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52화 (53/61)

제 52 장    피 에 는   피 로 ,  이 빨 에 는   이 빨 로

1

백무기(白無忌)는 금우두부의 외단(外壇)을 지키는 총

책임자였다.

별호는 사망유자(死亡幽子).

별호 그대로 그는 한때 강호무림에서 유명한

살성(殺星)이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일가족 서른 두 명을 살해한 적도 있었다.

결국 그 일로 무림인들의 공분을 사 쫏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

추적을 피해 금우두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금우두부에서의 나날은 평온한 것이었다.

그의 악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고,

아무도 귀찮게 하거나 성가시게 구는 사람이 없었다.

백무기로서는 너무도 평온하다 못해 심심할 지경이었다.

말이 금우두부의 외단을 지키는 책임자이지 실제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떤 미친 작자가 금우두부에 쳐들어 와서 행패를 부리겠는가?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그에게 할 일이 생겼다.

누군가가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을 모두 때려죽이고

외단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백무기는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입가에 삐식 웃음을

떠올렸다.

"심심하지 않겠군."

이것이 그가 보고를 받은 다음 가장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유언이 될줄을 백무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콰쾅!

폭발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백무기는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아악!"

상대의 손은 백무기의 가슴을 뚫고 들어와 내장안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리고 있었다.

백무기는 학질걸린 사람처럼 몸을 와들와들 떨다가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백무기를 끝으로 금우두부의 외단을 지키던 마흔 두명의

고수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노독행은 백무기의 가슴에 박혀 있던 오른손을 뽑았다.

팟!

백무기의 몸은 가슴에 커다란 피구멍을 남긴 채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노독행은 피로 물든 오른손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지나온 길은 시체와 피로 뒤덮힌 죽음의 혈로(血路)였다.

그 피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 시체 하나하나마다 가족이 있고, 각기 다른 생(生)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 이제 그 사연은 과거속으로 묻혀 버렸고, 생은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그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쾅!

노독행이 다시 또 하나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주위의 광경이 일변했다.

지금까지는 평범한 벽과 방들로 이루어진 건물이었으나 이곳은

달랐다.

좁고 기다란 회랑(回廊)을 따라 끝없이 많은 방들이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천장과 바닥은 모두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고, 기둥은 아름드리

원목(原木)을 그대로 사용했다. 방들은 얼핏 보기에 모두

똑같았으나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달랐다.

노독행은 회랑안에 한 발을 들여 놓았다.

덜컹!

복도가 움푹 꺼지며 시커먼 구멍이 입을 딱 벌렸다.

하나 어느새 노독행의 몸은 구멍뚫린 복도의 허공위를 날고

있었다.

그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에서 거대한 인영이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꽈르릉!

인영의 솥뚜껑만한 양 손이 휘둘러지며 가공할 경력이

폭풍노도처럼 허공에 떠 있는 노독행을 향해 몰아쳐왔다.

그것은 이미 마도의 십대장공(十大掌功)중에 하나인

폭풍마장(暴風魔掌)이었다.

폭풍마장은 이미 사십 년 전에 강호를 풍미했던 마도의

전설적인 고수인 환우구절마(環宇九絶魔)중의 일인인

폭풍신마(暴風神魔) 황보강(皇甫剛)의 독문무공이었다.

노독행은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도저히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그는 오른주먹을 두 번 연거푸 앞으로

내찔렀다.

쾌액!

붕추권이 예리한 파공음을 내면서 폭풍마장을 뚫고 들어갔다.

노독행을 향해 덮쳐 들었던 인물은 시뻘건 홍포를 입은 위맹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그야말로 사십년만에 다시 나타난 폭풍신마

황보강 본인이었다.

황보강은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도 상대의 주먹이 자신의

가공할 장세를 뚫고 들어오자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좋다, 이놈! 과연 대단하구나!"

황보강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양 손을 세차게 십 여번이나

휘둘렀다.

꽈르릉!

그의 장세가 갑자기 한 바탕 돌풍처럼 요란하게 회전하며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이것이야말로 황보강이 천하에 자랑하는 폭풍마장중의

최절초인 폭풍석권참(暴風席卷斬)이었다. 당년에 황보강이 이

폭풍석권참을 시전하면 아무도 감히 정면으로 받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장력으로 알려진 진주언가(晉州言家)의 절정고수 다섯

사람이 동시에 덤벼들었다가 피분수를 뿌리며 나가 떨어진 적도

있었다.

지금도 무섭게 회오리치며 다가오는 폭풍석권참의 장세는

금시라도 노독행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찔러내던 붕추권을 거두어 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내찔렀다.

폭풍석권참의 장세와 붕추권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사방이 온통

그 여파에 휩쓸리게 되었다.

콰콰콰....

벽이 부서지고 천장과 바닥이 마구 뒤흔들렸다.

노독행의 몸은 그 장세에 휩쓸려 이 장이나 날아갔다.

황보강은 여세를 몰아 더욱 빠르게 노독행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막 노독행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무방비상태로 허공을 날아가던 노독행의 얼굴이 돌려지며

황보강을 바라보았다.

황보강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마구 흐트러진 흑발 사이로 상대의 새하얀 이빨이 드러나

보였던 것이다. 마치 먹이를 노리고 으르렁거리는 늑대의

이빨같이 하얗고 날카로운....

날아가던 노독행의 몸이 허공에서 돌려지며 그의 팔꿈치가

돌진해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황보강은 안색이 변한 채 전력을

다해 뒤로 물러났다.

쉬악!

노독행의 살인적인 팔꿈치는 아슬아슬하게 황보강의 콧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황보강의 콧등

피부가 쫘악 갈라지며 핏물이 뿜어나왔다.

하나 황보강이 채 몸을 고정시킬 사이도 없이 스치고 지나갔던

팔꿈치가 갑자기 멈춰지더니 맹렬하게 뒤로 꺾여 날아왔다.

이 이단공격(二段攻擊)은 황보강으로서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수법이었다.

파직!

황보강은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아래턱의 끝부분을 격중당하고

말았다. 정면으로 강타당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아래턱은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흑!"

황보강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순간 노독행의 무릎이 황보강의 아랫배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쾅!

황보강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황보강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입을 딱 벌리며 피를 분수처럼

쏟아냈다. 하나 그는 그 와중에도 양 손을 앞으로 내뻗어

노독행의 어깨를 후려쳐갔다.

폭풍신마라는 이름에 걸맞는 반격이었다.

쾅!

노독행의 양쪽 어깨부근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졌다.

노독행도 아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어깨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뼈에 금은 갔을 것이다.

하나 노독행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고 떨어지는 황보강의

몸을 세차게 걷어찼다.

노독행의 발에 격중당한 순간 황보강의 몸은 그대로 갈라터져

버렸다.

단혈철각의 무서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황보강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리 아래가 완전히 짓이겨진

채 허공을 날아올라갔다.

그의 몸은 천장에 닿았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는

이미 그의 몸은 싸늘하게 식은 후였다.

하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황보강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시 옆에 있던 방에서

하나의 주먹과 두 개의 발이 동시에 날아왔다.

주먹은 거무튀튀한 빛을 띄고 있었고, 발은 낮고 힘차게

날아들었다.

남권북퇴(南拳北腿)라는 말이 있다.

장강 이남의 무림인들은 주먹을 잘 쓰고, 강북의 무림인들은

발을 잘 사용한다는 뜻이었다. 그중에서도 주먹으로 유명한 것은

온주고가(溫州顧家)였고, 발로 유명한 것은

담씨일가(譚氏一家)였다.

그들로부터 권퇴쌍마(拳腿雙魔)가 나왔다.

권마(拳魔) 고일악(顧一岳)은 온주고가 사상 최고의 고수였다.

그의 주먹은 만근 거석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퇴마(腿魔) 담서기(譚西豈)는 담씨세가에서 배출된 불가일세의

고수였다. 그의 담퇴(譚腿)는 수십 년간 강북 무림인들에게는

전설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주먹은 권마 고일악의 주먹이었고, 빠르고

날카로운 발은 퇴마 담서기의 발이었다.

환우구절마중의 이인(二人)이며 각기 권과 발에서 무적을

구가하던 두 절대고수가 동시에 합공해 들어온 것이다.

노독행은 그때 양쪽 어깨에 약간의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고일악의 주먹은 정면으로 받아치지 않고 피했다.

반면에 담서기의 발에는 발로 대응했다.

파파팍!

노독행과 담서기의 발이 허공에서 서로 뒤엉키며 열 다섯

번이나 부딪쳤다.

담서기의 발은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노독행은 무릎 아래가 시큰거렸다.

하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담서기를 향해 여덟

번이나 발길질을 했다.

담서기도 피하지 않고 맞서왔다.

파팍!

두 사람의 발이 두 번째로 엉켰을 때 노독행은 상체를 바짝

담서기쪽으로 들이밀었다.

담서기는 비쩍 마르고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체구의 노인에게서 어떻게 이런

가공할 발차기가 나올 수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담서기는 두 번째로 부딪치는 노독행의 발에 신경을 쓰느라

미처 노독행의 상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때 고일악이 다시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고일악은 체구가 우람하고 전신에 털이 가득한 대한이었다.

나이가 거의 칠십에 도달했을 텐데도 그의 얼굴은 사십 대

장한의 그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한 가지 특이한 무공을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원양동자공(元陽童子功)이었다.

평생토록 동정(童精)을 잃지 않아야만 익힐 수 있고, 한 번

익히면 천하에서 가장 정순(正純)한 힘을 가질 수 있는게 바로

원양동자공이었다.

고일악은 자신의 권법을 최강으로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의

일생을 내바친 것이다.

덕분에 그의 주먹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도 노독행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오는 고일악의 주먹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빠르고 무서웠다.

담서기와 발이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노독행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일악의 주먹에 맞서 같이 주먹을 내뻗었다.

빠악!

주먹과 주먹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고일악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 뜨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의 오른 주먹은 순식간에 퉁퉁 부어 올랐다.

노독행 또한 주먹뼈에 금이 가고 팔 전체가 시큰거렸다.

하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주먹을 거두며 팔꿈치로 고일악의

미간을 후려쳐갔다.

똑같이 부상당하고 똑같이 고통스러웠으나, 고일악은 물러났고

노독행은 덤벼들었다.

이것이 바로 무쌍류의 무예가 일반 무예와 다른 점이었다.

무쌍류는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몰랐다. 일단 공격하면 상대가

쓰러지기 전에는 결코 손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 차이는 너무도 분명한 결과로 나타났다.

뻑!

고일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반대편 주먹으로 노독행의

팔꿈치에 맞서왔다.

주먹은 비록 강력했으나 팔꿈치는 더욱 강력했다.

노독행의 팔꿈치와 부딪친 순간 고일악의 주먹뼈는 그대로

으스러지고 말았다.

"큭!"

고일악의 입에서 처음으로 답답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노독행의 손등이 쫘악 펴지며 탄양타의 수법으로

고일악의 콧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담서기는 고일악의 위기를 알고 얽혀 있는 발을 풀며 노독행의

머리를 향해 질풍 같은 발길질을 해왔다.

노독행은 피할 생각도 없이 손등으로 고일악의 콧 등을 부수어

버렸다.

빠악!

"큭!"

고일악은 콧등이 폭삭 주저앉은 채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노독행은 고일악의 콧 등을 부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빠빠빡!

담서기의 벼락 같은 발은 눈깜빡할 새 노독행의 팔을 열 두

번이나 강타냈다.

노독행은 팔에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겨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팔은 푸르뎅뎅하게 부어 있었다.

담서기는 노독행의 발을 십 여차례 걷어찬 후 그 탄력을

이용해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다시 노독행의 머리를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그 작고 마른 몸이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발차기를

하는 모습은 먹이를 노리고 날아드는 한 마리 매와 같았다.

이번에는 노독행도 막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오른 팔과 퉁퉁 부은 왼팔을 구부려 양쪽 팔꿈치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담서기의 발에 정면으로 맞섰다.

퍼퍽!

담서기의 발차기는 정말 무서웠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못할 사실이었다.

노독행은 연환철주와 반선철주를 거푸 사용했지만 뒤로

정신없이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야만 했다.

하나 담서기의 발차기가 끝난 순간 노독행의 무서운 반격이

시작되었다.

담서기가 숨을 고르기 위해 허공에서 다시 한차례 몸을 비틀려

할 때 노독행의 몸이 매를 노리고 날아드는 독수리처럼 그의

머리위로 솟구쳐 올랐다.

담서기는 흠칫 놀라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물구나무의 자세를 취했다. 그것이 담서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노독행이 노린 것은 담서기의 머리가 아니었다.

담서기는 재빠르게 발차기를 했으나 그때 노독행의 몸이

너무도 가까이 접근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과 같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노독행은 피하지 않고 담서기의 발로 달려들었다.

팍!

담서기의 발은 정확하게 노독행의 앞가슴을 가격했다.

노독행의 갈비뼈 한 대가 부러져 나갔다. 하나 노독행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을 가격하고 빠져나가려는

담서기의 발을 양손으로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돌려 버렸다.

우두둑!

뼈마디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담서기의 다리는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말았다.

"크악!"

담서기의 입을 뚫고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담서기는 오른쪽 다리가 괴상한 모습으로 꺾인 채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그 순간 노독행은 그의 앞가슴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철산벽의 가공할 위세가 담서기의 가슴팍을 송두리째 박살내

버렸다.

콰앙!

담서기의 비쩍 마른 몸은 벽을 뚫고 반대쪽 방으로 가서 쳐

박혔다.

"이....이놈!"

얼굴이 피투성이로 변한 고일악이 담서기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눈을 뒤집으며 달려 들었다.

그와 담서기는 지난 사십 년동안 친 형제보다도 더욱 가깝게

지내온 사이였다. 혈육(血肉)보다 더 친했던 담서기의 죽음은

고일악의 이성을 잃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나 양쪽 주먹이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고일악의 몸으로 노독행에게 덤빈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일이었다.

노독행은 고일악의 주먹을 피하며 그의 허리춤을 잡고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법륜구전중의 음양전도는 언제 보아도 살인적인 위력이

있었다.

쿵!

고일악은 머리부터 거꾸로 바닥에 쳐박혔다.

그의 몸은 한차례 경련을 일으키다가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강호무림을 수십 년간 종횡으로 누비던 권퇴쌍마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허망한 종말이었다.

2

그들은 회랑의 끝에 나란히 서서 노독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정검마(絶情劍魔) 두일선(杜一仙).

도마(刀魔) 궁복(宮宓).

회선창마(廻旋槍魔) 종리매(鍾里魅).

유령무영마(幽靈無影魔) 희무종(姬無踪).

부마(斧魔) 시경림(柴慶霖).

환우구절마중의 다섯 사람이었다.

환우구절마의 제일인자인 금마(金魔) 위혼(魏魂)을 제외한

여덟 명이 모두 나타난 것이다.

노독행은 그들의 삼 장 앞까지 와서 몸을 멈추었다.

가장 왼편에 서 있는 키가 훌쩍한 흑의인이 환우구절마중의

둘째인 절정검마 두일선이었다.

두일선은 검에 관한한 마도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에 필적할 수 있는 사람은 정파의 비룡검객 화비룡 뿐이라고

했다.

두일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 무쌍류는 소문으로 듣던 것 보다 더욱 무자비하구나. 네가

금우두부에 와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거리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담세악을 나오라고 해."

두일선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 올랐다.

"삼부주는 이곳에 없다. 네가 삼부주 때문에 온 것이라면

시기를 잘못 선택했다."

이어 그는 천천히 자신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 쥐었다.

"그리고 더욱 잘못된건 우리를 만났다는 것이지. 피의 빚은

피로 갚는다. 네가 우리를 건드린 이상 너는 결코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창!

검을 뽑는 동작을 취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손에는 어느새 좁고

길다란 장검이 섬뜩한 검광(劍光)을 뿌리며 쥐어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네 사람의 수중에도 각기 다른 병기가

들려졌다.

노독행은 묵묵히 그들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오른팔뚝에 매어져

있는 월영도를 뽑아 들었다.

"나를 먼저 건드린 것은 너희들이야. 피에는 피로. 이빨에는

이빨로."

그 순간 노독행은 그들을 향해 월영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도마 궁복의 사문(師門)는 마도에서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수라도문(修羅刀門)이었다. 궁복은 수라도문에서 백 년내

배출된 고수중 제일인자였다.

궁복의 수라칠마도(修羅七魔刀)는 그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위력과 한치의 사정도 보지 않는 무자비한 도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나 오늘 궁복은 자신의 수라칠마도 보다 더욱 잔인하고

무자비한 도법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악마(惡魔)의 도법(刀法)이라 할 만했다.

쾌액!

칼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종리매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추호의 군더더기도 없는 냉혹하리만치 빠르고 날카로운

도법을 보자 종리매는 소름이 쭈욱 끼쳤다.

그는 급히 창(槍)을 질풍처럼 열 여덟 번이나 찔러댔다.

카캉!

칼과 창이 격돌하며 불똥이 튀었다.

종리매의 창은 허공으로 튕겨졌다. 칼도 의당 튕겨져야 했다.

하나 칼은 조금도 튕겨지지 않고 더욱 빠른 속도로 종리매의

목덜미를 찔러 오고 있었다.

종리매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는 독보적인 회선창법(廻旋槍法)을 익힌 후로 아직까지

자신의 회선십팔령(廻旋十八靈) 수법을 이토록 수월하게 뚫고

들어오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 거칠 것 없이 날아드는 칼날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시경림의 도끼가 종리매의 목을 찔러오는 칼날을

막아섰다.

깡!

칼과 부딛친 순간 시경림은 하마터면 도끼를 떨어뜨릴 뻔했다.

천부의 신력(神力)을 지녀 패왕부(覇王斧)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시경림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저 작고 볼품없는 칼로 나의 패왕부를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손아귀가 찢어지도록 충격을 줄 수 있다니...

시경림이 아직도 정신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칼날이 그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토록 강렬하게 부딛쳤는데도 칼날이 날아드는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빨라진 것도 같았다.

시경림은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흥건히 고인 손으로 도끼를

힘껏 움켜잡고 다시 한 번 칼날을 정면으로 후려쳐 갔다.

후려쳐 가면서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대체 이 악마 같은 도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희무종은 가슴이 덜덜 떨렸다.

시경림의 전력을 다한 일격으로도 상대의 칼날을 멈춰세울 수

없었다.

오히려 시경림은 손이 피범벅이 된 채로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은 더욱 무서운 속도로 무방비 상태에 있는

시경림의 미간을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희무종이 막아서지 않는다면 시경림은 그

악마의 칼날아래 목숨을 잃을게 뻔했다.

하지만 희무종은 자신이 없었다.

수라도로도 막을 수 없고, 회선창과 패왕부로도 저지할 수

없는 저 칼날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하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멍하니 눈을 뜨고 동료가 쓰러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희무종은 귀신과도 같은 신법으로 시경림의 앞을 막아서며

전력을 다해 수중에 들고 있는 유령비(幽靈匕)를 휘둘렀다.

희무종이 얼굴을 피로 물들이면서 휘청거리는 광경을 보면서

두일선은 상대를 향해 질풍 같은 십이검을 발출했다.

희무종은 비록 즉사를 면했지만 유령비가 반으로 부러지며

얼굴에 길다란 상처를 입었다. 거의 뼈까지 들여다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그 상처보다도 유령비가 부러졌다는게 희무종을 더욱 두렵게

한 모양이었다.

상대의 칼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희무종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일선은 이때만큼 긴장되고 초조한 적이 없었다.

까깡!

그가 펼쳐낸 십이검은 하나의 장막을 만들며 희무종의 몸을

막았다.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격렬음과 함께 칼날과 장검이 수십 번의

격돌을 일으켰다.

"큭!"

두일선은 손목에 강력한 충격을 느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나 허겁지겁 앞을 올려다 본 그의 얼굴에는 이내 짙은

절망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토록 막강한 검세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은 여전히 똑

같은 위세로 희무종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두일선은 마음속으로 공포스런 절규를 토해 냈다.

'도데체 이것이 무슨 도법이란 말인가?'

*             *             *

무쌍류의 무예는 거의 대부분이 형식보다는 즉흥적인 동작을

필요로 한다.

하나 무쌍류의 무예에도 초식의 틀을 갖춘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십대절학(十大絶學)이다.

무쌍류의 십대절학은 인간이 펼칠 수 있는 최상(最上)의

무학이다. 그 강력하고 절대적인 위력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십대절학은 여섯 개의 초식과 하나의 검법(劍法), 하나의

수법(手法), 하나의 구명절초(救命絶招), 그리고 하나의

도법(刀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혈천도(血 刀)는 무쌍류 유일의 도법으로, 한 번 펼치면

반드시 상대의 몸에서 피(血)를 뿌려야( )만 멈출 수 있는

공포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가히 악마의 도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무쌍류비전총요'중에서

*             *             *

"크악!"

희무종은 마침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칼날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희무종의 목덜미를 그대로 궤뚫어

버렸다.

시뻘겋게 빛나는 선혈이 허공에 자욱히 뿌려졌다.

"이 놈!"

시경림이 벌겋게 핏발선 눈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희무종이 그의 앞을 가로막다가 변을 당했으니 그로서는 눈이

뒤집힐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포의 칼날이 다시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시경림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도끼를

휘둘렀다.

깡!

패왕부의 두꺼운 날이 움푹 파여 들어가도록 후려쳤으나

칼날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쉬잉!

막고 때리고 후려쳐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악마의 칼날!

그것은 정녕 피를 뿌려야만 멈추어지는 죽음의 도법이란

말인가?

궁복이 수라도를 휘두르며 시경림에 합세했다.

파파팟!

그의 도가 매서운 도풍(刀風)을 사방으로 뿌리며 노독행의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종리매 또한 회선창으로 노독행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찔러왔다.

두일선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의 절정검은 예리한 한광과 함께 노독행의 뒷통수를 무서운

속도로 베어가고 있었다.

사방(四方)에서 공격한다면 악마의 도법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두일선등 환우구절마의 생각이었다.

막기만 하면 된다!

한 번만 그 악마의 칼날을 세울 수 있다면 상대가 두 번 다시

도법을 시전하지 못하게끔 집요하고 날카로운 반격을 할 수가

있다.

한 번만...한 번만....

그들의 절실한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땅!

시경림의 도끼를 튕겨낸 칼날은 왼쪽으로 돌아 수라도를

막아내고 계속 회전하여 절정검과 회선창까지 튕겨냈다. 그리고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시경림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칼날이 시경림의 도끼를 튕겨낼 때부터 수라도와 절정검,

회선창을 격퇴시키고 다시 시경림을 향해 날아들 때까지는 채 숨

한 번 내쉴 사이도 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애초부터 시경림만을 곧장 노리고 날아든 것

같았다.

"컥!"

칼날이 목에 박히고 시경림의 입에서 괴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경림의 목에서 분수 같은 핏줄기가 뿜어나왔다.

그때 시경림은 마지막으로 괴력을 발휘했다.

목이 궤뚫린 상태에서도 상대의 칼날을 두 손으로 움켜 잡았던

것이다.

마치 생전 멈출 것 같지 않은 칼날을 자신의 몸으로

멈춰세우려는 것처럼....

시경림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마침내 칼날은 멈추었다.

시경림의 목과 양손에 틀어박힌 채 정지했던 것이다.

그토록 멈춰세우려고 했던 그 공포의 칼날은 두 사람의 피맛을

본 다음에야 겨우 멈춰졌다.

두일선과 궁복, 종리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야압!"

"죽어라! 악마 같은 놈!"

그들은 각기 가장 무서운 절초를 휘두르며 노독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두일선은 이십 년동안 각고의 수련 끝에 완성한 절초인

지참혼옥(地慘魂獄)을 펼쳐냈다.

궁복은 수라칠마도의 최절초인 수라광세출(修羅狂世出)을,

그리고 종리매는 회선창법의 최고비기인

회선만리혈(廻旋萬里血)을 전력을 다해 시전했다.

쐐쐐쐐쐐...

파파파팍!

주위가 온통 그들이 펼쳐낸 검풍과 도광, 창영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가히 엄청난 공세였다.

노독행은 그들의 공세속에 우뚝 선 채 외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월영도는 여전히 시경림의 목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칼을 놓고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그자리에 선 채로 삼인(三人)의 가공할 공세를 받아낼

것인가?

절대절명의 순간,

노독행의 몸이 갑자기 시경림을 향해서 돌진해 들어갔다.

쿠악!

시경림의 목에 박혀 있던 월영도가 노독행의 돌진해 들어오는

기세에 눌려 그의 목을 뚫고 반대쪽으로 삐져 나왔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시경림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끄아아...."

마침내 월영도가 시경림의 목을 완전히 관통하여 뒤로

빠져나왔다.

그 순간 노독행은 시경림의 몸을 타넘어 그의 목뒤로 빠져나온

월영도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전력을 다해 몸을 뒤집으며

십대절학중의 반천홍(盤天虹)을 펼쳐냈다.

쭈아악!

하나의 거대한 무지개가 바닥에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 무지개는 솟구치는 도중에 급속도로 확산되어 종내에는

허공 전체를 거대한 선반처럼 뒤엎어 버렸다.

그와함께 시뻘건 피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투둑!

잘려진 살점들이 여기저기 뿌려졌다.

따땅!

조각나버린 검의 파편(破片)들이 떨어져 내리고,

푹!

부러진 창날이 바닥에 틀어 박혔다.

그리고,

쿵! 쿵!

무언가 무거운 통나무가  쓰러지는 듯한 음향이 거푸

들려왔다.

노독행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오른쪽 가슴이 쩌억 갈라져 속살이 들여다 보였다.

만일 왼쪽가슴이었다면 심장이 갈라져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상처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왼쪽 팔에는 아직도 칼날이 박혀 흔들거리고 있었다.

궁복의 수라도가 반토막으로 부러져 꽂혀 있었다.

등쪽에도 적지 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등뒤로 날아오는 회선창을 완벽하게 막지 못해 하마터면

꼬치처럼 창날에 꿰뚫릴 뻔했던 것이다.

하나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두일선과 궁복, 종리매는 그러한 운(運)이 없었다.

그들은 전신이 난도질당한 모습으로 피바다속에 누워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온통 칼날에 짓이겨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무쌍류 십대절학중의 하나인 반천홍의 위력이었다.

싸움은 끝이 났다.

놀랍도록 잔인하고 처참한 싸움이었지만 결국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이다.

노독행은 월영도를 오른팔뚝에 매어찼다.

그리고는 피와 죽음이 가득한 회랑을 지나 앞으로 전진했다.

회랑의 끝에 있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열려진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금우두부의 내단(內壇)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3

내단은 이상하리만치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아주 넓은 장소였고, 천장도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았다.

건물의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고 화려한 장소였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터무니없이 넓고 큰 내단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노독행은 피로 물든 몸을 움직여 내단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때 아득히 저 멀리에 있는 내단의 반대편 벽에있는 작은

문이 열렸다.

가까이에 가서 보면 상당히 큰 문일게 틀림없지만, 노독행이

있는 곳에서는 작아 보였다.

그것은 다시말하면 이 내단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여실히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반대편의 열린 문에서 네 명의 흑의인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어깨에 하나의 침상을 메고 있었다. 침상위에 한

사람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이 다가올수록 침상위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금포를 입은 비쩍 마른 인물이었다.

얼마나 깡말랐는지 입고 있는 금포가 헐렁헐렁해서 금시라도

벗겨져 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는 거의 벗겨져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었고,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검버섯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그 검버섯은 금포노인이 예전에 악독한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당해 내장이  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흑의인들은 마침내 노독행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침상을 내려놓았다.

가까이서 보니 침상위의 금포노인은 한층 더 늙고 깡말랐다.

금포노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노독행은 한눈에 그것을 알수 있었다.

검버섯이 얼굴 전체로 확대되어 본래의 얼굴 모습이 어땠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속에 박혀 있는 두 눈에서는 진물이 뚝뚝

내려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

대체 이 금포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노독행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금포노인은 침상위에

누운 채로 힘없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금포노인의 메마른 입술이 열리며 거의 꺼져가는 듯한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노부가...누구인지 아는가?"

거의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포노인은 다시 물었다.

"노부가 누구인가?"

노독행은 한동안 그를 내려다 보다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금마 위혼."

금포노인의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주름살 몇 개가 움직인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한

미소였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한 미소였다.

"노부가 바로 금우두부의 부주인 금마 위혼일세."

금마 위혼!

눈앞의 이 금시라도 관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노인이

바로 금우두부의 주인이며 환우구절마중의 제일인자인 금마

위혼이란 말인가?

가공할 금마신공(金魔神功)과 무적금광지(無敵金光指)로

일세를 풍미하던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란 말인가?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혼은 한차례 메마른 기침을 쿨럭거렸다.

"쿨룩...쿨룩...노부는 십여 년 전에 하나의 악독한

장공(掌功)에 격중당해 이런 꼴이 되어 버렸네. 일어나서 손님을

맞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게나.."

대체 어떠한 장공이길래 천하제일마를 이런 꼴로 만들어

버렸단 말인가?

위혼의 얼굴에 예의 허탈하면서도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장공의 이름은 반혼장(返魂掌)이라고 하네. 반혼장은 모두

여덟 개의 초식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 한 초식에라도

격중당하면 죽던가....아니면 이런 꼴로 변하고 말지."

반혼팔장(返魂八掌)!

금마 위혼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든 반혼팔장이란 대체

어떤 무공일까?

다행히 위혼은 노독행이 묻지도 않았는데 그 장공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반혼장은 천하에서 가장 음유(陰柔)하고 독랄한 장력일세.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십 년 이상의 각고가

필요하지. 자네의 무쌍류만큼이나 그 장공도 오랫동안 무림에서

전설로만 떠돌고 있었네...."

위혼의 음성은 금시라도 꺼질 듯 하면서도 용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반혼장이 나타나면 천하가 피로 씻긴다는 소문이

있었네...그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 아직 익힌 사람이

없다고 알려졌었는데....사실은 이미 십여 년 전에 그걸 익힌

사람이 있었던 거지."

노독행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구요?"

위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방유아."

동방유아!

이이름을 듣는 순간 노독행의 가슴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회오리쳤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

출도한 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무적(無敵)의 절대자!

강남의 패자인 포호산장의 주인!

그리고....

방립동의 아버지!

독고무정으로 하여금 평생 복수의 원한속에 지내게 만든

원흉(元兇)!

그의 이름을 이곳에서 듣게 된 것이다.

"동방유아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네. 거기에

반혼장이라...인세(人世)에는 그를 당할 자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적어도 자네...무쌍류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위혼은 흐릿한 눈으로 노독행을 물끄러미 올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자네를 보고서야 비로소 동방유아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났다는 걸 알았네. 노부는 소문을 별로 믿지 않는

성격이거든..."

"......."

"동방유아도 그걸 알았겠지. 그는 모든걸 알고

있으니까...자네가 나타날 때부터 알고 있었을거야. 그는 그런

인물이거든...."

위혼은 말하기도 힘든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검버섯 가득한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혈색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기름이 떨어져가는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언제 기름이 바닥나 불이 꺼질지 모르는 몸이었다.

그런 몸으로 무슨 이야기를 이토록 하려는 것일까?

위혼은 한동안 숨을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담세악을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네. 하지만 담세악은

여기 없네...그는 원래 여기 없지."

노독행의 외눈에서 번쩍하는 빛이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담세악은 이곳에 거의 붙어 있는 법이 없네. 일 년에 한 두

번 올까...그것도 아주 잠깐 머물다가 어디론가로 사라지지.

이곳에서는 그를 만날 수 없네."

"그가 어디로 간단 말이오?"

"그건 아무도 모르네. 담세악 만의 비밀이라고나 할까?

담세악은 워낙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노부는 그를 별로

신임하지 않아."

위혼은 문득 고개를 들어 노독행을 응시했다.

그의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에는 기이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노부가 아픈 몸을 이끌면서 자네를 만나러 나온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네."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로서 금우두부는 무림에서 사라지게 되었네. 노부의 여덟

명의 의제(義弟)들은 실질적으로 금우두부를 이끌어가는

중추세력들이었네. 그들이 모두 자네 손에 쓰러진 이상

금우두부는 이제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

"자네를 탓하려거나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세. 단지

노부는 오늘 일에 어떤 의문을 느낀 거지."

위혼의 음성은 담담했다.

"담세악은 금우두부의 삼부주이지만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존재일세. 그 동안 본부에 붙어 있는 적도 없었고, 별다른

활동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불현 듯 강호에 나타나서는 자네와

시비를 일으키고 다시 사라져 버렸네."

노독행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나 눈에서는

강렬한 빛이 번뜩거렸다.

이 늙은이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위혼의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네를 금우두부에 끌고 오게 해놓고는

자신만 없어져 버린걸세. 그 결과는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고....일이 참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나?"

"......!"

"사실 우리는 포호산장의 압력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네.

그래서 얼마전부터 강북에 있는 천상회에 접촉을 시도했지. 일이

제법 진척되나 했는데...천상회는 자네의 손에 멸망해 버렸네."

위혼의 음성에 어떤 원한이나 추궁의 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고 담담할 뿐이었다.

"요새 우리는 또 다른 조력자를 찾다가 한 군데에 조심스런

의사타진을 했네. 그쪽에서는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이 왔지."

노독행은 불쑥 물었다.

"그곳이 어디요?"

"모용세가."

노독행은 놀라지 않았다.

모용태릉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는 야심으로 뭉쳤으며,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딸도 쉽게

버리는 인물이었다.

하물며 사돈을 배신하는 일쯤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

아니겠는가?

"일이 잘 진행된다면 이달 말쯤에 본부와 모용세가는

결맹(結盟)했을 지 모르네. 그런데 결맹을 불과 보름도 남겨

놓지 않고 이번에는 본부가 멸망하게 되었네. 우연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일 아닌가?"

위혼의 말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천상회와 금우두부의 몰락이 모두 누군가의 계략에 의한

것이며, 그 배후에 포호산장이 있을 거라는 암시를 한 것이다.

노독행은 확실히 의문이 들기는 했다.

천상회와 금우두부는 포호산장을 위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세력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자신의 손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물론 그 속에는 노독행 자신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으나

결과로만 따지면 포호산장의 커다란 우환을 제거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 포호산장을 조금이라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오직

모용세가 뿐이다.

모용세가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 그것은 단지 의문일 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이곳으로 온 것은 오직 친구인 방립동

때문이었다.

담세악이 본래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건, 아니면 또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건 그는 방립동을 제거하려 했다. 그리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아니, 어쩌면 성공했는지도 모르지.

자신이 발견한 것은 오직 방립동의 잘려진 팔 뿐이니 그의

생사(生死)여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담세악이 위혼의 예측대로 포호산장의 지시를 따랐다면,

결코 방립동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방립동은 동방유아의 오직 하나뿐인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과 방립동의 관계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방립동의 복수를 위해서 이곳으로 찾아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노독행은 다시 위혼을 바라보았다.

위혼의 안광은 급격히 흐려져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많은 말을 해서 진력이 급속도로 소모된

모양이었다.

노독행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살심(殺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심지가 다 타버린 등잔 같은 몸이었다.

노독행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며칠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노독행은 결코 피에 굶주린 살인마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위혼은 강호에서 늙은 인물답게 꺼져가는 눈으로도 노독행의

그런 의중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네. 세상 일이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야...단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희생이 따른다는게 문제지."

그의 입에서 다시 격렬한 기침이 토해져 나왔다.

"쿨룩...쿨룩..."

그는 거의 숨이 끊어질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러다가

한바탕의 피를 토해 냈다.

"우웩!"

침상옆에 서 있던 네 명의 흑의인들이 깜짝 놀라 급히 그를

부축했다.

위혼은 한 덩이의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내더니 속이 조금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손을 내저어 흑의인들을 물리치고는

노독행을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자네의 분노가 풀렸는지는 모르지만 노부는 자네를 상대할 수

없는 몸이네. 담세악도 이곳에 없고...자네는 다른 곳으로 가서

그를 찾아야 할 걸세."

노독행은 어차피 위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주저없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용무가

끝났으므로 남아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가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위혼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는....아주 강인한 인물일세. 그리고 젊지. 젊다는 건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는거야....그걸 잊지 말게."

노독행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위혼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의 말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노독행이 위혼을 돌아보니 위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미소속에는 기이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빛이 담겨

있었다.

노독행이 한동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위혼은 불쑥

입을 열었다.

"혹시 나중에 강호에서 손가락이 세 개인 사람을 만나게

되면...그가 자네에게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한 번만 살려주지

않겠나?"

노독행은 외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위혼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그저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자네에게 죽을 죄를 저지르지

않는한 한 번만 그를 용서해 주게."

그 말을 할 때의 위혼의 모습은 오랫동안 강호를 주름잡았던

일세의 거마(巨魔)답지 않은 처량한 것이었다.

노독행은 마음이 약하거나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상한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위혼은 그가 만났던 인물중에서 가장 특이한 인물중 하나였다.

과거에 화려한 명성을 날렸으면서도 전혀 거만하지 않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형제보다 가까이 지냈던 동료들의 죽음을 보고도

슬퍼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피땀 흘려 일구어낸 집단이 멸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분노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것에 초연(超然)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늙은이라는 표현은 그의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한 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위혼은 죽어가고 있고, 위혼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위혼은 과연 선인(善人)인가, 악인(惡人)인가?

노독행은 한동안 위혼의 주름살 투성이에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위혼은 드물게 보는 밝은 웃음을 지었다.

"고맙네."

그는 다시 네 명의 흑의인이 맨 침상을 타고 사라져갔다.

그것이 노독행이 본 위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노독행이 떠난 지 이틀 후에 위혼은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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