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장 그 들 이 그 녀 를 끌 고 갔 네
1
그 사람은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게냐?"
그 사람의 앞에 서 있던 금의귀공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넓고 화려한 대청이었다.
기둥부터 시작해서 벽면, 바닥, 천정에 이르기까지 단
한군데도 사람의 세심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대청이었다.
대청의 중앙에는 대청에 지극히 어울리는 크고 화려한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태사의의 중앙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의 나이는 대략 오십 세정도로 보였다.
나이를 들어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질좋은 푸른 청의를 입고
이마에는 커다란 옥색 비취가 박힌 영웅건(英雄巾)을 쓰고
있었으나 그래도 듬직하게 튀어나온 아랫배로 인해 나이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허리춤에 약간 넉넉하게
금대(金帶)를 매고 있었다.
정성껏 손질한 것이 분명한 검은 수염이 탐스럽게 목밑으로
늘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두툼하게 살집오른 손가락에는 형형색색의 굵직한 가락지를
여러개 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치스럽고 허황되게 보였는데 그래도 그런 것이
그에게는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절약이라던지 검소(儉素)의 미덕(美德)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로지 부귀와 권세, 그리고 화려함만이 그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그를 허영에 눈이 먼
몽상가(夢想家)라고도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의
화신(化身)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장 인간적(人間的)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말 그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사치와 부귀를 좋아하고,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악랄하고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았다.
하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거지를 보면 주머니돈을 털어서라도
넉넉한 돈을 주었고, 생면부지의 인물이라도 자기에게 부탁을
하면 들어줄 수 있는 일은 모두 들어주었다. 가끔 석양이 유달리
짙은 저녁에는 홀로 뒷뜰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싯구를
조리기도 했고, 친한 벗이 찾아오면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버선 발로 뛰어나가 마중을 했다.
별로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의 아내의 기일(忌日)날이면
그가 혼자 골방에 쳐박혀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곤 한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었다.
사치와 부귀, 권세, 탐욕, 비열, 자비, 풍류, 의리, 그리고
고독!
한 사람이 지니기에는 너무도 많은 모습들이 그에게 나타나곤
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본모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필연적으로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인식되었다.
만승검왕 모용태릉!
검(劍)으로만 따진다면 강남에서 세 손가락안에 들고,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대로 두 번째로 큰 권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복잡다단한 성격중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성급하고 격렬한 분노였다.
일단 화를 내기만 하면 그는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어떤때는 자기자신도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혼절한 적도 있었다.
그런 화급한 성격의 그가 화를 내고 있으니 그의 앞에 서 있는
금의귀공자가 제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금의귀공자는 모용태릉의 다섯 제자중에서 제일가는 제자인
금포옥소 위문평이었다.
위문평은 강남의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名門)의 후손으로,
모용태릉이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자타가 공인하는
강남의 후기지수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위문평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분노에 찬
모용태릉의 호통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도데체 너를 믿고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거늘...."
위문평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용태릉은 아직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지 자신이 앉아 있는
태사의의 모서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놈들을 끌어들이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꽝!
그가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호화롭기 짝이 없던 태사의는
모서리뿐만 아니라 거의 한쪽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그런데도
모용태릉은 화가 풀리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까짓 세상물정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 하나도 처치하지
못하면서 어찌 강호를 주름잡겠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니느냐? 어디 말좀 해 봐라!"
위문평은 지금 여기서 자기가 입만 뻥긋해도 그것은 끓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자는 너무 강했습니다."
모용태릉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한쪽 끝이 하늘높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위문평의 전신을 아래위로 쓰윽 훑어 보다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오라. 변명치곤 아주 확실하군. 그자가 너무 강했단 말이지?
너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는데?"
위문평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로서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문평이 의외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나오자 모용태릉은
어이가 없는지 오히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구? 허허..."
위문평은 그 정도로 자신의 심중을 충분히 피력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대청이 떠나갈 듯한 모용태릉의
호통소리가 그의 귓전을 강타했다.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이 천하에 멍텅구리 녀석아!
내가 그따위 소리나 들으려고 너를 가르쳤는줄 아느냐?"
위문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모용태릉은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그와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감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마구 퍼부어댔다.
위문평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모용태릉의 독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모용태릉은 거의 일각(一刻) 가까이 온갖 욕설을 퍼부은
다음에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지 말을 멈추었다.
잠시 대청에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 모용태릉은 조금전보다는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이제 네 생각은 어떠냐?"
그제서야 위문평은 고개를 들어 모용태릉을 바라보았다. 언제
욕설을 들었느냐는 듯 그의 얼굴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음성 또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번 일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정면으로는 그자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출혈이 너무 커지게 됩니다."
모용태릉은 이미 냉정을 회복한 듯 평상시처럼 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위문평의 태도 또한 냉정했다.
"한 주먹이 두 주먹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은 그자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막아도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막기 힘들다는 말이 통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도 그자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통상 한 가지 방법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게 무어냐?"
위문평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위문평은 빛나는 눈으로 모용태릉을 주시하다가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이독제독(以毒制毒)!"
모용태릉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위문평의 시선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은 마음에 드는군."
위문평은 한층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에 대한 몇 가지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게...."
모용태릉은 막 무언가를 물으려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대청밖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그 순간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두 눈에서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돋을만큼 냉혹하고 무서운
살기가 이글거렸고, 음성 또한 만년빙굴에서 흘러나오는 듯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처음의 성질급한 난폭자에서 갑자기 차가운 냉혈한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대청밖에서 조심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진호(陳狐)입니다."
진호는 모용태릉의 셋째 제자였다.
모용태릉은 잠시 안광을 빛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들어와라."
곧 대청밖에서 하나의 인영이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체구가 작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청년은 검은 유삼(儒衫)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비쩍 마르고
머리숱이 유달리 많았다.
흑삼청년은 모용태릉의 앞으로 다가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냐?"
흑삼청년은 모용태릉을 향해 고개를 수그리며 예의 그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산장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모용태릉의 눈쌀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나 이내 그는 무표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왔느냐?"
"한 사람은 쌍수마객 교악입니다."
모용태릉의 눈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흑삼청년, 진호의 말속에 묘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진호의 음성은 변함이 없었다.
"우문산(宇文山)입니다."
모용태릉의 몸이 움찔거렸다.
"우문산? 쟁천봉(爭天棒) 우문산 말이냐?"
진호는 조용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진호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쟁천봉 우문산이 왔다!
그것은 확실히 뜻밖의 일이었다.
우문산은 지난 이십 년간 산장 밖을 나온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강호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강호무림이
한바탕 요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하나 모용태릉은 전혀 다른 의미의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산장에서 우문산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다름아닌 산장의 주인이....
'내 딸이 그 늙은이가 이토록 중시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단
말인가?'
모용태릉은 문득 자신이 그녀에 대해 너무 등한시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2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
방립동은 둔계에서 오십여 리쯤 떨어진 탕구(湯口)의 어느
허름한 객점에서 노독행에게 말했다.
노독행은 아직도 완전한 혈색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는 그런대로 아물었으나 내상이 아직 낫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금창에 궤뚫렸던 왼쪽 옆구리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심하게 몸을 움직이면 격렬한 통증이 몰려와서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노독행이 몸을 몇 차례 옆으로 움직이자 방립동이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네. 이제 삼일만 지나면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지금 무리하다가 꿰맨 상처가 터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멈추었다.
방립동의 말이 옳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단지
오랜동안의 습관으로 그는 자신의 몸상태가 지금 어떤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는 않았으나 남과 싸우지만 않는다면
그런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방립동과 함께 지내온 지난 며칠동안은 노독행이 강호에
출도한 이후 보낸 가장 평온한 시간이었다.
생각하면 야차곡을 나온 이후로 그는 단 하루도 편안하게 쉰
적이 없었다.
쉬기는커녕 하루라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고, 양 손에서
피가 마를 시간조차 없었다.
특히 천상회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복우산에서 혈전을 벌이기
까지의 삼일동안은 가장 힘든 나날들이었다. 거듭되는 격전으로
부상과 피로가 누적되어 하마터면 치명적인 상태로까지 빠져 들
뻔했던 것이다.
적당한 휴식과 반복되는 수련.
그것은 무쌍류의 무예를 시전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들이었다.
적당한 휴식을 취해서 항상 몸 상태를 완벽하게 해놓지 않으면
무쌍류 무예의 진수(眞髓)를 마음껏 펼칠 수가 없었다.
노독행이 복우산에서 의식이 끊어질 정도의 중상(重傷)을 입은
것도 천상회의 격전에서 입은 상처를 채 완치시키지도 않고
무리하게 무쌍류 무예를 사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 간단하고 단순한 동작같아도 무쌍류의 무예
하나하나에는 그 강렬한 위력만큼이나 치밀하고 계산된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 의도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삼일만 무사히 지나면 노독행은 다시 예전의 몸상태로
되돌아 올 수 있다.
그리고 굳어진 뼈가 더 단단해 지듯이 그의 무공 또한
예전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방립동은 노독행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빠르면 오늘 저녁에 돌아오고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
오겠네."
방립동은 혼자서 아내에게 가겠다고 말했다.
노독행은 이곳까지 함께 와서 굳이 혼자 아내의 친정으로
찾아가겠다는 방립동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방립동은 아내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혹시라도 추한 꼴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을
노독행에게 보이기 싫었을 것이다.
그리고....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어찌 되었건 노독행은 방립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그녀를 소개시켜 준다는 말을 잊지 않았겠지?"
방립동은 억지로 웃었다.
누가 보기에도 억지스런 웃음이었으나 노독행은 그것이 그녀를
데려올 자신이 없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잊지 않았지. 반드시...자네는 그녀를 볼 수 있을
거야."
방립동은 다시 노독행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 눈빛을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노독행이 방립동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 방립동은
몸을 돌렸다.
"갔다 올게."
그때 노독행은 그의 눈아래 반짝하는 것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건 눈물이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방립동은 이미 방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진 후였기 때문이다.
탁!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며 노독행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이대로 방립동과 헤어져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황급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하늘에 한줌의 별들만이 반짝이고 있을 뿐 방립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노독행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차가운 밤바람만이 그를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의 공허함이란....
그날 밤 노독행은 방문을 열어 놓은 채로 뜬 눈으로 꼬박 그를
기다렸다.
방립동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의 차가운 냉기가 옷깃을 뚫고 살갗으로 밀려왔을 때
노독행은 문득 '그녀'의 집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둔계를 지나 백리쯤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용세가(慕容世家)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있다.
노독행은 자신이 왜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그녀'였는데....
'그녀'에 대한 생각을 단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자신이었는데....
왜 방립동과 함께 이곳까지 오면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노독행은 창문너머로 새벽이 동터오는 희미한 여명아래 드러난
남쪽 지평선(地平線)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그녀'가 있다.
저곳으로 백여 리만 가면 '그녀'를 만날 수가 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노독행은 자신의 가슴이 마치 풋사랑에 빠진 십여 세 소년처럼
심하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과연 사랑에 빠진
것일까?
그리고 그때 그 생각이 들었다.
이것 참! 공교로운 일이군.
'그녀'의 집과 방립동의 처가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니...
'그녀'는 유명한 여인이므로 방립동의 아내도 '그녀'의 이름을
들어보았을지 모른다.
방립동 같은 사나이가 흠뻑 빠질 정도라면 방립동의 아내도
필시 보통 여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방립동도 '그녀'를 알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그때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노독행은 번쩍 고개를 쳐들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들어온 사람은 방립동이었다.
방립동의 얼굴은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땀을 비오듯 흘리며 절규하는 듯한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들이 그녀를 데려갔네...."
노독행은 어리둥절하여 급히 물었다.
"그들이라니...그게 무슨 말인가?"
방립동은 노독행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노독행의 손을 움켜쥐고 비통한 부르짖음을
토해 냈다.
"그들이 그녀를 끌고갔네...그녀를 구해야 돼!"
그의 마지막 음성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 불쌍한 여자를....다시 또 지옥으로 끌고 갔단 말일세..."
< 1 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