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장 오 래 전 부 터 알 고 있 었 어
1
둔계에서 남쪽으로 십여 리쯤 가면 하나의 웅장한 성곽(城廓)
같은 담이 나온다.
담의 높이는 무려 이장, 그 길이는 거의 수 백리에 걸쳐
뻗어져 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뾰쪽한 전각의 지붕은 광활한 숲처럼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말못할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담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석문(石門)이 있다.
석문은 커다란 마차 세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로 엄청나게
컸는데, 석문의 위에는 사람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모용제일세가(慕容第一世家).>
그렇다.
이곳이 바로 부귀와 권세로 천하에 이름이 높은 모용세가였던
것이다.
모용세가가 세워진 지는 거의 삼백 년이 넘었고, 그 동안
배출된 절정고수의 수는 수 백명에 달했다.
특히 당대의 가주인 만승검왕 모용태릉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무림을 풍미하는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이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자 모용세가의 전각안에 하나 둘 씩
등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등불의 수는 많아지더니 이내 거대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게 되었다.
서문방은 모용세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 야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모용세가는 그 범위가 너무 광활해서 자칫하면 그 안에서
길을 잃기가 십상이오. 하지만 일단 지리에 숙달하게 되면
오히려 종적을 들키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장점도
있소."
노독행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서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서문방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서문방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은 나의 수하들이 모용세가의 여기저기에서 소란을
피울거요. 그때 당신은 모용태릉의 거처로 들어가시오."
이어 그는 손가락으로 모용세가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유난히 높은 전각들이 많이 솟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른 전각들을 압도하는 엄청난 높이의 칠층누각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중앙에 유달리 높다랗게 솟은 전각이 바로 모용태릉의
거처인 웅풍각(雄風閣)이오. 저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모두 세
개의 가산(假山)과 다섯 개의 돌담, 그리고 네 개의 매복처를
지나야 하지만 당신의 실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을거요."
그때 문득 노독행의 시선이 서문방을 향했다.
"모용세가에 대해 잘도 알고 있군."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으나 서문방은 몸을
움찔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하...모용태릉은 누가 뭐래도 당대 무림의
유력자(有力者)중 하나요. 그러니 나로서도 그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소."
노독행도 웃었다.
서문방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를 보자 서문방은 갑자기 더이상
웃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노독행의 미소는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을 지니고 있었다.
노독행은 웃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게 아닐텐데."
서문방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왜 좀더 솔직해지지 않나? 모용태릉을 없애기 위해서 피나는
연구를 했다고 말이야."
서문방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이내
다시 웃었으나 누가 보기에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무슨 말을 하는거요? 나는 그저..."
노독행은 그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말을 할 뿐이었다.
"나는 말이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서문방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무얼 말이오?"
"네가 누구인지. 처음 황산의 주막에서 보았을 때 나는 벌써
알고 있었지."
서문방의 얼굴에 이상야릇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누구요?"
노독행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웃었다.
"담세악. 아니 조향령이라고 해야 할까?"
서문방의 눈에서 칼날같은 섬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그럴리가...나는 서문방이오."
"이름은 중요한게 아니지. 너는 서문방일수도 있고 담세악일
수도 있고 조향령일 수도 있어. 아니면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중요한건 이름이 무엇이든 그들이 모두 너라는거야. 네가 바로
서문방이고, 담세악이고, 조향령이야."
서문방은 한동안 묘한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독행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외눈을 빛내며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차갑고 냉혹한 웃음이었다.
서문방은 더이상 부인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가면같은 표정이 홀연히 사라졌다.
아울러 그의 음성 또한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알았나?"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침착하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는 음성이었다. 말투 또한
변해 있었다.
노독행은 그의 음성이나 말투가 달라진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말투가 어쨌건, 음성이 어쨌건, 또 눈빛이 어쨌건 사람 자체만
변하지 않으면 된다.
"처음에는 몰랐지. 네가 담세악의 신분으로 나타나 나를
격분시켜 금우두부로 찾아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너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어."
서문방은 냉정한 눈으로 노독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우두부로 갔을 때 이상함을 느낀 거야. 그들은 의당
내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어야 했어. 네가 나를 설득한 것에
실패해서 분노한 내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어야 했어.
한데 그러지 않았어. 그들은 거의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있다가
나에게 당한거야."
"........."
"그곳에서 만난 금마 위혼은 더욱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
담세악은 이름만 삼부주이지 전혀 금우두부에는 붙어있지 않는
인물이라는 거야. 위혼은 아마도 그것이 누군가의 술책일지
모른다고 말해 주더군. 황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계속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 이상하게도 몸은 말할 수 없이 피곤한데
머리는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맑아지더군. 그때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지."
노독행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매어 달려 있었다.
하나 아무도 그것을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단지 습관일 뿐이었다.
먹이를 앞에 둔 늑대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듯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습관일 뿐이었다.
"그리고 너를 만났지. 네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모든 사실을
알았어. 네가 의도한 모든 것들을. 그리고 너의 모든 정체를."
서문방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도 확신할 수는 없었을텐데..."
"아니, 난 확실히 알 수 있었어. 왜냐하면...담세악과 너는
같은 냄새가 났거든."
서문방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냄새라고?"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예민한 코를 가지고 있지. 어렸을 때부터 짐승을
사냥하면서 터득한 거지만 제법 쓸모가 있어.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냄새를 지니고 있지. 같은 냄새를 지닌 사람은 없어.
조금씩은 다 달라. 그런데 너는 담세악과 똑같은 냄새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네가 담세악의 분신(分身)이라는 것을
알아차린거야."
서문방은 차갑게 웃었다.
"냄새로 사람을 분간하다니 놀라운 재주로군. 그런데 내가
조향령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나?"
"나는 조향령을 직접 만난 적이 없으므로 그가 무슨 냄새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조향령에 대해서 한
가지를 알고 있어."
서문방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그의 신발."
서문방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신발이라고?"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상회의 뒤쪽 절벽에서 조향령은 이름모를 고수와
함께 절벽을 넘어 사라졌지. 나는 그 절벽을 타고 내려가서
반대편으로 기어 올라갔지. 반대편 절벽에는 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더군. 그중에서도 특히 조향령의 발자국이 아주 선명히
남아 있었어. 나는 그 발자국의 크기와 신발의 형태를 잘 기억해
뒀지."
".......!"
"담세악이 서문방으로 변할 수 있다면 조향령으로 변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는 아니겠지. 그래서 나는 어제 사당을 벗어날 때
네가 있던 자리를 유심히 살폈지. 네 발자국은 조향령의 것과
똑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더군. 그리고 신발의 형태도 같았어.
그걸 보고도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나는 천하에 다시 없는
바보인거야."
노독행은 물론 바보가 아니다.
서문방도 이제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아주 냉철한 두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는 문득 자신이 노독행을 너무 경시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자국이나 냄새는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비단 서문방
뿐만 아니라 천하의 누구라 할지라도 그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 노독행은 그 사소한 흔적을 추적해서 서문방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다.
서문방은 한동안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군. 그렇다. 내가 바로 조향령이고 담세악이며
서문방이다. 너는 처음으로 내 정체를 모두 알아차린 인물이다."
실로 천하가 경동(驚動)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상회의 총호법 소면군자 조향령.
금우두부의 삼부주 병마군 담세악.
그리고 표향령의 군사인 천기일사 서문방.
놀랍게도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삼대 세력의 중추적인 이들 세
인물이 바로 한 사람의 분장이었던 것이다.
서문방은 한광(寒光)이 흐르는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하며
물었다.
"한 가지 의문이 있군."
노독행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말해봐."
"내 정체를 진작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가
무엇이지? 엽표와 구여해를 죽인 것이 모용태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물론 그들을 죽인건 모용태릉이 아니지. 그건 너무도 당연한
거야."
"왜 그렇게 생각했나?"
"네가 말한 주선검법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어. 너는 아주
그럴 듯하게 말을 지어내더군. 검흔도 그럴 듯 했고. 아마
엽표와 구여해를 암습해 살해한 다음 공을 들여서 만들었겠지.
하마터면 나도 그대로 믿어줄 뻔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헛점이 있었지."
서문방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노독행은 마치 보기라도 한 듯이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이다.
엽표와 구여해를 비롯한 표향령의 고수들을 살해한 사람은
바로 서문방 자신이었다. 검흔은 그가 그들을 살해한 다음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서문방은 노독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헛점이란게 무엇이지?"
"내가 주선검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거야. 너는
모용태릉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 모용세가의
절전검법(絶傳劍法)을 들먹거렸지만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지."
"그런가? 아직 모르겠군. 그게 무슨 실수였는지."
노독행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빨이 내비쳤다.
"주선검법의 본래 이름은 따로 있지. 그것은
복천주(伏天誅)라는 거야."
"복천주?"
천하에서 가장 견문이 많은 서문방으로서도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 듯 되물었다.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무쌍류의 십대절학중 유일한 검법(劍法)이지."
이 뜻밖의 말에 서문방의 얼굴이 약간 변했다.
"그럴리가...내가 알기로는 그것은 분명히 모용광이..."
"모용광이 연구는 했겠지. 하지만 그 근원을 알아보면 아주
재미있어. 모용광이 아직 젊었을 때 강호무림에 한 명의 무서운
인물이 나타났지. 그는 단숨에 강호무림의 최절정 고수 삼십
여명을 쓰러뜨려 버렸어."
서문방은 생각에 잠겼다.
'모용광이 젊었을 때면 거의 백 년 전일 텐데...그때 나타난
무서운 고수라면...?'
갑자기 서문방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그자는 혹시 연철산...?"
노독행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무쌍류의 이십 팔대 전인인 연철산이지. 당시
모용광은 연철산이 사용한 검법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겠지.
연철산이 사라진 후에도 그는 자신이 보았던 그 검법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그 검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던거야."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맞았어. 네가 말한 것처럼 주선검법의 논리는 모용광이 처음
생각한 게 아니야. 모용광은 단지 자신이 젊은 시절에 보았던
검법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던 것 뿐이지. 결국 그가 만들었다는
주선검법은 무쌍류의 복천주검(伏天誅劍)에 대한 습작품인
셈이지."
그것이 진실이었다.
모용광은 오십 년동안 자신이 보았던 그 이름모를 검법을
연구하여 조금씩 깨달은 심득(心得)을 검결(劍訣)로 남겼고, 그
검결을 다시 오십 년후에 모용태릉이 나름대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네가 주선검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솔직히 웃음을
참기 힘들었어. 돌멩이를 들고 그 기본원리를 설명할 때는 정말
배꼽을 잡을 뻔했지. 하지만 간신히 참았지. 나도 내가 그런
참을성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어."
그 말을 하며 노독행은 웃었으나 서문방은 더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노독행을 쏘아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왜 여기까지 따라왔지?"
노독행의 다음 대답을 듣는 순간 서문방은 피가 싸늘히
식어왔다.
"네가 말했잖아. 너의 부하들을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고. 나는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제서야 서문방은 자신이 노독행에게 철저히 우롱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하에서 가장 지략이 많고 심기(心機)가 뛰어나다는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의 의중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그 순간 노독행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산장의 고수들인가?"
2
숲이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노독행과 서문방이 서 있는 반경 이십 장이내의
모든 숲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하나 자세히 보면 숲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숲의 짙은 어둠속에 있는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수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마치 숲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숲의 어둠은 조금씩 노독행과 서문방의 주위를 에워싸며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노독행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문방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문방은 한차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정말 알고 싶은가?"
노독행은 나직하게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곧 알게 될테니까."
노독행이 막 서문방을 향해서 몸을 날리려 할 때 서문방의
몸이 먼저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사방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허공을 자욱하게
뒤덮으며 노독행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자넨 영원히 알지 못할거야! 절대로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테니까!"
서문방의 음성만 들릴 뿐 그의 모습은 이미 흑영(黑影)들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있었다.
노독행은 자신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드는 흑영들을 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피맛을 보고 싶단 말이지. 바라던 바야."
그 순간 노독행은 주저없이 흑영들의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냉혈무정으로 하여금 무림역사상 가장 잔인한 살명(殺名)을
얻게 만들었던 천살조(天殺組)와의 처절한 싸움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여덟 개의 칼날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그 칼날은 노독행의 몸을 산산히 짓이겨 버릴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오는 두 개의 칼날을 옆으로
튕겨냈다. 두 개의 칼날이 다른 두 개의 칼날쪽으로 다가가며
서로 부딪쳤다.
채챙!
노독행은 나머지 네 개의 칼날 아래로 몸을 숙이며 발을
세차게 휘둘렀다.
빠빡!
두 개인가 세 개의 발목이 그의 소퇴(掃腿)에 부딪치며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아악!"
짤막한 두 가닥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나 노독행이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의 몸을 향해서
우박같은 칼날이 퍼부어졌다.
노독행은 오른 팔로 얼굴을 가리며 칼날의 세례속으로
뛰어들었다.
까까깡!
그의 오른팔에 매어진 월영도의 칼집에 십 여개의 칼날이
부딪쳐 튕겨올랐다. 하나 나머지 다섯 개의 칼은 그의 몸에 다섯
개의 핏줄기를 만들었다.
그 대가로 노독행은 그들의 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콰쾅!
그의 팔꿈치가 수평으로 휘둘러지며 두 명의 흑의인이 얼굴이
형체도 없이 으스러진 채 나가 떨어졌다. 노독행은 쉬지 않고
탄양타의 수법으로 다른 한 흑의인의 콧 등을 부수어 버리고
이어서 철산벽으로 등뒤에서 다가들던 두 명의 흑의인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눈 깜짝할 새 다섯 명의 흑의인이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하나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면서도 흑의인들은 조금도
두려워 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진한 피냄새와 시뻘건 선혈이 그들의 살심(殺心)을
한층 더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강호의 최고 살수조직(殺手組織)인 천살조였다.
천살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강호무림에서 누구도 무시못할
혁혁한 명성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한 번 눈밖에 난 자는
제아무리 먼 곳까지 아가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것으로
악명(惡名)이 자자했다.
그들의 수는 이백 명도 되지 않지만 그들중 절정고수 아닌
자가 없고, 살인(殺人)을 마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웬만한 강호인들은 천살조라는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해
꽁무니를 뺄 정도였다.
그 천살조의 전체 인원이 모두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그 수는 정확하게 일백 아흔 두 명.
일백아흔두 명의 전문살수(專門殺手)들이 오직 단 한 사람을
목표로 공격한다는 것은 실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이었다.
백구십이대 일!
그 싸움의 처절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까까깡!
노독행은 언제부터인지 월영도를 뽑아들고 있었다.
맨손으로는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흑의인들을 쳐죽이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수중의 월영도로 자신의 정면으로 다가오는 네 명의
흑의인들의 몸을 꼬치처럼 꿰뚫어 버렸다.
팟!
네 명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선혈이 허공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그때 노독행은 등뒤에서 화끈한 작열감을 느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그의 등 뒤 살덩이를 한 웅큼이나 베고
지나갔던 것이다.
노독행은 몸을 돌리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파아...!
칼날과 머리통이 동시에 팔꿈치에 걸리며 두 개가 모두 박살이
나 버렸다.
덕분에 노독행의 팔꿈치에도 핏물이 솟았다.
하나 고통을 느낄 여유는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다시 일곱 개의 칼날이 칠성(七星)의 방위를 점하며
쏘아져 들어왔다.
천살조 살수들의 공격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자신들의 희생을 두려워 하지 않고, 상대를 격살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때문에 노독행이 그들을 한 명씩 죽일
때마다 노독행의 몸에도 한 줄기의 새로운 혈선(血線)이
생겨나고는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노독행이 일곱 개의 칼날중 다섯 개를 부러뜨렸을 때 나머지
두 개의 칼날은 그의 양쪽 옆구리를 한치나 찢고 들어왔다.
노독행은 양쪽 무릎을 쳐올려 그들의 턱을 뭉개 버렸다.
이런 식의 싸움이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모른다.
한쪽을 베면 다른 쪽이 쳐들어 왔고, 그쪽마저 베면 어느
사이엔가 반대쪽에 상처가 생겼다.
순식간에 사방에는 수십 구의 시체가 널려졌다.
그것은 노독행의 몸에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겼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독행은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상대방을 채 반도 죽이기
전에 자신의 피가 모두 빠져나와 쓰러지고 말리라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하나 그 방법을 생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천살조의 살수들은 끊임없이 날아들었고, 기꺼이 몸을
희생하면서 노독행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입히려고 했다.
파파파팟!
노독행은 맹렬하게 마흔 두 번이나 월영도를 수평으로 내리
그었다.
참혹한 결과가 빚어졌다.
여덞 명의 흑의인들이 그 질풍노도같은 공세속에 휘말려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다져진 고기처럼 토막토막 잘려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 살인적인 위세에 기가 질렸는지 막 그들의 뒤에서 달려들던
두 명의 흑의인들의 몸이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노독행은 주저없이 그 흑의인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두 명의 흑의인들은 안색이 변해 그를 향해 칼을 휘두르려
했다. 노독행은 그들의 칼에 맞서지 않고 허공으로 몸을 날려
그들의 몸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결과가 빚어졌다.
그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다섯 개의 칼날이 그의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흑의인들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두 명의 흑의인들은 핼쓱해진 얼굴로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파팍!
"크악!"
"케엑!"
그들은 동료들이 휘두른 칼날에 의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창졸지간에 동료를 쓰러뜨린 다섯 명의 흑의인들은 두 눈을
살기로 번들거린 채 노독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나 그때
노독행은 이미 또 다른 세 명의 흑의인들 사이로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세 명의 흑의인들은 방금전에 자신의 동료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이 보았기 때문에 칼을 휘둘러 공격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이번에는 노독행의 등뒤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칼날이 없었다.
대신에 노독행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그들을 향해
월영도를 그어댔다.
파파팍!
세 개의 목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날아가 버렸다.
노독행의 이 전법(戰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상대방이 공격해 들어오면 맞서지 않고 피하고, 상대방이
피하면 공격해 들어간다.
흑의인들은 공격하자니 노독행의 몸이 귀신같이 빠져나가며
자신이 오히려 동료를 공격한 꼴이 되어 버리고, 그렇다고 그냥
물러서자니 노독행의 가공할 공격에 표적이 되어 버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희생이 많아도 좋다. 무조건 격살(擊殺)해라!"
어디선가 살기로 뭉친 듯한 냉혹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흑의인들의 모습이 일변했다.
그들은 동료가 있건 없건 노독행의 모습만 보이면 무조건
칼날을 휘둘러 왔다.
노독행도 더이상은 그런 전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다시 악전고투(惡戰苦鬪)가 시작되었다.
노독행은 양 손과 두 발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순식간에 열 두 명의 흑의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들중 네 명은 월영도에 허리가 잘려졌고, 다른 여덟 명은 각기
주먹과 발에 격중당했다.
하나 노독행도 등뒤에 이도(二刀)를 맞았다.
천살조의 살수들은 동료가 격살당하는 그 순간을 노려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노독행의 전신에는 자신이 흘린 피와 흑의인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와 얼굴도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핏물섞인 땀이 목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다.
죽이고 죽여도 흑의인들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노독행은 점차 팔이 저려옴을 느꼈다.
그토록 강인한 그의 체력도 조금씩 바닥이 드러나면서
월영도를 들고 있던 팔이 점차 무겁게만 느껴졌다.
왼쪽 주먹은 이미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힐끗 보니 언제 입었는지 왼쪽 손의 손등에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비단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옆구리와 어깨, 등, 심지어는
목덜미까지 예리한 칼날에 잘려나간 자국으로 뒤덮혀 있었다.
그 잘려진 자국마다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엄청난 것이었다.
노독행은 거의 기계적으로 월영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칼이 다가오면 피하고 벤다. 다시 칼이 다가오면 피하면서
벤다....
피하고 베고...피하고 베고...그런데도 상처는 자꾸 늘어만
갔다.
갑자기 온통 하늘을 뒤덮으며 수십 개의 칼날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서른 개가 훨씬 넘어 보였다.
단 한 사람을 노리고 날아드는 서른두 개의 칼날!
그 광경을 보고 기가 질리지 않는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독행도 순간적으로 아찔함을 느꼈다.
하나 그는 외눈을 번뜩이며 피하지 않고 서른두 개의 칼날을
향해 몸을 날리며 월영도를 휘둘렀다.
십대절학중의 망응홍(網凝紅)이 무서운 기세로 서른두 개의
칼날을 향해 가공할 도기(刀氣)를 뿌려냈다.
파파파파....
무시무시한 도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부러진 칼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허공에서 쏟아져 내렸다.
반경 오장이내가 온통 폐허처럼 변해 버렸다
"끄아아...."
그 도기의 폭풍속에서 몇 가닥의 희미한 비명이 꺼져갈 듯
메아리쳤다.
도기가 사라지고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아! 그것은 실로 눈뜨고는 보지 못할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慘狀)이었다.
노독행을 향해서 동시에 날아들었던 서른두 명의 흑의인들은
단 한 사람도 요행을 얻지 못했다.
그들의 잘려진 목과 부러진 팔, 다리가 사방에 마구 널려져
있었다. 그들중 누구도 온전한 시신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
질펀한 피가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중앙에 전신을 온통 피로 물들인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사나이의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입고 있는 의복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는 제아무리
예리한 안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크흐..."
사나이는 피바가지를 뒤집어 쓴 형상을 한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몸에는 모두 다섯 개의 칼날이 박혀 있었다.
두 개의 칼이 양쪽 옆구리에 꽂혀 있었고, 왼쪽 어깨와 손
등에 각기 하나씩의 칼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등뒤에도 하나의 칼이 자루만 남은 채 삐져 나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마치 꼬치에 꿰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사나이는 쓰러지지 않은 채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스슥!
그런 사나이의 앞으로 천천히 세 개의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