심연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력을 발휘할 지도
모르니..."
사마표향의 눈빛은 여전히 유성처럼 맑았다.
"당신이 오뢰결인을 십이성까지 연성했다면...제아무리
동방유아라 해도 감당할 수 있겠죠."
장록번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십이성에 도달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직
십일성에 머무르고 있소."
그녀는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젊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에요."
장록번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렇겠지. 언젠가는...하지만 과연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줄는지..."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엽동은?"
사마표향은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죽었어요."
장록번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으로 몸을 날렸다.
엽동은 초옥의 처마밑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어찌보면 달고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장록번은 그의 몸이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록번은 한동안 그를 내려보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세(一世)의 기재(奇才)가 이토록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다니...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사마표향은 어느새 그의 뒤에 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에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알려 주었어요."
장록번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엇이오?"
사마표향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나 그녀의 음성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천상회를 뒤집은 조향령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어요."
장록번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가 누구요?"
사마표향은 나직히 입을 열었다.
"동방유아."
* * *
당신에게 알려줄 말이 있소.
내 말을 막지 마시오....
내 상처는 내가 잘 알고 있소....더 늦기 전에 당신에게 꼭 이
말을 해야 하오.
사실...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동방유아의 셋째
제자였소.
이번에 조향령을 구한 복면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뒤를
다가 나는 한 가지 아주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
조향령을 구한 복면인은 단숨에 그를 데리고 오십 장을
날아갔는데 그런 신법은 온 천하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시전할
수 있는거요.
바로 구유천자 양무극이오.
하지만 그는 이미 육십 년 전의 인물이라 나는 그자가 양무극
본인인지 확신할 수 없었소.
나는 그때 문득 사부에게서 오래전에 양무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을 기억해 냈소.
특히 사부의 말중 한 가지가 뇌리에 떠올랐지.
- 양무극의 신법은 노부를 능가한다. 그가 장인(丈人)만
아니었다면 노부는 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오래전에 들은 말이라 간신히 기억할 수 있었소.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몇 년 전에 죽은 사모(師母)의
성(姓)이 양(楊)씨라는 것이 떠올랐소.
양무극은 바로 동방유아의 장인이었던 거요.
만일 양무극이 조향령을 구출해 갔다면 그것은 필시
동방유아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을 거요.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십 년만에 다시 산장으로 갔소.
그리고 그곳의 후원에서 양무극을 발견했소.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산장을 빠져나오다가 종적이 발각되어
심연월에게 쫏기게 되었던 것이오.
결국 과거 천상회를 무너뜨리고 노가살수문을 혈겁한
배후인물은 다름아닌 동방유아였던 거요. 그는 강북을 장악하고
있던 천상회를 집어 삼키기위해 무서운 음모를 짰던 것이오.
아....
숨이 차오는군.
이제 당신 얼굴도 점점 흐릿하게 보이는구료.
내가 말했소?
당신은 나의 아주 옛날 여인을 많이 닮았소.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그토록 빠져 들었는지 모르지.
이제 저승에 간다면 그곳에 있는 그녀를 만나게 되겠지.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왔소.
이루어질 수 없는 당신과의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느니
죽어서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거요.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거요....
십 년만에 나는 다시 그녀의 품속으로 돌아가게 되는거요....
그녀는 기꺼이 나를 받아줄거요. 어쩌면 십 년동안 간절히
나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지....
그럼 표향....
잘 있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