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48화 (49/61)

제 48 장     친 구 의   아 내 는   안 지   않 아

1

아륵타를 비롯한 구마미륵의 안색이 홱 변했다.

'이토록 가까이까지 접근하도록 몰랐다니...내가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구나.'

아륵타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한 사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단 한 사람.

그런데 주위가 온통 그자로 인해 가득 차 버린 것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검은 안대를 하고 칙칙한 흑의를 입은 별로

크지 않은 체구의 사나이.

그자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아륵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시주는 누구요?"

사나이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짤막한 한마디만을 내뱉었을 뿐이다.

"꺼져."

아륵타는 물론이고 나머지 구마미륵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륵타가 누구인가?

운남과 귀주에서 제왕 같은 존재인 홍루사의 명실상부한

제이인자가 아닌가?

이 하늘높은줄 모르는 애꾸 녀석은 대체 자신이 꺼지라고 한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이라도 하는 걸까?

다행히 아륵타는 쉽사리 경동(輕動)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것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왠지 상대에게서 어떤 꺼리낌을 느꼈다.

상대의 어딘가에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륵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한 번 상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무정한 눈빛....검은

흑의.....그리고...

그리고....

아륵타의 몸이 덜덜 떨렸다.

검은 안대!

그제서야 비로소 아륵타는 상대의 무엇이 자신의 신경을

그토록 거슬리게 했는지를 깨달았다.

아륵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냉혈무정?"

처음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 음성이었으나 나중에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되었다.

냉혈무정!

이 네 마디를 듣자 구마미륵의 나머지 인물들은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냉혈무정이란 단순한 단어의 어디에 사람으로 하여금 옴싹달싹

못하게 만드는 마력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단어에는 무언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두렵고 흥분되게

만드는 야릇한 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아륵타를 비롯한 일곱 명의 구마미륵은 공포와 경이에 젖은

눈으로 당금 무림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신화적인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냉혈무정의 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화비룡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중 누구도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죽고 싶으면 다른 방법이 수천 가지나 된다.

굳이 그의 손에 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순간 아륵타는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이대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억지로라도 버티어서 주지의

명을 지킬 것인가?

하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스물 여덟 명의 절정고수가 그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몰살하고 말았다. 그들중 누구도 자신들보다 약한 고수는

없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스물 여덟 명의 구마미륵이 덤빈다고

해도 이자를 당해 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기들은 겨우 일곱 이지 않은가?

아륵타는 이때처럼 자신들의 숫자가 적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이 숫자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최소한 냉혈무정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륵타와 구마미륵은 떠나갔다.

싱거운 일이지만 이게 사실이었다.

홍루사의 최고고수들이 꺼지라는 단 한마디에 말없이 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이름, 나무는 그늘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무림인들이 왜 명성을 얻기 위해서 그토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륵타와 구마미륵마저 떠난 장내는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노독행은 무표정한 눈으로 동방완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동방완아와 화비룡의 마차를 본 것은 선성에서 조금

떨어진 이름모를 마을에서였다.

그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그들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노독행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노독행이 두 번째로 마차를 발견했을 때 마차는 구마미륵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마차앞에서는 처절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그냥 지나치려 했었다.

그들에게 관심도 없었고, 괜히 이런저런 번잡스러움을

자초하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화비룡이 쓰러지고 그녀는 사로잡히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때 문득 노독행은 방립동이 떠올랐다.

그가 하나뿐인 동생을 얼마나 아끼고 귀여워 하는지는

며칠전의 모옥앞에서 본 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불행한 일이 닥친다면 방립동이 슬퍼하지

않을까?

단순히 그 생각만으로도 노독행의 몸은 어느새 마차앞에

당도해 있었다.

구마미륵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시체로 변한 화비룡을 안고 있는

동방완아만이 달랑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그녀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책임이 아니었다. 친구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래서 노독행은 울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 그는 가치있게 죽었으니 슬퍼할 필요 없어."

노독행의 말이 무뚝뚝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건 노독행의 성격 때문이었다.

결코 그녀에게 악감정이 있거나 비꼬려는 뜻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신이야말로 꺼져버려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아마 다른 사람이 노독행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노독행은

참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라면 감히 노독행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이기 때문에 노독행은 참았다.

친구의 동생이기 때문에.

노독행은 맨손으로 땅을 팠다.

그리고는 그녀가 아직도 안고 있는 화비룡의 시체를 반

강제적으로 빼앗아 땅속에 묻었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그를 이렇게 묻어선 안되요! 그는...그는..."

노독행은 화비룡의 시체를 묻고 그의 장검을 무덤앞에 꽂았다.

그런다음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사에게 이 이상의 무덤은 사치야. 이것으로 그도 만족할

거야."

그녀는 몇 번을 발버둥치다가 하염없이 울었다.

아마 화비룡은 정말로 지하에서 만족해 하고 있을지 모른다.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 자신을 위해서 맨손으로 땅을

팠고,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자신을 위해서

울어주었으니 말이다.

노독행은 그녀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조차 말라 버렸을 때 노독행은

물었다.

"가장 가까운데 아는 사람이 누구지?"

그녀는 넋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다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생각해 봐."

"아무도 없어요. 나는 집밖으로 나온게 이번이 처음이에요."

노독행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나이는 얼핏 보기에도 스무살이 넘어 보였다.

그런데 그 동안 아직 단 한 번도 집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었단 말인가?

아무리 그녀가 앞이 안보이는 장님이라지만 어쩌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의 아버지란 작자는 자신의 딸이 단지 눈만 멀었을 뿐

남들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노독행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그녀의 감겨진 눈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슬픔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울었던 것은 화비룡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인생에 몇 안되는 동반자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혼자만 있게 되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던 것이다.

노독행은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이렇게 인간은 불행해지려고 애쓰는 것일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도 자살하려고 애를 쓰는

사나이...

천하에서 가장 부귀한 두 사람을 친아버지와 시아버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의 그림자를 씻어버리지 못하는 여인...

그리고 여기에 평생을 어둠속에서 외롭게 살아온 또 하나의

여인....

자신의 주위에는 어째서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만 있는 것일까?

어쩌면 노독행 자신도 그들과 하등 다를바가 없지 않을까?

아무런 인생의 목표도 없이 오직 복수만을 위해 피와 죽음속을

날뛰는 사나이...

그의 발길이 멈추는 곳은 어디일까?

복수를 끝낸 다음에는 그는 과연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사람을 죽이는 것외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중 누구도 이런 삶을 원했던 사람은 없었다.

불행해지고 싶었던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이런 인생을 살고 있었다. 불행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자초했을 뿐이다.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그런 불행은 결국 자기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이다.

방립동도 마찬가지고, 모용추수도 마찬가지고, 동방완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불행은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나의 불행도 내 스스로가 자초한 것일까?

과연 그런 것일까?

과연 그런 것이냐, 노독행?

너는 불행이 다가와 너를 갉아먹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

노독행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신의 불행을 차버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불행과 그들의 불행을 모두 모아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아득히 멀리 차버릴 수만 있다면 ....

이까짓 목숨 하나쯤은 기꺼이 던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2

날이 저물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선선했던 공기가 급격하게 식어가며 칠흑

같은 어둠이 소리도 없이 밀려왔다.

그녀는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노독행은 말없이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참동안 옷을 내밀어도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벗어든 옷을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위에 걸쳐주었다.

노독행의 손끝이 닿자 그녀는 깜짝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다가 그가 옷을 덮어주려 한다는 것을 알자 가만히

있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노독행이 벗어준 옷을 꼬옥 덮고 있었다.

노독행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언어(言語)란 때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옷을 걸쳐도 그녀가 계속 떨자 그제서야 노독행은 불을 피울

생각을 했다.

그는 노숙(路宿)을 하면서 아직 단 한 번도 불을 피워본 적이

없었다.

불을 피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겨울에 사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이란 놈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속을 아무런 탈도 없이 달려온 사람이 저 멀리

빛나는 불빛을 보면 이성을 잃고 허둥댄다. 불이 없을 때는

아무리 추워도 견디던 사람이 불을 피웠다가 그 불이 꺼졌을

때는 맥없이 얼어죽고 만다.

그래서 노독행은 불이란 음식을 데울 때외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불을 피울 생각을 했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녀 때문에.

이제 그도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일까?

그럴리가...

단지 그는 나중에 방립동을 만났을 때 왜 내 동생이

감기걸리도록 내버려 두었느냐는 원망섞인 푸념을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불을 피우자 그녀는 조금 견딜만 한 듯 했다.

날이 어두어오자 하늘에는 한점 두점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

달을 보자 노독행은 문득 모용추수가 생각이 났다.

그녀와 함께 이름모를 야산에서 보았던 달이 생각이 났다.

그때의 그 달은 왜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오늘의 달빛은 왠지 처량했다.

똑같은 달이건만 장소가 틀리니까 느낌도 다른 것 같았다.

아니면 함께 있는 사람이 틀려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달은 변함이 없건만 내가 변해 버린 것일까?

밤이 상당히 깊었다.

노독행은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그녀가 잠들어 있는지 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보아 잠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하나 그때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런건 처음이에요."

노독행은 그녀의 감겨진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그만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렇게 야외에서 밤을 지새우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이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군요."

"......."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요."

그녀는 두 다리를 오무리고 양 팔을 깍지껴 그 위에 얹은 다음

얼굴을 괴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그녀는 노독행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사랑하나요?"

노독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언니 말이에요. 내 오빠의 아내. 그녀를 사랑하나요?"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말 좀 해 봐요.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노독행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그녀는 뜻밖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었다.

비록 금방 사라지기는 했지만 노독행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웃는 웃음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모르다니 당신은

바보로군요. 그녀와 자봤어요?"

노독행은 번뜩이는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물었다.

"그녀는 어떤가요? 부드러운가요? 달콤한가요?

아니면...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여주는 여자던가요?"

그런 말은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말해 봐요. 그녀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천하제일미녀인데 그런

미녀를 안아본 느낌이 어때요? 비록 남의 아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울 거 아니에요?"

"........"

"남들이 그러더군요. 남의 아내를 빼앗을 때가 가장

짜릿하다고...당신도 그랬나요?"

노독행은 마침내 물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지?"

그녀의 두 눈이 감겨진 얼굴은 여전히 노독행이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내 방에서 작은 뜨락 하나를 지나면 주방이 있어요. 나는

가끔 잠이 오지 않으면 그 뜨락을 거닐곤 했는데 그때 주방에서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어요."

노독행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답해줘요. 궁금해서 그래요. 당신은 언니와 자면서 쾌감을

느꼈나요?"

노독행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얼굴 한 구석에 두려움의

표정을 떠올렸다.

노독행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똑똑히 들어. 한 번만 더 그런 소리를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어. 나중에 그에게 무슨 욕을 먹더라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녀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아직까지 이토록 냉혹하고 차가운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 가득히 두려움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그때 비로소 그녀는 무림에 퍼진 그의 소문이 기억이 났다.

-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 그는 양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살인귀(殺人鬼)다!

- 그는 일단 자신의 눈밖에 난 자는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

설사 지옥의 염라대왕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쫏아가 반드시

처참하게 죽이고 만다!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지금 얼마나 무서운 사람과 같이

있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자기가 조금전에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가를....

노독행은 그녀에게서 이 장 쯤 떨어진 곳으로 가서 맨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날은 여름의 절정을 지나고 있지만 밤의 땅바닥은 차가웠다.

하나 그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팔베게를 한 채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검은 하늘에는 달이 빛나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이 빛나고,

한 줄기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독행은 별을 세다가 잠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노독행이 산에서 따온 열매도 먹지 않았고, 잡아서 구운

꿩고기도 먹지 않았다.

노독행은 그녀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아마 어제의 일로 심기가 불편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노독행은 이런 정도로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노독행이 얼마나 무정하고 냉혹한 인물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냉혈무정이 한낮 아녀자의 투정에

넘어가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잠시 후에 노독행은 입을 열었다.

"말을 해 줄테니 고기를 먹어."

그녀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노독행은 내 말을 믿어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이 왜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와 자지 않았어."

동방완아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당신들은 서로 좋아하잖아요?"

노독행의 음성은 무뚝뚝했다.

"친구의 아내는 안지 않아."

동방완아는 한참동안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당신 같은 사람과 친구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나 같은 사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같은 사람. 오빠는 당신하고 너무 틀려요. 성격도

틀리고 분위기도 틀리고....오빠라면 절대로 어제 당신이 했던

말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하는게 분명하다.

인간이란 서로 비슷할수록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다를수록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성격이 정 반대인 사람일수록

상대방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걸 발견하고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녀가 어째서 당신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아요. 당신은 무뚝뚝하고, 냉혹하고, 사람을 두렵게

하지만...또한...또한...."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피어 올랐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그녀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다 합친 것 같았다.

노독행은 그녀를 곤궁에서 구해 주었다.

"또한 그런대로 매력도 있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런대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들이 살인자(殺人者)에게 곧잘 반한다는 말이

사실인가봐요."

노독해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나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아니야."

그녀는 갑자기 찬물로 머리를 뒤집어 쓴 것처럼 몸을 굳혔다가

조금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독행은 한동안 그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때 알게 될거야.

살인자라고 해서 좋아지는게 아니고 아름답다고 해서 좋아지는게

아니야. 남의 아내라고 해서 좋아지는 건 더더욱 아니야. 그냥

좋아지는 거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누군가가

좋아지는 거야. 그렇게 되는 거야."

그녀는 상당히 오랫동안 그의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그녀가 그렇게 좋아졌나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갑자기?"

노독행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말했잖아. 나도 모른다고."

노독행은 차게 식어버린 꿩고기를 내밀었다.

"이제 먹어."

그녀는 말 잘 듣는 어린 아이처럼 고분고분 그가 내미는대로

꿩구이며 열매를 집어 먹었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열심히 집어 먹다가 그녀는

갑자기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호호호...."

노독행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참을 웃다가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제서야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무슨 생각이지?"

그녀는 다시 빙긋 웃었다.

"산장에 있을 때 내가 제일 싫어한게 꿩요리에요. 그때 난

꿩요리의 냄새만 맡아도 토하곤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꿩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웠으니 주방장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고 말았을 거에요."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호호호...."

오늘따라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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