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54화 (55/61)

제 54 장    원 인 은   바 로   그 로 군 요

1

장록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 참 이상하군."

사마표향은 별빛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에요?"

장록번은 앞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가리켰다.

"보시오."

바위는 너비가 오 장에 높이가 무려 사 장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바위라기 보다는 차라리 절벽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위의 한쪽에 기이한 문양 십 여개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다섯 개의 꽃잎처럼 벌어진 매화문양이었다.

매화문양은 거의 열 다섯 개가 찍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장난으로 찍어 놓은 듯한 열 다섯 개의

매화문양. 그것은 두꺼운 바위에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장록번은 천천히 바위로 다가가 가장 왼쪽에 있는 매화문양을

어루만졌다.

"이것은 내가 보름전에 찍어 놓은 것이오. 하루에 한 번씩

나는 이곳에 와서 오뢰결인을 연습했소."

그가 만지고 있는 가장 왼쪽의 매화문양은 유달리 선명했다.

마치 예리한 보도(寶刀)로 판 듯 바위가 깨끗하게 파여 들어가

손을 대면 베어질 정도였다. 다섯 개의 매화잎도 유달리

정교했다.

장록번은 그 매화문양의 오른쪽에 있는 문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은 그 다음날, 그 옆에 것은 다시 그 다음 날 것이오.

그리고..."

그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매화문양을 가리켰다.

"저것은 방금 전에 찍은 것이오. 무언가 다른 점을 느낄 수

없소?"

사마표향은 가까이 다가와서 열 다섯 개의 매화문양을 유심히

주시했다.

과연 달랐다.

제일 왼쪽의 매화문양은 칼로 오린 듯 선명하고 또렷했는데

오른쪽으로 갈수록 매화문양이 조금씩 흐려지고 파여진 자국도

예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매화문양은 거의 뭉뚱그려진

모습이어서 도저히 처음의 예리한 매화문양과  같은 사람이

남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그 깊이는 채 두

치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갈수록 문양이 정교해지지 않는군요. 어떻게 된 일이지요?"

장록번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기이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나의 오뢰결인이 약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요."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가 원인을 설명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나의 오뢰결인은 오 년 전에 이미 십성(十成)의 경지에

올라섰소. 하나 거기에서 진보가 멈춰졌소. 더이상의 발전이

없다는 것이지."

".......!"

"내가 오년 전에 비무행(比武行)을 멈추고 소림사로 되돌아간

것도 단순한 비무행으로는 더이상 오뢰결인을 절정으로 연마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오. 나는 그 동안 남모르는 수련을

계속했지만 십성 이상의 경지에는 오를 수가 없었소."

그녀는 말없이 그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요즘들어 나는 내 마음이 약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오뢰결인을 시전할 때는 요요심(了了心)과

상상지(上上智)가 무엇보다도 필요한데 마음 속의 평정이 깨어져

전력을 기울일 수가 없었소. 그 동안 나는 평정을 되찾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지만 갈수록 평정이 흐트러져서 도저히 균형을 찾을

수가 없었소. 그 결과가 이 석벽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오."

말과는 달리 장록번의 얼굴에는 조금도 초조하거나 불안한

빛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결국 깨달았지. 나는 심마(心魔)에 빠져든거요."

그녀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심마라고요?"

장록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환마경(幻魔鏡)에 빠진거요.

그래서 요요심과 상상지를 찾을 수 없었던거요."

그녀는 눈을 빛내며 장록번을 주시했다.

장록번의 얼굴은 티없이 맑았다.

그리고 준수했다.

그는 전혀 심마에 빠진 사람같지 않았다.

장록번은 그녀가 자신을 빤히 주시하자 그녀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심마에 빠지면 겉으로는 그 흔적이

나타나지 않소. 오직 머리속에 두 개의 전혀 다른 내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나는 즐겁소."

대체 무엇이 즐겁다는 것일까?

장록번은 곧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심마에 빠진다는 것은 오뢰결인이 십일성(十一成)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오. 다시 말해서 내 오뢰결인이

드디어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오."

심마에 빠진 것이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라니...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록번은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계속했다.

"오뢰결인은 본사(本寺)의 천 년에 걸친 정화(精華)가 모인

것이오. 그것은 단순한 무학이 아니라 불법(佛法), 그자체요.

따라서 불법을 깨우치기 전에 환마경에 시달리듯이 오뢰결인도

절정에 이르기 전에 심마의 관문(關門)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오."

심마의 관문을 거쳐야만 한다!

대체 무공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심마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다행히 사마표향은 장록번의 말을 이해했다.

그것은 그녀가 불법(佛法)에 정통해서도 아니었고, 장록번의

말을 무조건 맹신(盲信)해서도 아니었다. 그녀의 두뇌가 더할

나위 없이 총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공도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하나의 진리(眞理)와

다를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뢰결인이 천년 소림의 모든 정화가 결집된 것이라면 그

안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온갖 오묘한 진리가 모두 담겨

있을 것이다.

그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재(奇才)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이다.

불법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최고의 정신, 그리고 육체적

난관을 모두 극복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에 묶여져

있는 한계의 사슬을 끊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심마의 관문'이다.

"심마의 관문을 뚫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미쳐 버리고 말거요.

운이 좋으면 백치(白痴)가 될테고 아니면 죽게 되겠지."

장록번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말했다.

그녀는 장록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만약 심마의 관문을 뚫는다면?"

장록번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때는 나의 오뢰결인은 십이성(十二成)의 극치에 이를거요.

더이상 도달할 수 없는 무공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오."

그녀는 잠시 침음했다.

더이상 도달할 수 없는 무공의 마지막 단계란 과연 어떤

것일까?

장록번은 과연 심마의 관문을 돌파하고 그 무공의 마지막 끝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만에 하나라도 그가 그 관문을 돌파하는데 실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리고 그때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자신이 있나요?

심마의 관문을 뚫고 무공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자신이

있나요?

하나 그녀는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 자체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었이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심마의 관문이 아니다.

심마의 관문은 인간의 정신력에 대한 최후의 시험으로, 그

결과는 본인은 물론이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동안 쌓아온 정신력과 본인의 재질, 그리고 변치 않는

요요심만이 성패(成敗)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장록번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그 표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설사

심마의 관문을 극복치 못하고 한줌의 고혼(孤魂)이 된다

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장록번은 맨 처음에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한거요. 오년 동안 그토록 애를 써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왜 요즘 들어 갑자기 이러한 일이

생겼는가 하고."

그녀는 망사사이로 반짝이는 눈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장록번은 그 눈을 들여다 보며 웃었다.

"그래서 생각을 했지. 나는 결국 해답을 찾아냈소."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으며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이유가 무엇이지요?"

"누군가가 나타나 내 마음 깊숙히 숨어 있던 투쟁심(鬪爭心)을

격발시킨 거요. 그 투쟁심이 잠재해 있던 나의 본능을

충동질하여 심마가 일어난 것이오."

그녀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노독행...원인은 바로 그로군요."

장록번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오뢰결인을 완성한다면 그 공(功)은 전적으로

그자의 것이오. 그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심마의

관문에 도달할 수 없었을거요."

그녀는 마침내 물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도 여자이기 때문에.

"당신은...자신있나요?"

장록번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언젠가 내가 오뢰결인을

발출했을 때 바위에 아무런 흔적도 새겨지지 않는다면...."

그는 손을 들어 바위에 난 매화문양을 쓰다듬었다.

바위가 진흙처럼 부서지며 매화문양이 사라져 버렸다.

장록번은 조용히 말을 맺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심마의 관문을 돌파하고 오뢰결인을 완성한

거요."

2

서문방은 노독행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혼자 모용세가로 쳐들어 간다는 건 무리요."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서문방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좀더 신중을 기해야만 하오. 우선 우리는 그가

엽표와 구여해를 살해하고 엽동을 끌고간 흉수인지 장담할 수

없소. 단지 누구보다 가능성이 많다는 것 뿐이지."

노독행은 언제나처럼 짤막하게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그렇다.

노독행에게는 그 정도의 가능성이면 충분했다.

아무리 입이 아프게 떠들어 보았자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보는

것만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서문방은 노독행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고집 하나는 대단하군. 좋소. 당신은 모용세가로 곧장

가시오. 내가 측면에서 지원을 해 주겠소."

"그런건 필요없소."

"언제까지 독불장군처럼 살 수는 없는거요. 마침 나는

얼마전부터 젊은 인재들을 모아서 맹렬한 훈련을 시켰소. 지금은

제법 그런대로 쓸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소. 그들을 동원한다면

당신의 수고를 약간은 덜어줄 수 있을거요."

노독행이 채 거절하기도 전에 서문방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변변치 않은 하류무사들까지 당신이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소. 그런건 공연한 시간과 힘의 낭비에 지나지 않소. 당신은

모용태릉만 상대하면 되는거요."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방도 따라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갑시다. 연락은 가면서 취하면 되니까. 우리가

모용세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그곳에 와 있을거요."

이어 노독행이 다른 말을 할 것이 두려운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노독행은 한동안 물끄러미 그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피가 그치지 않고 흘러 내렸다.

하나 피를 닦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 사력을 다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왼쪽 귀는 싹둑 잘려 있었고 양쪽 팔 모두는 허연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갈라져 있었다. 어깨에서 등까지는 갈고리 같은

것에 찔렸는지 세 줄기 깊은 흉터가 밭이랑처럼 패여져 있었다.

그의 몸중 유일하게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곳은 두 다리

뿐이었다.

그의 두 다리는 마치 천마(天馬)의 그것처럼 아직도 싱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쉬이익!

그토록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그의 몸은 빛살보다도

빨랐다.

순식간에 그는 두 개의 숲과 세 개의 산, 그리고 다섯 개의

개울을 건넜다.

그의 몸이 한 번 땅을 박차고 지나갈 때 마다 거의 이십 장에

가까운 거리를 쭈욱쭈욱 전진하고 있었다.

가히 번개가 무색할 정도의 신법이었다.

그의 눈앞에 다시 하나의 숲이 나타났다.

그의 몸이 막 수림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사제. 용케도 여기까지 왔군."

수림안에서 한 줄기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을 듣자 달려오던 사나이는 전신을 부르르 떤 채 몸을

멈추었다.

짙은 수림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하늘색 유삼이 유난히도 시선을 끌었다.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의 청년문사였다.

하늘색 유삼의 문사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제의 신법은 확실히 나보다 뛰어나군. 과거에

강남제일영(江南第一影)이란 이름이 전혀 부끄럽지가 않아.

사부님이 이것을 아신다면 얼마나 흐뭇해 하실까?"

사나이는 몸을 격하게 떨다가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심연월.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내게는 사부가 없다!"

하늘색 유삼의 문사는 나직히 혀를 찼다.

"쯧. 제자의 몸으로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지난 몇 년간

자네는 많이 변했군."

사나이의 음성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십 년 전의 그날 밤이후 내게는 사부가 없다! 너도 내 사형이

아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사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나이의 음성에는 분노와 원한에 사무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늘색 유삼의 문사는 조금도 놀라거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군. 하지만 자네가 아무리 부인해도 나는

자네의 사형일세. 나를 따라오게. 사부님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네."

사나이의 입에서 분노를 넘어서 허탈에 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헛...심연월! 나는 그 늙은이를 보고 싶지 않다. 너나 그

늙은이의 발바닥을 일으면서 충성스런 개 노릇을 열심히 해라."

하늘색 유삼의 문사의 눈에서 주위를 질식 시킬듯한 예리한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엽동. 정말 말을 함부로 하는군.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사나이, 엽동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주위를 쓸어보며

웃었다.

"하하...이곳에 그 늙은이의 심복인 십이비성(十二飛星)이

숨어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로 나를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심연월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자네야 말로 큰 착각에 빠져있군. 자네는 아직도 내가 십 년

전 처럼 호락호락한 줄 아나? 십 년이란 긴 세월이지. 지금의

나는 십이비성이나 다른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엽동은 달려오는 도중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이 약간 어찔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면서 심연월을 향해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내가 이런 꼴이 아니었다면 너는 내

앞에 나타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이 흐른다

해도 너는 나나 대사형을 따라잡지 못한다."

심연월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디 증명해 보지 그러나."

엽동의 눈에서 무서운 화광(火光)이 이글거렸다.

"좋다. 심연월. 어디 십 년동안 그 늙은이에게서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 한 번 보자."

그는 심연월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심연월은 뒷짐을 진 채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엽동을 응시하고 있었다.

엽동은 두 눈에 무서운 신광을 뿜어내며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외쳤다.

"겁이 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 죽지도 않는 열

두명의 괴물을 불러라."

심연월의 얼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등뒤의 숲속을 향해 나직하면서도 냉랭하게 말했다.

"열 두분은 이자와 나의 일에 개입하지 마시오. 이 일은

전적으로 내가 해결하겠소."

숲속에서는 잠시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숲의 어딘가에서 음충하면서도 늙수그레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알겠네."

아주 짤막한 말이었는데도 왠지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음성이었다.

심연월은 엽동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되었나?"

엽동은 이미 심연월의 삼 장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의 피로 물든 얼굴에는 한 줄기 원한에 가득찬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연월. 너는 내가 오늘 같은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밤마다 너와 그 늙은이의 살을 가르고 피를 마시는

꿈을 꾸며 지내왔다."

그는 두 주먹을 부르르 움켜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양

손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변해 버렸다.

심연월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 일은 이미 십 년이나 지난 것이다. 한낮 계집 때문에

청운(靑雲)의 꿈을 버리다니 너는 정말 바보다."

엽동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낮 계집이라고? 너는 그녀가 누구인지 아느냐? 그녀는 내

약혼녀다. 나와 정혼(定婚)을 앞둔 사이란 말이다. 그런데 너희

두 짐승들은 그녀를...그녀를...."

엽동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십 년이나 지났건만 그때의 고통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엽동은 더이상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마침내 엽동은 심연월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                *             *

그 소녀는 유달리 예뻤다.

금릉의 계명산(鷄鳴山)근처에서 사냥을 하는 사냥꾼의

외동딸인 그녀는 귀엽고 사랑스런 용모를 하고 있었다.

열 아홉 살의 엽동은 사슴을 뒤 다가 우연히 마주친 그녀에게

한 눈에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도 준수하고 헌앙(軒仰)한 기개를 지닌 그를 눈이 부신 듯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달려갔다.

엽동은 한 마리 풋사슴 같은 그녀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엽동은 근처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서 그녀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황아앵(黃兒鶯).

나이는 열 일곱 살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사냥꾼인 아버지와 단 둘이 계명산의

중턱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다음 날부터 엽동은 하루가 멀다하고 계명산으로 사냥을

떠났고, 마침내 삼 일만에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돌아오는 입춘(立春)날에 혼인을 하기로 하고

손가락을 걸고 서로의 사랑을 맹세했다.

입춘을 십 여일 앞둔 어느 날.

엽동은 한 가지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오일동안

폐관수련(閉關修鍊)에 들어갔다.

오일 후에 그가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황아앵의 아버지였다.

그는 울면서 말했다.

- 아앵이 없어졌네....그 아이를 찾아주게.

엽동은 안색이 대변해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녀가 없어지다니...

황아앵의 아버지는 울음 반 음성 반의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 어제 저녁에 그녀가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이곳에

왔었네. 그때 누군가가 그 아이를 보고 말했지.

"저 아이가 마음에 드는군."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았네.

엽동은 급히 물었다.

- 그가 누구요?

황아앵의 아버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 머리가 눈처럼 하얀 중노인이었네. 짙은 화의(華衣)를 입고

얼굴이 대추처럼 붉었지. 그의 곁에는 하늘색 유삼을 입은

청년이 뒤따르고 있었네.

엽동은 안색이 대변해 그 길로 산장으로 뛰어갔다.

가는 동안 내내 그는 마음이 미칠 듯이 급하고 터질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사부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을 가끔 들어왔던 그였다.

사모(師母)가 오래전에 죽은 후 사부가 가끔 어린 소녀를

침실로 끌어들인다는 소문이었다. 하나 그는 그 소문을 한낮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好事家)들의 입방아라고 치부하고 한쪽

귀로 흘려듣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그는 불문곡직하고 사부의 거처로 뛰어들었다.

몇 사람인가 그를 막으려 했으나 이미 눈이 뒤집히고 광폭한

분노에 사로잡힌 그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사부의 침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보았다.

찢겨진 옷...드러난 알몸의 그녀를....

그녀의 크게 뜨여진 눈에 어려있는 그 비통함과 치욕스러움과

억울함을...

그를 본 그녀는 혀를 깨물고 쓰러졌다.

그는 그녀의 입에 한 줄기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토록 영롱하고 사랑스러웠던

눈에서 빛이 꺼져가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머리가 텅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와아....!"

마침내 그의 입에서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엄청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는 그대로 밖으로 몸을 날려 정신없이 달려갔다.

뒤에서 사부가 무어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그는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었다.

그 길로 그는 두 번 다시 산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십 년 전에 함께 동방유아의 밑에서 사사(師事)를 했을 때

가장 진척이 빠른 사람은 엽동이었다.

방립동은 천성적으로 성격이 충후했고, 심연월은 너무 살기가

짙고 조급해서 각기 약점이 있었다.

하나 엽동은 머리가 명석하고 성격이 모난데가 없었으며 몸도

건강했다. 특히 그는 발이 빨랐다.

천성적인 것이겠지만 그는 유달리 몸이 날렵하고 다리힘이

좋았다.

몸이 빠르다는 것은 무공을 익히는 무림인들에게는 커다란

이점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세 사람중에서 가장 늦게 들어왔지만 진도가 가장 빨라서

동방유아의 관심어린 지도를 많이 받았다.

심연월은 항상 그것이 못마땅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동방유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철저하게 노력을

했다.

조급한 성격을 버리려고 애를 썼으며,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서

무진 고생을 했다. 그의 재질이나 신체적 조건은 방립동이나

엽동보다 못할 지 모르나 집요한 끈질김은 그들보다 월등한

것이었다.

이제 두 사람의 사형제는 십 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십 년동안 끈질긴 노력으로 동방유아의 무학을 전수받은

심연월의 경지는 과연 어디에까지 이르러 있을까?

지난 십 년간 엽동은 무공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상대가 다름아닌

동방유아인 만큼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사부라서가 아니라 동방유아이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동방유아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엽동은 막연히 심연월이 지금의 자신보다 한 두 단계

위에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 차이라면 자신의 탁월한

신법으로 얼마든지 메꿀 수가 있었다.

하나 그는 곧 자신이 커다란 오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심연월의 차이는 단순히 한 두 단계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였다.

십 년동안 심연월은 전혀 차원이 다른 고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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