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장 승 락 하 겠 소
1
"쿨룩...쿨룩...."
선혈이 그치지 않았다.
기침이 계속 나오면서 검붉은 핏물이 계속 뿜어져 나왔다.
노독행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계속 기침을 했다.
거의 한 바가지나 되는 피를 토하고서야 기침은 겨우
멈추었다.
하나 그때는 이미 노독행의 몸은 기름이 모두 없어진 등불처럼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최악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의 앞으로 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노독행이 간신히 고개를 쳐들자 교악의 비쩍 마른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교악의 얼굴에는 괴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게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냉혈무정을 내손으로 제거하게
되다니...'
교악은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것을 알았다.
교악은 오랫동안 강호무림을 종횡하던 인물답게 단번에
냉혈무정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파악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냉혈무정은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내상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그냥 내버려 두어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금의 냉혈무정이라면 설사 무공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은 강호무림에서 내노라하는 절정고수가 아닌가?
그는 이름만 들어도 무림천하가 온통 공포로 벌벌 떠는
냉혈무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된다는 생각에 짜릿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노독행이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교악은 음충맞게
웃었다.
"흐흐....너는 과연 내가 평생 처음보는 고수다. 그런 몸을
하고도 우문노인을 쓰러뜨리다니. 하지만 운이 나빴다. 아니
내가 운이 좋은 것인가?"
그는 득의에 찬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금시라도 광소를
내지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되겠지. 너로 인해
나는 불후(不朽)의 명성을 얻게 될 테니까...크흐흐..."
교악은 천천히 자신의 양 손을 들어 올렸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너에게 어울리는 멋진 최후를 장식해
줄테니까."
그의 손바닥이 갑자기 시퍼런 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교악이 자신의 성명절기인 추혼장력(追魂掌力)을 끌어올린
것이다.
"나의 추혼장에 쓰러진다면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단 일장(一掌)에 끝내주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이어 교악은 시퍼렇게 변한 손으로 노독행의 머리를 맹렬하게
후려쳤다.
푹!
장력이 머리통에 격중된 것 치고는 이상한 음향이 울려퍼졌다.
교악은 노독행의 머리를 가격하는 동작 그대로 몸이 굳어
있었다.
뚝...뚝...
그의 앞가슴을 타고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교악의 등에 삐쭉한 칼날이 삐져 나 와 있었다.
교악은 무언가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사람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노독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넌 말이 너무 많았어."
교악의 몸이 한차례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이...."
교악은 몸을 떨며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노독행은 그의 가슴에 꽂았던 월영도를 힘껏 빼냈다.
팟!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지며 교악의 몸이 한차례 회전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교악의 얼굴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당혹감과 경악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조금전 노독행은 교악이 추혼장을 끌어올리며 주절주절 떠드는
순간에 마지막 힘을 쥐어 짜 월영도로 그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교악이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저런 말없이 장력을 휘둘렀다면
노독행으로서는 도저히 손써볼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너무도 큰 행운이 굴러떨어진데 대한 방심이 결국 교악에게
뜻밖의 종말을 선사했던 것이다.
따땅!
월영도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에따라 노독행의 몸도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토록 강했던 그도 결국은 쓰러지고 말았다.
최후의 힘까지 쥐어짜낸 그의 몸은 이제는 아무런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입으로 흘러나오는 피는 어 있었지만 코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쉴사이없이 흘러나왔다. 언제나 무섭게 번뜩이며 보는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던 그의 눈도 급격하게 흐려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차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가 걸어나왔다.
시간은 정지(靜止)해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 또한 정지해 있었다.
표정도, 얼굴도, 몸도, 마음도 모두 정지해 있었다.
또옥..똑...
정지는 깨어졌다.
그녀의 눈가에 매달려 있던 수정처럼 고운 눈물 한 방울이
모든 정지를 깨뜨려 버렸다.
노독행은 무슨 힘이 남아 있는지 벌떡 일어났다.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
최소한 그녀의 앞에서 쓰러질 수는 없다.
오직 이 생각만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달려왔다.
배꽃같이 고운 두 뺨을 눈물로 적시면서 달려왔다.
그리고는 그의 품을 향해 몸을 던졌다.
"독행...독행...."
아마 노독행이 두 팔을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그녀의 몸을
안았을지도 몰랐다. 나중이야 어떻게 되었건 그녀의 몸을 꼬옥
안았을 것이다.
하나 그는 그녀를 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때처럼 고통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녀를 안을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웠고, 그녀를 안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쳐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그 눈빛이란....
노독행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녀의 몸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은
점차 강해져 나중에는 의혹어린 표정이 되었다.
"독행...왜?"
노독행은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음울하리만치 낮게 가라앉은 쉬어 버린 듯한 음성이었다.
"당신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처음에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한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노독행을 올려다 보았다.
노독행은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좋은 남자야."
그녀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그 순간의 그녀의 표정을 무어라고 해야 할까?
그는 그때처럼 슬픈 그녀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커다랗게 뜨여진 눈망울과 반쯤 벌어진 입술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지금은 아무 말없이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그가 자신의 몸을 밀치는데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가 양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을
때도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노독행의 걸음은 유난히도 느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쏜살보다도 더욱 빠르게 느껴졌다.
마침내 그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단지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지...? 왜지...?"
그녀는 이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등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내 친구이기 때문이지."
그녀는 벼락맞은 사람처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 옆에 우울한 표정의 방립동이 우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가 언제부터 그곳에 와 있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몇 달전에 비해서 말할 수 없이 수척하고 거칠어
졌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한없이 아련한 빛을 띠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그의 말 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라고...? 당신과 그가...?"
방립동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래서 그는 떠나간거요. 친구의 아내를 안을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립동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친구의 아내? 그가 당신의 친구라고?"
방립동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묻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학질걸린
사람처럼 몸을 떨더니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방립동은 가슴이 아팠다.
그것은 예리한 비수로 가슴 한 구석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자.
그 여자가 지금 울고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 때문에....
더구나 그 남자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친구가 아닌가?
마침내 방립동의 눈가에도 뿌연 물막이 피어올랐다.
하나 방립동은 울지 않았다.
속으로는 피눈물이 흘러나왔으면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따라가고 싶으면 그를 따라가도 좋소.
나는...괜찮으니까...."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의 마음은 전혀 다른 말을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다.
- 내 곁을 떠나지 마시오! 제발 떠나지 마시오! 당신이 나를
떠나는 고통을 나는 결코 다시 겪고 싶지 않소!
하나 이 말은 또한 진실이었다.
- 당신만 좋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기꺼이 참을 수 있소.
당신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고, 그는 나의 하나뿐인
친구이니까.
나는 기꺼이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소.
지금 방립동의 심정은 자신도 알 수 없을만큼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때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눈물이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던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냉정을 회복한 것일까?
그녀의 음성은 얼굴에 떠있는 표정만큼이나 담담했다.
"당신은 친구라면서도 그를 모르는군요."
방립동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따라간다해도 그는 결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에요.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한 이상."
방립동은 고개를 숙이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나직하게 탄식을 토해 냈다.
"그렇지. 그라면 그럴거요.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방립동의 얼굴에 우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그를 따라가야 하오."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향해 묻는 시선을 던졌다.
방립동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자신이 할 말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했다.
아마 자신은 한층 더 비참해지겠지.
하지만 그래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실연자(失戀者)가 될지언정 결코 친구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립동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소.
당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는 이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거요."
2
숲은 깊었다.
길이 없어진지는 이미 오래였다.
잡초 무성한 수풀은 인적(人跡)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노독행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기만 하면 금시라도 그녀의 모습이 눈앞으로 화악
닥쳐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멈춰졌다.
그는 자신의 몸이 차가운 풀밭위에 쓰러지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로 이런 식의 웃음은 지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너도 나를 배신하느냐?'
쿵!
마침내 그의 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풀잎의 냄새는 싱그러웠다.
풀잎에 매달린 이슬은 달콤했다.
그리고 하늘은....
풀숲에 누워서 올려다 본 하늘은 어째서 그렇게 아름다운가?
그 하늘의 빛깔은 오늘따라 유달리 고운 것 같았다.
원래 이런가?
원래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런데 자신은 왜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제 생(生)의 마지막 한 줌이 꺼져가는 이 순간에야 왜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까?
노독행은 의식적으로라도 그녀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후회하는 감정은 없었다.
단지 이제는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하자 지나간 모든 것이
그리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는 복수(復讐)에 대한 생각이 미쳤다.
일흔 여덟 개의 목숨.
일흔 여덟 개의 복수.
복수에 대한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은 오직 그것이 전부였는데....
조향령이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을 해도 이상하게 예전처럼
격동하는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를 추적하고, 잡아서 죽이고,
살을 찢고 배를 갈라서 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약해진 것일까?
죽을 때가 되니 갑자기 두려워진 것일까?
노독행!
너는 겁장이인가?
갑자기 파란 하늘이 서쪽에서부터 어두워지며 한 줄기
먹장구름이 밀려왔다.
싸늘한 바람이 구름속에서 불어오고, 이어서 몇 개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노독행은 얼굴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감촉을 느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노독행!
너는 이제 죽는다.
두려운가?
죽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무서운가?
살아있는 자들이 너를 비웃을 것이 화나지 않는가?
그런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두려운건 아니다.
복수를 마치지 못한 것이 억울한게 아니다.
나는 단지...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나' 답게 죽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귀(復讐鬼) 냉혈무정, 그대인가?
아버지에게 선물할 호피를 마련하기 위해 장백산의 겨울을
헤메고 다니던 노독행, 그대인가?
아니면....
이름모를 야산에서 낮선 여인과 함께 사슴의 뒤를 으며 웃고
있던 너, 그대인가?
너는 그때 분명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도 맛보았겠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네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겠지.
그랬던 그녀가....난생 처음 뜨거운 감정을 느꼈던 그녀가
유일한 친구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죽고 싶었나?
그래서 지금 죽는 것인가?
과연 그런가?
그건 아니다.
나는 단지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친구를 위해....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남일 수 없으며, 노독행! 바로 너다.
그렇다면 이런 죽음은 지극히 노독행다운 죽음이 아닐까?
빗발이 거세어졌다.
노독행은 빗물의 맛이 찝찌름하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고, 빗방울은 사정없이 그의 몸과
얼굴과 마음을 때렸다.
노독행은 웃었다.
퍼붓는 빗방울을 보면서 웃었다.
웃으면서 생각했다.
빗 속의 죽음이라면 이것도 괜찮군.
사나이의 일생에 있어 아버지가 있고, 형이 있고, 친구가
있으며, 여인이 있다면 그자의 인생은 그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있다면...
그녀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었으면....
그때 거짓말처럼 그의 눈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노독행은 처음에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줄 알았다.
하나 몇 번을 눈을 깜박거려도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비에 젖어 누더기나
다를바가 없었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도 풀어헤쳐져
허리아래까지 늘어져 있었고, 전신은 진흙투성이였다.
그런 채로 그녀는 멍하니 빗속에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노독행은 바닥에 누운 채로 생각했다.
이건 분명히 신(神)의 장난일 것이다. 아니면 악마이거나...
신이든 악마든 이런 식의 장난은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 그녀가 그의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왔을 때 그는
더 이상 그것이 신의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녀가 정말 내 앞에 있다.
그녀가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면서 다가왔다.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그의 얼굴 바로 위까지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소근거렸다.
"당신을 찾았어요....당신이 이미 죽어 버린줄 알고...울면서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노독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비에 젖고 흙탕물에 범벅이 되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다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창백한 그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손끝은 차가웠고, 그의 입술도 차가웠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당신을 찾지 못할까봐 두려웠어요....그리고 당신을 찾을까봐
두려웠어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당신을 보게될까봐...."
그녀의 흠뻑 젖은 두 뺨위로 새로운 두 개의 물줄기가
그려졌다.
"정말 두려웠어요..."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싼 채로 속삭였다.
"당신은 바보에요."
노독행은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래서 차가운 빗물을 받고
있으면서도 노독행은 훈훈함을 느꼈다.
"당신은 내가 평생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준 남자에요. 그런데
그런 당신을 내가 쉽게 보내줄 것 같아요? 당신이 나를 버리고
간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끝까지 아갈 거에요."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은 유달리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아롱거리는 물방울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노독행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슴이
뭉클하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노독행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살짝 갖다대었다.
"말도 없이 가지는 않아."
나직하고 갈라터져 쉬어버린 것 같은 음성이었는데 그녀에게는
다른 어떤 음성보다 감미롭게 들려왔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낀 갓난아이처럼 그의 손에 뺨을
대고 비볐다.
어느새 그의 머리는 그녀의 무릎위에 놓여 있었고, 그녀의
빙어 같은 손가락은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억나요? 당신이 내게 처음 했던 말이?"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그때 당신은 내게 말했죠. '당신 때문이 아니었어.' 난
솔직히 속으로 겁이 무척 났어요. 그때 당신의 목소리나 표정이
너무 무서웠거든요."
노독행도 그때를 기억했다.
그녀는 산장의 추적을 피해 서문정과 함께 북만주로
도망쳤다가 한 무리의 고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형의 친구였던 서문정을 위해서 그들을 물리쳤고, 그녀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때 노독행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노독행은 그때를 떠올리자 당시의 그 인물은 자기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뿐만 아니라 과거의 냉혈무정이란 인물은 자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처럼 생각되었다. 도저히 그때의 살기로 뭉쳐진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두 번째로 당신을 보았을 때도 나는 당신이 두려웠어요.
하지만 왠지 호감이 가기도 했어요. 당신은 적어도 꾸미거나
가식어린 행동은 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그랬던가?
그녀는 웃었다.
비에 젖은 웃음이었으나 다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무뚝뚝했지만 나에게는 잘해 주었죠. 절벽에서 뛰어내렸을 때
이제는 끝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당신은 다시 날 구해
주었죠. 그리고 그때 난 깨달았어요."
그녀는 노독행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며 소근거렸다.
"내 인생이 변했다는걸. 내 인생이 당신 때문에 변하게
된다는걸."
그녀의 눈에는 한 줄기 뜨거운 열정의 빛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당신은 내게 제이(第二)의 인생이에요. 당신을
떠나서는 난 살 수 없어요. 이제는 살 수 없게 되었어요."
빗물은 하염없이 내렸다.
노독행은 비가 와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는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으니까. 빗속에 모든 것을 감출
수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그런 자세로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의 말이란 쓸데없는 쓰레기이거나 사치일 뿐이다.
노독행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의 숨결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노독행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양 팔의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팔뿐만 아니라 몸의
어느 곳에서도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지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노독행의 손이 닿자 그녀는 그 손을 꼬옥 잡아 쥐었다.
마치 자신의 떨림을 멎게 해달라는 듯이...
하나 떨림은 멈춰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세차게 떨렸다.
노독행은 흐릿해 오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윤곽이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앗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위의 경물 또한 뿌옇게 보였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그런데도 노독행의 얼굴에는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필시 그녀의 눈에 진주 같은 눈물이 고여있을 것이다.
눈물고인 그녀의 얼굴은 틀림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 얼굴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노독행은 그녀의 얼굴 위로 다시 하나의 얼굴이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눈의 초점이 흐려져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가
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위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자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노독행은 그
윤곽이 어디서 본 듯하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인가, 저자는?'
그녀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쳐든 그녀는 그 사람을 보자 짤막한 탄성을 질렀다.
"아!"
노독행은 그 음성속에 한 줄기 억누를 수 없는 반가움의
감정이 담겨 있음을 알고 의식이 흐려져가는 중에도 의아심을
느꼈다.
'그가 대체 누구이길래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그 사람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당신은 두
구의 시체를 보게 되었을 거에요."
그 사람은 조금 눈쌀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나보고 이 사람을 구해달라는 거요?"
"그래요."
그 사람은 잘라 말했다.
"너무 늦었소. 지금은 이자를 살릴 수 없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어요."
"내가 아니라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요. 이자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내장이 뒤흔들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심맥(心脈)이 모두 뒤틀렸소. 게다가 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약을 과용하는 바람에 진기가 역류해 이제는
설사 화타(華陀)가 살아온다 해도 어쩔 수 없소."
"당신이 바로 당대의 화타아니에요?"
그 사람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 같은 돌팔이를 어찌 화타에 비하겠소?"
나타난 사람은 바로 신주화타 조상심이었다.
조상심이 불가능하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당신의 조가의문(曹家醫門)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한
가지 비방(秘方)이 있다고 하더군요."
조상심은 흠칫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시오?"
"그이에게서 들었어요."
조상심은 어이가 없는지 얼굴에 쓴웃음만을 머금고 있었다.
"동방립이? 그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그녀는 그의 음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 비방은 가히 죽은 사람을 살리고 시체에 살을 붙게 하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묘술로서 능히 고금제일의
의술대법(醫術大法)이라고 하더군요."
"용케도 그걸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뛰어난 술법이 아니오.
그냥 단순한 침구술(針灸術)의 일종일 뿐이오."
그녀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비방은 당신의 증조부인 성수신의(聖手神醫)
조상의(曹尙意)를 끝으로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었는데 당신은
천부의 재질과 노력으로 백 년만에 그 비방을 익힌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조상심은 더 이상 발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저었다.
"좋소, 좋아. 내가 그 비방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
비방으로 이자를 살린다고는 장담 할 수 없소. 그리고 내가 왜
이자를 위해 그 비방을 사용해야 한단 말이오? 이자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그녀는 별빛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부탁하니까요."
조상심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무어라고 소리지르려 했다.
"그런 말도 않되는....."
그러나 그의 말은 그녀의 다음 말을 듣고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를 살려주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어요."
조상심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괴이한 섬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런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조상심은 다짐받으려는 듯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로 어떤 조건이든지...."
"어떤 조건이든지 들어주겠어요."
조상심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든지 들어주겠다!
원래 이런 말은 여인의 입으로는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그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스스럼없이 이 말을 내뱉었다.
이것은 그녀가 지금 얼마나 절실한 심정인지를 단적(斷的)으로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조상심은 한참동안이나 그녀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눈빛도
변함이 없었고,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조상심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심은 다시 물었다.
"내가....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 동안
얼마나 절실히 당신을 원해 왔는지도?"
그녀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단 말이오?"
세 번째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작만 하게끔 되어 있는
자동인형같았다.
조상심은 다시 한동안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당신네들같이 이상한 부부는 처음보겠구료."
그녀의 말없는 시선이 조상심을 향했다.
조상심은 쓴웃음을 머금은채 중얼거렸다.
"남편이란 작자는 곤히 잠자고 있는 사람의 집으로 불쑥
쳐들어와서 다짜고짜 이곳으로 가보라고 아우성을 치고..."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거렸다.
조상심은 그녀의 표정을 힐끔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내라는 여자는 여인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조건까지
내걸으면서 외간남자를 살리려고 하다니...이 세상에 당신네들
같은 부부가 또 어디 있겠소?"
그녀의 눈빛이 흐려졌다.
하나 이내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고 조상심을 올려보았다.
"당신은 승낙할 건가요? 하지 않을 건가요?"
조상심은 다시 머뭇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락하겠소."
그의 얼굴에도 또한 굳은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누가 뭐라해도 이번 일은 내 일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이니까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