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39화 (40/61)

제 39 장     그  래  도    자  네  는    바  보  야

1

지독한 통증이었다.

누군가가 거대한 작살로 자신의 옆구리를 계속 찔러오고

있었다. 노독행은 몇 번이고 피하려 했으나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대한 작살은 그의 옆구리를 산산히 찢어놓고 그것도

모자라는지 전신을 조금씩 짓이겨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독행은 외눈을 멀거니 뜨고 상대가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작살을 든 사람의 얼굴은 아주 흐릿했다.

아무리 안력을 돋구어 보려고 해도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상대가 작살을 찔러올 때마다 노독행은 너무도 극렬한 통증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마치 아침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이 시야가 밝아지며

작살을 든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노독행은 깜짝 놀랐다.

작살을 든 채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던 그 사람은 바로

모용추수가 아닌가?

'추수...당신이...?'

노독행은 작살로 찔린 아픔보다도 더욱 심한 통증을 가슴으로

느껴야만 했다.

모용추수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특유의 애잔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었다. 그녀는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노독행은 혼몽중에도 그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녀의 얼굴은 점차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기

시작했다.

보드랍던 그녀의 뺨이 구레나룻이 무성한 털복숭이 뺨으로

변해가고, 오똑했던 콧날이 두툼한 사내의 콧등으로 바뀌었다.

하나 눈만은 변하지 않았다.

사내의 눈빛도 모용추수 만큼이나 애잔한 빛을 띄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사내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낮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노독행은 한차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사내는 다름아닌 방립동이었던 것이다.

'자네가...'

노독행이 무어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방립동은 희미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작살을 있는 힘껏 노독행의 옆구리에 틀어박았다.

그 순간 노독행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악...!"

그리고 노독행은 눈을 떴다.

*                   *                 *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허름하기 그지없는

천장이었다.

원래는 희고 깨끗했을 천장은 누렇게 색이 바랬고, 한쪽

구석에는 거미줄마저 쳐 있었다.

노독행은 물끄러미 거미줄쳐진 낡은 천장을 응시했다.

그의 머리위로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수염자국가득한 그 얼굴은 깊은 수심과 걱정을 담고 노독행을

응시하다가 그가 눈을 뜬 것을 알자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려냈다.

"깨어났군."

방립동이었다.

방립동의 얼굴은 조금 핼쑥해 보였다. 수염이 제법 자라나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눈가에 떠 있는

잔주름이 그렇게 보이게 한 것일까?

노독행은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나?"

갈라터져 잔뜩 쉬어버린 음성이었으나 방립동은 알아들었다.

방립동은 수염이 길게 자란 턱을 습관적으로 쓰다듬었다.

"삼일. 생각보다 좀 오래됐지?"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립동은 유심한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기분은 어떤가?"

"그저 그렇군."

"자네의 부상은 정말 심각했네. 치료하는데 의원이 아주 애를

먹더군.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했어."

그제서야 노독행은 자신의 몸이 하얀 붕대로 칭칭 동여매져

있다시피한 것을 깨달았다.

몸을 뒤척이자 옆구리에 아직도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방립동은 일어서려는 그를 제지했다.

"아직 몸을 일으켜서는 안되네. 의원이 앞으로 보름동안은

절대로 남과 싸우거나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네.

만일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지기라도 한다면 이번에는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고 해도 자네를 살릴 수 없을 거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더군."

노독행은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돌팔이야."

"뭐라고?"

"돌팔이라구.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방립동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 세상에서 신주화타(神州華陀) 조상심(曹傷心)을

돌팔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걸세."

신주화타 조상심이란 말에 노독행은 외눈을 번쩍거렸다.

조상심은 강호견문이 일천(日賤)한 노독행조차도 여러번

들어본 이름이었다.

알려지기로는 조상심은 백년 내 강호에 나타난 인물중 가장

뛰어난 신의(神醫)라고 했다. 제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도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완치될 수 있고, 죽을 병을 가진 사람도

일어설 수 있다고 했다.

하나 그는 종적이 일정치 않고 성격이 괴팍해서 좀처럼 남을

위해서 손을 쓰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마음에 흡족한 보수를 주기 전에는 절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신수무정(神手無情)'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그런 조상심이 어떻게 생면부지의 노독행을 위해서 치료를 해

주었을까?

방립동은 조금 심각한 눈으로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말은 농담이 아닐세. 조상심은 자네가 보름 이내에 무공을

사용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울거라고 했어. 그는 비록 성질이

편협되고 괴팍하지만 허튼 소리는 결코 하지 않는 성미일세. 내

말을 명심하게."

노독행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고 전신에 눈부신 백의를 걸친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얼굴이 유달리 길쭉하고 눈이 옆으로 쭉 찢어져 한 마리

독사를 연상케 했으나 음침하기 보다는 차갑고 무뚝뚝하게

느껴졌다.

방립동은 돌아보지 않아도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약(藥)은 다 조제했나?"

백의중년인은 차가운 눈으로 방립동의 등을 쏘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계산할 차례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카랑카랑한 음성이었다.

방립동은 별반 표정없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나가지."

그는 먼저 방밖으로 걸어나갔다.

백의중년인은 침상위에 누워 있는 노독행은 쳐다보지도 않고

방립동의 뒤를 따라 나갔다.

탁!

노독행이 보고 있는 동안에 방문은 무정하게 닫혀 버렸다.

방을 벗어난 방립동은 구석진 곳으로 가서 백의중년인을

돌아보았다.

백의중년인은 어느새 그의 뒤에 바짝 다가선 채로 독사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백의중년인이야말로

당금 무림에서 가장 괴팍하고 의술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신주화타 조상심이었다.

방립동은 불쑥 물었다.

"무얼 그리 빤히 바라보고 있나?"

조상심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방립동을 쳐다보며 얄팍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정신나간 작자가 도대체 어떤 상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방립동은 화내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내가 정신나간 사람으로 보이나?"

조상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하는 일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걸."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네. 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뿐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는 바보일세.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텅구리야."

방립동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야 예전부터 자네도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조상심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예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바보짓 하는 거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보수만 받으면 되니까."

방립동은 아무 말없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곱게 접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손수건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할 듯한 아련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방립동은 천천히 손수건을 풀었다.

네 겹으로 접은 손수건의 안에는 하나의 조그만 옥패(玉佩)가

있었다.

옥패는 어른의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에 은은한

비취빛을 뿌리고 있었다. 옥패의 중앙에는 봉황(鳳凰)의 그림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붉은 수실이 매달려 있었다.

방립동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봉황옥패를 쓰다듬고 있었다.

봉황옥패를 만지는 방립동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조상심의 시선은 봉황옥패가 나타난 순간부터 그것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봉황옥패를 볼 때 조상심의 눈빛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기이한 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조상심은 한동안 봉황옥패를

바라보고 있다가 방립동이 좀처럼 그것을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자 불쑥 소리쳤다.

"계산을 치루지 않을 셈인가?"

방립동은 물끄러미 봉황옥패를 내려보다가 느릿느릿 그것을

조상심에게 내밀었다.

조상심은 낚아채듯이 방립동의 손에서 봉황옥패를 움켜잡았다.

그때 방립동의 손끝이 가늘게 떨린 것을 본 것은 단지

조상심의 착각이었을까?

조상심은 막 봉황옥패를 자신의 품속으로 넣으려다 문득

방립동을 올려다 보았다.

방립동의 두 눈은 유현(幽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두 눈속에 담겨 있는 눈빛을 보자 조상심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지금이라도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면 파기해도 좋네.

난 만들어 놓은 약을 없애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방립동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없네."

조상심은 다시 물었다.

"자네....정말 후회하지 않는 거지?"

방립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심은 돌아서려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다시 방립동을

쳐다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자네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방립동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전에 알았네."

조상심은 갑자기 감정이 격해진 듯 음성이 급격히 높아졌다.

"그렇다면 저자가 그녀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나?"

".........."

"이 옥패가 자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네. 그녀와 결혼했을 때 주고 받은 하나뿐인

예물(禮物)이지. 자네가 목숨처럼 아끼는 것이란 말일세. 그런데

저자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아끼는 것을 버리려 한단 말인가?"

방립동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상심은 갈증이 난 듯 혀로 입술을 몇 번이고 축였다.

"나도 예전부터 그녀가 좋았지. 그런 여자를 보고 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가 아닌거야. 그래서 나도 이 옥패가 갖고

싶었어. 이 옥패는 그녀의 분신(分身)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난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네에게서 이 옥패를 빼앗고

싶었네. 하지만...하지만 이런 식으로 옥패를 가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

"자네는 정말 저자 때문에 이 옥패를 포기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네에게 이 옥패가 그 정도 값어치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조상심의 마지막 말은 거의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때 방립동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옥패는 내게도 소중해."

"그런데도...."

조상심이 무어라 소리치려 했으나 방립동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옥패는 지금의 내게 그녀를 이어주는 유일한 물건일세.

내가 그 옥패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자네도 모를걸세.

내겐 그 옥패가 생명이나 다름없다네."

이번에는 조상심이 입을 다물었다.

방립동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듯한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이토록 슬퍼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런데 말일세. 그는 내 친구란 말일세. 이 넓은 천하에서

오직 하나뿐인 내 친구란 말이야. 난 자네 말대로 멍청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지만 친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친구란

말일세. 적어도 옥패 보다는 소중한거야."

".......!"

"난 자네가 옥패를 얼마나 탐내고 있는지도 알고 있지. 자네는

내가 옥패를 준다고 하지 않았으면 결코 그를 위해 손을 쓰지

않았을 거야. 난 지금 기분이 좋다네. 정말이야. 정말 기분이

좋아. 친구를 위해 조그만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게 이렇게

기분좋을 수 없어. 난 평생 이런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거든."

방립동은 환하게 웃었다.

"자네 이해하겠나?"

조상심은 말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넨 바보일세. 언제고 반드시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거야."

방립동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조상심은 방립동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휭하니 몸을

돌렸다. 단순히 몸을 돌리기만 했는데도 그의 신형은 어느새

담을 넘어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약은 뒤뜰의 화로위에 있네. 하루에 두 번씩 복용하면

보름이면 완쾌될걸세..."

그의 마지막 말은 담장 너머 아득히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방립동은 그자리에 우뚝 선 채로 조상심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2

"먹게."

방립동은 둥글게 제조된 금빛 환약을 내밀었다.

노독행은 환약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방립동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방립동은 피식 웃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노독행은 불쑥 물었다.

"그자에게 무얼 주기로 했지?"

방립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거 아닐세. 원래부터 친분이 있어서 약간의 은자만으로

해결이 되었네."

노독행은 방립동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들은

소문으로는 조상심은 결코 돈 몇 푼에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독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물어도 방립동은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방립동이 그자에게 대가로 지불한 것이

무엇이던 그것은 조상심이 탐을 낼 정도로 귀중한 것이고,

방립동에게도 또한 귀중한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립동이 바른대로 말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방립동은 노독행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자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네. 친구를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라면 더한 일도 했을 거야."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방립동이 아니고 노독행이었다.

노독행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단순한 만큼 그는 은원(恩怨)이

분명했다.

빚을 졌으면 반드시 갚는다!

이것은 그의 철칙(鐵則)이었다.

하지만...다른 빚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있겠지만

우정(友情)의 빚은...? 그것도 갚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노독행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전에 그는 사랑을 느꼈고, 지금 그는 우정을 느꼈다.

이제는 그도 남들처럼 슬퍼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소유하게 된 것일까?

방립동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약을 먹게. 어쨌든 자네는 약을 먹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구."

노독행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약을 받아 들었다.

금색 환약은 아직도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 화로에서 꺼낸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 온기는 방립동의 손에서 전해진 것일까?

노독행은 환약을 삼켰다.

환약은 침에 닿자 저절로 녹아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갔다. 후끈한 것이 뱃속부터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단지 한알만 복용했는데도 노독행의 안색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백지장처럼 핼쑥하고 핏기가 없던 얼굴에 엷으나마 혈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방립동은 노독행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조상심의 약을 조제하는 솜씨는 정말 천하제일이지. 상처를

치료하고 침을 놓는 솜씨도 뛰어나지만 그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일은 약을 만드는 것일세. 특히 이 대라금환(大羅金丸)은 그가

오랫동안 연구하여 개발한 것으로 내상을 고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최고의 효과를 가지고 있네."

방립동은 습관적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예전에 이 금환의 신세를 진 적이 있지.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이 금환을 열흘 쯤 복용하고 완쾌되었다네."

노독행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되었었나?"

방립동의 수염자국 가득한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와 비무(比武)를 했었지. 상대가 너무 강했네."

방립동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임이 분명했다. 하나

노독행이 관심있는 눈으로 쳐다보자 방립동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알고 싶나?"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정말 호되게 당했지. 죽지 않은게 기적이었을

정도니까. 가끔은 그때 죽었으면 지금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더군."

방립동은 가슴팍 부근의 옷자락을 열었다.

"벌써 오래된 일인데 지금도 그때의 흉터가 남아 있네. 보게."

방립동의 가슴에는 남성의 매력을 상징하는 듯한 털이 수북히

나 있었다. 그 가슴의 한 복판에 기이한 문양의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처음 노독행은 그것이 매화문양의 문신(紋身)인줄 알았다.

마치 누군가가 정교하게 새겨놓은 듯 다섯 개의 꽃송이가 달린

매화문양!

하나 안광을 돋구어서야 그것이 매화문양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가락 자국임을 알았다.

그 순간 노독행의 안색은 가볍게 변했다.

마치 정교한 도장을 새긴 듯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선명하게

남겨 놓은 매화모양의 장인(掌印)!

그것은 가히 인간이 펼쳐낼 수 있는 수공(手功)의 극치이자

장력(掌力)의 최고봉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대체 누가 이와 같은 장인을 인간의 몸에 새겨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노독행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상대가 누구였나?"

방립동은 매화문양의 장인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때의 방립동의 얼굴은 아주 차분했고,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립동은 한동안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다가 천천히

한숨을 불어내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장록번. 그자는 장록번이라고 하지."

장록번!

이 이름을 듣는 순간 노독행의 외눈에서는 번갯불을

무색케하는 섬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장록번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무림의

제일기재(第一奇才)였다.

그는 젊은 층의 우상일 뿐 아니라, 천년소림(千年少林)의

영광을 한 몸에 짊어진 소림사상(少林史上) 제일가는

고수(高手)였다.

그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이제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름이 되었다.

그가 출도한 지는 거의 십 년이 지났으나 그동안 그는 마땅한

적수를 찾지 못했다. 십년동안 그는 철저한 무적(無敵)이었으며,

백년 내 무림에서 무신(武神)으로 존경받는 동방유아와 함께

가장 강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 무적수사 장록번이 방립동의 가슴에 매화문양의 장인을

남겨놓은 주인공인 것이다.

"칠 년 전인가...나는 그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승심(好勝心)을 못이겨 찾아갔었지. 그때만해도 나는 제법

무공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거든. 우리는 이십 여초를 싸웠는데

그동안 그는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았네. 그러다가 딱 한 번,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리더니 내 가슴을

찍어왔네."

방립동의 음성은 나직했고 전혀 떨림이 없었다.

하나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한층 더 음울한 빛을 띄고 있었다.

"평범한 초식같았는데 이상하게도 피할 수가 없었네. 무언가

강력한 번갯불에 가슴을 관통당하는 기분이었어. 그리고는

그만이었네."

방립동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깨어보니까 침상이더군. 나중에 말을 들으니 나는 오일동안을

꼬박 혼절(昏絶)해 있었다고 했네. 그때 대라금환을 먹지

않았다면 아마 살아나지 못했을 거야.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무공을 쓸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지."

방립동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도 그때 그가 사용한 무공이 무엇인지 모르겠네. 그렇게

무섭고 위력적인 손가락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거든."

그때 노독행이 짤막하게 말했다.

"그건 오뢰결인(五雷訣印)이야."

방립동은 흠칫하는 눈으로 노독행을 돌아보았다.

"오뢰결인?"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방립동은 한동안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가 그가 다른 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그런 무공은 처음 듣는데...자네는 그 무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노독행은 별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평소의 노독행이라면 자신이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천하의 누구라고 해도 그런 그의 입을

열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노독행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순전히 물어본 사람이 방립동이었기 때문이다.

"오뢰결인은 소림사(少林寺)에서 구결(口訣)로만 전해

내려오는 무공일세. 오백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만 은밀히 내려오는 무공이지."

오백 년동안 구결로만 전해 내려오는 무공!

방립동은 말만 들어도 흥미가 이끌리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구결로만 전해진단 말인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전해져 왔다면 누군가는 익혔을텐데...."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네. 아직까지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었지."

방립동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그 무공에 소림사에서 천년동안 전해 내려오는 모든

무공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

"천년의 정수라고?"

"그래.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손동작같지만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는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정교하며 무서운

무학의 이치가 담겨 있다고 하네. 그래서 소림의 내노라하는

기재들도 평생을 연구했건만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군."

방립동은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소림의 무학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무학(天下武學)의

원류(源流)였다.

그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끝이 없는 무예는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 없는 기재라 해도 평생을 걸려도 반에 반도 익힐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심원(沈遠)한 소림무학이 그 간단한 손동작 하나에

모두 포괄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 또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겪어 보지 않았는가?

단순히 다섯 손가락이 모여지기만 했는데도 그 순간 자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가공할 압박을 느꼈고, 그 손가락이

찍어 오는 순간 천지가 온통 자신을 향해 짓눌러오는 듯한

중압감에 도저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 위력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絶對的)인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독행은 결코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방립동은 한참동안 사색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자가 오백년동안 아무도 익히지 못했다는 그

오뢰결인을 익혔단 말인가?"

"그런 것 같아."

방립동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의 의문점을 물었다.

"한 번도 익힌 사람이 없다면서 자네는 어떻게 그자가 펼친

것이 오뢰결인이라는 것을 아는가?"

노독행은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외눈에서는 조금전과 같은 기이한 눈빛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나도 말로만 들었지. 오래전에."

방립동은 누구에게서 들었나하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때 노독행의 얼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만큼

진지하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매화모양의 작은 손도장을 보면 일단 오뢰결인인지

의심하라고 했지. 손도장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오뢰결인일

확률이 높고, 눈으로 보아서 매화문양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손도장이라면 그게 바로 오뢰결인이라고 했네."

"........!"

"그 손도장은 소림의 모든 무예가 융합한 정화(精華)이며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장공(掌功)이라고 했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무쌍류 무예와 자웅(雌雄)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무공이라고...."

노독행의 음성은 점차로 작아지더니 종내에는 방립동의 귀에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말을 끝으로 노독행은 천정을 응시한채로 끝없는 상념에

잠겨 들었다.

방립동은 한동안 노독행의 말을 음미하고 있다가 문득 어떤

것에 생각이 미치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두려운 듯 굳어진 얼굴로 노독행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자와...."

노독행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눈빛 또한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 그의 입이 열리며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 순간 방립동의

피는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대대로 무쌍류의 후예에게는 한 가지 의무가 있지. 그것은

오뢰결인을 익힌 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자를 꺾어야 한다는

거야."

노독행은 방립동을 돌아보며 웃었다.

"나는 반드시 장록번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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