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장 싸 우 고 싶 단 말 이 지
1
위지륵과 구양기는 노독행의 지척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위지륵이었다.
"네가 당대의 무쌍류냐?"
노독행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만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륵은 붉은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독행의 전신을
쭈욱 훑었다. 무시무시한 눈길이었으나 노독행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고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낸 채 웃고 있는 노독행의 모습은 마치 양떼에 둘러싸인 한
마리 늑대를 연상케했다.
위지륵은 한동안 노독행의 모습을 뚫어지게 주시하다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노부의
대(代)에서는 무쌍류를 볼 수 없을줄 알았는데...결국은
나타났군."
위지륵의 얼굴에 한 줄기 단호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쌍류는 결코 나타나서는 안되는 무공이다. 그것은 오직
피와 죽음의 살기로만 뭉친 저주받은 마예(魔藝)이기 때문이지.
오늘 너를 제거함으로서 두 번 다시 강호에 무쌍류가 나타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노독행은 웃으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들만으로 말인가?"
위지륵을 비롯한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이들만이라니?
이곳에 있는 군웅(群雄)들의 수는 무려 스물 여덟 명이었다.
그들중 절정고수가 아닌 자가 없고, 강북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개 방파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게다가
전설적인 마명을 떨치는 음양쌍마까지 가세했는데도 이자는
그들을 전혀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위지륵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혈광이 확연히 알아볼 수
있도록 진해졌다.
"정말 광오하구나. 아무리 무쌍류의 전인이라고 이토록
오만무도하다니...."
이제껏 말이 없이 있던 구양기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내가 뭐랬소? 저런 놈에게는 더 말할 필요없소. 해치웁시다."
구양기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우웅....!
마치 벌떼가 몰려오는 듯한 미약한 음성과 함께 그의 양
손에서 뼈골이 시릴듯한 한기(寒氣)가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구양기가 독보적인 현음마수를 시전한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타앗--!"
"죽어라!"
"희대의 살인마를 처단하자!"
노독행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수십 명의 고수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덮쳐 들었다.
개개인이 능히 천하를 오시(傲視)할 수 있는 초절정고수들이
수십 명이나 덮쳐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의 목표가 오직 단 한 사람이었으니...
제각기 허공을 날아 노독행을 향해 압축해 들어오는 고수들의
기세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하나 노독행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싸우고 싶단 말이지. 사양하지 않겠어."
그는 우선 자신의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는
방립동을 붙잡더니 십장여 밖으로 던져 버렸다.
"어어...?"
방립동은 영문도 모르고 노독행이 던진대로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쿵!
그가 미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싸움은 시작되었다.
무림사(武林史)에 기록될만한 이십팔(二十八) 대 일(一)의
처절무비한 결전이 드디어 막을 올린 것이다.
콰쾅!
"크아악!"
가장 먼저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진 사람은 의외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칠성도객중의 한 명인 복호도(伏虎刀)
엄무(嚴武)였다.
구양기가 덮쳐오는 순간에 노독행은 거의 오 장을 이동해서
중인들중 가장 뒤에 서 있던 엄무에게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의
이 동작은 완전히 의표를 찌른 것이어서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던
엄무는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철산벽의 가공할 공세에
의해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아마 엄무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야 진정한 싸움이란 단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피비린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놈!"
엄무의 처참한 죽음을 본 칠성도객들이 살기흉흉한 빛을
뿌리며 미친 듯이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파팍!
수십 가닥의 빗발 같은 도기가 노독행의 전신을 금시라도
짓이길 듯 몰아쳐왔다.
노독행은 서슴없이 그 도기속으로 뛰어들었다.
팟!
도기중 한 가닥이 그의 왼쪽 소매자락을 찢고 지나갔다.
그 순간 노독행의 왼손은 자신의 소매자락을 찢고 지나간 도의
도신(刀身)을 덥석 움켜잡고 있었다.
칼의 주인은 칠성도객중의 셋째인 항마도(降魔刀)
비위(費衛)였다.
비위는 그야말로 간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여섯 개의 칼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덮쳐 들고
있는 와중에 맨손으로 그중 하나의 칼날을 움켜쥐었다는 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나 놀람도 잠시였다.
땅!
노독행의 손에 잡힌 항마도가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가며 비위는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큭!"
부러진 항마도의 도편(刀片)이 비위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던
것이다. 비위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숙이는 순간
노독행의 오른발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날아들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항마도가
채 부러지기도 전에 노독행은 비위가 몸을 숙이는 위치를 향해
발길질을 해댔던 것이다.
비위는 이렇게 빠르고 악독한 수법이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쾅!
그는 정통으로 노독행의 오른발에 아래턱을 강타당하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실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크아악...!"
그의 얼굴은 코밑으로는 이미 형체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두 개의 칼날이 노독행의 양쪽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동시에 그의 뒤통수와 등을 향해 두 개의 칼이
날아왔다.
하나 가장 무서운 살수는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정면.
쾌액!
하나의 시퍼런 칼이 그의 미간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칼이 날아오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칼은 보이지 않고 단지
하나의 푸른 광채만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이것이야말로 도법(刀法)의 최고경지중 하나인
신도합일(神刀合一)이었다.
신도합일의 주인은 바로 칠성도객중 우두머리인 전광도
매환이었다. 매환은 순식간에 두 명의 형제들이 처참한 몰골로
쓰러지자 전력을 다해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았던 비장의 절학을
사용했던 것이다.
앞과 옆, 그리고 뒤!
각기 사방(四方)에서 날아드는 다섯 개의 칼날은 금시라도
노독행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양 옆구리와 등뒤를 노리고 들어오는 네 개의 칼날은
무시한 채 두 손을 곧장 앞으로 내밀었다.
콱!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가공스런 기세로 날아들던 매환의 전광도가 노독행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뻗은 듯한 두 개의 손바닥 사이에 그대로
끼어버린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매환
자신이었다.
"시....신도합일을 맨손으로 막아내다니..."
그는 자신이 수십 년간 고심참담하여 익힌 신도합일을 상대가
맨손으로 가볍게 잡아버리자 상대의 손에서 빨리 칼을 빼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순간에도 네 개의 칼날은 노독행의 옆구리와 등뒤를 무서운
속도로 압축해 들어왔다. 막 네 개의 칼이 그의 몸을 꼬치처럼
꿰뚫어 버리려는 찰나,
빙글!
노독행은 매환의 칼을 양 손바닥으로 잡은 채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그것은 법륜구전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강력한 힘을 지닌
'풍차급전(風車急轉)'이었다.
매환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칼과 함께 빙글
회전하며 방금전까지 노독행이 서 있던 위치로 옮겨졌다.
"아...안돼...!"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들은 매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파팍!
시뻘건 선혈이 하늘높이 솟구치면서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아악!"
매환은 전신에 네 개의 칼날이 꽂힌 채 피를 분수처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네 명의 칠성도객들은 분명히 성공할 줄 알았던 자신들의
공격이 오히려 매환을 쓰러뜨리자 경악과 당혹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순간에 노독행의 몸이 허공을 그림자처럼 날아 그들에게
덮쳐 들었다.
파파팍!
네 개의 팔과 다리가 허공에 수십 개의 환영을 그려냈다. 네
명의 칠성도객들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노독행의 공세가 조금 더 빨랐다.
콰쾅!
두 명의 도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남은 두 명의 도객마저 그대로 비명횡사하려는 순간,
쐐애액!
노독행의 뒷통수를 향해 다섯 개의 혈환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때마침 삼환교의 천지쌍환중 천환(天環)
양구응(揚九應)이 혈환을 날렸던 것이다.
때를 놓칠세라 지환 궁악과 패환 지천붕도 거의 동시에 각기
세 개씩의 비환(飛環)을 발사했다.
장내가 온통 십여 줄기의 광채에 휘감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노독행은 두 명의 도객을 향해 달려들던 몸을 돌려 허공에서
이 장쯤 옆으로 이동했다.
이 신기(神技)에 가까운 몸놀림에 천지쌍환과 지천붕이 입을
딱 벌렸다.
한데 노독행의 몸이 허공에서 채 내려서기도 전,
촤르르....
무언가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미약한 음향이 노독행의 귓전에
들어왔다. 청각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노독행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을 미미하기 그지없는 음향이었다.
노독행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집었다. 찰나,
파앗!
무언가 시커먼 갈쿠리 같은 것이 그의 앞가슴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조금만 동작이 늦었어도 그대로 가슴이 관통당하고
말았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것이 하삭 신응문의 독보적인 병기인 응조비삭임을 채
깨닫기도 전에 다시 두 가닥의 희미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노독행은 다시 두 번이나 몸을 허공에서 뒤집었다.
팟! 팟!
두 개의 쇠사슬이 달린 응조비삭이 무서운 속도로 그의 몸을
스쳐갔다. 그중 한 개는 노독행의 옆구리 옷자락을 길게
찢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시 네 번째의 응조비삭이 날아들었다.
이번의 것은 그야말로 속도와 방위가 절묘했다.
노독행이 두 번의 공중제비를 해서 막 두 개의 응조비삭을
간신히 피하고 허공에서 숨을 돌리려는 순간에 네번째
응조비삭은 어느새 그의 목덜미에서 한치 떨어진 곳까지 육박해
오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신응문의 최고고수인 하삭사응이 천하에
자랑하는 사향탈혼(四向奪魂)의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하삭사응의 이 번개 같은
연환공격에 영문도 모르고 쓰러졌는지 모른다.
누가 보기에도 노독행의 목은 응조비삭에 그대로 꿰뚫리고 말
것 같았다.
"앗?"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방립동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노독행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팟!
섬광이 사라졌다.
의당 피가 뿜어나오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야 하건만
주위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노독행의 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커다랗게 구멍이 뚫릴 줄 알았던 노독행의 목은 손톱만한
상처도 없이 매끄러웠다.
그리고 목의 바로 앞에 노독행의 왼손이 올라가 있었다.
장난처럼 목을 가리고 세워져 있는 손.
매의 발톱같이 날카로운 응조비삭의 갈고리는 그 손바닥에
반쯤 박혀 있었다.
2
뚝...뚝....
손바닥을 타고 한 줄기 선혈이 떨어져 내렸다.
노독행은 자신의 손바닥을 파고 든 갈고리는 쳐다 보지도 않은
채 갈고리의 주인인 하삭사응중의 우두머리, 대응(大鷹)
신조력(申朝靂)을 쳐다 보면서 웃었다.
"정말 멋진 솜씨였어. 이 빚은 그대로 갚아 주지."
신조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향해 짓고 있는 미소와 음성이 마치 피에 굶주린 한
마리 늑대의 으르렁소리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노독행은 천천히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바닥 중앙에 박혀 있던
갈고리를 뽑아들었다.
팟!
갈고리가 뽑히자 시뻘건 구멍이 뚫리며 핏물이 솟구쳐
나왔으나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신조력은 퍼뜩 정신이 들어 노독행의 손에 들린 응조비삭을
회수하려 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노독행이 응조비삭의 끝에
달린 갈고리를 오른손으로 움켜쥔 후였다.
신조력은 있는 힘껏 응조비삭을 잡아 당겼으나 노독행의 손에
들린 응조비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독행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피에 젖은 왼손으로
갈고리에 달려있는 응조비삭의 은빛 쇠사슬을 움켜잡았다.
그런다음 힘껏 양손을 벌렸다.
뚝!
어이없게도 단단하기로 천하에서 몇 손가락안에 꼽힌다는
빙정철모(氷精鐵母)로 만든 응조비삭의 쇠사슬이 노독행의
양손에 의해 너무도 맥없이 끊어져 버렸다.
신조력의 몸이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순간 노독행은 끊어진 응조비삭의 줄을 힘껏 앞으로 잡아
당겼다. 신조력의 몸이 주르르 그의 앞으로 딸려왔다.
"대형! 조심하십시오!"
하삭사응중의 다른 세 사람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비호같이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쾌액!
그들이 일제히 떨쳐낸 세 줄기의 응조비삭이 기이한 호선을
그리며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그들은 비록 빨랐으나 노독행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노독행의 오른손이 슬쩍 움직이며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응조비삭에서 끊어낸 갈고리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악!"
신조력은 목덜미를 부여잡은 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갈고리가 깊숙히 박혀 있었다. 갈고리가
어찌나 깊히 박혔던지 목의 반대쪽까지 갈고리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이....이 악독한 놈!"
"죽어랏! 악마 같은 놈!"
하삭사응중의 남은 세 사람이 이를 부드득갈며 노독행을 향해
날린 응조비삭에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핑! 핑!
응조비삭이 강철기둥같이 팽팽해지며 갈고리의 날아들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노독행은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응조비삭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응조비삭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팟!
하나의 응조비삭이 그의 왼쪽 어깨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독행은 계속 앞으로 돌진했다.
다시 하나의 응조비삭이 앞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노독행은
달리던 몸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옆으로 슬쩍 몸을 비틀었다.
찌익!
가슴 부근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며 맨살이 드러났다.
노독행이 비틀었던 몸을 똑바로 하는 순간에 세번째
응조비삭이 코앞으로 바짝 쏘아져 들어왔다. 노독행은 오른팔을
번쩍 쳐들었다.
땅!
금시라도 노독행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릴 듯
날아들던 응조비삭의 갈고리가 노독행의 오른팔과 부딪치는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튕겨져 나갔다. 노독행의 오른쪽 팔뚝에
매어져 있던 월영도의 칼집에 격중되었던 것이다.
하나 영문을 몰랐던 하삭삼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그들의 중앙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파파팍!
노독행의 양쪽 팔꿈치가 죽음의 수레바퀴마냥 회전하며 그들을
그대로 휩쓸어 버렸다. 무쌍류의 일곱 가지 주법( 法)중에서도
가장 살인적인 위력을 지닌 철선반주(鐵旋盤 )였다.
콰쾅!
벼락이 치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오며 세 가닥의 처절한
비명이 주위를 뒤흔들어 놓았다.
"크아악!"
방금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살아 숨쉬던 하삭삼응은
눈깜짝할 새 세 구의 시뻘건 핏덩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이...놈..!"
이 광경을 본 광풍회의 혁련삼형제를 비롯한 중인들이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지르며 노독행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이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가 멀리 떨어진 방립동의 귀에도 똑똑이
들릴 정도였다.
빗발치는 듯한 검광(劍光)과 환영(環影), 그리고 도풍(刀風)이
노독행의 전신으로 우박처럼 퍼부어졌다.
그 순간 노독행은 월영도를 뽑아 들었다.
위지륵의 나이는 올해로 정확하게 여든 아홉 살이었다.
구양기보다도 두 살이 더 많았고, 현재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가 무림에서
활동할 때 함께 뛰어던 고수들은 이미 대부분이 저 세상으로
갔거나 은거한 상태였다.
그가 처음 강호에 출도했을 때 그의 나이 열 여덟이었다.
그로부터 칠십여 년 동안 그는 수많은 고수들과 싸웠고, 수많은
격전을 보아왔다.
하나 맹세코 말하건데, 오늘처럼 처절하고 끔찍한
혈투(血鬪)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도살(屠殺)이었다.
처음 자신을 비롯해서 스물 여덟 명의 절정고수들이 한 사람을
협공하기로 했을 때 위지륵은 솔직히 가슴 한 구석에 일말의
수치심이 있었다.
하나 상대가 전설로만 알려졌던 무쌍류의 후예이고,
강북제일의 집단인 천상회를 단신으로 무너뜨린 인물이라는
것으로 한가닥 위안을 삼았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는 상대가
제아무리 가공할 고수라 할지라도 결코 스물 여덟 명의 고수들의
합공(合攻)을 견디지는 못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확신이 너무도 무참하게 깨어지고 있지 않은가?
능히 한 지방의 패주(覇主)가 될 수 있는 인물들로만 이루어진
스물 여덟 명의 절정고수들이 벌써 반 이상이나 자신들이 흘린
피바다속에 누워 있었다.
콰쾅!
"크아악!"
그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혈령방의 구살중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가슴이 박살난 채 피떡이 되어 허공을 날아갔다.
그 두 사람외에도 혈령구살중 네 명이 이미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비단 혈령구살 뿐만이 아니었다.
제일 처음에 거의 몰살당한 칠성도객을 비롯하여 신응문의
최고고수들인 하삭사응과 삼환교의 천지쌍환, 그리고 광풍회의
혁련삼형제중 막내인 파풍검 혁련광(赫連光)이 그자의 악마 같은
손에 한줌 고혼(孤魂)이 되어 버렸다.
실로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칠성도문과 신응문, 삼환교, 광풍회, 그리고 혈령방은
천상회가 없어진 지금 강북에서는 가장 유력한 방파들이었다. 그
방파들의 최고고수들이 모두 모여있건만 단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위지륵은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은 그야말로 악몽(惡夢)이었다.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별로 크지 않은 몸집을 지닌 그
사나이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장내에는 시체가 한 구씩
늘어갔다.
그 사나이의 입가에 매달려 있는 흐릿한 미소와 하나뿐인
눈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은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 사나이도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수십 개나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나이의 몸은 조금도 느려지거나 완만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공격을 당했을 때 보다도 더욱 민첩하고
강렬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는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
한치의 허점이라도 발견하면 무섭게 파고드는 냉철한 동작!
그리고 일단 손을 쓰면 절대로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 무자비한
솜씨!
그것은 실로 무공을 익힌 무인(武人)들이라면 누구나가
꿈꿔왔던 완벽한 모습이었다.
하나 막연히 마음속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런 광경을
실제로 보게되자 그것은 가히 '공포(恐怖)'라는 한마디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위지륵은 평생 처음으로 상대에 대한 공포심을 느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이 누구를 두려워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였기에 자신이 공포심을 느낀 것에 대한 충격은
누구보다도 컸다. 그리고 일단 공포심을 느끼게 되자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내가 저 놈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이제 겨우 강호에 발을
내디딘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풋내기를? 게다가 한쪽 눈도 없는
애꾸를....그럴리 없다!'
위지륵은 아무리 부인하려고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공포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위지륵은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래...두렵다고 하자. 하지만 저 놈은 혼자다! 혼자로는
도저히 우리들을 당해낼 수 없다. 제 아무리 날고 설친다고 해도
한 손으로는 열 주먹을 당해낼 수 없는 법이다!'
위지륵은 마음속으로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그때 다시 그의 눈속으로 칠성도객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절정도(絶頂刀) 하충(河沖)의 머리가 상대의 무쇠 같은
주먹에 정통으로 강타당하는 광경이 들어왔다.
파아아....
비명도 없었다.
하충은 머리통이 완전히 박살난 채 몸뚱아리만 비칠거리며 서
있다가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위지륵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자신의 머리통이 박살난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저 놈을 쓰러뜨릴 수 없다. 저 악마 같은 놈을...'
위지륵의 눈에는 노독행이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위지륵은 벌겋게 핏발선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미 장내에는 몇 사람 남아 있지 않았다.
칠성도객과 하삭사응은 이미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몰살해
버렸고, 혈령구살도 셋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들외에는 오직 삼환교의 교주인 패환 지천붕과 추풍검
혁련평(赫連平), 질풍검 혁련일독(赫連一獨), 그리고 음마
구양기와 자신뿐이었다.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스물 여덟명중에서 스무 명이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남은 인물들은 사력(死力)을 다해 버티고 있으나 위지륵이
보기에는 그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된다...이대로는...!'
문득 초조와 불안에 가득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위지륵의 시야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방립동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순간 위지륵의 눈에서 번쩍하는 신광이 피어올랐다.
'저 놈은....!'
위지륵의 시선은 방립동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방립동은 위지륵이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장내의 격전을 주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위지륵은 살기어린 눈으로 방립동을 바라본 채 한걸음
한걸음씩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3
노독행은 전신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피중 반은 남들이 흘린 것이고, 나머지 반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런만큼 그의 몸도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조금씩 아물고 있던 상처들이 대부분 다시 터져 버렸고,
새로운 상처들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왼쪽
옆구리와 오른쪽 손등의 상처가 심각했다.
왼쪽 갈비뼈 세 개가 모두 부러져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심각한
통증이 뒤따랐고, 오른쪽 손등은 칼에 베어져 거의 뼈가 드러나
있었다. 때문에 월영도를 잡은 손의 힘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서
월영도를 놓칠 뻔한 적도 여러차례 있었다.
그런데도 노독행은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의 몸 어딘가에 용암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활화산(活火山)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쾌액!
혁련삼형제중 첫째인 질풍검 혁련일독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벼락 같은 삼검(三劍)을 찔러왔다. 가히 질풍검이란 별호에
어울릴만한 빠르고 무서운 검법이었다.
혁련일독은 조금전에 막내인 혁련광이 노독행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죽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인지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오직 노독행을 쓰러뜨리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그의 검은 더한층 악랄하고 매서운 위력을
담고 있었다.
노독행은 일단 좌측으로 두걸음 이동하여 혁련일독의 살인적인
검세를 피했다.
그때 다시 그쪽에서 혈령구살중의 살아남은 세 사람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각기 혈도살(血刀煞) 맹소(孟燒), 금창살(金槍煞)
낙구(洛龜), 추혼살(追魂煞) 최학(崔壑)이라고 했다. 그중
최학은 이미 조금전에 노독행의 월영도에 이마를 스쳐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투성이인 채로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인 채 달려드는 삼살의
모습은 흉신악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노독행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그들 사이로 뛰어들며
월영도를 휘두르려 했다.
그때 문득 노독행은 위지륵이 방립동을 향해 다가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노독행의 하나뿐인 외눈에서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칠만큼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는 삼살의 공세는
무시한 채 그대로 몸을 길게 뽑아 올려 위지륵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그의 앞으로 하나의 창백한 손이 날아들었다.
고오오...
손이 날라오는 위세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위의 공기가 마구
요동을 치며 소용돌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맹렬한 속도로 노독행의 전신을 짓누를 듯
다가왔다.
그것이야 말로 음마 구양기가 천하에 자랑하는 현음마수였던
것이다.
앞에는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는 현음마수, 그리고 뒤에는
삼살의 독기어린 맹렬한 공세!
평소의 노독행이라면 비록 삼살과 구양기의 공격이 제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어렵지 않게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위지륵은 이미 방립동의 바로 뒤까지 다가가서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위지륵의 오른손에서 붉은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포스런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태양마장을 끌어올린게 분명했다. 노독행이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방립동은 위지륵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지 몰랐다.
그 순간 노독행은 마음을 결정했다.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월영도를 그대로 위지륵을 향해 집어
던짐과 동시에 왼손으로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현음마수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등뒤에서 다가오는 삼살의 공세는 무시해
버렸다.
꽝!
벼락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구양기의 몸이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구양기의 코와 입으로는 시커먼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방립동을 향해 다가서던 위지륵은 막 오른손을 휘두르려는
순간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는 방립동을 향해 휘두르려던 태양마장을 그쪽을 향해
갈겨댔다.
콱!
태양마장의 가공할 기세가 구름처럼 일어났으나 그 기운은
너무도 간단하게 태양마장을 뚫고 돌진해 들어왔다. 그리고
위지륵은 오른손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크윽!
월영도는 그의 오른손 손바닥을 그대로 관통하여 반대쪽으로
뚫고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위지륵의 오른손은
걸레조각처럼 변해 버렸다.
음양쌍마가 단 한 순간에 모두 격퇴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 노독행 또한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음양쌍마를 물리치느라 거의 무방비상태인 그의 뒷등에 삼살의
공세가 그대로 격중한 것이다.
파파팍!
노독행의 등 뒤 옷자락이 누더기처럼 터져 나가며 시뻘건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혈도살 맹소의 칼이 그의 등을
종횡(縱橫)으로 훑고 지나간 것이다.
수십 개의 칼자국이 그어진 노독행의 등판은 마치 핏물로 만든
바둑판을 연상케 했다.
그와 함께 노독행의 왼쪽 어깨뼈는 최학의
추혼귀수(追魂鬼手)에 의해 반쯤 부서져 버렸다.
하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세 번째 공격이었다. 낙구의
금창(金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노독행의 옆구리에 그대로
틀어 박혀 버렸다.
노독행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오른발을 축으로하여 맹렬하게
그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무쌍류 십대절학중의 하나인 대윤회의 공세가 질풍처럼 삼살을
휩쓸어 버렸다.
삼살은 설마 노독행이 이토록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몸을
움직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던 터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콰쾅!
북치는 듯한 음향이 연거푸 터지며 합창하는 듯한 세 가닥의
비명이 장내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크아아악!"
사방으로 이리저리 날아가는 삼살의 모습은 이미 하나의
시뻘건 혈구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강력한 공격에 당했는지
그들중 제대로 형상을 유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중앙에 서 있는 노독행에게로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노독행은 등판이 너덜너덜해지고, 왼쪽 어깨뼈가 부러져 몸이
이상하게 기울어지고, 오른쪽 옆구리에 금창이 꽂힌 채로 몸을
흔들거리며 서 있었다.
끊임없이 흔들거리는 노독행의 온몸은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하여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이제 끝났다!'
그것은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제는 제 아무리 냉혈무정이라 해도 쓰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 석달 동안에 당금 무림을 완전히 공포와 경악의
도가니속으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살성 냉혈무정은 드디어
이곳에서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저런 상처를 입고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아직도 다섯 명의 절정고수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이제야 말로 강호무림에 무쌍류의 후예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냉혈무정의 숨통을 끊음으로서 그 처절무비한
악마의 무예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스슥...
한 사람이 느릿느릿 노독행을 향해 다가왔다.
거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스러진 오른손을 부여잡은
채로 다가오는 그 인영은 위지륵이었다. 위지륵의 주름지고 땀에
절은 얼굴에는 한 줄기 결연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이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아야 한다!'
그의 번뜩이는 두 눈에서는 엄청난 살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구양기도 앞가슴을 온통 피로 물들인 채로 노독행을
향해 다가왔다.
혁련일독과 혁련평, 삼환교의 유일한 생존자인 지천붕도 두
눈에 살광을 내뿜으며 노독행을 향해 걸음을 옮겨왔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로 장내의 공기는 다시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때였다.
끊임없이 흔들거리며 금시라도 바닥에 쓰러질 듯 하던
노독행의 몸이 흔들림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인들의 시선은 홀린 듯 천천히 움직여지는 노독행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누가 지시라도 한 듯 일제히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노독행의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독행의 오른손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들어올려지더니
마침내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에 박혀 있는 금창의 손잡이에 닿게
되었다. 금창의 손잡이를 잡은 노독행의 손에 불끈 힘줄이
불거지더니 이내 금창을 잡아 뽑기 시작했다.
스르륵!
금창이 살을 가르고 나오는 음향이 조용한 주위에 울려퍼졌다.
그 음향을 듣자 중인들은 왠지 모를 오싹함에 전신을 흠칫
떨었다.
스륵...스륵!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음향이 계속 들려오며 마침내
노독행의 옆구리에 깊숙히 박혀 있던 금창이 전부 뽑혀 나왔다.
거의 한 뼘이 넘게 박혀 있던 금창은 노독행의 몸에서
묻어나오는 피로 시뻘건 혈창(血槍)이 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그 금창을 오른손에 잡은 채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피와 땀에 절어 잔뜩 헝클어진 머리가 들어올려지며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노독행의 외눈이 드러났다. 이어
핏물이 묻어 있는 코와 홀쭉한 뺨...그리고 갈라터진 입술...
그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를 보는 순간 중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갈라진 입술이 살짝 열리며 들려오는 음성 하나....
"아직 끝나지 않았어...."
동시에 노독행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은 노독행에게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위지륵이었다. 위지륵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노독행을 향해 왼손을 휘두르려다 미처 왼손을 반도 내뻗지
못하고 노독행의 오른손에 쥐어진 금창에 목의 중앙이 산적처럼
궤뚫리고 말았다.
노독행은 금창을 위지륵의 목에 꽂은 것으로도 모자라는지
왼쪽 팔꿈치로 그의 관자놀이를 산산히 부수어 버렸다.
파아아...
위지륵의 백발이 성성한 머리통은 형체도 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이...."
구양기가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이를 부드득 갈며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구양기의 현음마수가 막 노독행의 등판에 작렬하려는 찰나,
노독행의 몸이 위지륵을 사이에 두고 빠르게 회전했다.
쾅!
구양기의 현음마수는 한치의 착오도 없이 위지륵의 가슴을
강타해 버렸다. 구양기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여 급히 손을
빼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
구양기는 무언가 화끈한 것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여 등뒤로
뚫고 나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 보았다.
무언가 시뻘건 것이 위지륵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자신의
가슴팍을 궤뚫어 버린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시뻘건 것이
노독행의 오른팔뚝이라는 것을 구양기가 깨달은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온 그 손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내장을 비롯한 온몸의 내부가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다시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크아악!"
구양기가 인간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전신을 격렬하게 뒤틀다가 숨이 끊어진 것은 다시 그로부터 숨
한 번 내쉴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악마 같은 놈...!"
노독행이 구양기의 가슴에 박혀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뽑았을
때 그의 등뒤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노독행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리며 양쪽의 팔꿈치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노독행의 등을 찔러오던 혁련평의
머리가 수평으로 휘두르는 노독행의 팔꿈치에 그대로 걸려
버렸다.
꽝!
혁련평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십 여장이나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날아갈 때는 분명히 정상적인 사람이었으나 바닥에
닿은 것은 머리가 없는 몸뚱아리 뿐이었다.
"둘째야!"
혁련일독이 절규하듯 부르짖으며 앞뒤를 가리지 않고 노독행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노독행도 피하지 않고 그에게 맞부딪혀 갔다.
콱!
혁련일독이 내찌른 장검이 노독행의 몸을 관통해 등뒤로 삐져
나왔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노독행은 혁련일독의 장검을 오른쪽 옆구리로 잡아 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그는 왼손으로 혁련일독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꺼억!"
혁련일독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혁련일독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노독행은 꿈쩍도 하지 않고 혁련일독의 목을 움켜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뿌드득!
목뼈가 부러지는 괴이한 음향과 함께 혁련일독의 얼굴이
푸르뎅뎅해지며 딱딱하게 굳은 혓바닥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끄으으..."
혁련일독의 얼굴은 푸른 색에서 점점 검은 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때 시퍼런 섬광 하나가 노독행의 뒷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보다 못한 지천붕이 노독행을 향해서 패환을 던졌던 것이다.
노독행은 손아귀에 혁련일독의 목을 쥔 채로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팍!
노독행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패환은 혁련일독의 뒷통수에
깊숙히 박혔다.
혁련일독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축 늘어지려는
순간에 노독행은 그 몸을 지천붕을 향해 집어 던졌다.
지천붕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옆으로 피했다.
그때는 이미 노독행은 삼 장의 허공을 가로질러 지천붕의
코앞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자....잠깐...."
사색이 된 지천붕이 손을 내저으며 무어라고 소리쳤다.
"하...할말이 있소...!"
하나 그가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노독행의 주먹이 그의
코를 사정없이 강타해 버렸다.
쾅!
"큭!"
지천붕은 콧등이 움푹 꺼진 채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노독행은 바짝 그의 가슴앞으로 뛰어들며 다시 오른주먹을
휘둘렀다.
지천붕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우...우리는 단지 지시를 받았을 뿐이오...믿어 주시오!"
노독행의 주먹은 정확하게 지천붕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우두둑!
지천붕의 왼쪽 갈비뼈가 모두 부러지며 지천붕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내려왔다.
"쿠욱....!"
지천붕의 코와 입으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지천붕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으로 숨조차 내쉬기 어려웠으나
다시 입을 열었다.
"우...우리를 지시한 사람을 아..알려 주겠소...그..그러니
제발..."
노독행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지천붕의 눈가에 공포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저...정말이오. 그...자는..."
노독행은 아무 말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쾅!
지천붕의 반대쪽 갈비뼈마저 모두 부러져 나갔다.
지천붕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린 채 학질걸린
사람처럼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벌려진 입 사이로 부러진
이빨과 시커먼 핏물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노독행은 다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비...빌어먹을...이런게 아니었는데...."
지천붕이 몸을 덜덜 떨며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노독행은
몸을 숙였다가 일어서며 왼손으로 지천붕의 아래턱을 맹렬하게
가격했다.
콰아아....
지천붕은 마치 작살에 꿰뚫린 사람처럼 허공으로 이 장가량을
붕 떠올랐다. 그의 몸이 다시 바닥에 내려섰을 때는 이미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구는 지천붕의 시신은
무림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처절한 결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노독행은 마지막 주먹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
분명했다.
철탑같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몸이 한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코와 입, 그리고 귀에서도 시커먼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에게로 다가왔다.
노독행은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팔꿈치를 휘두르려 했다.
"독행. 날세."
낮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노독행은 휘두르려던 팔꿈치를 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립동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자네 정말 대단하군."
방립동의 얼굴은 아직도 조금전에 보았던 끔찍하고 처절한
장면의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노독행은 피에 절은 얼굴로 멀거니 그를 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웃었다.
"흐흐흐..."
상처입은 늑대의 울부짖음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의 여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노독행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독행!"
방립동의 놀람에 찬 외침소리를 아련한 귓전으로 들으며
노독행은 정신을 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