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장 내 버 려 두 는 거 야
1
분하(汾河)의 강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노독행은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분하의 강변에 우뚝 서
있었다.
발자국은 강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조향령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분하의 물결을 따라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독행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모래사장위에 배가 정박해
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흔들리는 물결...넘실거리는 파도...파란 비취빛 하늘...
그야말로 나그네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풍경이었다.
하나 지금 노독행의 눈에는 어느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조향령을 놓쳤다...!
결국은 놓치고 말았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노독행은 한동안 우두커니 그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배가
정박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모래사장의
움푹 파인 부분을 내려다 보았다.
조교연은 그의 뒤에서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는 노독행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대체 그는 무엇을 쫏고 있는 것일까?
그가 쫏는 것이 무엇이든 저 강물을 따라 종적을 감추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추적을 포기할 것인가?
그때 갑자기 노독행이 몸을 돌려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노독행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이 근처에서 배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조교연은 마음 한 구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노독행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 일단
시작한 이상 그는 결코 멈출 줄을 모를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조교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 일대에서 배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가 누구지?"
조교연은 짤막하게 말했다.
"용객(龍客) 사중익(史仲翼)."
* * *
사중익은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다.
날도 화창했고 바람도 잔잔해서 배를 타기에 아주 적당했을 뿐
아니라, 그날이 마침 그의 마흔 두번째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커다란 잉어라도 몇 마리 잡아 저녁에 친한 친구들을
불러 조촐한 술상을 마련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자 사중익은 해가
빨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한데 그가 막 자신의 배를 묶어둔 곳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앞으로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사중익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냉막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사중익?"
사중익은 움찔 놀라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나의 무서운 외눈이 그의 얼굴을 빤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 번뜩거리는 외눈을 보자 사중익은 갑자기 전신이 차가운
빙굴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눈빛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그렇소만..."
사중익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외눈의 사나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따라와."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사중익은 결코 겁장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분하 일대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수공(水功)의
고수이기도 했다. 평상시의 그라면 누가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해서 가는 일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생면부지의 외눈박이 사나이가 손가락을
까닥이는 데로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라갔다.
사중익은 물론 눈앞의 사나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고개를 젓기만 하면 그
순간 자신은 두 번 다시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없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강렬한 느낌뿐이었다.
자신 뿐만 아니고 천하의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중익은 용서받지 못할 커다란 죄라도 지은
대역죄인(大逆罪人)처럼 어깨를 늘어 뜨린 채 외눈의 사나이의
뒤를 힘없이 따라가야만 했다.
외눈의 사나이가 사중익을 데리고 간 곳은 분하의 물살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이었다.
외눈의 사나이는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강물에서 채 이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가서 우뚝 멈춰섰다. 사중익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자는 무슨 용무로 이곳까지 데려온 것일까?
사중익은 원한관계는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자와 원한을 맺을 정도로 어리석은 짓은 그동안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물건을 노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중익은 남들이 탐을 낼만한 귀중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사중익의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사나이는 턱으로 바닥의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것이 어느 배의 흔적이지?"
사중익은 몸을 움찔거리다가 천천히 사나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다가갔다.
은빛 고운 모래가 가득한 백사장(白沙場).
그 한쪽에 무언가에 눌린 듯한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중익은 한 눈에 그것이 배가 정박했던 흔적임을 알아보았다.
사중익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모래사장에 남아 있는 자국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흔적은 비교적 또렷했으나 약간의 시일이 지난 듯 조금씩
눌렸던 모래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폭이 상당히 좁아서 처음에는
별로 크지 않은 배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배의 자국이
상당히 길었다.
모래사장에 배가 반쯤 걸쳐 있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적지 않은
길이의 배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배의 폭도 이보다는 훨씬 넓어야 한다.
사중익은 두 눈을 빛낸 채 한동안 모래사장에 새겨진 흔적을
더듬어 보기도 하고 배가 풀려나간 지점의 강물속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는 거의 한식경이나 지난 후에야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외눈의 사나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사나이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사중익은 헛기침을 했다.
"험....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어떤 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소."
외눈의 사나이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도 사중익은 이마에서 진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중익은 급히 입을 열었다.
"여기에 정박해 있던 배는 길이가 무척 긴데 비해 폭이 상당히
좁은 배요. 더구나 닻을 사용하지 않고 두 개의 폭이 넓은
노(櫓)로 배를 고정시켰소. 이것은 아주 전형적인 남선(南船)의
형태요."
사나이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사중익은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선이란 강남(江南)지방의 전통적인 목선(木船)을 말하는
거요. 강남은 예로부터 호수와 강이 많아 수로(水路)가
발달해왔소. 그런데 강남의 호수와 강은 수심이 그리 깊지 않고
바람도 자주 불지 않아 그쪽 지방의 배들은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 배의 길이는 되도록 길고 폭은 좁게 만들고 있소. 그리고
노(櫓)도 가급적 넓게 만들어서 사용하오. 그래야 바람의 힘을
빌지 않고도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굴곡이 심한
수로에서도 쉽사리 방향을 바꿀 수 있으니 말이오."
사중익은 여기까지 말하고 사나이의 눈치를 살폈으나 사나이의
얼굴에는 한 점의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어찌보면 얼음조각을 깎아 만든 석상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무언가에 정신이 나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사람같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사중익은 그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간이
오그라 들었다.
그는 급히 침을 삼키며 말을 계속했다.
"여기에 있던 배는 길이가 길고 폭이 좁은 남선중에서도
유달리 길고 좁은 형태를 지니고 있소. 이런 유형의 배는
강남에서도 주로 절강(浙江)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소."
"........"
"이곳에 난 흔적으로 보아 배의 길이는 대략 오 장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이렇게 큰 배는 별로 흔치 않소. 절강성내에서 이런
배를 탈 정도의 위세를 지닌 사람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을 거요.
하지만 이곳에 있던 배가 그중 누구의 것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소. 직접 보았다면 혹시 알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흔적만으로는 그이상은 무리요."
사중익은 할 말을 모두 다 했는지 입을 다물고 사나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나 사나이는 여전히 석상처럼 우뚝 선 채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사중익의 마음에 다시 불안감이 싹터 올랐다.
"절강성에서 이 정도 배를 굴릴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싶다면 말해 줄 수 있소. 하지만 그들 중 누구의 배인지는 정말
알수가 없소. 믿어 주시오 ..."
사중익은 사나이가 묻지 않았는데도 계속 주절거렸다.
"이런 배는 빠른 속도를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인이나
일반인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소. 그러니 강호의 무림인들로
범위를 축소해보면 아마 틀림없을 거요. 방파로는
수한이십팔채(水旱二十八寨)와 수룡방(水龍幇), 도화보(桃花堡),
금우두부 정도만이 이 정도의 배를 가지고 있을 거요. 그외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을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추측할 수밖에 없소. 우선 떠오르는 것이
남해장씨칠형제(南海莊氏七兄弟)요. 그들은 이보다 더 큰 배도
있을지 모르오."
남해장가(南海莊家)의 권세와 부귀는 예로부터 유명했다.
특히 당금에 이르러서는 일곱 명의 뛰어난 형제들이 배출되어
최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 일곱 명의 형제들은 개개인이 모두 강호의 절정고수들일
뿐 아니라 의협심이 뛰어나고 담량이 커서 강남일대에서는 많은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었다.
"그들외에 꼽으라면 사해조수(四海釣 ) 포량(鮑凉)과
흑표자(黑豹子) 위척(葦脊), 천남취객(天南醉客),
금안천군(金眼天君) 석천송(石天松), 새온후(賽溫候)
정대립(丁大笠), 그리고 안탕어은(雁蕩漁隱) 갈지산(葛地山)
정도요."
그때 문득 사나이의 외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금안천군 석천송이란 인물에 대해서 말해 봐."
사중익은 다시 몸을 움찔거렸다.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마치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얗게 이빨을 드러낸 늑대...
"서...석천송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소. 단지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고 종적이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것밖에는..."
"그자의 안광이 별호처럼 금빛인가?"
사중익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소."
사나이는 다시 침묵했다.
사중익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 사나이의 입을 주시했으나
사나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중익은 한참동안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별다른 용무가 없다면...나는 이만 가보겠소."
사나이는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사중익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발을 움직였다.
이장 여를 움직여도 사나이가 아무런 내색이 없자 그제서야
사중익은 재빠른 동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은 점차로
빨라지더니 이내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아마 사중익으로서는 오늘처럼 빨리 달렸던 적은 그의 사십
평생에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2
흘러가는 강물은 무심하기만 했다.
노독행은 멀어져가는 사중익의 뒷모습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금안천군 석천송은 과연 조향령과 함께 절벽을 넘어 사라진
금빛 안광의 복면인과 동일인물인가?
만약 아니라면 대체 누구부터 추적을 시작해야 하는가?
어디서부터...어떻게....
여러 가지 단상(斷想)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나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결론은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우선은 금안천군 석천송이란 인물을 찾아가야 한다.
그 다음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안천군 석천송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는지도 설명해 줄
사람이...
그러자 문득 노독행은 한 사람이 뇌리에 떠올랐다.
때마침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조교연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노독행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직시했다.
"그는 어디 있지?"
그녀의 눈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누구 말인가요?"
"엽동. 어디가면 그를 만날 수 있지?"
조교연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는 왜 만나려고 하지요?"
"만나야 할 일이 있어."
"그게 무언가요?"
노독행의 대답은 무정하기만 했다.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조교연은 한동안 노독행의 냉정한 눈을 응시하다가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당신이 직접 알아보세요."
노독행은 아무런 대꾸없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노독행이 몸을 돌리는 순간 조교연은 벌써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나 이미 노독행은 그녀에게서
성큼성큼 멀어지고 있었다.
조교연은 불연 듯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대체 왜 그에게서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를 언제까지고
이렇게 맹목적으로 따라가야만 한단 말인가?
황가둔의 모옥에서 무작정 그의 뒤를 따른지 벌써 삼 일이
흘렀다. 그 동안 그의 뒤를 따라오느라 그녀가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 무정한 사내는 따뜻한 위로의 말은커녕 그녀에게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대하는 그의 냉혹한 모습에서 울컥 치미는
서러움을 느꼈다. 그 서러움은 지금까지의 고생스러웠던
순간순간의 기억들과 결합되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저만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의 등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녀였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았겠지요?"
그의 몸이 우뚝 멈춰졌다.
그녀의 두 뺨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에요! 난 정말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는데....어쩌면 내게 이럴 수가..."
그때 그의 몸이 휙 돌려지더니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입밖으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저...정말 너무해...흐흑...."
노독행은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그의 외눈에는 기이한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무어라고 했지?"
그의 음성을 듣자 그녀는 갑자기 찬 물을 머리에 뒤집어 쓴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급히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안으로 이글거리는 노독행의 외눈이 바짝 들어왔다.
그녀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더듬거렸다.
"내...내 말이 너무 심했나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나는
단지..."
노독행은 냉혹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조금전에 '그녀'라고 말한게 누구를 가리킨거지?"
그녀의 낮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그녀라니요? 나....나는 그저 다른 여자라면 당신이
이렇듯 무정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 분명 누군가를 지칭한거야. 누구지?
누구를 알고 있지?"
"저...정말 아무 뜻도...."
노독행은 그녀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움켜 잡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차가운 빛을
번뜩이는 외눈이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도저히 그 번뜩이는
외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독행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였나? 그녀였지? 내가 그녀와 함께 있었던 걸 알고
있었던거지?"
조교연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노독행은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였군. 그녀를 팔아넘긴건 바로 너였어."
조교연은 도리질을 했다.
"아...아니에요. 나는 그러지 않았어요..."
하나 노독행은 그녀의 말 따위는 듣고 있지 않았다.
"네가 그녀를 그자들에게 넘긴거야. 너는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그녀가 나와 함께 있는 걸 알고 있었어."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쥔 그의 손에 점차로 힘이 가해졌다.
조교연은 숨이 막히는지 그의 손을 벗어나려고 몇 번이고
바둥거렸다.
하나 이내 체념했는지 반항하는 걸 멈추고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핼쑥한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한 점없이 창백했다.
차가운 뺨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바짝 자신의 얼굴을 갖다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단지 거짓말만은 하지 마.
상대가 누구든 내게 거짓말하는 건 참을 수 없어."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조교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뜨거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불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저히 그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나는 나룻터에서부터 당신의 뒤를 따라갔어요. 처음에는
당신이 곧 그녀와 헤어질줄 알았어요. 그런데....당신들은
도무지 헤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조교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을 따라다닐수록...나는 질투에 사로잡혀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엄연히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고...당신들은
결코 합쳐질 수 없는 사이였는데...그런데 당신들은..."
노독행은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하기 그지 없어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떤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조교연은 돌연 번쩍 고개를 쳐들어 노독행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이 애틋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나는...당신이 그녀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까봐
두려웠어요. 당신들은 결코 어울려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에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했어요. 당신은 결코 그래서는
안되요."
노독행은 짤막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녀를 산장(山莊)에 넘겼나?"
조교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장이 아니에요. 그런 짓은 나도 할 수 없어요."
"그럼 누가 그녀를 데려갔지?"
"그녀의 아버지에요."
노독행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녀의 아버지라고?"
"그래요. 나는 모용세가(慕容世家)에 연락을 했어요. 당신이
모옥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에 모용세가의 대제자(大弟子)인
금포옥소(金袍玉簫) 위문평(魏文平)이 왔었어요. 그녀는 그가
데리고 갔어요."
모용세가의 당대가주는 야심이 많기로 유명한
만승검왕(萬勝劍王) 모용태릉(慕容太陵)이었다.
위문평은 모용태릉의 다섯 제자중 대제자로, 당금 강호의
후기지수중에서 세 손가락안에 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항상 금색 비단옷을 입고 다니고, 출도한지 불과 이년만에 십
여명의 절정고수들을 연파하여 강남무림을 소란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조교연은 애처러운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더 이상 그녀를 만나서는 안되요. 그녀를
생각해서도...그녀를 사랑해서는 더더욱 안되요. 그녀는 반드시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거에요."
그녀의 음성이 목구멍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 작아졌다.
"게...게다가 나는...당신을...."
뒷말은 차마 이어지지 못했다.
노독행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남쪽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끝없이 푸르른 하늘....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일단 그녀의 행방을 알게된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조교연을 내려다 보았다.
조교연은 눈물젖은 눈으로 그를 응시한 채 힘없이 서 있었다.
아무리 철석간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애처러운 모습이었다.
하나 그녀를 보는 노독행의 눈빛은 냉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노독행은 결코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인정을 베푸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만약 그녀에게 신세진 일만 없었다면 결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독행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한 자 한 자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나를 치료해 준 빚은 이것으로 갚은 셈 치겠어. 하지만 다음
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정말 숨통을 끊어놓고 말거야."
조교연의 몸이 확연히 알아볼 수 있도록 심하게 떨렸다.
그 음성...그 태도....그 매정함....
그녀는 예리한 비수가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노독행은 서슴없이 몸을 돌려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다.
조교연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캄캄해서 도저히 더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아득히 멀어졌을 때 그녀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슬픈 오열을 터뜨렸다.
"흑...흑...."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게 헝클어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끝없이 눈물만 쏟아질 뿐이었다.
양 어깨를 흔든 채 흐느끼는 그녀의 애처러운 울음소리만이
고적한 강변을 잔잔하게 울려주고 있었다.
3
화원(花園)은 끝없이 넓었다.
가도 가도 형형색색의 꽃들로 이루어진 꽃밭의 연속일 뿐,
집이나 전각의 모습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이런 화원이라면 의당 있어야 할 벌이나 나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꽃외에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화원이었다.
인적도 없고, 벌이나 나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화원은 기이함을 넘어 신비스럽기조차 했다.
화원에는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꽃이 만발하고,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화원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랐다.
어쩌면 방금전에 왔을 수도 있고, 어쩌면 한 시진 전 일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하루나 이틀이 아닌 아주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노인의 서 있는 모습은 그처럼 고요했다.
머리는 눈처럼 하얀 백발이었고, 얼굴은 대추빛으로 붉었다.
허리는 곧았고, 피부는 어린아이처럼 팽팽한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주위의 꽃밭에 잘 어울리는 알록달록한
화의(華衣)였다.
화의노인은 꽃밭의 중앙에 조용하게 선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뚜렷하게 무엇을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심연(深淵)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을 허공에 고정시킨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꽃밭의 저 멀리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인영은 빠르게 화의노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하늘색 장삼을 걸친 훤칠한 키의 청년이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쭉 뻗은 검미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절세(絶世)의 미남이었다.
청년문사는 노인의 뒤로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분명 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텐데도 여전히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청년문사는 노인의 사색(思索)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노인의 뒤 이장쯤 되는 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문득 노인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청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봄도 반이나 지나가 버렸군.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더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단 말이야."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음성이었다.
그런데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기이한 힘을 담고 있었다.
청년문사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세월이 빨리 흐른다해도 사부님께서는 극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낮 인간의 힘으로 어찌 세월을 붙잡을 수 있겠느냐?
노부라해도 그건 어쩔수 없지."
청년문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노인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청년문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상회가 무너졌습니다."
노인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무언가 고민에 잠긴 것도 같았고 어찌보면 청년문사의
말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사색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하나 청년문사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천하가 그자 때문에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자는 지금 분하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데 머지않아 하남성(河南省)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노인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이따끔 불어오는 산들바람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청삼문사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금우두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도 그자를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
"금우두부의 셋째 부주(府主)인 병마군(病魔君)
담세악(譚世鄂)이 비밀리에 강북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그자를 포섭하거나 끌어들이려고 할 것
같습니다."
"........"
"강북은 표향령과 철모방의 연합세력이 장악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연합이 얼마동안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강북에
별다른 변고는 없을 듯 합니다."
청삼문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다음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마애혈불(磨崖血佛)은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만 조금
마음이 바뀐 것도 같습니다. 이번에 사자(使者)를
보내왔습니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이어졌으나 노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청삼문사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그리고...그녀의 행방을 알았습니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노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느릿느릿 몸을 돌려 청삼문사를 바라보았다.
"그자와 같이 있지 않았던가?"
"아마 도중에 헤어진 모양입니다. 조금전에 모용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녀가 거기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노인은 빙긋 미소지었다.
"모용태릉이 보기보다 재주가 좋은 모양이군."
청삼문사도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겠지요."
"운도 실력의 일부분이다. 운이 강한 자는 좀처럼 쓰러지지
않지."
청삼문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한동안 침음하다가 불쑥 물었다.
"그 녀석에 대한 소식은 들었느냐?"
노인은 '그 녀석'이 누구인지 지칭하지 않았지만 청삼문사는
알아들었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 약간 난처한 빛이 떠올랐으나 이내
사라졌다.
"일전에 장안(長安)부근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그 뒤로 통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노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단지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청삼문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청삼문사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안의 대천루(戴天樓)라는 술집이었다고 합니다. 몹시 취해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소식을 듣고 급히 사람을
풀었습니다만...그 뒤로 행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청삼문사는 움찔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그가 다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다. 제발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해도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거야."
"알겠습니다."
노인은 다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노인이 별다른 말을 할 것 같지 않자 청삼문사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자와 금우두부가
결탁하면 복잡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표향령과
철모방에서도 그자를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자가
어느 쪽으로든 포섭되면 위험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빙긋 웃으며 턱으로 끝없이 이어진 꽃밭을 가리켰다.
"어떠냐? 아름답지 않느냐?"
청삼문사는 난데없이 꽃밭을 들먹거리는 노인의 의중을
몰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화원은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나 허튼 찬사가 아니었다.
확실히 두 사람이 서 있는 화원은 각양각색의 꽃들로 어울려져
어느 곳과도 비길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노인은 흐뭇한 눈으로 화원을 바라보았다.
"이 화원을 가꾸기 위해서 노부는 오랜 시간 공을 들였지.
사시사철 꽃이 지지 않는 그런 화원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야. 그
동안 참 힘들었는데 이제는 제법 공들인 흔적이 나타나는 것
같군."
청삼문사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지금은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아도 화원이 잘 유지되고 있지.
그래서 노부는 마음편하게 감상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노인은 천천히 청삼문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은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큼이나 담담한 것이었다.
"무림(武林)의 일도 마찬가지야. 노부는 오랜 세월 무림에
정성을 기울였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었지. 그
결과 이제는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될 정도가 되었다.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모든 일이 순리적으로 풀려 나갈거란
말이지."
노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네가 노부 정도의 경험이 있다면 세상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상책(上策)일 때가 가끔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여러 가지 일들이 내리닥칠 때는 닥치는대로 가만
내버려두는 거야."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진한 꽃향기가 사방을 감돌았다.
청삼문사는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신선하고 달콤한
꽃향기가 체내 깊숙히 들어오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청삼문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자에 대해서는 계속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그런데...그녀는 어떻게 할까요?"
노인의 눈에 한 줄기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데려와야겠지."
아주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음성속에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섬뜩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청삼문사는 즉시 물었다.
"누구를 보낼까요?"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문노인(宇文老人)과 교악(喬岳)을 보내라."
청삼문사는 조금 의외인 듯한 모습이었다.
"우문노인도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오랫동안 현기각(玄機閣)에만 있어서 조금 갑갑해하고
있을 거다. 이런 기회에 바깥 바람을 쏘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려던 청삼문사를 노인이 조용한
음성으로 불렀다.
"연월(燕月)."
청삼문사는 급히 노인을 돌아보았다.
"예."
노인의 잔잔한 시선이 청삼문사의 눈을 응시했다.
"노부는 그녀가 두 번 다시 외간남자와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싶지 않다."
청삼문사는 우두커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려냈다. 무언가 결연한 표정을 지닌 미소였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뒷짐을 진 채 허공을
응시했다.
청삼문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온 길을
돌아갔다.
청삼문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노인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하늘높이까지 솟구쳐 올라간 것 같았다.
노인은 꽃향기 가득한 푸른 하늘을 올려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 같군..."
그의 마지막 음성은 꽃밭속으로 사라져 제대로 들리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