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53화 (54/61)

제 53 장   아 무 도   익 힌   사 람 이   없 소

1

황산을 내려왔을 때 천하에 다시 없는 체력을 지닌 노독행도

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만은 더욱 맑아졌다.

수많은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중 어느 것도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나 노독행은 서두르지 않았다.

위혼의 말처럼 언젠가는 모든 일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독행이 황산의 산아래를 걷고 있을 때였다.

그는 문득 길옆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주막을

발견했다.

주막이라고 해야 네 개의 기다란 막대기위에 천을 걸어놓은

것에 불과했으나 그래도 바람에 펄럭이는 <주(酒)>라는 깃발이

유난히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노독행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에는 서 너개의 탁자가 있었다.

그중 한 탁자에는 벌써 한 사람의 손님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노독행이 주막안으로 들어오자 그 사람은 힐끗 고개를 돌려

노독행을 쳐다보았다.

노독행의 시선도 그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는 짙은 회삼을 걸치고 이목구비가 수려한 중년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눈빛이 차고 맑았으며,

손에는 섭선 하나를 들고 있었다.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회삼중년인의 눈에 이채가

반짝거렸다.

노독행은 그 회삼중년인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 회삼중년인은 분명 그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그때 회삼중년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노독행을 향해

다가왔다.

"당신을 찾고 있었소."

노독행은 회삼중년인을 빤히 응시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노독행의 눈을 절대로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 눈에 서려 있는 냉정함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나 회삼중년인은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엽동이 당신을 찾고 있소."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듣자 노독행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번득였다.

노독행은 불쑥 물었다.

"당신은?"

회삼중년인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천기일사(天機逸士) 서문방(西門尨)이란 사람이오.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는 들어 보았다.

천기일사 서문방!

그는 바로 표향령의 신비에 가려진 군사(軍師)였던 것이다.

서문방은 강북무림의 제일가는 지략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강남의 담세악, 강북의 서문방!

이 두 사람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당금 무림의

최고 두뇌들이었다. 혹자는 이들을 가리켜

남북쌍절(南北雙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문방은 지략이 탁월하고 재지가 비상할 뿐 아니라 종적이

신비스러워서 천상회에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없애지 못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行跡)은 많은

무림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거의 전설과도 같은 명성을

떨치게 만들었다.

그 서문방이 노독행의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당신이 황산 근처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말을 듣고 이틀 째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더 늦기 전에 만났으니 정말

다행이오."

서문방의 말은 간단했으나 그 동안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게

했다.

엽동이 노독행을 찾고 있다!

그것은 필시 중대한 일일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만났다는 것은 엽동에게 위기가 닥쳐 있으며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대체 엽동은 무슨 비밀을 지니고 있을까?

그것을 알아보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는 없다.

더 늦기 전에 엽동을 직접 만나는 길뿐이다.

노독행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생각했는지 서문방은 자신이 먼저

앞으로 움직였다.

"사마영주에게도 연락을 했으니 그녀도 그곳으로 오고

있을거요. 이 일의 자세한 내막은 가면서 말해 주겠소. 우선은

한시라도 빨리 엽동에게 가야하오."

"그는 어디 있지?"

"이곳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사당(祠堂)에 있소."

노독행은 그의 뒤를 따라가기 전 술을 한 병 샀다.

그는 서문방과 함께 몸을 움직이면서 술을 병째 마셨다.

서문방은 이런 촉망중에도 술을 병째로 들이키는 그의 모습이

의아스러운 듯 몇 번이나 그를 쳐다 보았다. 하나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심 짐작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체내의 혈액순환이 빠르게 상승한다.

지나치게 마시면 물론 호흡이 가빠지고 좋지 않은 상태에

빠지게 되지만, 적당한 음주는 피의 순환을 좋게 하고 근육에

적당한 자극을 주게 된다.

노독행은 술을 마시고 몸을 움직임으로써 황산에서의 치열한

격전으로 지쳤던 몸을 회복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과연 달려가는 도중 그는 땀을 비오듯 흘렸다.

가슴과 어깨, 등의 상처에서도 간간히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 일각쯤 달리자 피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반 시진쯤 달리자 근육속에서 땀이 흘러나와 체내의

탁한 기운을 모두 밖으로 뿜어내었다.

목표지점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에는 노독행의 몸은 거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고 있었다.

서문방으로서도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술을 마시고 단지

달리는 것만으로 심각한 부상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보았다면 가히 기적 같은 일이라고 떠들어 댔을

것이다.

서문방은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기적이라고? 그런건 없다. 저건 천년동안 쌓아온

비법(秘法)과 최고의 강인한 육체가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기적 같은 건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얕으막한 고개를 넘자 멀리 하나의 허름한 사당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곳이오."

서문방은 더욱 빠르게 몸을 날렸다.

노독행은 그보다 앞서지 않고 묵묵히 그와 보조를 같이하여

달리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본 채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무쇠로

만들어진 철인(鐵人)을 연상케했다.

어떠한 것으로도 파괴되지 않을 무적의 철인!

사당에서 십 여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을 때 두 사람의

눈빛이 일제히 변했다.

바람을 타고 사당안에서 한 줄기 기이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 냄새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비릿하면서도 왠지 기분 나쁜 냄새...

바로 피냄새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당의 담을 넘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당안은 아주 조용했다.

풀밭이 무성했고, 무너진 담장과 빛 바랜 벽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몇 구의 시체가 있었다.

사방에 널려져 있는 시체의 수는 모두 일곱 구였다.

그들중에는 노독행의 눈에 익은 시체도 있었다.

사당의 계단앞에 입을 딱 벌린 채로 쓰러져 있는 시체.

짙은 남색 장삼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손에는 예리한 빛을 발하는 강도(剛刀)가 굳게 쥐어져 있었다.

그는 바로 신도비응 엽표였다.

사마표향의 측근중의 측근이며 엽동의 유일한 남동생.

그가 이름모를 사당의 풀밭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는

것이다.

엽표의 시체를 본 서문방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황급히 사당안으로 들어갔다.

사당 안에도 몇 구의 시신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양쪽 손에 쇠구슬(鐵丸)을 움켜 쥐고 우뚝 서

있는 금포인의 시체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금포인은 무엇이 그리도 억울했던지 눈을 부릅뜬 채 꼿꼿하게

선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

그 금포인을 보자 서문방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구여해...자네까지...."

그렇다.

금포인은 바로 엽표와 함께 새외쌍절로 알려진 무적철환

구여해였던 것이다.

엽표와 구여해.

표향령의 핵심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무림의

최절정고수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다.

그들외에 널려진 시신도 모두 표향령의 고수들이었다.

서문방은 사당안을 돌아보고는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엽동을 지키던 고수들이었소. 그런데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몰살을 당해 버렸으니..."

노독행은 불쑥 물었다.

"엽동은?"

서문방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라졌소."

이어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엽동은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소. 그

혼자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몸이란 말이오. 그를 지키던

고수들이 모두 죽고 그가 사라졌다는 건 한 가지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소."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는 삼척 동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엽동은 흉수(兇手)에 의해 끌려간 것이다.

그것외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흉수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왜 이들을 몰살하고 엽동을  끌고 간 것일까?

서문방은 문득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듯 구여해의 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손길이 한 곳에서 딱 멈추었다.

"이리 좀 와 보시오."

서문방의 음성은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독행은 구여해의 시신곁으로 다가갔다.

구여해의 가슴팍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기이한 혈선(血線)이 한 일자(一字)로 그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붉은 세필(細筆)로 정성스레 그어 놓은 듯 아주

가늘고 곧은 직선이었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그 혈선을 응시하다가 손으로 만져

보았다.

피는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 혈선의 깊이는 정확하게 두 치였다.

피부만 살짝 가르고 들어가 피부밑에 있는 신경을 잘라놓을 수

있는 깊이였다.

그리고 혈선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얼핏 보기에 붉은 실 한조각이 달라 붙어 있는 듯 가느다랗게

그어진 한 줄기의 혈선은 구여해의 가슴팍 신경을 모조리 끊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칼로 신경을 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나 이토록 섬세하게 피 한 방울 나오게 하지 않고

전문적으로 신경만을 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구여해 같은 고수가 제대로 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상대가 자신의 신경을 모조리 끊어 버릴 때까지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흉수의 무공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서문방이 확인해 보니 구여해 뿐만 아니라 엽표를 비롯한

장내에 쓰러져 있는 모든 고수들의 가슴팍에도 하나같이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무공일까?

흉수가 도데체 누구이기에 이토록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서문방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무공의 흔적인지 알아보겠소?"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검(劍)."

서문방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직 검끝만이 이렇게 가느다란 선을 그을 수 있소.

흉수는 검의 고수요. 그것도 아주 무서운..."

검끝으로 엽표나 구여해 같은 절정고수들의 가슴에 마음대로

혈선을 그을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들의 신경을 가닥가닥 끊어 버릴 수

있는 검법의 소유자가 과연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노독행의 실력으로 엽표나 구여해를 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도 그들의 신경을 모조리 끊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토록 깨끗하게 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대항조차 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에 그럴 수는

없다.

서문방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당금무림에서 검으로 일정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인물은

그리 많지 않소. 강북에서 서 너명, 강남에서 칠 팔명 정도요.

전대의 인물을 합친다고 해도 채 스물이 넘지 않을거요."

노독행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중에서 사람의 몸에 검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는 더욱 많지 않소. 신경을 끊는 것은 둘째문제로 하고

검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기껏 다섯 명

정도요."

서문방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먼저 강북의 전설적인 검객인 천산신검(天山神劍)

을지민(乙遲岷)을 들 수 있소. 하지만 그는 오래전에 이미

은거했고, 강호를 종횡할 때도 결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소. 그는 너무 성격이 충후해서 절대로 이런 살인적인

검법을 익힐 수 없소. 아마 그는 이렇게 악독한 수법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거요."

"......"

"둘째로 생각나는 자는 남궁세가의 젊은 가주인 철검서생

남궁유룡이오. 그자의 검법은 정말로 빠르고 날카롭소."

노독행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서문방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정도의 검흔(劍痕)을 남기려면 적어도 한

갑자(甲子) 이상 검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오. 그리고 엄청난

인내력과 공력을 필요로 하지. 젊은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소."

젊은 사람은 아무리 침착하고 정력(定力)이 강하다고 해도

어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혈기(血氣)란 결코 억누른다고 해서

억눌러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수많은 세월의 경험을 쌓은 노강호(老江湖)만이

언제까지나 부동심(不動心)을 흐트러 뜨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자야만이 비로소 검으로 사람의 신경을 마음대로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서문방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다음에는 비룡검객 화비룡을 떠올릴 수 있소. 화비룡이라면

어쩌면 검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오."

"그는 죽었소."

서문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아니오. 네 번째로 가능한 사람은

환우구절마중의 절정검마 두일선이오. 그는 화비룡에 버금가는

검객이니만큼 가능할지 모르오."

노독행은 무표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도 죽었소."

서문방은 어깨를 움찔하며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두일선은 환우구절마중의 이인자이다. 그가 죽었다는 건 곧

환우구절마가 몰살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멀쩡한 환우구절마가 왜 갑자기 몰살을 당했단 말인가?

해답은 한 가지밖에는 없었다.

서문방은 한참동안이나 노독행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남는 사람은 이제 한 사람뿐이오."

노독행은 그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서문방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용태릉."

2

한 줄기 세찬 바람이 구멍뚫린 벽 사이로 불어왔다.

노독행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문방은 구여해의 가슴에 나있는 혈선을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모용태릉의 검술은 능히 검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소. 또한 그의 연륜이나 공력은 젊은이의 그것과 비길 수

없소. 하지만 그는 아닐거요."

노독행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서문방의 눈빛은 담담하면서도 지혜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성격상으로 약간의 결함이 있소. 그라면 이런 경지에

올라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하수(下手)들에게 이런 절기를

쓰지는 않을거요."

모용태릉의 성격에 대해서는 노독행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는 야망의 화신(化身)이라 할만큼 강한 명예욕과 권세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만큼 그의 자부심은 실로 대단해서 자기보다 명성이

떨어지거나 무공이 약한 인물과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하수에게 손을 쓰느니 차라리 손을 잘라버리고 말겠다!

강남칠검이 예전에 모용태릉에게 도전했을 때 모용태릉은

이렇게 외치며 그들의 도전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해 버린

적이 있다.

이 일화(逸話)는 상당히 유명해서 그 뒤로 모용태릉에게

'절수검(截手劍)'이란 또 다른 외호가 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검은 적어도 자신에 필적하거나 자신보다 강한

인물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엽표와 구여해가 제아무리 강북에서 유명한 고수들이라

할지라도 모용태릉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모용태릉이 엽표와 구여해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더욱

보잘 것 없는 표향령의 하급 무사들을 향해 손을 쓸 리가 없다는

것이 서문방의 생각이었다.

서문방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섯 명을 지목했고,

그들이 모두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행히 서문방에게는 한 가지 생각이 더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서문방은 노독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주선검법(誅仙劍法)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소?"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서문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듣지 못했을거요. 당금 무림에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을테니까. 주선검법은 검을 익힌 모든

검객(劍客)들이 이론상(理論上)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전설의 검법이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검법!

대체 그것이 무슨 검법이란 말인가?

"주선(誅仙)이란 말 그대로 신선을 벤다는 뜻이오.

주선검법이란 인간이 아닌 신적(神的)인 존재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검법이라는 말이오."

신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검법!

그런 검법이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노독행의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을 알기라도 한 듯이 서문방은

즉시 말을 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오. 그래서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검법이라고 한거요."

서문방은 바닥에서 두 개의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여기 이쪽의 돌멩이를 상대방이라고 가정하고, 반대쪽

돌멩이를 나, 즉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

두 개의 물체가 존재하는한 이 두 물체를 연결하는 최단의

직선(直線)은 항상 존재하오."

서문방은 수중에 든 두 개의 돌멩이를 멀리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위나 아래로 분리시켜 보기도 했다.

"어떤 자세를 취하든, 또 어떤 움직임을 보이든 두 물체

사이에는 반드시 하나의 직선이 있는거요. 가장 빠르면서도

가까운 거리의 직선. 그래서 검을 연구하는 검객들중에 누군가가

생각을 했지. 만약 이 최단거리의 직선으로 검을 휘두를 수만

있다면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상대를 벨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그리고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설사 상대방이 신이라

할지라도 능히 벨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오."

서문방은 돌멩이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것이 주선검법이라는 전설의 시초가 된거요. 그 뒤로 많은

검객들이 그 최단거리의 직선을 찾기 위해서 오랜 시간과

정혈(精血)을 쏟았지만 누구도 그 직선을 찾은 사람은 없었소.

그리고 그 직선으로 검을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소."

"그래서 당신은 이것이 주선검법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는거로군."

서문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여해의 가슴에 나 있는 혈선을

가리켰다.

"이 혈선을 보시오. 아주 효과적이면서도 간단하지 않소? 마치

최단의 거리로 검을 움직여 가장 빠르고 신속하게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 같지 않소? 이건 주선검법의 기본 원리(原理)와

아주 상통하는 데가 있단 말이오."

노독행은 서문방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무도 익히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소?"

서문방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아직 이 검법을 익힌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검법은 있으나 익힌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때 문득 노독행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불쑥 물었다.

"가장 처음 주선검법을 연구한 사람이 누구요?"

서문방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천천히 말했다.

"방금 그러지 않았소? 검객중 누군가가 처음으로 주선검법의

원리를 생각해 냈다고. 그자가 누구냐는 말이오."

서문방은 그제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피식 웃었다.

"물론 그런 자가 있기야 있지. 하지만 그자는 아니오. 이미

오래전에 흙속에 묻혔으니까.

노독행은 말없이 서문방을 응시했다.

서문방은 그의 눈빛을 견디기 어려웠던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싶다면 말해 주겠소. 그자는 모용광(慕容狂)이라고

하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모용태릉의 조부요."

*               *              *

모용태릉은 눈쌀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위문평은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심연월이 직접 산장에서 내려와 두 사람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는...부상이 심하다고 하더군요."

위문평은 모용태릉이 버럭 호통을 내지를 줄 알았으나 의외로

모용태릉은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녀가 산장에 도착하기는 했단 말이군. 그

병신 같은 자식과 함께 말이지."

위문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입니다."

모용태릉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위문평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모습은 결코 평소의 모용태릉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참 후에 모용태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용태릉의 눈꼬리가 묘하게 꿈틀거렸다.

"동방늙은이는 대체 왜 그렇게 수아(水兒)를 산장으로 데리고

가려고 기를 쓰는 것일까? 우문노인에 이어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인 심연월을 산장밖으로 보내면서까지 말이야."

위문평은 그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듯 입을

열지 못했다.

모용태릉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흘러나왔다.

"만약...만약에 말이야. 내 짐작대로라면..."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미소였다.

"그때는 동방늙은이의 꼬리를 움켜쥘 수 있다."

위문평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용태릉은 무엇이 그리도 흥겨운지 연신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흐흐...모른다면 굳이 알려고 하지 마라. 언젠가는 노부의

짐작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게 될테니..."

위문평은 더이상 물을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모용태릉이 일단 그렇게 말한 이상 물어 보았자 그의 성질만

긁을 뿐이라는 사실을 오랜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문평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모용태릉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참. 이번에 대공(大功)을 이루신걸 축하드립니다."

모용태릉은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은 채 위문평을

쳐다보았다.

"너도 소식을 들었느냐?"

위문평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사부님께서 얼마전에 필생(必生)의 염원을 이루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용태릉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지. 그 동안 노부가 남몰래 흘린

땀과 눈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그

보상을 받게 되었다."

"......."

모용태릉은 허공을 응시하며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노부의 조부께서 미완(未完)의 검결(劍訣)을 남기고

돌아가신지 어언 오십 년. 선친(先親)께서 평생의 각고 끝에 그

검결의 미비점을 보완하셨고, 이제 마침내 노부가 그 완성을

보게 되었다. 실로 구천에 계시는 두 분의 공덕이 아니라면

노부가 어찌 오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겠느냐?"

위문평은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모용태릉의 입에서 자신감에 가득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이제 주선검을 완성한 이상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다.

동방늙은이의 반혼장이 제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주선검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용태릉의  두눈에서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엄청난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오십 년....동방늙은이를 꺾기 위해서 오십 년을 기다려왔다.

이제 머지않아 강호의 역사는 다시 씌여질 것이다. 바로 나,

모용태릉에 의해서!"

그의 음성은 거대한 대청을 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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