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장 상처입은 늑대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지
1
조향령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십 여장 밖의 어둠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들을 향해 치달려 오는 것을 본 것이다.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조향령은 그 인영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인영의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지고 의복은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게다가 전신이 완전히 피로 범벅이 되어 그야말로
끔찍스럽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하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은 어둠속에서도 확연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무섭게
번뜩거리고 있었다.
"노독행...."
조향령의 입가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노독행? 저자가 냉혈무정 노독행이란 말이오?"
낙태독이 움찔 놀라 목소리를 높혔다.
중앙의 흑의복면인의 금빛 안광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이내 게 소리쳤다.
"철수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향령을 비롯한 여섯 명의
흑의인들은 일제히 뒤로 신형을 날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빠르고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금안(金眼) 흑의인의 입에서 '철수한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의 몸은 어느 새 십 여장 밖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노독행의 달려오는 기세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들이 그토록 빠르게 움직였는데도 노독행은 그들과의 간격을
삼십 여장으로 줄이고 있었다.
그들도 그것을 알았는지 더욱 공력을 끌어올려 맹렬하게
어둠속을 치달려갔다.
쫏는 자와 쫏기는 자.
한동안 죽음과도 같이 살벌한 경주가 계속되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뿐이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십여 리를 질풍처럼 달려갔다.
조향령과 여섯 명의 흑의복면인들의 신형은 섬전을 방불케
했다. 특히 가장 앞서 달리는 금안 흑의인의 신법(身法)은
그야말로 무영지경(無影之境)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하나 그토록 빠른 그들의 신법으로도 노독행을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노독행은 전신에 피칠을 한 채 상처입은 한 마리 야수처럼
외눈을 번뜩이며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추적해 오고 있었다.
금안 흑의인은 힐끗 뒤를 돌아보다가 이대로 가다가는
노독행의 추적을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짤막하게 소리쳤다.
"광사(狂獅)와 폭호(暴虎)는 뒤를 맡아라."
흑의복면인들중 체구가 커다란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달리던 몸을 허공으로 비틀어 몸을 우뚝 돌려 세웠다.
그토록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가 갑작스럽게 몸을
멈춰세웠는데도 그들의 신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화광(火光)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어둠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쉬이이....
바람을 가르는 듯한 음향과 함께 전면의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무언가 시커먼 것이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들어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로 범벅이 된 그 인영은 다름아닌
노독행이었다.
우측에 있던 흑의복면인이 노독행을 향해 양 손을 휘둘렀다.
꽈르릉!
그의 손에서 먹물 같은 경기(勁氣)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단 일수(一手)에 이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만 보아도 그
흑의복면인의 공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노독행은 달려오는 기세를 조금도 멈추지 않은 채 흑의인이
뿜어낸 먹물 같은 경기속으로 뛰어들었다.
꽝!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한 사람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큭!"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이 장이나 정신없이 후퇴한 사람은
바로 장력을 날렸던 흑의복면인이었다.
그는 양 손이 모두 탈골되었는지 두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낀
채 이를 악물었다.
"몸뚱아리가 이렇게 단단하다니..."
노독행의 입가에서는 꾸역꾸역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나 그는 달려가던 몸을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흑의복면인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좌측에 서 있던 흑의복면인이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벼락
같은 일권(一拳)을 후려갈겨왔다.
쉬아앙!
마치 거대한 뇌전(雷電)이 치듯 무시무시한 권풍(拳風)이
노독행의 옆구리를 향해 몰아쳐갔다.
노독행은 질주하던 자세 그대로 우측 팔꿈치를 세차게
휘둘렀다.
콰직!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음향이 터져나오며 흑의복면인이
오른손목을 움켜쥔 채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악!"
손목뼈가 그대로 부러졌는지 힘없는 고무줄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노독행은 조금도 멈추지 않은 채 두 흑의복면인 사이로
뛰어들며 양쪽 팔꿈치와 양 무릎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파파파팍!
두 개의 팔꿈치와 두 개의 무릎.
도합 네 개의 살인병기는 흡사 죽음의 수레바퀴마냥
무시무시한 속도로 장내를 휩쓸어 버렸다.
흑의복면인들은 노독행의 질풍노도 같은 공격에 대경실색해
사력을 다해 맞서갔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콰콰쾅!
북치는 듯한 굉음이 연거푸 터져나오며 처절한 비명이 어두운
밤하늘을 찢어 놓았다.
"크아악!"
"케엑!"
두 흑의복면인은 마치 수십 개의 쇠기둥에 난타당한 듯 전신이
짓이겨진 채 피분수를 뿌리며 십여장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쿵!
그들의 몸은 방금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생명체였으나 땅에
떨어진 것은 두 개의 혈구(血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몸이 바닥에 닿을 때 노독행의 몸은 어느 새 이십여
장밖을 치달려가고 있었다.
"쿨룩...쿨룩...."
나직한 기침이 토해지자 시커먼 선혈이 입술밖으로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입뿐만 아니라 코로도 끊임없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소맷자락으로 입과 코를 쓰윽 훔쳤다.
피는 검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거듭되는 격전과 심각한 내상(內傷)으로 진원지기(眞元之氣)가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 노독행은 결코 추적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조향령은 모든 혈겁의 원흉(元兇)이었다.
그를 쓰러뜨리지 않고는 결코 과거의 처절한 원한을 갚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곳에서 그를 놓친다면 어디에 가서 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노독행은 창백한 낮빛을 한 채로 입과 코로 피를 흘리면서
오백 여장을 질풍처럼 달려갔다.
그때 갑자기 어둠속에서 두 개의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너무도 순간적이고 불시에 나타났기 때문에 노독행도
완벽하게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양 손을 쳐들어 두 개의 칼날을 맨손으로 덥석 움켜
잡았다.
팟!
양 손바닥이 쩌억 갈라지며 시뻘건 선혈이 뿜어나왔다.
두 개의 칼은 모두가 절세의 보검(寶劍)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석을 두부처럼 부숴버리는 노독행의 손이 그토록
쉽게 베어질리가 없었다.
하나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두 개의 칼날을 더욱 바짝
움켜잡았다. 동시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칼을 쥔
두 인영을 향해 두 발을 휘둘렀다.
파팟!
수십 개의 발그림자가 허공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무쌍류 실전무예중 하나인 천추각(千錘脚) 수법이었다.
빠악!
비명도 없이 두 명의 흑의인이 머리통이 박살난 채로
어둠속에서 쓰러졌다.
노독행은 양 손을 피로 물들인 채 다시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몸에서 너무나 많은 피가 흘러나와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시야도 약간 흐릿해졌다. 한없이 강하기만 했던 그의 육체
구석구석이 지나친 출혈(出血)과 무리로 끊임없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노독행은 지금은 쉬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안정과 휴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의
출혈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쉴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았다.
멀지 않은 어둠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인영의 손에는 다른 칼보다 훨씬 짤막하고 뭉툭한 강도가 들려
있었다.
강도에서 흘러나오는 예리한 한기가 어둠속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섬뜩한 빛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한 눈에 그 인영이 좀처럼 볼 수 없는 뛰어난
도객(刀客)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칼을 들고 서 있는 자세와
기이한 모양의 칼에서 흘러나오는 도기(刀氣)는 절대로
예사로운게 아니었다.
인영과의 거리가 십 장이내로 좁혀졌을 때 노독행은 일 초로는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삼초(三招)
이상이 필요한 상대였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영영 조향령의 행방을 놓칠게 뻔한 노릇이었다.
그 순간 노독행은 결단을 내렸다.
낙태독은 도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 긴장이 되어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로서는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상대를 눈앞에 두고 이처럼 흥분되고 초조한 적은 아직
없었다.
그 자신도 지금 왜 이렇게 긴장이 되고 떨리는지 자신의
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단지 이제 막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신출내기에 불과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강호에서 수많은 고수들을 격파하여 혁혁한 명성을 구축한
절세의 고수가 아닌가?
그동안 자신의 칼 아래 쓰러진 인물들의 면면을 보아도 어느
하나 만만히 볼 상대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중 누구도 싸우기 전에 그에게 이와 같은 긴장감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냉혈무정!
어둠속에서 힐끗 본 그자는 가히 '공포(恐怖)', 그 자체였다.
그 번뜩이는 외눈만 보아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악마(惡魔)거나 복수에 미친 한 마리
살인귀(殺人鬼)다!'
제일 처음 상대를 피해 도망칠 때도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었다.
하나 상대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수십 리를 집요하게
뒤 아오는 것을 알았을 때 낙태독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자를 막기 위해 일행에서 떨어져 나간 폭호와 광사가 채 일
초도 버티지 못하고 피투성이로 나뒹굴었을 때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어서 다시 분랑(奔狼)과 독표(毒彪)마저 맥없이
쓰러지고나자 그는 더 이상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폭호와 광사, 분랑, 독표의 사살(四煞)은 결코 그렇게 쉽게
쓰러질 리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중 두 명 이상이 합공하면
자신도 승세를 장담할 수 없는 절정(絶頂)의 고수들인 것이다.
그런 사살들을 짚단처럼 베어넘긴 채 집요하게 따라오는
상대를 보면서 낙태독은 이제 자신이 그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향령은 아직은 죽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를 무사히 데리고 오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리고
임무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칼을 뽑아든 채 몸을 돌려 상대를 기다리면서도
낙태독은 자신이 두렵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두렵다.
난생 처음으로 싸우기도 전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상대를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자를 적(敵)으로 돌린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를 적으로 삼지 않기에는 모든 일이 너무도 늦어 버린
것이다.
'절대로 추적을 계속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 설사 내 몸이
가루가 된다 할 지라도 네 놈을 쉽게 보내지는 않겠다!'
낙태독은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수중의 칼을 힘껏 움켜
잡았다.
그 순간 노독행이 한 줄기 폭풍처럼 무서운 속도로 그의
앞으로 짓쳐 들었다.
2
먼저 선제공격을 한 사람은 낙태독이었다.
낙태독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자신의 최대절기인
단홍칠도(斷虹七刀)를 전개했다.
쾌쾌액!
그의 손에 들린 칼이 다섯 개의 붉은 섬광을 토해 내며
노독행의 상반신을 향해 쏘아져갔다. 낙뢰도홍(落雷屠虹)의
일식이었다.
이 초식은 이름 그대로 허공에서 번개가 떨어지듯 빠르고
매섭기 때문에 일단 벼락 같은 오도(五刀)가 퍼부어지면 누구도
감히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낙태독의 칼은 분명 벼락치듯 빨랐지만 상대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의 코앞으로 무섭게 육박해 들어오던 노독행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도대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인간의 몸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칼이 허공을 자르고 지나갔을 때 낙태독은 눈을
부릅뜨고 전면을 노려보았다.
노독행의 모습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나 다음순간 낙태독의 안색은 시퍼렇게 변하고 말았다.
무언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빠르고 강력한 것이 자신의
두개골을 향해서 허공에서 맹렬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음을
감지(感知)한 것이다.
피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낙태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지 마지막 몸부림처럼
수중의 칼을 허공으로 쳐 올리는 것뿐이었다. 그의 칼이 채 반도
올라가기 전에 그는 자신의 머리통이 부서지는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비명 따위는 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낙태독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몸이 어찌 마음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파아아...
두개골이 박살나는 음향과 함께 질펀한 뇌수가 진한
피비린내와 함께 장내에 자욱히 널려 퍼졌다.
낙태독은 머리에서 명치부근까지 완전히 형체가 뭉개진 채
잠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상체를 잃은 그의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몇 차례의 가느다란 떨림을 마지막으로 그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흐으...흐으...."
노독행은 바닥에 내려선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입밖으로는 벌써 시커먼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색은 이미 푸르뎅뎅하게 변해가고 있었고,
전신의 진력(眞力) 또한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감천문(憾天門)'의 일식은 그 위력만큼이나 진력의 소모가
막심하여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두 번 이상 연거푸 펼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감천문은 무쌍류의 십대절학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무공중
하나였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지니고 있는 착시(錯視)현상을 이용한
것이었다.
인간의 눈은 제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움직이는
물체를 보게 되면 희미한 잔상(殘像)이 남게 된다. 즉, 실제로는
움직임을 멈추었어도 순간적으로는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일수록 잔상이 남는 시간은 길어지게
된다.
무쌍류의 무학(武學)을 완성시킨 우문독패는 이 인간의 시력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弱點)을 이용한 무공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바로 감천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면, 움직임 도중에 다른 동작을 취한다 해도
인간의 눈은 순간적으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잔상이 계속 남아서 상대가 똑같은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노독행이 낙태독을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을 때,
낙태독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는 노독행의 잔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하나 그때 사실은 노독행은 이미 달려오던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낙태독의 머리위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동작이 너무나 신속했기 때문에 낙태독은 미처 그가 자신의
머리위로 날아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노독행이 달려오는 모습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잔상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낙태독의 눈에서 노독행의 잔상이 사라졌을 때는 노독행은
이미 낙태독의 머리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낙태독으로서는 노독행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잔상이 사라진 순간 그는 노독행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노독행의 무릎이 허공에서 그의 두개골을 향해
내리꽂혔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무시해도 좋을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그
결과는 가히 가공(可恐)스러운 것이었다.
도(刀)로는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호무림의
절정도객(絶頂刀客) 한 명이 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노독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조향령에 대한 불타오르는 원한 또한
깊어졌다.
투툭....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는 흥건한 핏물이 고이고 있었다.
얼마쯤 가자 깊은 어둠 속에 잠긴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나타났다.
그 벼랑의 끝부분에 우뚝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인영이 있었다.
노독행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노독행이 그들에게서 이 백여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을 때
그들은 힐끗 고개를 돌려 노독행을 돌아보았다.
그중 한 명은 조향령이었고, 다른 한 명은 두 눈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흑의복면인이었다.
금안의 복면인은 두 눈에 기광을 번쩍거렸다.
"정말 끈질긴 놈이로군."
조향령은 멀리서 달려오는 노독행을 보자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안복면인은 다시 절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벽의 아래는 그야말로 제아무리 안력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깊었다.
휘이잉!
한 차례 차가운 밤바람이 절벽의 아득한 저 끝에서 불어닥치자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절벽의 폭은 거의 오십 장이 넘었다. 절벽의 다른 반대쪽이
가물가물하게 보일 정도였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리였다.
금안복면인은 한동안 절벽의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손을 내밀게."
조향령은 약간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금안복면인은 그의 손을 잡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을 꼭 잡고
있게."
조향령은 그의 의중(意中)을 짐작한 듯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할 수 있겠소?"
금안복면인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금광(金光)이 더욱
짙어졌다.
"나를 믿지 못하겠나?"
조향령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소."
금안복면인은 힐끗 고개를 돌려 노독행이 달려오는 곳을
돌아보았다.
노독행의 몸은 이미 그들에게서 백 여장까지 도달해 있었다.
멀리 떨어진 어둠 속에서도 전신에 피칠을 한 그의 몸과
번쩍거리는 외눈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금안복면인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한번은 상대해야 겠지만 오늘은 일단 피하는 게
좋겠군. 상처 입은 늑대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지."
조향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금안복면인은 잠시 어둠 속을 응시하더니 돌연 조향령의 손을
잡은 채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금안복면인의 몸이 조향령과 함께 오십 여장이 넘는 절벽 위를
훌훌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몸은 새가 아닌데 어찌 이렇게 날 수가 있단 말인가?
멀리서 달려오고 있던 노독행도 이 광경을 보자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은 삼십 여장을 날아갔다.
맞은 편 절벽을 이십 여장 남겼을 때 금안복면인의 신형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으윽!
그 순간, 그의 두 발이 기이하게 움직이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의 몸이 허공으로 이 장여쯤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금안복면인은 조향령의 손을 잡은 채 너무도 수월하게 다시
십여 장을 날아갔다. 이어 다시 한 번 그와 비슷한 동작을
취하자 그들의 몸은 반대편 절벽 위에 떨어져 내렸다.
금안복면인은 힐끗 노독행을 돌아보더니 조향령의 어깨를 툭
쳤다.
이어 두 사람의 몸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빨리듯 사라져갔다.
노독행이 절벽의 끝에 도달했을 때는 두 사람의 신형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독행은 몸을 우뚝 멈춰 세운 채 자신의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죽음 같은 어둠을 응시했다.
오십 여장....!
그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리였다. 그뿐만이 아니고
천하의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넘은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한 사람을 대동한 채로...
만약 신법(身法)의 신(神)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자일 것이다.
그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휘이잉....
절벽 아래에서 다시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차가운 밤바림이 그의 갈가리 찢겨진 흑의를 뚫고 들어와
상처로 뒤덮인 살갗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지만 노독행은
어둠 속을 쏘아본 채로 언제까지고 서 있었다.
* * *
"이건 정말 끔찍하군."
엽동은 상체가 완전히 으스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하나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시신은 허리아래밖에 없었다.
상반신은 산산이 짓이겨져 사방의 여기저기에 뿌려져 있었다.
"이것도 그 자의 솜씨인가?"
엽동의 뒤에서 하나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엽동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철모방의 방주인
철력파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엽동은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요."
철력파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곳에 오는 동안 사마천세를 비롯해서 모두 여섯 개나 되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네. 이게 모두 그자의 솜씨라니 그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엽동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그자의 짓이 맞지만 사마천세는 다른 자의
솜씨입니다."
"그걸 어찌 아는가?"
"사마천세는 등뒤에서 누군가의 칼날을 맞아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자는 결코 등뒤에서 누구를 찌르거나 하지는 않지요.
그럴 필요도 없고."
철력파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눈을 빛내며 엽동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자에 대해 잘 아는군."
엽동은 피식 웃었다.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철방주께서도 그자를 직접
보신다면 제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자가 그렇게 대단한가?"
엽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력파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것 참...그 말을 듣고 보니 더욱더 만나고 싶어지는군
그래."
엽동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때 멀리서 두 개의 인영이 재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들은 흑의를 입고 체구가 비쩍 마른 청년과 황의를 걸친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형님."
흑의청년은 엽동의 앞에 내려서며 소리쳤다.
"핏자국이 단혼애(斷魂崖)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엽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가자."
흑의청년은 엽동의 동생인 신도비응 엽표였다.
그와 함께 달려온 황의중년인은 엽표와 가장 절친한 사이인
무적철환 구여해였다.
엽표와 구여해는 천상회 시절부터 쌍절(雙絶)로 이름이 높은
고수들이었는데, 사마표향이 천상회를 탈출할 때 그들도 함께
탈출하여 사마표향을 따랐다.
엽동과 철력파등 일행은 황급히 엽표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엽표가 따라가는 것은 끝없이 이어진 핏자국이었다. 핏자국은
때로는 한 무더기의 선혈덩어리로 이어져 피를 흘린 사람의
상태가 몹시 위독하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철력파는 핏자국을 따라가며 혀를 찼다.
"이렇게 지독한 상처를 입고도 추격을 멈추지 않다니...정말
독종중에서도 최고의 독종이로구나. 조향령은 어쩌다가 그런
자를 원수로 만들게 되었을까?"
멀리 어둠 속에서 시커먼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단혼애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엽동은 단혼애의 벼랑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어둠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엽동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절벽 아래로 누군가가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른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노독행이 조향령을 아 이곳까지 온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노독행은 과연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리고 그가 쫓는 조향령의 행방은?
엽동은 한동안 주위를 수색하다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저 절벽을 뛰어넘은 것이 분명하다. 무슨 방법을 썼든
간에...'
엽동은 자신의 생각이 그리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벽의 너비는 거의 오십 여장이 넘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그 외에는 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엽동의 생각은 절반만 맞은 것이었다.
조향령은 분명 금안복면인과 함께 절벽을 뛰어 넘어 사라졌다.
하지만 노독행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엽동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절벽의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